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26. 오지랖(1)
영업을 한 지 한 달이 지나자 한방의학센터도 서서히 자리를 잡아갔다. 또한 센터장인 고웅섭 역시 자신의 위치에 대해 서서히 인지하고 있었다.
“김 과장의 말은 뭔지 알겠어요. 하지만 일단 들어오는 선생님들과 함께 일을 해본 후에 인력을 더 늘려달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센터장님, 수련의들도 없는데…….”
“수련의 문제는 원장님과 얘기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가장 급한 곳은 안마과예요.”
고웅섭은 더 듣기 싫다는 듯 말을 돌려 버렸다.
회의 때마다 순환내과 과장은 인력이 부족하다고 말하는데 매일같이 센터의 매출액을 확인할 수 있는 센터장이 보기엔 그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센터장의 직권으로 그러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고분고분하지 않고 사사건건 각을 세우는 그를 위해 자신의 권한을 쓰고 싶지 않았다.
서서히 자리를 잡아간다는 건 서서히 센터 내에 라인이 생기고 있다는 얘기기도 했다.
현재 센터 내에는 세 개의 라인이 존재했다.
센터장을 중심으로 하는 라인, 내과 과장들로 이루어진 라인, 그리고 아직 어느 곳에도 붙지 않은 이들.
센터장 라인은 유하고 잘하는 사람보다 못하는 이를 잘 다독이는 고웅섭답게 실적이 부족한 과들 위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센터장 라인이 힘을 얻을 수 있는 이유는 안마과 때문이었다.
상관은 센터장뿐이라고 생각하는 이방익은 자연스럽게 센터장 라인이 되었고, 현재 이방익이 있는 안마과가 단연 실적면에선 탑이었다.
다른 부족한 과의 실적을 덮을 만큼.
“음, 괜찮습니다. 지독하게 뺀질거리던 녀석이 오전에도 틈틈이 시간을 낼 수 있게 됐거든요.”
마사지 숍을 넘긴 두삼은 오전에 있던 뇌전증 연구소 일을 퇴근 이후로 넘겨 버렸다.
“한두삼 선생이 그동안 많이 뺀질거렸나 보군요?”
“제가 방금 한 선생이라고 말을 했습니까?”
“안마과에 이 과장이랑 한 선생밖에 없지 않나요?”
“아! 그렇군요. 방금 제가 욕했다는 건 비밀입니다.”
“허허! 전문의 눈치를 보는 과장이라 볼 만하군요. 괜찮다니 다음 건으로 넘어가죠.”
고웅섭은 태블릿의 다음 페이지를 보며 말을 이었다.
“다음 건은 오늘부터 출근을 하게 되는 전문의들에 대한 얘기예요. 먼저 자리를 잡은 우리가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해서 파이팅하자 이겁니다. 그리고 이제 인원이 생겼으니 당직에 대해 얘기해 보죠.”
회의는 1시간 가까이 지속됐다.
* * *
한강대학병원 VIP병실.
두삼은 물보다 조금 더 진한 죽 그릇을 들고 고연아 옆에 앉아 주사기로 그녀에게 먹이고 있었다.
“먹고 싶지 않다는 거 알아요. 한데 어쩌겠어요. 영양제를 몸이 거부하거든요. 음식도 몸이 거부한다고요? 걱정 말아요. 그래서 몸을 마취시켜 뒀으니까. 자! 천천히 넣을게요.”
두삼은 주사기를 눌러 묽은 죽을 입에 넣어주었다.
힘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고연아를 보고 있자니 민망함에 다시 입을 열었다.
“씹고 삼킬 힘이 아직 없다고요? 걱정 말아요. 내가 있잖아요.”
두삼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목에 손을 대 목이 열리게 만들었다.
그러자 입안에 있던 음식이 식도를 타고 위로 내려갔다.
“맛없죠? 하지만 조금만 참아요. 그럼 맛난 죽을 먹을 수 있을 거예요. 보기엔 묽은 죽이지만 이 안에 하루 권장량이라 할 수 있는 영양이 모두 포함되어 있어요. 이거 어젯밤부터 달인 한약으로 끓인 거예요.”
