소설리스트

주무르면 다 고칭-105화 (100/122)

# 105

30. 길고 긴 밤(4)

야간 당직을 서는 간호사는 모두 다섯.

두 명은 입원실을 전적으로 담당하는 간호사고 나머지 셋은 각 과의 간호사들이었다.

김 간호사, 김영임은 전자로 주임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특실을 맡고 있는 분이라 일반 병실은 무시하는 줄 알았어요. 죄송해요, 한 선생님.”

야식이 도착해서 맛있게 먹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김영임이 말했다.

“애초에 늦은 게 잘못이죠. 그 얘긴 그만하고 방법을 말해보세요.”

“제가 이경진 선생님 담당 간호사에게 전화를 걸어서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 이것저것 물어봤거든요.”

“그래서요?”

“이경진 선생님, 건망증이 조금 심하시대요. 환자 얼굴과 병명도 헷갈려 하신대요. 그래서 담당 간호사가 항상 환자가 들어오기 전에 병명을 알려준대요.”

“그 말인즉, 진료 기록만 고치면 된다는 건가요?”

“그렇죠.”

“좋은 생각이긴 한데 수정하는 거는 담당 의사만 가능해요. 그리고 수정하면 기록에 남게 되고요. 아무리 이 선생님이 건망증이 심해도 기록이 수정되어 있으면 의심을 할걸요.”

“당연히 전산팀에서 수정을 해야죠.”

“아! 그럼 되겠네요. 그럼 당장 연락해서 고쳐달라고 말해야겠어요.”

“저는 전산팀에 아는 사람 없어요. 한 선생님은 있으세요? 그리고 전산팀에서 그거 수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사람 별로 없을걸요.”

산 너머 산인가?

“…무슨 해결 방법이 이리 어정쩡해요?”

“전 그래도 한 가지 생각했으니 전산팀 문제는 한 선생님이 해야 하지 않겠어요? 같이 해결하기로 했잖아요. 같이!”

주는 대로 받는다더니 아까 써먹었던 방법에 자신이 당했다.

전산팀에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을 생각해 봤다.

민규식과 공동희.

민규식에게 얘기하면 무조건 가능할 테지만 현재 해외 학회에 참여 중이다.

‘일단 원장님은 최후의 보루로 남겨놓고.’

늦은 시간이라 공동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뭐 해? 급하니까 확인 즉시 연락 줘.]

5분 후쯤 연락이 왔다.

-이 시간에 급할 일이 뭐가 있어?

“어디야?”

-집. 방금 들어왔어.

“웬일로? 오늘 같은 주말엔 애인과 같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어제 같이 있었어. 연 이틀은 무리다.

자랑하는 듯한 말투에 놀려줄까 하다가 그게 급한 게 아니라서 본론을 꺼냈다.

“너 혹시 전산팀에 아는 사람 있어?”

-연계해서 일할 일이 많으니 대부분 알지. 근데 갑자기 전산팀은 왜?

이경진과 관련된 일을 설명했다.

-뭔 오지랖이냐. 그 양반이 ‘그럴 수도 있지’라고 뻔뻔하게 나올 수도 있는 일이잖아.

“그럴 수도 있지만 내가 볼 땐 아냐. 아무튼 가능해?”

-야, 그거 전산팀에서도 함부로 만지면 안 되는 거야. 법적으로도 문제 생겨.

“진단 좀 잘못된 거 고치는 건데 무슨 문제. 설령 일이 커져서 잘못된다고 해도 벌금형이나 받겠지. 그리고 솔직히 이런 경우가 없었다고 말할 수 있냐?”

-…가끔 있긴 하지.

사실 꽤 자주 있는 일이다.

인간의 몸을 살피는데 왜 그렇지 않겠는가.

자신의 실수를 남기기 싫은 의사들이 수정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었고 차후에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웬만해선 고쳐줬다.

물론 수술 관련해서는 예외였다. 그건 수기로 기록된 자료까지 있어 절대 수정 불가였다.

