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
30. 길고 긴 밤(3)
푹 잔 잠이 보약보다 낫다는 말을 실감했다.
고연아의 배려로 1시간이 넘게 잠들었다가 일어나니 개운했다. 심지어 기운도 절반 가까이 차 있었다.
“아! 당직!”
그때 까맣게 잊고 있던 당직 의사의 할 일이 떠올랐고 바로 입원실로 향했다.
“선생님, 아무리 당직이 처음이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하실 일에 대해선 들으셨을 텐데요?”
나이가 있는 간호사의 눈빛이 꽤나 매섭다.
“죄송합니다! …김 간호사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녀가 자신에 대해 아는 것도 없는데 변명을 해봐야 구차할 뿐이다.
“…월요일 날부터 수련의들이 오면 달라지겠지만 오늘은 제가 환자에 대해 말씀드릴 거예요.”
“감사합니다. 그럼 한 번 돌아볼까요?”
“…회진하시려고요?”
“그래도 제가 맡게 된 환자들인데 밤새 일이 있으면 안 되잖아요.”
수련의들이 오면 그들이 하겠지만 일단은 혼자이니 한 바퀴 돌 생각이었다.
“준비할게요.”
“아뇨. 제가 휑 하니 다녀오겠습니다.”
“선생님이 혼자 다니는 거 보기 안 좋아요.”
싫다는데도 굳이 드레싱카를 끌고 따라나서는 그녀였다. 일에 대해선 꽤 고집이 있는 모양이다.
한강대학병원에 잘되어 있는 것 중 하나로 꼽히는 게 바로 전산 시스템이다.
어느 위치를 가든 태블릿 PC만 보면 해야 할 일이 명확하게 보인다.
가령 오늘같이 당직을 서는 경우 입원 환자의 명단을 볼 수 있다.
즉, 당직할 동안 자신이 관리해야 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나와 있다는 것이다. 내일 당직이 끝나면 볼 수 있는 권한 역시 사라진다.
일단 1인실부터.
생명에 귀천은 없지만 우선 순위는 존재한다.
1인실을 쓰는 환자와 6인실을 쓰는 환자가 똑같이 대접받는 것도 이상하다.
노크를 하고 들어가자 단아한 50대의 아주머니가 드라마를 보고 계셨다.
“안녕하세요. 혹시 불편한 거 있으세요?”
한방부인과를 통해 입원한 환자로 호르몬 불균형으로 인한 통증, 갱년기로 입원하게 되었다고 진료 기록에 나와 있었다.
“덕분에 괜찮아졌어요.”
“잠깐 진맥을 하겠습니다.”
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입원 환자가 몇 명인데 모두 기를 이용해서 보다간 다 보기도 전에 기가 탈탈 털릴 것이다.
오로지 맥박이 뛰는 정도, 속도, 전해져 오는 느낌으로만 상태를 살폈다.
‘음, 진맥 실력이 이렇게 좋았나?’
장갑을 얻고 기를 통해 내부를 보게 된 후 진맥을 등한시했지만 기본적으로 진맥 능력은 평균 이상이었다.
한데 아까 침을 꽂을 때 느꼈던 손 감각이 남았는지 진맥만으로도 내부가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갱년기 증상인 심장박동이 조금 빠른 걸 제외하곤 딱히 특별한 건 없었다.
“괜찮으시네요. 혹시 이상 있으시면 지체 없이 연락주세요.”
한 명의 환자에게 마냥 시간을 허비할 순 없었다. 현재 입원 환자는 총 73명. 아무리 짧게 봐도 2시간은 넘게 걸릴 터였다.
1인실에서 다소 천천히 진행되던 회진은 2인실, 3인실로 갈수록 빨라졌다.
“일일이 보시는데도 상당히 빠르시네요?”
이동 중 김 간호사가 말했다. 사무적인 말투 때문에 설렁설렁 본다고 말하고 싶은 건지, 아님 칭찬인지 모르겠다.
“진료 기록을 확인하고 진맥을 하니 좀 더 쉽게 파악이 되네요. 그렇다고 절대 설렁설렁 보는 건 아닙니다.”
“…그런가요?”
이번 말투로 확실히 전자임을 알게 됐다.
‘환자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건가?’
간호사 일은 3D 직종이다. 의사보다 간호사 구하는 걸 더 힘들어하는 병원도 있다.
