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무르면 다 고칭-87화 (86/122)

# 87

25. 다이어트(5)

지금까지 고연아를 치료했던 의사들이 돌아가면서 딸의 죽음을 알리는 꿈을 밤새도록 꾼 고정운은 피곤한 모습으로 방에서 나왔다.

기다렸다는 듯 야채 주스를 건네는 집사에게 물었다.

“그 의사는?”

“한약을 먹고 소파에 앉아 몇 시간 앉아 있다가 아가씨의 아랫배에 잠깐 손을 올리고 계속 그 행동을 반복하고 있어요.”

“밤새?”

“예. 시간을 볼 때 잠시 후 소파에서 일어나 아랫배에 손을 댈 시간이에요.”

“무슨 도깨비놀음도 아니고… 가보지.”

나경록 사장과 민규식 원장으로부터 정상적으로 보이진 않을 테지만 일단 믿어보라는 얘길 들었다.

그에 그저 지켜보고만 있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만일 고연아를 대하는 태도가 진지하지 않았다면 벌써 ‘뭐 하는 짓’이냐고 한마디 했을 것이다.

보낼 때 보내더라도 이상한 꼴을 당하게 하고 싶지 않은 게 그의 마음이었다.

고정운이 딸의 방에 도착했을 때 두삼은 단전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다 손을 떼며 안도의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하아… 드디어 끝이구나.”

“뭐, 뭐가 끝이라는 말인가?!”

“아! 오셨습니까. 근데 설명 드리기에 앞서 일단 아침 식사 좀 할 수 있을까요? 쓴 한약만 삼켰더니 입이 너무 쓰네요.”

묻는 말에 답부터 하지 않는 것은 그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하룻밤 사이에 어제 온 의사가 맞나 싶을 만큼 핼쑥해진 모습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식탁에 앉은 두삼은 정말 걸신이 들린 사람처럼 먹는 것에 집중했다. 그리고 밥을 세 공기째 먹고 난 후에 숟가락을 놓았다.

“이제 설명을 해줄 수 있겠나?”

“물론이죠.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젯밤에 처음 환자분을 진맥했을 때…….”

두삼이 막 말을 하려는데 비서가 부리나케 다가오더니 귓속말을 했다.

“회장님, 아가씨가 정신을 차리셨어요!”

“뭐!”

“조금 전에 눈을 떠서 직접 산소마스크를 벗었어요.”

“당장 가보지!”

몸이 약물을 서서히 거부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보름 가까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었다.

한달음에 딸의 방으로 달려갔다.

“연아야!”

피곤한지 눈을 감고 있던 고연아는 아주 천천히 눈을 떴다.

“…….”

뭔가 말하려는 듯 마른 입술이 달싹이긴 했지만 말이 나오진 않았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 아빠다, 아빠야! 이 녀석…….”

고정운의 눈주름을 따라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감동적인 시간은 한 사람으로 인해 깨졌다.

“지금은 눈을 뜨는 것조차 생명에 위험할 수 있습니다. 연아 씨, 당신이 살고 싶어 한다는 건 알고 있으니 이만 쉬어요.”

두삼은 그녀의 머리에 한손을 올리고 다른 한손으로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주물렀다. 그러자 신기하게 금방 색색거리면서 잠이 들었다.

“연아 씨는 한동안 계속 자야 할 겁니다.”

“…그런가? 식사 후 차를 못 마셨군. 마시면서 아까 못들은 얘기를 듣고 싶은데.”

고정운은 손으로 얼굴을 쓱 닦고 말했다.

“그러시죠. 저도 드릴 말씀이 있으니까요.”

두 사람은 정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난 커피로. 한 선생이라고 했지? 자네는 술이라도 한 잔 줄까? 의사들 술 좋아하지 않나.”

“아닙니다. 전 꿀차나 코코아처럼 단맛이 강한 걸로 부탁드립니다. 밥을 먹었는데도 쓴맛이 가시질 않네요.”

가정부가 가고 나자 고정운이 물었다.

“피곤하지 않나?”

“괜찮습니다.”

자신보다 피곤해 보이는 고정운 앞에서 피곤한 척할 수 없어 괜찮다 말했지만 사실 죽을 맛이었다.

밤새도록 기운이 차오르기 무섭게 고연아에게 줘버렸는데 멀쩡한 게 이상하리라.

다만 얻은 게 있어서 심적으로는 버틸 만했다.

명상을 통해 임독양맥으로 기운을 돌리던 것을 이제는 가만히 있어도 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밤새도록 돌리다 보니 관성을 얻은 건지 어느 순간부터 의식하지 않아도 돌고 있음을 알게 됐다.

지금도 돌고 있다.

그리고 야금야금 주변의 기운들을 몸속으로 끌어들여 비어진 빈자리들을 채우고 있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제부터 더 많은 일을……

‘빌어먹을! 기운을 더 빨리 채울 수 있게 됐다고 일을 더 할 생각을 하다니, 지금 일하는 걸로도 부족한 거냐, 두삼아!’