“할 수 있어? 없어? 아님 원장님께 연락하고.”

-해줄게. 아이~ 전산팀장 엄청 까칠한데…….

“다음 주에도 뜸 해줄게. 물론 몸에 아주 좋은 보약도 한 첩 해주고.”

-병원 약재 네 맘대로 쓰는 건 안 돼!

“누가 보면 병원 이사장 아들인 줄 알겠다. 아는 형이 보내준 약재들 집에 많거든.”

-그렇다면 상관없지. 이르면 오늘 밤 안에, 늦어도 내일 아침까지 처리해 둘게.

다행히 잘 해결됐다.

“왜 고생을 사서 하는 건지 모르겠다. 환자에게 좋게 된 걸로 만족하자.”

오지랖도 어지간히 떨자고 다짐해 본다.

한방센터의 당직은 해도 본관의 당직과는 달랐다. 위급한 상황이 오면 움직여야 하는데 딱히 생길 일도 없었고 혹시 큰 문제가 생긴다 해도 치료가 아닌 본관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다였다.

“당직실에 가서 쉬세요, 선생님. 이제 할 일도 거의 없어요. 일 있으면 연락드릴게요.”

야식을 먹고 의자에 앉아 멍 때리고 있자 김 간호사가 말했다.

“아무래도 그래야겠네요. 그럼 수고하세요.”

당직실은 입원실 근처에 있어서 금방 도착했다. 간단히 씻고 누우려는데 전화가 울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얼른 받았는데 김 간호사가 아닌 노상철이었다.

-세 번 울리고 안 받으면 끊으려고 했는데, 뭐 하나?

“당직실에서 쉴까 해서요.”

-당직 참 날로 먹는군.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네요.”

-얼굴 좀 봤으면 하는데? 괜찮나?

“네, 가겠습니다.”

‘내일 뵙죠’라고 말하려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엔 힐 일이 많았다.

“자러 들어간 분이 왜 금세 나오세요?”

“본관에서 누가 보자고 하네요. 일 있으면 바로 연락주세요.”

아까와 달리 이번엔 느긋하게 걸어갔다.

그는 아까 만났던 곳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고생이 많았는지 꽤 피곤한 얼굴이다.

“마스크를 했을 땐 나이가 있는 줄 알았는데 요즘 들어온 인턴보다 어려 보이는군. 얼굴도 잘생겼고.”

지금은 마스크를 할 필요가 없었기에 그냥 왔다.

“감사합니다. 마스크를 한 이유는 제가 한의사라서 괜한 소문이 날까 봐 그런 겁니다. 병원에서 현재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잘 진행되면 그땐 마스크를 벗어도 상관없겠죠.”

“한방 마취에 관한 것 말이군.”

“그렇죠.”

“복잡하군. 험! 아무튼 조금 전에야 정리가 끝나서 연락이 늦었어.”

“고생하셨습니다.”

“내 일인데, 뭘. 한 선생이야 말로 고생했지.”

“고생했다는 말을 하려고 부르신 건 아닌 것 같고 무슨 일이십니까?”

“이거 주려고.”

“아! 잊고 있었네요.”

침통이었다.

“가급적 다 챙기려고 했는데 정확하게 몇 개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혹 보이면 챙겨줄게.”

“그냥 은으로 만들었다 뿐이지 대단한 침도 아닌데요. 나머진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까 한 선생이 살린 환자 가족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는데 어쩔래?”

“들켜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드러내기는 조금 그러네요. 그 전에 행한 심폐소생술 덕분인지도 모르는데 제가 다한 것처럼 인사를 받는 것도 싫고요. 마음은 잘 받았다고 말해주세요.”

“자네 뜻이 정 그렇다면 그렇게 전하지.”

이후 말이 끊겼다. 오늘 잠깐 함께한 사이에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을까, 이만 가보겠다고 말하려는데 머뭇거리던 그가 말했다.

“…근데 혹시 응급센터에서 일해볼 생각 없어?”