지방의 일부 병원의 경우 간호사를 구하지 못해 지방 정부가 나서는 경우도 있으니 말 다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직업의 사명감과 환자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버티기가 힘들다.
‘늦으면서 미운털이 제대로 박힌 모양이네.’
함께 일하는 간호사들과 가급적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구구절절 설명하기도 애매했다.
‘나중에 오해가 풀리겠지.’
어차피 당직은 하루뿐이다. 그러니 김 간호사와 다시 만날 일은 오다가다 만나는 게 다였다.
4인실까지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6인실에 들어섰다.
“아이고! 저 나쁜 년! 저런 것들은 머리끄덩이를 잡아채서 혼쭐을 내야 해.”
“맞아, 맞아!”
“콜록콜록! 에구구구!”
드라마에 몰입한 환자들, 감기가 걸렸는지 기침을 하는 환자, 간식을 먹었는지 음식 냄새가 풀풀 났다. 병실인지 시장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시끄럽다.
‘응급실에 비하면…….’
응급실을 한 번 겪고 긍정적으로 바뀐 두삼이다.
“이옥자 환자분.”
“여기! 여기예요, 선생님.”
“허리는 좀 어떠세요?”
“저녁 약을 먹어서인지 지금은 버틸 만해요.”
“진맥 좀 할게요.”
“난 됐고 저기 저 아줌마나 봐줘 봐요. 오십견이라는데 밤새 아주 끙끙 앓아서 잠도 제대로 못 자요.”
“이인하 씨도 볼 테니 걱정 마시고 팔 주세요.”
“괜찮은데…….”
시선은 드라마에 두고 내미는 팔을 잡았다.
맥이 조금 불규칙적이다. 혹시나 싶어 태블릿을 넘기니 검사 기록도 있었다.
‘음? 신경외과로 가셔야 할 분이 왜 한방센터에?’
추간판탈출증이 심했다. 이 정도면 수술을 받는 게 더 나았다. 물론 이유가 있으니 이곳에 입원했을 것이다. 한데 그런 분이 낮은 의자에 걸터앉아서 TV를 보고 있다니.
“환자분. 당장 침대로 올라가서 허리 찜질 하세요.”
“조금 전까지 했어요. 저것만 보고 다시 할게요. 침대에선 잘 안 보여서.”
“TV를 끌까요? 아님 올라가실래요?”
궁서체 모드로 말하자 같이 보던 나이든 환자가 나섰다.
“TV 방향 틀어줄 테니까 얼른 올라가, 이 여자야. 이거 다음 드라마는 안 볼 거야?”
“에구구구구! 올라가요, 올라가.”
“김 간호사님, 이옥자 환자, 항상 자세에 신경 쓰라고 기록해 두세요.”
“네, 선생님.”
이옥자 환자가 침대에 올라가는 걸 확인한 후 다른 환자들을 보기 시작했다.
다들 기록된 병 외에도 병을 가지고 있었지만 환자의 나이를 감안한다면 이상할 것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끙끙 앓으면서도 팔을 위로 올리기 위해 애쓰고 있는 이인하 환자에게 갔다.
“환자분 밤에 많이 아프세요?”
“약을 먹으면 잠깐 괜찮은데 금세 아프네요. 하지만 선생님이 아플 거라고 하셨고… 그보다는 굳으면 안 된다고 운동하라고 하셨어요.”
“잠깐 진맥 좀 할게요.”
오십견이 맞다면 옳은 치료 방향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유라면 병을 키우는 일이다.
먼저 진맥으로 살펴봤다. 고통을 느끼며 하는 운동 때문인지 맥이 상당히 불안정했다. 어쩔 수 없이 기운을 그녀의 어깨로 보냈다.
‘어깨 연골 파열!’
연골 주위에 염증이 엄청 심했고 그 범위가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연골 파열인 경우는 오십견과 정반대로 팔을 쓰지 않고 염증과 연골에 주사를 놓아 치료가 되게 해야 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작은 한방병원도 아니고 환자가 어깨가 아프다면 MRI를 찍어서 확인만 해도 되는 일이다.
‘도대체 누가?’
얼른 담당의를 살펴봤다.
한방재활과 이경진 교수다.
