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完) 절대 좋아질 수 없는 남자?
2019.03.26.
“고민영!”
“어, 왔어 오빠?”
그 날 오후 재하의 작업실.
민혁과 예원의 등장에, 재하와 머리를 맞대고 한참 뭔가를 논의 중이었던 것 같던 민영이 고개를 들었다.
“뭐야, 늦을지도 모른다더니. 생각보다 일찍 왔네?”
“어, 차가 안 막혀서. 일하던 중이야?”
“아냐, 할 건 아까 다 했어. 프로듀서님이랑 잠깐 상의할 게 있어서.”
어느새 가수로서 꽤나 프로페셔널해진 민영은 집에 있는 듯 프리한 차림을 하고도 범상치 않은 포스를 자아내고 있었다.
다른 때는 몰라도 일할 땐 진짜 멋있다니까, 쟤.
예원은 언제나처럼 감탄해 마지않았다.
“야. 여기서 이러고 있으니까 진짜 뮤지션 같다, 너.”
“참나, 언닌 또 그 소리. 뮤지션 같은 게 아니라 뮤지션이거든요?”
“아, 그래도…….”
“진짜예요, 제수씨. 얘 요즘 작곡도 시작했잖아요. 이제 뮤지션이라 불려도 손색없죠.”
“정말요? 야, 너 이제 작곡도 해?”
불쑥 끼어든 재하의 참견에, 민영은 쑥스러운 듯 대답했다.
“작곡이랑 작사랑 편곡이랑……. 이것저것 손대고는 있는데 아직 신통찮아요. 아직 아마추어지, 뭐.”
“에이, 그래도 대단한 거지. 아직 나이도 어린데.”
“그래. 괜히 겸손 떨지 말지, 고민영. 너 내가 봐도 잘한다니까. 소질 있어. 가수 말고 작곡가로 전향해도 될 만큼.”
“싫어요. 난 죽어도 가수 할 거예요.”
이런 미모에, 이런 목소리를 갖고 태어났는데. 작곡가만 하면서 썩히긴 인간적으로 너무 아깝잖아. 안 그래요?
예고도 없이 튀어나온 민영의 자뻑에 모두가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맞다. 너 얼마 전에 네 또래 누구한테 대시 받았다며.”
“아, 그 얘긴 왜 또 해요. 다 끝난 얘긴데!”
“헐, 진짜야? 진짜 대시 받았어? 같은 연예인?”
“아……. 아, 받긴 받았는데…… 내 스타일 아니었어요.”
“오올~ 그럼 네 스타일은 누군데? ……우리 지원이?”
“아, 언니!”
“농담이야, 농담. 뭘 또 그렇게 발끈을 하고 그러시나. 인기쟁이께서.”
말은 그렇게 해도, 진즉에 지원에게서 정을 뗀 민영을 알고 있는 예원이었다.
본래도 유쾌하고 명랑한 편이긴 했지만, 우울한 짝사랑마저 털어내고 오로지 음악만을 사랑하게 된 민영에게선 요즘 하루가 다르게 빛이 나고 있었다.
그 점이 예원으로서는 가장 다행이었다.
새언니로서, 그리고 민영의 짝사랑 상대였던 이의 누나로서.
“아차, 우리 잠깐 나가야 되잖아.”
“응? ……아, 맞다. 언니, 오빠. 우린 잠깐 나갔다 올게요.”
“엥. 갑자기 어딜 가? 주인도 없이 우리만 있으라고, 여기?”
“그런 게 있어요. 금방 올 거야. 혼자도 아니고 둘인데 뭐 어때.”
“그래, 다녀와. 나랑 예원이랑 지키고 있을게.”
급작스런 전개에 당황한 예원과 달리, 민혁은 무척이나 태연하게 반응했다.
예원이 갑자기 이게 뭔 일인가, 하고 있는 사이 재하와 민영은 앞 다투어 작업실을 나갔다.
“무슨 바쁜 일 있나 봐요. 왜 저렇게 급하게들 나가지?”
“……따로 사정이 있나 보지 뭐. 신경 쓰지 마. 알아서 오겠지.”
“그야 그렇겠지만…….”
그래 뭐, 별 일은 아니겠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는 더 이상의 생각을 포기하고 적당한 의자에 앉았다.
그제야, 나름 화려하게 차려져 있는 재하의 작업실이 눈에 들어왔다.
“예원이 넌 여기 처음 오는 거지?”
“……그쵸. 내가 재하 씨 작업실에 올 일은 전혀 없었으니까.”
“와 보니까 어때.”
“……음. 되게 좋아 보여요. 돈 냄새가 난다고 해야 하나……. 원래도 대단한 거 맞긴 한데, 갑자기 재하 씨가 더 대단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티비에서 많이 봤던, 어딘가 계란판스러운 방음벽마저도 너무나 신기했다.
무엇보다 신기한 건 녹음실이었다.
저 안에서 녹음을 하고, 그걸로 앨범도 내고 음원도 내고 그런단 말이지.
고개를 쭉 빼고 녹음실을 살펴보던 예원의 눈빛이 어느 순간 이지러졌다.
이상하지만, 바로 코앞에 있는데도 어쩐지 거기까지의 거리가 매우 멀어보였다.
예전에는 저길…… 그렇게도 갈망했었는데.
“왜, 녹음실 들어가 보고 싶어?”
그런 그녀의 선망어린 시선을 눈치 챘는지, 그가 먼저 대뜸 물어왔다.
예원은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뇨.”
“진짜?”
“……아니, 솔직히 궁금하기는 한데…….”
“한데?”
“……들어가 봐도…… 되려나? 실례하는 거 아니에요?”