“조금 전 제가 한 말은 그새 잊으셨어요?”

“난 그딴 거 신경 안 써. 응급센터에서 환자 목숨구하는 거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까.”

“전 신경 쓰이네요. 그리고 이곳만큼은 아니겠지만 저 엄청 바쁩니다.”

“…아쉽군. 한 선생은 정말 응급실에 필요한 사람인데. 자네라면 분명 수없이 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거야. 오늘 환자를 살린 것처럼.”

“…운이 좋았습니다.”

그때의 기분이 다시 떠오른다.

환자를 살렸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그전에 느꼈던 무기력감과 부족함이 더 크게 다가왔다.

“어째 기뻐 보이지 않는군?”

“기쁘기도 합니다만… 좀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스스로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한 친구군. 근데 가끔은 우쭐해도 되네. 특히 오늘 같은 날에는. 나는 보지 못했지만 본 인턴이 그러더군. 소름이 돋을 만큼 감동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도 반드시 자네처럼 되겠다고.”

“…그렇습니까? 그럼 오늘만 건방지게 굴어볼까요?”

“내 앞에서 하지 말고 다른 데 가서 해.”

“방금 하신 말씀과 좀 다르지 않습니까?”

“뭐… 그건 그렇고, 오늘 같은 날 가끔 불러도 되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네.”

돌아서서 가려 할 때였다.

반쯤 먹은 피자 조각을 든 인턴이 노상철에게 외쳤다.

“노 선생님! 강변북로에서 얼음길에 트럭이 미끄러지면서 8중 추돌사고가 났답니다. 환자 받을 여력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당연히… 받을 수 있다고 해. 간식 먹는 애들한테 준비하라고 하고.”

“예! 알겠습니다.”

인턴이 가고 나자 복도에 멍하니 서 있는 두삼을 향해 그가 중얼거렸다.

“오늘 무슨 날인가? 한 선생, 일 좀 도와줄 수 있지?”

두삼은 고개를 푹 수그리며 말했다.

“오늘은 일복이 많네요. 옷 갈아입고 올게요.”

* * *

2월의 마지막 날.

끔찍할 만큼 바빴던 주말이 지났다. 월요일이 이렇게 반가웠던 적이 있었던 적이 있었나 싶다.

안마과로 가는데 공동희가 보였다. 가볍게 수인사를 한 후 말했다.

“고맙다.”

“약속한 거나 잊지 마라.”

“걱정 마. 오래 끓여야 하는 거라 내일쯤 될 거다.”

“오케이! 수고해라.”

헤어진 후 과로 들어가자 꽤 부산스럽다. 원흉은 세 명의 수련의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는 엘튼 리였다.

“오! 저기 왔다. 걸그룹을 떡 주무르듯 하는 우리 과의 행운아.”

떡이라니, 말본새하곤.

“한 선생, 이리와. 이번에 우리 과에서 40일 동안 함께 일하게 된 인턴들. 여긴 최영환 선생, 여긴 교현성 선생, 여긴… 아무튼 인사해.”

‘호불호가 확실하구나.’

이름을 듣지 못한 인턴은 살집이 있고 결코 잘생겼다고 할 수 없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반가워요. 있는 동안 가급적 많은 걸 배우고 가길 바라요. 잘 지내봐요.”

“예! 선생님!”

“말은 편하게 할게. 근데 엘튼 선생님. 전문의 과정 선생들이 없으니 우리가 한 명씩 맡게 되는 겁니까?”

“응. 자자! 그러지 말고 이 친구들에게 특실에 대해 얘기 좀 해. 그래야 우리 과를 선택할 거 아냐.”

“우리 과는 아직 시험도 없잖아요.”

“무슨 상관이야. 우리가 침구나 다른 걸 못하는 것도 아니고. 레지던트 과정은 우리에게 받고 시험은 원하는 걸로 보면 되지. 안 그래들?”

“…네, 선생님.”

