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24.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면 돌려주는 게 예의다(1)
이방익이 연예계 인물들 사이에서 발이 넓다는 걸 알게 된 이틀이었다.
배우, 가수, 개그맨, 아나운서, 운동선수 등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안마과에 찾아왔다.
그리고 그들이 다녀간 후 일주일 정도가 지나자 안마과의 손님이 서서히 늘었다.
아직까지 안마가 치료라는 인식이 없어서인지 치료를 위해 오는 손님은 드물었고 대부분이 다이어트 때문에 왔다.
“허벅지의 살을 조금만 더 뺐으면 하는데 굶어도 잘 되지 않아요.”
원피스에 줄무늬 스타킹을 신은 아가씨가 자신의 두껍다(?)는 허벅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도대체 어디가 두껍다는 건지…….’
그녀의 허벅지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얇은 발목에 늘씬한 종아리, 거기에 적당한 두께의 허벅지는 어느 남자가 보더라도 잘 빠졌다고 엄지를 치켜세울 정도였다.
한데 여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허벅지 두께에 불만이 있어 찾아온 이에게 ‘당신의 허벅지는 이미 날씬한 허벅지입니다!’라고 말해봐야 좋은 소리는 못 듣는다.
그녀가 원하는 건 스스로의 만족이었다.
“잠깐 진맥을 해볼게요.”
손목을 잡고 기를 보냈다.
‘음, 몸 관리는 꽤 잘했네.’
허벅지로 기를 보내면서 몸의 상태도 간단히 체크를 했다.
기가 무한하지 않았기에 찾아온 손님마다 몸 구석구석을 살펴볼 순 없었다.
나머지는 맥의 상태로 짐작만 할 뿐이다.
‘타고난 근육이 많구나. 굶는다고 빠질 허벅지가 아니야.’
물론 몸이 망가질 때까지 굶으면 빠지겠지만 그 정도까지 몸을 혹사시키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 빼길 원하시죠?”
“선생님께 상담을 받은 언니 말로는 몸의 밸런스도 잘 보신다면서요? 저도 보시고 선생님이 결정해 주세요. 그래서 일부러 달라붙는 옷을 입고 왔는데.”
그런 소문은 또 언제 퍼진 건지.
언니라는 이가 지난 주 왔던 연예인인가?
이 추운 날 입기엔 조금 과한 의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의도가 있었구나.
“…제 눈이 정확하다곤 할 순 없는데…….”
“봐주세요.”
“원한다면 봐드려야죠. 잠시 점퍼를 벗고 일어서서 천천히 돌아보시겠어요?”
“보기 좋게 원피스를 살짝 더 올릴까요?”
너무 적극적이다.
“…조금만요.”
조금만이라고!
아무리 스타킹을 신고 있다고 해도 끝선까지 올리면 시선을 두기가 애매했다.
가끔 가슴을 성형하는 의사들은 수술할 때 무슨 생각을 할까 싶다.
시간이 지나면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직까진 의사가 아닌 남자의 시선으로 보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럴 때 혹시라도 옆에 서 있는 천 간호사와 눈이 마주치면 참 민망하다.
최대한 담백한 시선으로 미인대회 심사위원이 된 듯이 몸매를 천천히 살폈다.
“뒤돌아서 걸어보세요.”
가만히 서 있을 때는 모르지만 걷다 보면 단점이 보이기도 했다.
이번에도 그 경우였다.
걸을 때 엉덩이 밑살이 살짝 도드라져 보였는데 허벅지 살이 쪄서가 아니라 엉덩이가 살짝 쳐져 있었다.
“됐습니다. 걸을 때 엉덩이 밑살이 살짝 접히는데 그것만 없어질 정도로 케어를 받으면 될 것 같아요.”
“얼마나 걸릴까요? 다다음주에 친구들과 워터 파크에 가기로 했거든요.”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걸릴 겁니다. 혹시 케어를 받아야 할 곳이 또 있습니까?”
“아랫배도 조금.”
“알겠습니다.”
위층 안마실에 전달될 진료 차트를 작성하는데 여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안마는 선생님이 해주시는 건가요?”
“경우에 따라선 합니다. 물론 원하지 않으시면 안마 치료실로 바로 가셔도 됩니다.”
“저의 경우는 어떤데요? 언니가 꼭 선생님께 받으라고 해서요.”
그놈의 언니 쓸데없는 소리 많이도 했다.
“하는 편이 좋습니다. 다만 위치가…….”
“해주세요. 선생님의 시술을 시술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오지 않았을 거예요.”
오히려 자신보다 여자 손님의 마인드가 더 쿨했다.
‘곧 의사의 마인드가 되겠지.’
현재처럼 진행된다면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다.
살을 빼는 시술은 여러 가지가 있다.
지방흡입수술, 지방분해주사, 냉각지방분해술 따위들로 지방흡입수술은 빨대 같은 기구를 이용 지방층에 삽입해서 빼내는 것이고, 지방분해주사는 지방 분해에 이용되는 여러 약물, SL, HPL, PPC, 카복시 등을 투입해서 지방을 분해하는 것이다.