일 중독자처럼 구는 스스로를 책망했다.

아무튼 할아버지가 수많은 환자들을 볼 수 있었던 비밀은 푼 것 같았다.

“험!”

생각에 빠진 건지, 잠을 잤는지 고정운의 헛기침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테이블엔 꿀을 넣은 코코아가 놓여 있었다.

달콤한 코코아를 한 모금 마신 후 입을 열었다.

“원장님께 말씀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몸의 기운을 이용해 사람의 내부를 보거나 치료를 합니다.”

“얼핏 들었네.”

“그래서 어제 제일 먼저 내부를 보려고 했고요. 한데 제 기운을 그냥 흡수해 버리더군요. 그리고 흡수를 하고선 더 달라고 조르기도 했고요. 아! 몸이 말했다는 건 아닙니다. 그저…….”

“특이한 표현이지만 충분히 이해하네. 그렇게 느꼈던 거겠지.”

“맞습니다. 아무튼 본능은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원하는 만큼 기운을 주입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쓴 한약을 그렇게 먹은 것이고요.”

“이제야 괴상하기까지 한 행동들이 이해가 되는군.”

“괴상하기까지야…….”

“고맙네. 솔직히… 연아가 다시 눈을 뜨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네.”

“솔직히 저도 기대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저 할 수 있는 한 해보자는 생각대로 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호전시키는 건 어느 누구도 못 한 일이지. 이젠 어떻게 할 생각인지 알고 싶군.”

“글쎄요. 생각해 봐야죠. 근데 그보다 먼저 왜 저렇게 되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아주 흔한 이유지.”

커피 잔을 잡는 고정운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내겐 자식이 연아 한 명뿐이네.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나?”

“소중하다?”

“그야 당연히 소중하지. 우리에게도, 내 회사에도.”

“아! 맞다. 회장님이시죠? 죄송합니다.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끌려온 것이라.”

“경제엔 관심이 없나 보군?”

“의학 서적 보기에도 바쁜데요.”

고정운은 약간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사실 그는 웬만한 연예인보다 더 자주 방송 매체에 나왔다.

“하긴 자신의 분야에 빠져 살면 그럴 수도 있지. 아무튼 상속자인 딸의 미래를 위해 쓸 만한 인재를 붙여줬다네. 다행히 연아도 그 남자를 마음에 들어 했지.”

정말 그의 말처럼 흔한 이유였다.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하필 그 남자가 바람을 피우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거기서 멈추고 끝냈으면 좋았을 텐데 배신감에 뒤를 캤고 그에 남자가 뒤에서 하는 뒷 담화까지 고스란히 듣게 되었다.

이후는 듣지 않아도 알 만했다.

억지로 다이어트를 하려 했고 그에 대한 부작용으로 거식증에 걸려 현재까지 온 것이다.

“몸을 정상으로 만드는 게 쉽지 않겠군요. 전 정신 건강 의학에 대해 아는 게 없습니다.”

“그건 민 원장에게 내가 부탁하겠네. 자넨 그저 정신과 치료를 할 수 있는 정도로만 만들어주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한데 제가 이 일에만 매달리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을 시켰으면 합니다.”

“…민 원장에게 병원에 입원하지 못하는 이유를 듣지 못했나?”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짐작은 합니다. 하지만 지금 상태론 절대 자해는 하지 못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다 그만두고 치료만 해준다면 평생 놀고 써도 다 쓰지 못할 만큼 줄 수 있네.”

“…귀가 솔깃해지는 제안이네요.”

솔직히 짧은 순간 ‘평생 놀고 써도 다 쓰지 못할 만큼’이 얼마일까라는 생각과 기다리고 있는 환자들이 머릿속에서 서로 싸우고 있었다.

싸움의 승자는…….

“하지만 진짜 돈 때문이 아닙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들도 제가 꼭 필요로 하는 일들이라 그렇습니다.”

옳은 대답을 했는데 왜 속이 쓰릴까.

“어쩔 수 없지. 그럼… 입원은 언제 시키면 되겠나?”

“당장하시죠. 제가 원장님께 구급차 보내달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차를 마셨다.

문득 치료만 잘되면 아까 말한 것만큼 주면 안 될까요, 라고 묻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참을 수 없게 술을 권할 때 마실 것을.

* * *

“저 왔어요.”

가게로 들어가자 세 사람은 따뜻한 수제비를 먹고 있었다. 가장 먼저 이진철이 반겼다.

“여어~ 사장 양반, 수금하러 왔나? 금방 먹고 챙겨줄 테니 잠깐만 있으라고.”

“네네~ 근데 하룻밤 여기서 잤다고 날 손님 취급하진 말아줄래요?”

