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25. 다이어트(4)
“먼저 나갑니다.”
옷을 갈아입고 입구로 나가자 한쪽에 민규식의 차가 서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문이 열리며 민규식의 모습이 보였다.
“타게.”
그가 비켜주는 자리에 앉자 차는 빠르게 어디론가 향했다.
“청하 씨 합격했다면서요? 축하드립니다.”
“고맙네. 그 앨 만났나?”
“푸드코트에서요. 여행 간다고 들떠 있던데요.”
“쉬는 기간에 병원에 와서 공부나 하라고 했는데 싫다고 하더니 여행을 갈 생각이었군. 쯧쯧!”
“…제가 말을 잘못했나 보네요. 부녀 지간을 갈라놓은 건 아니겠죠?”
“허허. 이제 슬슬 정을 떼야지. 그렇지 않으면 결혼하는 걸 어떻게 보겠나? 전문의로 생활하다 보면 내가 왜 공부하라고 했는지 알겠지. 그나저나 내 딸하고는 잘되어가고 있나?”
“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저흰 그런 사이 아닙니다. 고작 식당에서 몇 번 본 것뿐인데요.”
“허어~ 그래? 근데 둘이 휴게실에 들어가는 걸 본 사람이 있다던데.”
쿨럭!
“네?”
“허허. 젊은 사람이 기관지가 그렇게 약해서야.”
“…오, 오해십니다. 그저 몸이 많이 안 좋아 보여서 마사지를 해준 것뿐입니다.”
“벌써 몸을 더듬는… 아니, 마사지하는 사이가 된 건가? 고작 몇 번 만나서? 자네 생각보다 꽤 행동파구먼. 허허허!”
“…그렇게 따진다면 전 수백 명과 사귀야 합니다만.”
“허허허! 농담일세. 청하에게 들었어. 자네 마사지 실력이 엄청나다고 자랑을 하더군. 뭐, 실제로 사귄다고 해도 딱히 반대할 생각은…….”
“원장님!”
“그 사람, 참. 말이 그렇다는 그야. 그리고 내 귀는 아직 멀쩡하니 그렇게 소리치지 말게. 운전석에 앉은 친구 의외로 입이 가볍다네.”
운전사 쪽을 바라봤다. 백미러로 운전사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씨익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계속 얘기해 봐야 놀림만 받을 것 같아 얼른 화제를 돌렸다.
“오늘 볼 환자는 어떤 증상입니까?”
“anorexia nervosa.”
“네?”
“좀 더 공부해야겠군. 신경성 식욕부진증.”
혈을 외울 때도 얼마나 힘들었는데……. 영어도 아닌 의학 용어에 익숙해지고픈 마음은 없었다.
“거식증!”
신경성 식욕부진증, 거식증은 여러 가지 이유로 발생하는데 대부분은 심리학적 요인으로 발생한다.
체증 증가와 비만에 대한 두려움이 점차적으로 커지면서 악화되는데 먹고 토하기를 반복하다가 몸이 아예 음식을 거부해 버린다.
100명 중 2명은 결국 거식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른다.
“얼마나 심합니까?”
거식증 환자를 자신에게 보일 정도라면 아주 심각하다고 봐야 했다.
“백약이 소용없고, 수많은 의사들이 상태를 호전시키려 노력했지만 실패했네. 각종 영향제로 생명을 유지시키고 있지만 이젠 그마저도 서서히 몸이 거부하는 지경까지 왔네.”
“어쩌다가…….”
“나도 남자 때문이라는 정도밖에 모르네.”
“많은 의사들이 치료를 해왔다면 의료 기록이 있을 것 아닙니까?”
“없네. 환자의 아버지가 개인적으로 알음알음 의사를 직접 데려와 치료를 했던 모양이야. 나도 나 사장의 소개로 어제 처음 봤다네.”
“그럼 병원으로 데리고 오는 것이…….”