까아아아암박!
아주 천천히 눈을 깜박이는 눈. 두삼은 그 깜박거림을 자의로 해석해서 대답했다.
“누가 끓였냐고요? 당연히 저죠. 연아 씨가 여기 있는 걸 아는 사람은 원장님이랑 저랑, 연아 씨 집안사람들밖에 없어요. 간호사들도 여긴 출입 금지예요. 그러니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요. 자! 좀 더 먹어볼까요?”
두삼은 계속해서 쓸데없는 소리를 하며 죽을 다 먹였다.
“잘했어요. 응? 주사기로 먹이는 게 마음에 안 든다고요? 걱정 마요. 항문외과에서 가져오긴 했지만 사용하기 전에 뜯은 거니까요.”
“…….”
“하하! …농담이에요. 지금처럼 잘 먹으면 며칠 후면 숟가락으로 먹여야 할 만큼 죽이 진해질 거예요. 아! 제가 숟가락질을 잘 못해요. 그러니 연아 씨가 더 적극적으로 받아먹어야 할 거예요. 아님 옆으로 흘릴 걸요. 그럼 흉하잖아요.”
조금 전에 한 말 때문인지 아님 흉하다는 말에 반응하는 건지 그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흉하지 않을 거라고요? 글쎄요. 두고 보죠. 재미없는 얘기 듣느라 피곤하죠? 이제 그만…….”
자라고 말하려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처음 보지만 낯익은 아주머니가 들어왔다.
“아! 연아 씨 어머님! 안녕하세요, 담당의인…….”
막 인사를 하려는데 덥석 안기는 고연아의 어머니.
아주머니가 안기는 건 별로 달갑지 않네요.
“…보호자분, 따님은 저기 있습니다만.”
“고마워요, 선생님.”
“흠! 말씀만으로 충분한데…….”
“우리 애를 살려주셔서 감사해요. 정말… 뭐라고 감사를 해야 할지……. 흑!”
흐느껴 우는 모습에 밀어내려고 들었던 손으로 등을 토닥여 줘야 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직은 낙관할 상황이 아니니 감사는 나중에 하시고 일단 따님과 인사를 하시죠.”
“…내 정신 좀 봐. 훌쩍! 조금 이따가 얘기해요. 연아야, 엄마야. 알아보겠니?”
까아아아암박!
“그래, 내 새끼! 엄마를 닮아 마음이 이렇게 약해서야. 엄마, 아빠를 봐서라도 마음 단단히 먹으려무나.”
빈부에 상관없이 자식에 대한 사랑은 별 차이가 없는 모양이다.
10분쯤 지켜보고 있다가 나섰다.
“이제 자야 할 시간입니다. 연아 씨, 엄마 만나서 기쁘죠? 그러니 푹 쉬고 얼른 나아요.”
그녀의 백회혈 부근을 살살 어루만지자 그녀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다른 사람이 머리 만지는 걸 싫어하던 앤데… 사람을 잘 다루시네요.”
“잠이 잘 오게 하는 치료 행위입니다.”
혹 오해를 할까 정확하게 말했다.
“그런가요? 나도 최근엔 잘 못 자는데 부탁드려야겠네요.”
“…어머닌 울화증 때문에 간의 생리 기능에 장애가 와서 그러신 겁니다.”
절대 하기 싫어서 하는 말은 아니었다.
“전에 있던 병원에서는 심리적인 요인이라고 하던데 한의사라 울화병으로 진단을 하네요?”
“양의학과 한의학의 차이랄까요. 따님 때문에 생긴 증상이라 따님이 나아야 낫겠지만 그대로 두면 위험하니 꼭 치료를 받으세요.”
“안 그래도 그러기 위해서 여기로 왔어요. 딸애와 같이 있기 위해서긴 하지만요.”
“네?”
“이곳에 입원하기로 했다고요.”
“아, 그러시군요.”
“근데 선생님, 연아가 건강해질 수 있을까요?”