40일간 엘튼 리에게 교육받는 사람은 절대 우리 과를 선택할 일이 없을 것 같다.

“그럼 제가 담당할 인턴은 누굽니까?”

“여기 이 친구.”

알 것 같았지만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직 이름을 모르는 인턴이 자신의 몫이었다.

“근데 한 선생 분위기가 조금 바뀌었다?”

“제가요?”

“뭐랄까? 눈빛이 더 깊어졌다? 카리스마가 생겼다? 더 잘생겨졌다?”

뭘 기대하고 물었을까. 생각이 어린 건지 일부러 저러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참! 근데 토요일 날 크레인 사건으로 부상당한 사람들 우리 병원에서 처리했다면서?”

“…그렇다고 들었어요.”

“사망자 4명인데 병원에 도착해서 사망자는 아무도 없었다며? 그리고 어젠 총리까지 와서 응급센터 지정 병원으로 큰일 했다고 칭찬했대. 대단해! 우리 병원.”

그랬나? 모르겠다.

교통사고까지 처리가 끝나고 나자 어디선가 불이 난 건지 화상 환자들이 들이닥쳤었다.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해가 뜨는 걸 응급실에서 봤다.

그 후 VIP실과 특실에 들렀다가 이준호를 본 후에 겨우 퇴근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진짜 대박인 건 뭔지 알아? 숨이 멈춘 환자를 어떤 한의사가 침 한 방에 살려냈단다. 캬아~ 대박 아니냐? 이만 한 장침으로 가슴을 푹! 찔러서 멈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었단다.”

류현수랑 붙여주면 잘 어울리겠다. 이번 얘기는 인턴들에게 통한 모양이다.

“정말이에요, 선생님?”

“근데 그런 분이 우리나라에 있나요? 혹시 중국인 아닐까요?”

“허어~ 얘네들이 모르네. 한의학이 많이 약해졌다곤 하지만 숨겨진 실력자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 내가 아는 것만 해도 3대 문파, 8대 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설의 고수. 제일 재미있는 게 전설의 고수가 중국의 고수와 붙는 얘긴데 말이야.”

류현수와 비교한 것이 민망할 정도로 사람을 확 잡아끄는 말솜씨였다.

자신도 모르게 그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3대 문파에 8대 세가라니. 재미있긴 한데 듣고 있을 시간이 없네.’

딱! 얘기에는 별 관심이 없는지 딴 짓을 하는 이름 모를 인턴에게 손가락을 튕겨 시선을 끈 후에 그에게 진료실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앉아. 이름이 어떻게 돼?”

“양태일입니다.”

“양 선생, 반가워. 난 한두삼. 현역? 아님 예비역?”

“다녀왔습니다.”

군대를 다녀와서 수련의 과정을 거치는 것과 졸업 후 바로 거치는 경우 둘 다 장단점이 있었다.

“잘됐네. 그럼 나이가 스물아홉? 서른?”

“스물여덟입니다. 고등학교를 조기 졸업 했습니다.”

“오! 공부 잘했나 보네. 서로에 대해선 천천히 알아가기로 하고 짧은 기간이지만 잘 지내봐. 혹시 필요한 거 있음 바로바로 물어보고. 가만있자. 뭐부터 알려줘야 할까? 아!”

뭐니 뭐니 해도 스케줄이 제일 중요했다. 두삼은 얼른 종이에 일주일치 스케줄을 적었다.

“자. 이건 내 스케줄이야. 비어 있는 부분은 나 혼자 움직이는 시간. 그동안은 책을 읽어도 좋고 엘튼 선생님이나 이 선생님 옆에서 배워도 좋아. 실력을 확인하고 나면 별도의 숙제를 내줄 수도 있으니까 약속 같은 건 잡지 말고.”

“알겠습니다. 근데 시간표대로라면……?”

“맞아. 지금 난 가봐야 해. 조금 뒤에 올 테니까 그때 다시 얘기하자. 간다.”

“…아, 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일단은 환자를 보러가는 게 우선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