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누구나 사랑을 한다
2019.03.22.
……그로부터 약 6개월 후.
“2018 KBC 연기대상, 대상. 수상자는…….”
작년 대상 수상자의 자격으로 시상을 맡은, 여자 원로배우가 카드에 적힌 이름을 보며 씩 미소 지었다.
“……<마이 시크릿 맨> 현민혁 씨!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펑! 축포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카메라에 비친 훤칠한 남자는 제 귀를 의심하는 듯 멍하니 입을 벌렸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떨구고 제 뒷목을 감싸 쥐었다.
금세 빨갛게 충혈이 된 눈가에선 이미 뜨거운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수상자 현민혁 씨는 드라마 <마이 시크릿 맨>에서 미스터리하면서도 매력적인 검사 유석준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현민혁 신드롬이라 일컬어질 만큼의 엄청난 반응을 이끌어냈습니다. 다시 한 번,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성우의 내레이션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민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로 향했다.
주최 측으로부터 꽃다발과 트로피를 거머쥔 그가 마이크 앞에서 비로소 환하게 웃어보였다.
“어……. 감사드립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제게 이런 영광스러운 날이 오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었는데…… 솔직히 아직은 제가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게 꿈만 같고, 잘 믿기지가 않는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우선 가장 먼저, 저희 드라마 <마이 시크릿 맨>을 처음부터 끝까지 잘 이끌어주신 장일훈 감독님, 박혜정 작가님. 그 외 많은 배우 분들과 스태프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덕분에 촬영도 행복하게 잘 마치고, 저에게는 너무나도 과분한 이런 상까지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작게 미소 지은 민혁이 작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는 침착한 목소리로 수상 소감을 이어나갔다.
“사실 작년 말부터 지금까지, 올해는 제게 굉장히 다사다난한 해였습니다. 배우 현민혁에게뿐만 아니라, ‘사람’ 현민혁에게도요. 그런 상황을, 예전의 저 같았다면 사실 쉽게 버틸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올해는 저의 곁을 지켜준 소중한 분들 덕분에 그 모든 것들을 잘 극복할 수 있었고, 그래서 제가 지금 이 자리에 무사히 서 있게 된 것 같아요. 소속사 장 대표님, 매니저 성환이 형, 삼촌, 이모님, 재하, 우리 민영이 지원이와 에덴 식구들을 포함한 그 외 많은 분들……. 지금도 저를 멀리서 지켜보고 계실 그 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 너무너무 감사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꼭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말하는 사이 그가 숨을 한 번 삼켰다.
“……이 자리에 서니까, 솔직히 제 머릿속에 가장 크게 떠오르는 분이 한 분 계십니다. 아까 전, 이 자리에서 공로상의 영예를 안기도 하셨던 분인데요.”
살짝 울컥한 듯, 잠시 망설이던 민혁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이제껏 제 입으로, 공개적으로 말씀드린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올해 초 영원한 별이 되신 故 채수진 선생님은 사실, 살아생전 제게 친어머니와도 같았던 분입니다. 철부지 같았던 저를 누구보다 어여쁘게 봐주셨고, 혹시나 엇나가기라도 할까 늘 노심초사하며 지켜보셨지요. 표현이 서툴고 무뚝뚝해서…… 제 맘을 생전에 많이 표현해드리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진한 아쉬움으로 남는데요. 혹시 하늘나라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고 계신다면, 이젠 더 이상 걱정하지 마시라고…… 그 곳에서 부디 잘 지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엄마, 잠시나마 엄마의 아들로 살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너무너무, 영광이었습니다.
그리 말하는 말끝에 울먹임이 섞이며 그의 눈엔 다시금 눈물이 맺혔다.
자리에 있는 모두는 그 광경을 뭉클하게 지켜보았다.
“……아직 이런 큰 상을 받기에는 제가 너무 부족하고 미흡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좀 더 열심히, 충실하게 연기에 매진하라는 뜻으로 알아듣고 정진하며 노력하겠습니다. 결단코 이 상에 부끄럽지 않을 배우가 되겠습니다. 꼭 지켜봐 주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까스로 눈물을 삼켜낸 민혁이 기쁘게 웃었다.