“환자가 거부해서 안 된다더군. 1년 전쯤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병원에 데리고 간 모양인데 오히려 죽을 뻔했다더군.”
민규식의 표정이 어두운 것을 보아 정말 심각한 모양이다. 심리적인 요인으로 발생한 병을 자신이 고칠 수 있을까 생각해 봤다.
자신이 없었다.
지금까지 본 환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케이스였다. 어디가 아프면 그 부분만 낫게 해주면 되지만 심리적인 건 자신의 영역이 아니었다.
“너무 고민 말게. 보고 아니다 싶으면 그냥 나와도 좋네. 사실 부모도 거의 포기하고 있는 상태라네.”
“…알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솔직히 죽음을 다시 담담히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섬에서 있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차는 무거운 분위기 때문에 느려진 건지, 아님 교통체증 때문인지 멀지 않은 남산 밑 부자 동네를 가는 데 한참 걸렸다.
저택의 주차장에 차가 서자 양복 차림의 여성이 문을 열어줬다.
“어서 오십시오, 원장님. 회장님께선 위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무뚝뚝하다 못해 음울해 보이는 그녀의 표정이 아니더라도 집안의 분위기는 짐작할 수 있었다.
얼굴이 은은하게 비치는 대리석으로 된 바닥도 분위기를 밝게 만들진 못했다.
“…어서 오세요, 민 원장님. 이 친구가 원장님이 말한 한의사입니까?”
“그렇습니다, 고 회장님.”
“한두삼입니다.”
“고정운일세.”
분위기상 인사말은 생략했고 그도 말을 아꼈다.
고정운의 표정은 몹시 힘들어 보였다.
‘자신의 딸이 아픈 이유 중 하나가 자신의 유전자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사실 거실에 들어서면서 그와 그의 처가 결혼할 때의 사진을 봤는데 두 사람의 유전자를 받았다면 결코 괜찮은 몸매를 타고 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들 부부를 폄하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정보가 거의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환자에 대해 최대한 알아보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까.
“데려다주지. 따라오게.”
그는 말하는 것도 마음이 아프다는 듯 별다른 소리 없이 바로 환자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복도를 지나 고급스러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커다란 방이 나왔다.
한쪽 면 전부가 유리로 되어 있어 아기자기하게 꾸민 정원이 보였는데 방이 얼마나 큰지 가구가 놓여 있음에도 휑하니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창문 한쪽에 병원 중환자실을 연상시키는 기기들과 침대가 보였다.
“…보게.”
가슴이 아파서일까, 고정운의 목소리는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그럼…….”
민규식과 함께 환자에게로 갔다.
‘어, 어떻게……!’
환자는 마치 미라처럼 말라 있었다. 이런 상황에 어떻게 살아 있느냐고 물어보려다 뒤에 있는 고정운이 떠올라 입을 닫았다.
산소 호흡기를 쓰고 있었는데 들썩임마저 느릿느릿했다. 다이어트를 하다가 정말 ‘다이’하게 된 것이다.
“…맥을 짚어보게.”
민규식은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나지막이 말했다.
마치 죽기 전에 형식적으로 하는 마지막 의료 행위를 하는 기분으로 맥을 잡았다.
죽기 직전의 맥이 이럴까 약해도 너무 약했다.
‘배영옥 여사님 수준이네, 아니, 더 심하다고 해야 하나.’
배영옥이 1시간 내에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면 눈앞의 환자는 10분 내에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다.
한참을 살피던 두삼은 기운을 밀어 넣어 몸을 살펴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과거 모두 죽었다고 했을 때 포기하지 않고 덤벼들었다가 어떤 꼴을 당했던가.
‘그래, 몇 시간 더 연장시킨다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 포기하자.’
손을 떼려 할 때였다.
문득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며 섬에서의 기억을 덮었다.
[의사인 내가 죽음을 선고하기 전까진 죽은 게 아니다! 당장 안으로 들여라!]
