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25. 다이어트(3)
지방 덩어리인지 고기인지 헷갈리는 요즘 삼겹살.
그 삼겹살을 보면 인체가 보인다.
지방층도 여러 개다.
피부 바로 밑에 있는 지방층은 절대 제거해서는 안 되는 지방층이고 지방 흡입을 통해 제거하는 것이 두 번째, 세 번째 지방층이다.
지방 흡입이나 다른 시술을 하지 않고 지방을 제거하기 위해선, 운동을 통해 태우거나 마사지와 같이 직접 충격을 줘 분해시키는 방법이 있었다.
가장 좋은 건 누가 뭐라고 해도 운동이 최고다.
하지만 살을 빼야겠다는 의지가 없던 사람이 운동만으로 살을 뺀다?
그럴 수 있었다면 노형진은 이곳에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운동을 하지 않고 살이 빠지는 경우에도 문제는 생긴다. 지방이 빠지면서 근육마저 빠지고 그 자리를 다시 지방이 차지하게 되는 요요현상을 겪을 게 분명했다.
즉, 살을 뺄 땐 적당한 운동, 마사지, 거기에 2단계 시술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했고, 살을 뺀 후엔 스스로 운동을 할 맛을 나게 해줘야 했다.
‘뜻대로 따라줄지는 미지수지만…….’
안마실로 옮겨 침상에 눕힌 후 2단계에 앞서 잠깐 생각에 빠져 있던 두삼은 상념을 털어냈다.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2단계 시술은 위를 제외한 모든 신체에서 에너지를 과소모하게 만드는 겁니다.”
“에너지를 과소모하게 만든다?”
엄 PD가 물었다.
“예를 든다면 많이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사람들이 있죠. 그 사람들의 경우 몸에 필요 이상의 음식이 들어오면 에너지로 발산을 바로 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살이 잘 찌지 않죠.”
“인위적으로 그렇게 만드는 게 가능하다는 겁니까?”
“가능하죠. 그게 한방 치료의 핵심입니다. 하지만 조절을 해야 합니다. 지금 이 상태에서 살이 빠져 버리면 늘어진 피부는 결국 수술을 해야 할 테니까요. 물론 제 능력이 닿지 못할 정도로 늘어진 피부라면 당연히 수술을 권할 생각이고요.”
엄 PD가 이해했다는 듯 뒤로 물러난 후 노형진을 향해 말했다.
“방금 한 얘기 들었죠?”
“네.”
“아무리 여러 가지 시술을 한다고 해도 늘어지는 피부를 최소화하기 위해 결국 필요한 건 뭐다?”
“…그, 글쎄요?”
“운동입니다. 지금 당장 운동을 시작하라고 말하진 않겠습니다. 관절에 무리가 갈 테니까요. 하지만 서서히 살이 빠지기 시작하면 운동을 해야 합니다. 살이 늘어진 떡처럼 축축 처지길 바라는 건 아니겠죠?”
“예!”
상상을 했는지 그의 대답은 남달랐다.
“제 말대로만 하면 수술을 최소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니 철저히 제 말을 들으세요. 내일부터 한동안 입원을 해야 할 겁니다.”
“…네, 선생님.”
“그럼 시작하죠.”
일단은 현재의 몸 상태에서 10퍼센트 정도만 활성화시킬 생각이었다.
‘아니, 5퍼센트만.’
아무래도 처음 하는 일이다 보니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시술을 하고 지방을 자극하기 위한 마사지를 했다. 내일부터는 안마사들이 할 일이다.
“…으, …아.”
마사지를 하는 동안 노형진은 신음 소리를 냈다.
“많이 아프죠?”
“…괘, 괜찮습니다.”
“다행이네요. 아프다고 했으면 그동안 운동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
환자라고 해도 달콤한 말만 해줄 생각은 없다.
받아들이냐 마냐는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몸에 좋은 약이 쓰듯이 건강과 관련된 좋은 말 역시 쓴 법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 아침에 입원하세요. 12시 30분쯤 다시 뵐게요.”
“…네,”
“촬영 끝이죠?”
“네. 충분히 찍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전 이만 일이 있어서 가볼게요.”
촬영을 한다고 진료 시간을 줄였음에도 벌써 7시가 넘었다.
얼른 옷을 갈아입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오토바이가 망가진 후 새로운 오토바이를 사는 대신 차로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솔직히 그날을 생각하면 두 번 다시 오토바이는 타지 못할 것 같았다.
지하 3층 주차장에 내려 입구로 나가려는데 낯익은 두 사람이 입구 앞에 서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임동환과 주해인. 두 사람은 막 밖으로 나오는 두삼을 보고 살짝 당황한 표정이다.
그에 반해 두삼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선배, 해인이랑 저녁 데이트?”
“…으응, 이제 퇴근?”
“네. 촬영 때문에 조금 늦었네요.”
“방송한다는 얘긴 들었다. 이방익 선생님과 같은 과를 하더니, 운이 좋구나.”
이방익이라는 배경 때문에 자신이 방송에 출연하게 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뭐 굳이 설명할 필욘 없지.’