한데 이러한 지방 제거 시술들은 다 부작용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는 점에서 안마를 통한 살 빼기와는 차이가 있었다.
‘기가 온전히 차 있을 날이 없네.’
두삼의 경우 지압과 함께 효과를 높이기 위해 기를 조금씩 이용해 지방을 분해했다.
하지 않아도 되는데 조금 더 빨리 치료를 마치기 위해서였다.
분해된 지방은 혈액으로 들어가 배출되는데 운동을 하지 않으면 다시 쌓일 수 있다는 부작용도 있어서 때에 따라선 신진대사를 빠르게 하는 방법도 병행했다.
물론 이번 환자의 경우는 그렇게까지는 필요 없었다.
엉밑살의 지방을 일부-한꺼번에 제거하는 우를 범하진 않았다-제거하고 허벅지의 근육을 풀어주는 것으로 마무리 했다.
“밖에 가셔서 예약 정하신 후 2층으로 가시면 됩니다. 천 간호사님.”
“…수고하셨어요. 언니 말씀처럼 정말 잘하시네요. 다른 곳에서는 많이 아프던데.”
운동의 고통이 싫어 시술을 받지만 양의학적 시술이든, 한의학적 시술이든 역시 아프다.
“하하! 제가 좀 합니다. 다만 혹 동생분이 계시면 제가 잘한다는 건 비밀로 해주세요.”
“어머, 왜요?”
“접수 데스크에서 예약 시간을 잡아보면 아시겠지만 점점 바빠지네요.”
“제 시술이 다 끝나면 말할게요. 그럼 되는 거죠? 호호!”
똑똑하기도 하셔라.
손님이 나가고 천 간호사를 봤다.
다음 손님을 들여보내라는 신호였다. 한데 고맙게도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없다는 뜻이다.
“천 간호사님도 잠시 쉬세요.”
“네, 선생님.”
잠시 숨이나 돌릴까 했는데 쉬는 꼴을 못 보겠다는 건지 류현수가 들어왔다.
“이야~ 여긴 천국이네, 천국. 우리 과는 노인분들이 대부분인데. 방금 나간 여성분 무슨 일로 온 거예요?”
“…또 왔냐? 2차 시험 준비는 안 하냐?”
류현수는 1차 합격 후 병원에 가끔 나왔다.
“머리 식힐 겸, 병원 분위기도 익힐 겸 왔어요.”
“그럼 너희 과로 가지 왜 여기로 와?”
“형도 참 섭섭하게. 근데 방금 그 여성분 막 주무른 거예요?”
“…안마거든.”
“업어 치나 메어치나. 형, 나 안마과 하면 안 될까요? 잘할 자신 있는데.”
“은수한테 그대로 전해줄게. 네가 여성들의 몸을 주무르고 싶어 한다고 말이야.”
“안마죠.”
“사심이 들어가면 추행이다.”
“…농담이에요, 농담. 근데 비만 클리닉이라고 해서 정말 심각한 사람들이 오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요?”
“나도 처음엔 그럴 줄 알았는데 이 선생님께 들으니 고도비만 환자들의 경우는 의외로 많지 않대.”
“아하!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류현수는 손가락을 튕기며 아는 척했다.
“날씬해지고 싶다는 욕망은 결국 타인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본능이죠. 칭찬이 고래를 춤추게 하듯이 인정받은 이들이 더욱 예뻐지고 싶어 더 자주 찾는다는 말이죠? 고도비만인 이들은 타인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본능보단 먹고 싶다는 본능이 더 큰 거고요.”
“일반화할 순 없지만 지금까진 그런 것 같다. 나도 쉬어야 하니까 할 말 있음 얼른 하고 가.”
“재미있는 소문 얘기해 주려고 왔는데 서운하네요. 듣기 싫음 말고요.”
“응. 말아.”
류현수는 대학 다닐 때도 저런 식으로 말하곤 했었다.
대부분 누가 누구와 사귄다는 얘기였기에 들을 가치는 없었다.
“에이~ 형과 나 사이에 비밀이 있으면 안 되잖아요. 제가 특별히 말해 드리죠.”
넉살이 좋은 건지 남의 말을 귓등으로 듣는 건지 류현수는 두삼의 말을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형, 혹시 본관 쪽 정체 불명의 마스크맨에 대해 들어봤어요?”
달갑지 않은 얘기다.
“…그런 얘긴 어디서 들었냐?”
“어디서 듣긴요, 본관 간호사들에게 들었죠. 근데 말투를 보니 형도 알고 있었나 보네요?”
“병원에서 마스크 쓰고 다니는 사람이 한둘이냐? 게다가 미세먼지 때문에 쓰고 다니는 사람도 많고. 그런 헛소문을 듣고 다니다니 할 일도 없다.”
“소문을 듣고 분석해 본 결과 헛소문으로 치부할게 아니라니까요.”
‘전문의 2차 시험 준비하는 놈이 그런 소문을 분석할 시간도 있고 잘한다.’