기다리던 환자가 갑자기 숨을 멈추며 쓰러지자 일을 돕던 사람들이 환자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돌려보내려 할 때 할아버지가 외쳤던 말이었다.
할아버지는 결국 그 환자를 살리셨다. 병명이 기억나진 않지만 심각한 병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어린 시절 그 모습이 얼마나 멋있었던지… 가끔 동네 또래들과 놀 때 흉내 내곤 했었다.
‘그래. 해보지도 않고 사망 선고를 내리려 하다니……. 그땐 정말 내가 죽이는 거야.’
다시 환자의 맥을 꼭 쥔 두삼의 손이 하얗게 빛났다. 그리고 기운이 여자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한데 그때 이상한 증상이 일어났다. 팔을 통해 쭈욱 들어가던 기운이 점점 약해지더니 어깨를 지나기 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뭐, 뭐야!’
깜짝 놀라 다시 기운을 넣었다. 한데 방금 전과 똑같은 증상이 일어났다.
‘이게 무슨…….’
처음 보는 현상에 놀라 더 이상 기운을 넣지 않고 손목의 맥 대신에 더 잘 느낄 수 있는 목의 맥에 손을 올렸다.
조금 전과 다를 바 없는 미약한 맥. 한데 한참 맥을 느끼고 있는데 이상한 현상이 또 하나 생겼다.
움찔!
조금 강한 맥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잘못 느꼈나 싶어 더욱 집중해서 그 현상을 잡아내려 노력했다.
불규칙적이지만 아주 가끔 손끝으로 확실히 약간 강한 맥이 느껴졌다.
‘…살고 싶으니 내 기운을 달라는 건가?’
왜 이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처음 맥을 잡았을 땐 아예 느껴지지 않던 것이, 기운을 주입한 후 느껴지자 마치 기를 더 달라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오냐! 먹어봐라.’
이왕 먹는 거 제대로 먹어보라고 양손을 그녀의 단전 위에 올렸다.
양손에서 하얗게 빛나던 기운이 그녀의 단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단전으로 들어간 기운은 사지로 뻗어가기 전에 빠르게 흐려졌다.
다만 좀 전과 달리 기운을 끊지 않고 계속 밀어 넣자 사라지는 이유가 보였다.
메마른 땅에 약간의 물을 부으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듯 기가 메마른 육체는 두삼의 기운이 들어가는 족족 흡수해 버리는 것이었다.
‘젠장! 기가 부족해.’
병원 일까지 마치고 나면 거의 30퍼센트 정도의 기운밖에 남지 않았는데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남은 기운을 탈탈 털어먹고도 더 달라고 하는 육체를 보고 있자니 한숨밖에 나지 않았다. 하지만 더 줄 순 없었다.
무리하면 자신의 원기가 다친다.
일단 손을 뗐다.
“윽!”
기운이 텅 빌 때 느껴지는 허탈감에 절로 숨이 거칠어졌다.
단전에 손을 올리고 있던 두삼이 손을 떼며 갑자기 숨을 헐떡거리자 민규식이 물었다.
“왜 그러나?”
“제 기운을 넣어서 그렇습니다. 후… 혹시 근처에 기운을 보할 수 있는 한약 없습니까? 아님 보양식도 괜찮습니다.”
“잠깐만 기다리게!”
“구해 오는 동안 저는 잠깐 기운 좀 돌리겠습니다.”
두삼은 침대 앞쪽에 털썩 주저앉아 몸의 내부를 관조했다.
습관 때문인지 아님 이유가 있는 건지 모르지만 이러한 명상은 일어날 때와 자기 전에 하는 것이 가장 효율이 좋았다.
다른 때도 해봤지만 두 시간대보다는 확실히 효율이 나빴다.
근데 지금은 찬밥과 더운밥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기껏 넣어줬는데 그 양이 적어 숨을 거두면 그보다 낭패가 있을까.