그는 현재 한방센터에서 센터장 고웅섭을 제외하곤 나이가 가장 많았는데 실력이 좋고 항상 웃고 다니는 모습에 싫어하는 이가 거의 없었다.
다만 의학적인 지식과 관련해서는 꽤나 고지식하고 자존심이 강하다는 평을 받았다. 과학적인 데이터보다 경험의 데이터를 더 믿는 편이랄까.
‘미치겠네. 하필이면 이 양반이냐. 얼마 전 고 센터장님이랑 기기 사용 때문에 언쟁을 했다던데.’
이방익의 말에 따르면 회의 도중 의료 기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라는 사항에 그가 태클을 걸었고 얘기 끝에 자신의 경험이 기기보다 낫다는 말을 했다고 했다.
물론 언성이 높아지다 보면 자존심에 쓸데없는 말을 할 때가 있다.
한데 그 말을 자존심 강한 노학자가 했다면 문제가 된다.
다른 사람들이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과연 스스로가 용납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연골 파열이라고 말하면 그만둔다고 하는 거 아냐?’
팔 운동을 하고 있는 환자도, 자존감이 강한 이경진도 걱정이다.
그래도 일단 환자가 우선이다.
“이인화 님, 운동을 멈추세요.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지만 선생님이 적어둔 기록엔 운동은 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럴 리가요. 선생님이 직접 어떻게 하는지 보여주셨는데요.”
“전산 시스템의 오류 때문인 것 같습니다. 여기 보시면 아시겠지만 현재 최대한 움직이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그런가요?”
어정쩡한 말과 복잡하게 써져 있는 의료 기록을 단번에 파악할 수가 없다는 점을 이용했다.
“네. 오늘은 제가 간단히 침을 이용해 고통을 없애 드릴 테니 편히 주무시고요. 아프지 않다고 움직이지 마시고요.”
의문을 가지기 전에 서둘러 어깨에 시침을 했다.
“어? 고통이 사라졌어요.”
“시침이 잘됐나 보네요. 내일 아침 식사 후에 다시 들를게요. 그리고 잠시 후 간호사 편으로 약을 보낼 테니 드세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별말씀을요. 쉬세요.”
밖으로 나오자 김 간호사가 물었다.
“뭐가 잘못된 건가요?”
“뭐가요?”
“선생님, 저희가 하는 일이 환자를 케어하는 일이에요. 그러기 위해선 정확하게 알아야 해요.”
시치미를 떼려 했지만 그녀의 말이 옳았다.
“이인화 환자 오십견이 아니라 연골 파열이에요.”
“예? …그걸 진맥으로 알아내셨다고요?”
“빨리 봐도 허투루 보지 않는다고 말했잖아요.”
김 간호사는 놀란 표정을 짓다가 곧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담당 선생님께 말을 하고 조치를 취하시는 게 맞지 않나요?”
“제가 그걸 왜 모르겠습니까. 다만 말을 전하기가 곤란합니다.”
“곤란한 점이 뭔지는 몰라도 나중에 이경진 선생님이 알게 되는 게 더 곤란하게 될 것 같은데요.”
“그렇긴 하죠.”
“설명해 보세요.”
“네?”
“혼자보단 둘이 더 낫지 않겠어요?”
갑자기 호의적으로 나오니 뭔가 싶다. 그러나 일을 저질러 놓고 대책이 없는 상황에서 도움을 주겠다는데 그 제안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이경진과 고웅섭 사이에 있었던 일과 자신이 왜 그랬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했다.
“결국 이경진 선생님이 그만둘 것 같아서 그랬다?”
“다른 이유가 있을 리가 없잖아요. 저야 그냥 전화 드리기만 하면 되는 일인데.”
“하긴 그러네요. 그래서 생각해 둔 방법은 있으세요?”
“이제부터 생각해 봐야죠. 아! 치료할 사람이 있어요. 그거 끝내고 해야겠네요.”
“…한 선생님 의외로 대책 없는 분이네요”
“생각이 많은 걸로 해주세요. 그리고 아까 함께 생각해 주신다고 하신 분이 계셨던 것 같은데?”
“풉! 머리는 좋으시네요.”
환자를 열심히 봤다고 생각해서인지, 비밀을 공유해서인지 김 간호사의 표정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좋은 대안을 주신다면 간식 쏠게요.”