두삼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류현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전에 강변북로에서 큰 사고가 났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났다더군요. 척 보는 것만으로 환자의 상태를 알아맞히고, 손을 가볍게 대는 것만으로도 피가 멈추고 바이탈이 안정을 되찾는대요. 이후로 소아과, 혈관내과, 신경과에 자주 나타나 환자들을 치료한다는데.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넌 그런 허황된 말을 믿어? 그런 게 실제로 가능하다고 보냐?”
스스로를 부인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마스크맨에 대한 얘기는 멈추고 싶었다.
“형도 믿어지지 않죠? 저도 처음엔 그랬어요. 손만 댔는데 피가 멈춘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본관에서 활약했다고 하니 당연히 서양 의학을 배운 의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요. 근데 마스크맨을 한의사라고 생각하면요?”
“…소설 쓰냐?”
“소설이 아니라니까요. 근거가 있어요.”
“근거씩이나?”
류현수는 호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잘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짠! 이게 바로 근거입니다. 한번 봐보세요.”
그는 잘 펴서 두삼의 앞에 펼쳐 보였다.
종이에 적힌 건 ‘침을 통한 전신, 혹은 부분 마취에 대한 논의 일정’에 관한 공고문의 초안이었다.
양의학과 한의학의 협업은 이미 민규식과 협의가 된 얘기였다.
물론 직접 가르치는 건 힘들었다. 전문의 과정도 겪지 않은 한의사가 수십 년 경력의 교수들을 가르친다? 그건 병원에도, 두삼에게도, 교수에게도 좋지 않았다.
한의학계는 물론 양의학계에서도 이상한 논리를 갖다 붙여서 덮으려고 난리가 날 것이다.
마취에 대한 교육이 아닌 ‘논의’라고 한 이유도 비슷한 맥락이다.
아무튼 그래서 시침 부위에 관한 자료만 넘겼다.
‘얘는… 이걸 어디서 구한 거야?’
일시가 정확하게 적혀 있지 않은 것을 보아 정식으로 작성된 공고문도 아니었다.
“놀랍죠? 시침을 통한 전신 마취와 부분 마취. 병원에서 이런 걸 준비한다는 건 이미 그러한 실력자가 존재한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전 그 실력자가 마스크맨이 아닐까 싶어요.”
상상력으로 그럴싸하게 갖다 붙인 추리임에도 결과적으로는 사실이었다.
물론 인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말이다.
“억측이 심하네. 니가 싫어하는 임동환 선배가 주도하는 건지도 모르지.”
“거기서 그 인간, 아니, 그 선배 얘기가 왜 나와요?”
“중국에서 유학하고 와서 그 침술을 알고 있다는 소문이던데.”
“소문은 소문일 뿐이죠.”
“…마스크맨 소문은 믿고 동환 선배 소문은 그냥 헛소문일 뿐이다? 이기적인 상상력에 경의를 표한다.”
“전자는 재미있지만 후자는 기분이 나쁘잖아요. 그 선배 얘긴 그만하죠. 기분 풀러 왔는데 기분만 상하겠어요. 그나저나 이 공문 사실일까요? 솔직히 청소하는 아주머니 쓰레기통에서 구한 거라 확신을 못 하겠어요.”
“뭘 하고 다니기에… 휴우~ 말을 말자.”
“지나는 길에 우연히 눈에 보여서 살펴본 것뿐이에요. 어쨌든 형의 생각은 어떠냐고요?”
“사실일 거야. 면접관 할 때 얼핏 들은 것 같아. 근데 그게 중요하냐?”
“중요하죠. 솔직히 우리나라에서는 흔한 케이스가 아니잖아요. 무엇보다도 만약 침으로 마취를 완벽하게 할 수 있다면 어디를 가든 굶는 일은 없을 거 아닙니까.”
“완벽하다면 그렇긴 하지.”
비마취 전문의로 인한 치명적인 의료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한의학을 통한 마취가 아예 부작용이 없는 것도, 마취통증학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일부 대안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한방마취통증과가 생길지도.
“아! 근데 형도 중국에서 마취를 배웠잖아요?”
“그랬지.”
“나중에 노하우 좀 가르쳐 주세요.”
“이미 가르쳐 줬잖아.”
“에? 언제요?”
“면접 할 때 한 말을 그새 잊어먹었냐?”
“집중하라는 거요?”
“그래. 어차피 시침 자리는 알려주지 않겠어? 그럼 남는 건 뭐다?”
“누가 더 정확하게 찌르느냐, 겠죠.”
“맞아.”
실수를 하더라도 최대한 안전한 혈 자리를 선정해 전신 마취와 부분 마취 시침 자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완벽하다고 장담할 순 없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천 간호사가 고개를 들이밀며 말했다.
“허리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 대기 중이세요.”
얼마 만에 들어온 일반 환자인가.
“알았어요. 현수야, 이만 가라. 시험 끝나면 한 잔 살게.”
“그 날은 죽을 때까지 마실 테니 지갑 두둑이 채워두세요.”
류현수가 나가고 환자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