반짝 빛나는 얼굴에 무한한 행복이 가득했다.
“올해, 드디어 저희 아기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저의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 지금 몇 달 째 고생 아닌 고생을 하고 있는데요. 아마, 지금 안 자고 TV로 이 장면을 보고 있을 거예요. 딴 사람 얘기는 다 하면서 왜 자기 얘기는 안 하나 하고 눈에 불을 켜고 있을 것 같은데…….”
말을 하던 그가 돌연 수줍게 웃자, 객석에서 웃음과 함께 부러움 섞인 환호가 터졌다.
하지만 그는 이내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예원아, 나 같은 사람 곁에 있어줘서 정말로 고마워. 반짝반짝 빛나는 너를 만나고 내 삶은 늘 찬란 그 자체였어. 진심으로 사랑한다.”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모든 말을 끝마친 민혁이 다시 한 번 수줍게 웃고는 인사했다.
그리고 이 날, 그의 수상소감은 KBC 연기대상의 역사에 길이길이 남게 되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파워 사랑꾼의 수상소감으로.
.
.
.
다음 날. 2019년 1월 1일, 오전.
故 채수진 이라는 이름이 적힌 위패와 유골함 앞으로, ‘2018 KBC 연기대상 공로상’이라 적혀 있는 트로피와 작은 리스가 조심스레 놓였다.
“……어머니, 저희 왔어요. 너무 오랜만이죠?”
“…….”
“어제, 어머니 상 받으셨어요. 그래서 저희가 직접 알려드리려고 이렇게 왔어요.”
깔끔하게 차려 입은 민혁과 예원은 사진 속에서 밝게 웃고 있는 수진을 향해 화답하듯 웃었다.
“저희, 이제 진짜 부부예요. 진짜 부부가 되어서, 다시 어머님 앞에 왔어요.”
“…….”
“그때 거짓말해서 죄송했어요. 그래도, 이번엔 둘이 아니라 셋이 돼서 왔으니까……. 얄미워도 봐주실 거죠?”
예원의 손이 그새 꽤나 불룩해진 배를 쓰다듬었다.
임신 초 입덧으로 고생에 고생을 하고, 이래가지고 언제 열 달을 채우나 막막해하기만 하던 그녀도 이제 어느덧 임신 중후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어쩌면, 수진은 일찌감치 다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모든 것을 다 알고도 그렇게 넘겨주었는지도.
그리고 그녀라면, 일이 다 이렇게 될 줄 그때 이미 예상했었는지도 몰랐다.
너무 인자하고 현명해서, 가끔씩은 현자의 눈 같은 걸 가지고 계신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곤 했던 수진이었으니까.
“……기분이 좀 이상하다. 그쵸?”
“……그러게.”
“좋은 곳에서, 잘 계시겠죠?”
“……그럼. 우리보다 더 잘 지내고 계실 거야.”
팔을 뻗은 그가 예원에게 어깨를 감싸 안았고, 예원은 그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그 상태 그대로, 그들은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 했다.
“……이제, 그만 갈까?”
“……네. 이제 다른 어머님께도 가야죠.”
다른 어머님.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조금 이상하게 들리기도 할 그것은, 아주 오래 전에 돌아가신, 그의 친어머니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처음이네. 엄마한테 너 소개시켜주는 거.”
“그러게요……. 얼른 가요. 결혼 한 지가 언젠데 며느리 구경도 안 시켜준다고, 하늘에서 엄청 뭐라 하시는 거 아닌가 몰라.”
“하하, 그래. 가자.”
“어머니, 다음에 또 올 테니까 그동안 잘 지내고 계셔야 돼요. 아셨죠?”
수진에게도 마지막 당부를 남기고도 쉽사리 발을 떼지 못해 앞을 서성이던 그들은 잠시 뒤에야 마침내 그곳을 벗어났다.
두 사람이 자리를 뜬 후에도, 그들이 놓고 간 트로피와 리스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멀찍이 열어놓은 창문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사진 속에 담긴 수진의 얼굴은, 어쩐지 그 전보다 더욱 밝게 웃고 있는 것도 같았다.