고연아에게 밤새 기운을 불어넣느라 집에 올 수가 없어서 이진철에게 하룻밤만 자달라고 부탁했다.

요 며칠 집 주위에 서성이는 이가 있다는 한미령의 말에 혹시나 싶어서였다.

“요즘 하는 거보면 손님이나 다름없지.”

“말싸움하기도 귀찮네요. 인정. 제 잘못이에요. 이제 됐어요?”

“재미없긴. 밥은 먹었냐?”

“…제가 먹을 거 있어요?”

수제비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당연히 있지. 네가 올지 안 올지, 먹고 올지 안 먹고 올지 알 순 없지만 항상 넉넉하게 준비하거든. 안 그래요, 혜경 씨?”

“호호! 내가 떠줄게. 앉아.”

“고마워요, 누나.”

“천만에. 근데 어제 재미있는 손님 왔었어.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전립선 마사지는 안 하느냐고 묻더라.”

전립선 마사지는 꽤 민감한 곳을 손으로 꼼꼼히 문질러야 해서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안 한다고 했더니 자신의 전립선이 위험한 상태라고 꼭 해달라는 거야. 웬 진상인가 싶어 쫓아내려는데 진철 오빠가 마사지를 마치고 나오다 그 모습을 본 거야. 그리고 오빠가 자신이 아주 잘한다고 해주겠다고 말했거든. 호호호호! 그때 그 사람 표정을 봤어야 하는데.”

“하하하! 화들짝 놀라 도망가는 꼴이라니.”

세 사람은 일을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진상 처리는 잘 하고 있었다.

재미있자고 한 얘기도 즐거웠고, 수제비도 맛있었다. 아니 그보다 북적이는 분위기 때문에 더 맛있게 느껴진 건지도.

저녁 근무를 시작하기 15분 전쯤 두삼은 병원을 다니면서 생각했던 바를 꺼냈다.

“세 사람한테 말할 게 있어요.”

“무슨 얘기를 하려고 무게를 잡고 그래?”

“별건 아니고… 이제 세 분 중 한 명이 가게를 운영해 보는 게 어떨까 해서요. 부담스럽다면 세 사람이 공동 운영 해도 괜찮고요.”

갑작스러운 말이었을까,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대답을 못 했다. 그러다 대표로 이진철이 말했다.

“가게를 우리에게 넘기겠다고?”

“뭐, 그렇죠.”

“음, 많이 바쁜가 보구나. 근데 그냥 네가 사장으로 남으면 되지 않나?”

“함께하는 거라면 모를까 세 사람을 직원으로 쓰며 돈을 벌고 싶지 않아요. 병원에서 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고요.”

“…가게는 얼마쯤에 넘길 생각인데?”

“얼마나 대단한 가게라고 넘기긴 뭘 넘겨요. 그냥 월세는 40 정도에, 인테리어 비용 감가상각 생각해서 30 정도 주고 쓰세요.”

현재 각종 세금과 공과금을 제외하고 세 사람에게 월급을 주고 나면 400만 원 정도가 남았는데 두삼 자신이 밤마다 와서 일한 돈을 제외하면 250정도다.

만일 세 사람이 운영하면 각각 60만 원씩 더 가져가게 되는 셈이다.

“그건 거의 공짜로 주겠다는 소리잖아?”

“월세 받는 것으로 만족하겠다는 소리죠. 사실 혼자 하는 가게였다면 벌써 문 닫았을 거예요.”

“조건은 좋은데… 우리가 너무 미안한데.”

“맞아. 그냥 사장으로 돈 관리만 해.”

“그래요, 오빠. 그냥 그렇게 해요. 오빠 없다고 해도 일 열심히 할게요.”

신혜경도, 한미령도 한 마디씩 했다.

“사람들이 이렇게 욕심이 없어서야. 날 생각해 주는 건 고마운데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어요. 법적인 문제는 제가 깔끔하게 처리할 테니까 세 사람이 공동으로 맡는 걸로 해요. 날짜는 오늘부터.”

어차피 길게 얘기해 봐야 나서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예 못 박았다.

“자식이… 정 그럼 월세 50에 인테리어 비용 50 줄게. 백은 줘야지 덜 미안할 것 같다. 이것도 안 받겠다면 안 해! 그렇지 얘들아?”

“150정도는 줘야 하지 않을까?”

“그보단…….”

쯧! 이러다 계속 올라갈 것 같다.

“합해서 백! 나중에 장사 안 된다고 깎아달라고 해도 절대 안 깎아줄 테니 그리 아세요. 아무튼 얘기 끝났으니 이제 올라가서 좀 씻을게요. 어제부터 씻지 못했더니 찝찝하네요.”

자리에서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갔다.

애정을 쏟았던 가게를 넘기는 것 같아 약간 서운함도 있었지만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넘기고 일을 다이어트했다는 것에 대한 시원함이 더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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