“그렇게 됐네요. 전 급해서 이만.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해인이도.”
껄끄러운 만남을 길게 이어가 봐야 서로 불편할 것 같아 서둘러 마무리를 지으려 했다.
한데 주해인 앞이라 뭔가 잘난 척할 거리가 필요했을까? 임동환이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
“겨울이라 오토바이를 주차장에 댔나 보네? 한겨울에 오토바이라니… 이제 책임질 환자들도 있는데 몸조심해라.”
오토바이 타는 건 어떻게 알았지?
“…아, 그건 그렇죠. 그래서 겸사겸사 차 하나 구했어요.”
“…그래? 하기는 이제 한강대학병원 소속 의산데 차가 낫지. 차는 어디다가 주차했어?”
“직원 전용 주차장이요.”
주차장의 좌측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도 그쪽에 주차했는데 같이 움직이자.”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학교 다닐 때도 잘난 척한다고 해서 싫어하는 애들이 꽤 있었는데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류현수였다.
‘이 선배는 여전하구나.’
두삼도 어릴 때 할아버지 덕분에 잘난 척하며 산 적이 있었기에 이해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때를 생각하면 낯이 뜨거웠는데 임동환은 아직까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삐익! 삑!
“내 차는 저기 있네.”
제법 비싼 외제차가 전조등을 깜박이며 ‘네 차는 어디 있니?’라고 묻는 듯했다.
“제 차는 형 차 옆에 있네요.”
그의 차를 기준으로 좌측엔 국산 소형차, 오른쪽엔 두삼의 차가 서 있었다.
“세금도 싸고, 통행료에 주차비도 절반이니 혼자 끌고 다니기엔 좋지. 한데 아무렴 의산데… 렌트를 해서 중형차 정도 몰아도 될 것 같은데.”
그는 당연하게 소형차를 보고 두삼의 차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렌트 차량용 넘버는 ‘하허허’로 시작하지만 리스는 일반 차량 번호을 썼다.
“아, 네. 그럼 내일 봬요.”
얼른 작별 인사를 하고 자신의 차로 가서 문을 열고 탔다.
“어, 그게……!”
뭔가 말하는 것 같았지만 무시하고 시동을 켰다.
구르르르르릉!~ 시동 음이 그의 말을 잡아먹었다.
그동안 조금 부담스러웠던 차의 시동 음이 오늘처럼 고마운 적이 없었다.
끼이익!
빠르게 차를 빼서 출구를 향해 달렸다.
백미러로 흘낏 보니 멍하니 서서 쳐다보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왜 쪽팔림은 내 몫인지…….”
최대한 빨리 지하 주차장을 벗어났다.
* * *
“할아버지는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일을 하실 수 있던 거지?”
뇌전증 연구소에서 나와 점심을 먹으며 중얼거렸다.
자고 일어나 기운을 돌리는 시간을 제외하고 잘 때까지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멍하니 생각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나마 가장 한가한 시간이 식사 시간이었다.
물론 점심시간은 얼른 먹고 안마과로 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여유롭다고 할 수 없었다.
그저 먹어서 에너지를 채우는 시간이랄까.
물론 자신이 이만큼 바쁘다고 자랑할 수준은 아니다.
아마 바쁜 외과의 의사들이 듣는다면 행복에 겨운 소리한다고 할 것이다.
다른 대학에 비해 의사 한 명당 환자 비율이 제일 적다고 평가받는 한강대학병원이지만 그렇다고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담당 과장이 이틀 만에 퇴근하는 걸 기뻐할 만큼 바빴다. 게다가 가끔 스쳐 지나가는 수련의를 볼 땐 절로 손을 들어 마사지를 해주고픈 마음이 들 정도였다.
한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 할아버지는 지금의 자신보다 더 많은 환자들을 돌보고 치료하셨다.
새벽부터 일어나 입원한 환자들을 돌보셨고, 업무 시간엔 새로운 환자들을 보고, 밤에 또다시 입원 환자들을 돌보셨다.
어디서 그런 체력이 나오셨던 건지 모르겠다.
“아직도 여기서 먹어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웬일로 평범한 여자처럼 잔뜩 꾸민 민청하가 서 있었다.
“이제 병원 소속 한의사니 직원 식당에 가서 먹어도 되지 않아요?”
“내려가기 귀찮아서요. 근데 웬일로 예쁘게 차려입었네요? 데이트?”
“…그동안 엉망인 모습을 너무 많이 보여줬나 보네요. 이게 평소 모습이거든요!”
“아, 네네.”
“하아~ 하긴 믿을 수가 없겠죠. 하지만 이제부터 이 모습에 익숙해질 거예요. 참! 선물 줘요.”
민청하는 길고 하얀 손을 내밀었다.
웬 뜬금없는 선물.
“…무슨?”
“서운하네요. 5년의 개고생 끝에 본 시험 결과가 어제 발표됐는데 못 들었어요?”
“아! 아아! 축하해요! 이제 당당히 전문의네요.”
“헤헤! 감사해요.”