* * *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요.”
“……또 너냐.”
“어라, 손님한테 너라니. 여기 서비스가 왜 이래요?”
너무하네, 이거.
답지 않게 빙글거리는 남자의 얼굴에, 늘 그렇듯 지영은 잔뜩 진력이 난 얼굴을 했다.
얜 진짜 질리지도 않나 봐. 어떻게 매일 같이.
“……예, 죄송합니다. 손님.”
“헉. 안녕하세요! 또 오셨네요!”
하지만, 정작 그녀와 함께 일하는 매니저는 버선발로라도 달려 나올 기세로 그를 반갑게 맞았다.
“네, 요 며칠은 일 때문에 못 왔는데. 잘 지내셨죠?”
“그럼요. 으유, 자주자주 좀 오세요. 안 그래도 사장님이 지원 씨 얘기하시던데.”
“사장님이 제 얘기를요?”
“네! 사장님이 지원 씨만 왔다 가면 매출이 배로 뛴다고 그러셨거든요.”
그쵸, 매니저님?
여자가 동의를 구하듯 지영의 팔을 찔렀으나, 한 번 눈총을 준 지영은 아무 말 없이 커피 제조에만 몰두했다.
무시의 기본은 먹이 금지라는 것을 알고 있는 탓이었다.
물론, 그래봤자 앞에 선 지원은 그런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조용하게 열심히 눈으로 좇았지만.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나 며칠 전에 앨범 나온 거 알죠?”
“…….”
주문한 음료는 받지도 않고 대뜸 그런다.
모른다고 하면 또 계속 버티고 서 있을 것 같아서, 지영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자, 여기.”
“……이게 뭔데?”
“보면 모르나. 내 앨범이잖아요.”
첫 솔로 앨범이라고 회사에서 패키지도 엄청 멋있는 걸로 해줬던데…….
그래도 가수는 가수라고 앨범이 나왔다는 사실이 기쁜지, 안 그런 척 은근한 자랑까지 보탠다.
그 모습이 솔직히 퍽 귀여웠다.
“이거 이래봬도 사인 시디니까 잘 간직해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거예요.”
“……왜 하나밖에 없어. 넌 팬 사인회 같은 거 안 해?”
“하는데, 이건 누나한테만 주는 거니까.”
다른 거랑은 좀 다르죠. 그 의미가.
지영의 손에 억지로 시디를 쥐어 준 지원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얼떨결에 시디를 받아들게 된 지영은 뭣 때문인지 꽤나 묵직한 그것과 지원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헐! 지원 씨 완전 치사해. 매니저님 것만 있고 내 건 없어요?”
“아, 죄송해요. 오늘 같이 일하시는 줄 몰라서. 다음엔 꼭 챙겨올게요.”
“치, 진짜죠?”
“네. 대신, 그동안 감시 잘 해주셔야 하는 거 아시죠?”
“헤헤. 그거야 뭐 당연하죠!”
당연하긴 뭐가 당연해. 감시는 또 뭐고.
지영은 항상 지원과 죽이 기가 막히게 잘 맞는, 나이 어린 매니저의 팔뚝을 찰싹 때려 얼른 안으로 쫓아 보냈다.
둘 중 하나라도 먼저 해결해야, 그와 같이 있을 시간이 그나마 줄어듦을 알기 때문이었다.
“얼른 가. 앨범 나왔으면 바쁠 거 아니야.”
“바빠도, 챙길 건 챙겨야 하니까.”
“…….”
“그렇게 안 쫓아 보내도 갈 거니까 걱정 마요. 그럼, 또 봐요 누나.”
그렇게 발길을 돌리려던 그가 아참, 하더니 다시 돌아섰다.
지영은 본능적으로 경계 태세를 취했다.
“……왜 또.”
“그거, 끝으로 넘겨보면 땡스 투 있거든요. 꼭 읽어줘요. 알았죠?”
“……땡스…… 투?”
“그럼, 이제 진짜 갈게요.”
평소처럼 웃어 보인 지원은 그러고서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이제껏 그에게서 별별 것들을 다 받아봤어도 이런 건…… 처음인데.