“먹으려면 열심히 해야겠네요.”
“그럼 얼른 마무리 짓죠.”
남아 있는 6인실을 돌았다. 다행히 문제가 있는 이들은 없었다.
김 간호사와 헤어져 진료실로 왔다. 그리고 상자를 챙겨서 다시 입원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가장 구석에 있는 1인실로 갔다.
노크를 하고 들어가자 이준호가 반겼다.
“어서 오세요, 선생님.”
“말도 안 했는데 저인 줄 어떻게 알았어요?”
“사람마다 걷는 소리가 조금씩 다르거든요.”
“제 발걸음은 어떤데요?”
“걷는 속도가 빠르세요. 남들보다 1.5배 빠르다고 할까요. 아마 바빠서 그런 거겠죠?”
“아니라고 말을 못 하겠네요. 누워요.”
오늘로 네 번째 뜸을 뜬다. 뜸을 뜨기 전에 일단 기를 주입해 눈 주위를 살폈다.
‘이런! 또 다시 굳어버렸어. 굳어지게 하는 호르몬이 발생하는 거야, 뭐야?’
경락이라는 도로에 쌓인 딱딱한 진흙덩어리들을 뜸과 마사지를 통해 말랑말랑하게 만들어놓으면 그 다음 날 어김없이 다시 딱딱하게 변해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
‘정말 원인부터 찾아봐야 하는 건가? 하아~ 장비를 가져왔으니 좀 더 지켜보자.’
느낌이 이상하다고 생각됐을까 이준호가 물었다.
“역시 다시 딱딱해졌습니까?”
“네, 그러네요. 지속시킬 방법을 생각해 왔으니 일단 뜸부터 뜨죠.”
가방을 열자 입구가 긴 삼각 플라스크처럼 생긴 뜸이 나왔다. 길쭉한 부분의 두께가 성냥개비 정도이니 상당히 작았다.
눈 주위에 기름을 살짝 발랐다. 뜸이 잘 붙도록 하고 화상을 덜 입게 하는 기름으로 장인규가 다년간의 노력으로 만든 것이다.
눈 주위의 혈 자리에 뜸을 촘촘히 놓았다. 그리고 길쭉하게 생긴 가스 점화기로 약간의 틈을 둔 후 불을 붙였다.
“뜨겁지 않습니까?”
그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OK 표시를 했다.
뜸은 꽤나 지루하면서도 집중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기준점까지 타고 나면 얼른 바꿔서 다시 불을 붙여줘야 했는데 자칫 방심하면 화상을 입었다.
50분 남짓 계속 뜸을 뜬 후 기를 보내 굳어 있는 노폐물의 상태를 확인했다.
살짝 말랑해진 느낌.
얼른 뜸을 떼어내고 경락 마사지를 시작했다. 기를 잔뜩 머금은 손가락들로 말랑해진 노폐물을 더욱 말랑하게 만드는 작업이었다.
“아! 아!”
가끔 비명 소리가 들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완전히 말랑말랑해졌을 때 손을 뗐다.
“수고하셨어요.”
“참느라 고생했어요.”
“선생님이 고생하셨죠.”
“하하! 서로 고생했다고 해요. 자! 이건 앞으로 쓰고 다닐 물건이에요.”
“…안경인가요?”
그는 거의 보이지 않는 시력으로도 두삼이 준비한 물건을 알아봤다.
“테두리에서 지속적으로 적외선이 발생하는 안경이에요. 제작을 부탁했죠. 한동안 눈을 보호하기 위한 안대는 차고 다녀야 할 거예요. 배터리로 작동되니 꼭 챙기고요. 뜨겁진 않겠지만 혹시 이상이 있으면 여기 버튼을 누르면 되고 올 때마다 배터리는 교환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선생님께 너무 신세만…….”
“제가 감사는 언제 하라고 했죠?”
“가능성이 보일 때와 다 나았을 때요.”
“그래요. 그 두 번이면 족해요. 착용 잘하고 쉬어요.”
그가 안대와 안경을 착용하는 걸 본 후 김 간호사에게 갔다.
그녀는 두삼을 보자마자 빙긋 웃으며 외쳤다.
“좋은 생각이 났어요!”
“그래요? 그럼 일단 야식부터 시키고 들어보죠.”
배가 너무 출출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