“회장님께 말씀드렸지만 심리적인 분야는 저의 전문 분야가 아니라서 거식증이 완전히 나을 수 있을지는 장담을 못 드리겠네요. 다만 체력을 회복시키는 건 현재로썬 굉장히 긍정적입니다.”
“선생님이 연아를 대하는 모습을 보니 잘될 것 같아요. 잘 부탁드려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누구한테 고개를 숙인 적이 있을까 싶은 이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본 후 VIP실에서 내려왔다.
로비를 가로질러 한방센터 쪽으로 가려는데 안마팀의 이준호가 로비 가운데서 어찌할 바를 몰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얼른 다가가 물었다.
“준호 씨, 여기서 뭐 해요?”
“아! 한 선생님. 택시 기사분이 잘못 내려주셔서 헤매고 있었습니다.”
“통근 버스는 어쩌고요?”
“어제 일이 있어서 버스를 탈 수 없었어요. 아무튼 선생님을 여기서 만나다니 제가 운이 좋았네요. 하하!”
교육 받을 때 실력 때문에 의기소침해 있던 그도 점점 경험이 쌓이면서 제법 밝아졌다.
약간 앞쪽에 서서 그와 보조를 맞춰 한방센터로 향했다.
“선생님껜 항상 감사해요.”
“뭐가요?”
“알게 모르게 저에게 신경 많이 써주셨다는 거요.”
“모르게 한 것도 알아차렸어요? 다음부터 그냥 알게 해야겠네요.”
가게를 넘기고 나니 왠지 모르게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인지 농담도 술술 나왔다.
“하하! 그러셔도… 어!”
“이크! 조심!”
시력이 있을 때의 습관이었을까 그는 고개를 들어 웃느라 에스컬레이터를 보지 못했다.
두삼은 계속 그를 신경 쓰고 있었기에 얼른 그를 붙잡았다.
그를 잡고 넘어지지 않게 힘을 주는 순간이었다.
계속 돌고 있는 있던 기운 중 일부가 그의 몸에 스며들었고 그대로 그의 눈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복잡한 눈의 세계가 보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빠져나와야 했다.
“가, 감사합니다.”
“…아뇨. 에스컬레이터가 있다는 걸 알려줬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아니에요. 점자 블록이 있어 에스컬레이터가 있다는 걸 알았는데 주의를 하지 못한 제 탓이죠.”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지나면 한방의학센터였다. 센터에 들어서자 왠지 잔뜩 들뜬 분위기가 느껴졌다.
이준호가 말했다.
“오늘 따라 왠지 많이 수선스러운 것 같아요.”
“그러게요. 새로운 식구들이 와서겠죠?”
“아! 오늘 새로운 선생님들 오는 날이죠. 그래서 복도에 이렇게 사람이 많았구나.”
새로운 식구라고 하지만 다 면접 때 본 얼굴들이었다. 자연 복도를 지나다 보니 인사를 하는 이들이 엄청 많았다.
“안녕하세요, 면접관님.”
“네. 안녕하세요. 합격 축하해요.”
“면접관님도 여기서 일하세요?”
“안마과입니다.”
“안녕하세요. 엄청 무섭게 느껴졌었는데 여기서 뵙게 되니 왠지… 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친구 같다는 거죠. 친하게 지내요.”
막 병원에 온 이들이라 무척 들떠 있었다.
“휴우~ 한 선생님 인기 좋으시네요. 이제부턴 저 혼자가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참! 근데 나중에…….”
시간되면 한번 제대로 진맥을 해보고 싶다고 말하려는 찰나, 의사 가운을 입은 류현수와 이은수가 다가와 인사했다.
“형! 우리 어때요?”
류현수는 목에 걸린 명찰을 강조하며 물었다. 잘난 척하고 싶다는데 그 정도 호응은 해줘야 도리였다.
“전문의 류현수 선생님, 전문의 이은수 선생님. 첫 출근 축하합니다.”
“한두삼 선생님, 축하 인사가 너무 무성의한 거 아닙니까? 4년간의 고생이 담긴 건데요.”