“선물 당연히 줘야겠군요. 뭐가 갖고 싶어요?”
가끔 식당에서만 만나는 사이지만 항상 친근하게 대해줘서 개인적으로 고마웠다.
“에이~ 선물 얘긴 농담이에요. 합격한 거 자랑하려고 일부러 말한 거예요. 뭐, 정 해주고 싶다면 근무할 때 밥이나 가끔 사줘요.”
아무리 봐도 말하는 게 참 예쁜 여자다.
“하하! 그럴게요. 근데 바로 근무하는 거예요?”
“내가 미쳤어요? 전문의라고 해도 앞으로 몇 년간은 죽었다 생각하고 근무해야 하는데요. 이때가 아니면 언제 놀겠어요. 정식 출근일인 2월 말까진 해외 여행도 하고 그동안 못 한 것도 해보려고요.”
“하긴 지금이 적기겠네요. 조심히 잘 다녀와요. 그때 점심 살게요.”
“여기서요?”
“가고 싶은 곳 있음 말해요. 거하게 대접할게요.”
“오케이! 한동안 밥 걱정은 없겠네요.”
그녀와 어디로 여행을 갈 건지에 대해 더 이야기를 나누고 일어났다. 이제 노형진을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그가 입원한 곳은 2인실이었지만 아직 입원 환자가 많은 건 아니었기에 혼자 쓰고 있었다.
오늘은 조연출과 촬영팀 1명만 나와 촬영 중이었다.
“어제 집에 가서 잘 쉬었어요?”
“…네.”
“점심은요?”
“…조금 전에 병원식으로 먹었어요.”
왠지 우울한 얼굴 표정이 잘 쉰 것 같지 않았다.
“근데 표정이 왜 그래요? 어디 보자. 어젠 얼마나 먹었는지 볼까요?”
그의 팔목 맥을 잡았다.
“…배고프지 않아서 거의 안 먹었어요.”
“음, 그러네요. 점심도 조금밖에 안 먹었네요.”
위엔 아주 약간의 음식만 담겨 있었다. 그마저도 거의 소화가 다 된 상태였다.
“혹시 배고프지 않아요?”
“…전혀요. 조금만 먹어도 배가 아프다는 느낌이 들어서…….”
모든 게 정상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어제 시술해 둔 곳들을 체크했다.
노형진이 쭈뼛거리다 말했다.
“근데… 선생님.”
“할 말 있으면 편하게 해요.”
“…음식 맛이 느껴지지 않아요. 그리고 먹지 않았는데도 배가 계속 부른 상태고요.”
“당연하죠. 어제 했던 1단계 시술이 그 두 가지예요.”
“…아!”
“설마, 마음껏 먹으면서 다이어트를 할 거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죠?”
“…그야 그렇습니다만…….”
“너무 안 먹으면 쓰러질 수 있으니 병원에서 주는 밥은 꼭 다 드세요. 그리고 퇴원할 땐 식단표를 줄 테니 아무리 맛없어도 먹고요.”
징징거림을 받아줄 생각은 없었다. 살을 빼려면 적응을 해야 했다.
“자! 몸무게를 재볼까요?”
병실에 올 때 가지고 온 전자식 체중계를 바닥에 놓았다. 노형진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체중계에 섰다.
숨 가쁘게 올라가던 체중계의 숫자는 192에서 멈췄다. 하루 만에 3㎏이 줄었다.
현재 몸무게에 비하면 많이 빠진 건 아니지만 활성화 속도를 높일 필요는 없었다.
너무 한꺼번에 빠지면 건강이 위험할 수 있었다.
‘현재는 5퍼센트가 적당하겠어.’
결정을 내린 두삼은 옆에 있는 천 간호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아침, 저녁으로 피부 탄력 마사지를 받게 하고요. 식후엔 살 빼는 마사지를 받게 하세요.”
“알겠습니다, 선생님.”
“그리고 하루 성인 권장량의 1.5배로 식단 조정 해주고요. 노형진 씨는 앉아서 할 일이 없을 때 지금 알려주는 동작을 반복해요. 틈틈이 계속하세요.”
손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하는 동작. 맨손으로 아령을 하는 동작. 앉아서 다리를 들었다 내리는 동작처럼 특별할 것 없는 동작이었다.
모든 동작을 알려줬을 때 오랜만에 민규식에서 전화가 왔다. 병실을 나오며 받았다.
“예, 원장님.”
-오늘 5시쯤 시간이 되나?
“손님이 없으면요.”
-예약은 없다는 얘기군. 그럼 그때 한방 센터 입구에서 보세나.
“무슨 일입니까? 오래 걸릴 일이라면 가게에 연락을 해둬야 해서요.”
-해두게. 이제 슬슬 새로운 환자를 맡을 때도 되지 않았나. 그럼 그때 보세나.
새로운 환자를 맡기겠다는 소리였다.
급하지 않은 환자라면 나중에 하면 안 되겠느냐는 말을 하려다 하란을 떠올리곤 알겠다고 말했다.
“하아~ 못 오를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아야 해. 자꾸 오르고 싶어지잖아.”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곤 진료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