단전에 집중하자 어느새 작은 양의 기운이 모여들면서 임독맥을 달리기 시작했다.
눈 굴리기처럼 이렇게 돌리다 보면 기운은 점점 커졌다.
“한 선생, 여기 있네. 마음껏 먹게.”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민규식은 상당한 양의 한약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말을 하는 사이에 가정부로 보이는 이들이 연신 뭔가를 가져와 옆에 놓고 갔다.
“…뭐가 이렇게 많습니까?”
팩에 든 각종 한약부터 고급스러운 상자에 든 단까지 수북했다.
대답은 웬 상자를 내려놓으며 고정운이 했다.
“연아 먹인다고 그동안 사둔 것들이네. 다 먹어도 되니 가격은 신경 쓰지 말고 먹어도 되네.”
그는 말을 하면서 상자를 열었는데 그곳에 족히 백 년은 넘은 산삼 두 뿌리가 아주 예쁘게 담겨 있었다.
“…감사합니다.”
신경 쓰지 말라니 더 신경이 쓰였다.
물론 산삼을 먹을 생각은 없다.
다른 것이 없다면 모르겠지만 잘 달여서 만들어놓은 것들이 있는데 굳이 욕심낼 이유가 없었다.
일단 팩에 든 한약을 들고 약간 찢어서 그대로 입에 넣었다.
“…여성 생리 불순과 임신을 위한 한약이군요.”
“…다른 걸 먹게.”
“아뇨. 그저 기운을 채우기 위한 거니까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두삼은 팩 대신 청자로 된 도자기를 손에 잡았다.
뚜껑을 열자 한약 특유의 냄새가 찐하게 올라왔다.
‘경옥고!’
공진단에 비해 저렴하지만 효능은 그에 못지않은 명약의 하나.
손가락으로 푹 떠서 입에 넣었다.
약의 기운이 입에서부터 뿜어져 나왔다. 좋은 약재로 제대로 숙성시켜서 만든 경옥고가 분명했다.
한참 퍼먹던 두삼은 기운들이 날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곤 얼른 눈을 감고 기운을 단전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임독양맥으로 순환시켰다.
명상을 매일같이 하다 보니 알게 된 거지만 자연적으로 채워지는 기운과 약효를 통해 채워지는 기운은 조금 달랐다.
약효로 채워지는 기운이 더 독하고 진했는데 명상을 통해 임독양맥을 돌리다 보면 점점 연해지면서 자신의 것과 비슷하게 됐다.
완전히 자신의 기운이 된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기운을 세밀하게 조절할 수 있느냐 없느냐였다.
가령, 기운으로 혈관을 막는 호스를 만들 때 전자는 생각대로 만들어지지만 후자의 경우는 조금 조잡하게 만들어졌다.
‘됐다.’
좋은 보약을 먹어서인지 정신없이 명상을 하자 생각보다 빨리 50퍼센트나 차올랐다.
‘완벽하게 내 것과 비슷하진 않지만 세밀한 작업을 하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겠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다시 환자, 고연아에게 가서 맥을 체크했다.
자신의 기운 30퍼센트를 먹어서인지 확실히 아까보다 맥의 움직임이 강해진 느낌이다.
옳은 방향이라고 확신을 하고 그녀의 단전에 손을 댄 후 주입했다.
‘……!’
기운이 퍼지는데 아까처럼 사라지지 않고 고연아의 몸이 가볍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자마자 얼른 회수했지만 그녀의 떨림은 한동안 지속됐다.
“후우~”
“왜 그러나?”
떨림이 지켜보는 사람에게 보일 정도는 아닌가 보다.
“환자의 식성이 까다로워서요.”
“응?”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 소파에 앉아서 좀 더 명상을 해야겠습니다.”
“…그러게.”
두삼은 고급스러운 소파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내부를 관조하며 기운을 회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