“음, 그럼 4년간의 고생을 씻을 만큼 술을 사주면서 축하를 한다면 만족하겠어?”
“이은수 선생님은 술보다 맛있는 거 먹는 걸 좋아하는데요.”
“아주 괜찮은 고기 집을 아는데 만족할 수 있을까 모르겠네.”
“돼지고기는…….”
“오냐, 소고기!”
“기꺼이 감사 인사를 받죠. 하하하!”
“은수도?”
“예, 선배.”
“오케이! 후배님들, 더 축하해 주며 놀아주고 싶지만 그건 저녁으로 미루자. 이제 온 신입들과 달리 난 할 일이 있거든.”
“헉! 방금 엄청 재수 없었던 거 알아요? 마치 제가 싫어하는 누구처럼 말이죠.”
“저기 네가 싫어하는 누구 온다. 6시 30분. 혹시 과 회식 있으면 미리 메시지 보내. 간다.”
얼른 노형진을 보고 신경과에 가서 뇌전증 환자들을 치료해야 했다.
입원실로 올라갔다.
“안녕하세요, 노형진 씨.”
“…네, 선생님.”
그는 맥 빠진 사람처럼 대답했다.
당연했다. 맥 대신 살이 15㎏ 이상 빠졌으니까. 현재 굉장히 허전할 것이다.
그 허전함을 채울 수 있는 건 운동뿐이다. 그의 내부를 살피며 물었다.
“병실에만 있기 너무 갑갑했죠?”
“…네. 하루 종일 멍하니 TV만 보는 것도 못 할 짓이네요. 전엔 손에 음식이라도 있었는데.”
“아직도 뭔가 먹고 싶어요?”
“…아뇨. 하루 종일 배가 부른 상탠데요.”
거짓말이다. 아마 병원식이라 입맛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밖에 나가서 자극적인 음식을 먹으면 다시 식욕이 들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아니, 그럴 것이 분명했다.
“좋아요. 우리 이렇게 해요. 오늘 오전 마사지를 받고 나면 퇴원을 시켜줄게요. 앞으론 정해준 시간에 오기만 하면 돼요.”
“…진짜요?”
“거짓말할 이유가 없죠. 그리고 오늘 밖에 나가서 먹고 싶은 거 마음대로 먹어요.”
“하지만…….”
그는 카메라를 흘낏 보며 말했다.
“괜찮아요. 담당의가 허락하는 거예요. 촬영팀은 그저 당신을 찍기만 할 거예요. 그렇죠?”
촬영팀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그는 자신의 생각을 꺼냈다.
“마구 먹고 다시 살이 찌면 어떻게 합니까?”
“그땐 다음 단계로 넘어갈 거예요.”
“…또 다른 단계가 있어요?”
“물론이죠. 전 형진 씨의 살을 빼기 위해 많은 단계를 준비하고 있어요. 그러니 마음껏 먹어요. 단!”
‘단!’이라는 말을 하며 잠깐 말을 끊고 주위를 환기시킨 후 말했다.
“먹어보고 그때도 현재의 허전함을 채울 수 없다면 운동을 시작합시다.”
“…솔직히 아직까지 걸으며 무릎이 아픕니다.”
“땅에서 걸으면 그렇죠. 이건 퇴원 선물.”
플라스틱 카드 한 장을 건넸다.
“핏 피트니스 센터?”
“병원에서 10분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곳인데 헬스, 요가, 복싱, 크로스 핏 등 다할 수 있죠. 물론 수영장도 있고요. 일단은 수영장에서 걷는 연습부터 하세요. 아침에 와서 마사지를 받고 수영장에 가서 걷기 운동을 한 후 다시 오후에 와서 마시지를 받는 걸로 스케줄을 짭시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좋아요. 그럼 마시지 후 퇴원하세요. 내일부터 진료는 오전 마사지를 받을 때 같이하기로 하죠. 아! 연락이 왔네요. 그럼 전 이만.”
병실을 나오는데 진동으로 해둔 스마트폰이 울렸다.
[수술실로 오게.]
두삼은 서둘러 본관을 향해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