잠시 당황스러운 듯 눈을 굴리던 지영은 조심스럽게 그가 말한 땡스 투를 열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꽤나 긴 텍스트가 한 면에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제가 일하는 중이었다는 것도 잠시 잊고 만 지영은 그 자리 그대로 못 박힌 듯 선 채 그것들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모두 가족과 지인들에게 미처 전하지 못 했던 고마움을 표하는 말들이었다.
그런데, 나름 긴 땡스 투 밑으로 짧은 스페셜 땡스 투가 하나 더 있었다.
뭔가, 직감적으로 느낌이 왔다.
지영은 저도 모르게 그것을 집중해 읽었다.
Special Thanks To
아무리 풀려고 해도 잘 풀리지 않는, 내게는 언제나 성문기초영문법 같은 당신. 조만간 그 해답을 풀고 싶습니다. 나는 이제 열네 살이 아니라 스무 살이니까요.
언제나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
글 말미,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계속해서 곱씹던 지영은 앞으로 돌아가서 돌연 피식 웃었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뭐야, 진짜.”
성문기초영문법.
그것은 그녀가 지원에게 과외를 해주던 시절, 처음으로 채택했던 교재였다.
그때만 해도 지원은 그다지 영어를 잘하지 못했기에, 가장 기본으로 꼽히는 그 책마저도 소화하기 버거워했었다.
그러니까, 열네 살의 홍지원은 그랬었다는 얘기다.
새파랗게 어려서, 쥐면 부서질까 불면 꺼질까 싶기까지 했던 그 홍지원은.
“…….”
하지만 지금의 지원에게, 성문기초영문법 따위는 그야말로 껌과 같은 것일 터였다.
나는 이제 열네 살이 아니라 스무 살이니까요…….
그 말에 어쩐지 가슴이 아렸다.
딴에 아무리 밀어내고 내쳐봐도, 지칠 줄도 모르고 다시 저에게 치대오는 녀석이었다.
지금이야 같은 맘이 아닌 척 연기하며 겨우겨우 그를 거부하고 있지만,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어떻게 될지…… 그녀조차도 이제는 감히 예상할 수가 없었다.
굵은 고목처럼 꿋꿋하게 버텨야 하는데.
이런 것 하나하나에 갈대처럼 흔들리고 마는 자신만 봐도 그랬다.
“뭘 그렇게 유심히 보세요?”
“……시디, 카페에 틀려면 어떡해야 하지?”
“시디요? 뭐, 컴퓨터에다가 넣어서 틀면 되는 거 아니에요? 연결 돼 있잖아요.”
“……아, 컴퓨터.”
“왜요, 지원 씨 시디…… 매장에 트시려고요?”
바 안이 조용해진 새를 틈타 슬금슬금 기어 나온 매니저가 웬일이야,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별 일도 아닌데 지영은 괜히 머쓱해졌다.
“……그냥, 이왕 주고 간 거니까. 집에 놔둬봤자 안 들을 게 뻔하고.”
“오오, 좋죠! 지원 씨 노래 좋잖아요. 목소리도 좋고, 노래도 잘하고. 이번 노래도 보니까 반응 좋은 것 같던데.”
“…….”
“주세요, 제가 틀고 올게요.”
“아냐, 내가 가서 틀게.”
혹시나 매니저가 보기라도 할세라, 땡스 투 부분을 다시금 고이 접은 지영이 CD를 든 채 사무실로 향했다.
그래, 다른 이유는 없었다.
‘노래가 좋으니까, 목소리가 좋으니까.’
그러니까…… 듣는 거지. 노래 트는 데 별 이유가 있나.
하지만, 지영이 간과한 점이 있었다.
“매니저님 컴맹이시잖아요. 제가 한다니까요.”
“아냐, 내가 아무리 컴맹이라지만 설마 이런 것도 못할까 봐?”
“그럼, 어디 한 번 넣어보세요. 트레이가 어딘데요?”
“……트, 트레이?”
그녀의 입 꼬리는 이미, 노래를 틀기 전부터 이미 하늘 높이 승천해 있었으니까.
그녀조차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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