주춤했다.
아무리 그가 재하와 친구 사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엄연히 주인이 있는 공간이니까.
출입을 하려면 재하의 허락이 떨어져야 할 것만 같아서였다.
“실례는 무슨. 괜찮아, 나도 많이 들어가 봤는데 뭐. 가자.”
“아니, 저, 저기 민혁 씨……!”
평소엔 잘만 오빠라고 부르다가도 당황만 타면 언제 그랬냐는 듯 호칭이 도로 민혁 씨로 뒤바뀐다.
즉, 지금 그녀는 당황했다는 얘기였다. 굉장히.
“진짜 괜찮은 거예요? 괜히 나 때문에 그러는 거면 괜찮은데…….”
“괜찮다니까. 자, 여기 이렇게 서 봐.”
예원을 거의 강제로 끌고 오다시피 한 민혁은 보기만 해도 어쩐지 경외감이 느껴지는 마이크 앞에다 그녀를 떡하니 데려다 놓았다.
오우, 이게 얼마짜릴까.
“이것도 이렇게 쓰고. 자.”
그걸로도 모자라 엄청 값나가 보이는 헤드폰까지 그녀의 귀 위로 덧씌워지고.
그녀는 헙, 짧은 숨을 내뱉었다.
“어때. 어떤 것 같아?”
“……이상해요.”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상황에 아직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한 예원이 눈을 끔뻑거렸다.
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 작업실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상해? 좋지는 않고?”
“……아뇨, 좋은데……. 그냥 되게 이상해요.”
“…….”
“……음, 꼭 내가 가수가 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기껏 말해놓고서 예원은 수줍게 웃었다.
그가 곁에 없었더라면, 혹은 지원이 가수가 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해보지 못했을 일.
이로써 죽기 전에 소원 하나는 푼 셈이었다.
녹음실 안에서 가수 코스프레를 해보는 것.
이걸 해보고 싶어도 못 해보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많겠는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은 무척 축복받은 거라는 생각이 드는 예원이었다.
“그래?”
어쨌거나, 그녀를 여기다 데려다 놓은 장본인인 남자는 덩달아 즐거운 듯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그때, 꽤나 차음이 잘 되는 헤드폰을 뚫고 그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들려왔다.
“그럼, 여기서 노래 한 번 해볼래?”
“……네?”
“듣고 싶다. 예원이 네 노래.”
놀란 예원이 퍼뜩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여, 여기서 하라고요? 나더러?”
“응. 내가 나가서 MR 틀어줄게. 한 번 해봐. 녹음도 해보고.”
“아, 아니. 우리 맘대로 어떻게 그렇게 해요. 여기가 우리 것도 아닌데…….”
“괜찮아. 이미 다 허락 맡았으니까.”
“……네?”
허, 허락? 이건 뭔 소리지.
그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 예원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이미 사전에 다 허락 맡았다고. 그래서 둘 다 아까 나가 준 거야. 내가 눈치 줘서.”
“…….”
“별 건 아니지만, 언젠가 너한테 꼭 해주고 싶은 이벤트였거든.”
이제 와서 내가 네 꿈을 이뤄줄 수는 없겠지만, 대신…… 이젠 내가 네 꿈이 될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해. 날 봐서라도. 응?
헤드폰을 낀 탓에 그의 목소리가 여전히 웅웅거리며 들려왔다.
헤드폰을 빼야겠다 생각하면서도, 예원은 차마 손을 올리지 못하고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이건…… 이건 정말이지…….
“예전에 내가 말했지. 굳이 이런 데서가 아니라도 넌 충분히 반짝거린다고. 근데, 그래도 여기서 노래 부르는 걸 보고 있으면…… 왠지 더 반짝거릴 것 같기도 해.”
“…….”
“그러니까, 한 번 보여 줄래?”
발개진 눈시울에 금세 눈물이 고였다.
울음기에 목이 잠기고 목울대가 따가워져서 노래를 부르기는 어려울 것 같았지만, 그래도…….
“……네.”
예원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내가 나가서 봐줄…….”
“잠시만, 잠시만요.”
“응?”
그의 옷깃을 잡은 채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용기 있게 물었다.
“여기, 안에 CCTV 없죠?”
“……어?”
“……있어요?”
당장이라도 입 맞추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는 표정.
저도 모르게 잘근잘근 깨물어 붉어진 그녀의 입술.
홍예원에 한해서는 나름 통달했다 자부하는 민혁으로서는, 그녀의 의도가 무엇인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니, 없을걸.”
있어도 없게 할 거야, 내가.
파일 같은 거야 지워버리면 그만이고.
“……다행이네요.”
말이 끝나자마자 민혁의 목덜미에 쏙 팔을 두른 예원은 곧바로 그에게 열렬히 입 맞추었다.
물론, 애초부터 거절할 생각이 1도 없었던 그는 그녀 이상의 열정으로 아주 화끈하게 응답해주었고.
밀폐된 녹음실이 삽시간에 두 사람의 체온과 숨결, 촉촉한 소음으로 가득 찼다.
정말이지 죽도록 행복했다.
어찌 되었든 간에.
그리하여 예원이 비로소 노래를 시작하게 된 것은, 그 뒤로도 한참의 시간이 흘러간 뒤였다.
* * *
벅차고도 야릇했던 녹음실 데이트가 끝이 나고, 두 사람은 새해 첫 날의 저녁식사를 집에서 조촐하게 함께했다.
취침에 앞서 깨끗이 씻고 나온 예원은 방 한 편에서 뭔가를 몰두해서 읽고 있는 그를 발견했다.
“뭐해요, 오빠?”
“응? 아, 다음 작품 제의 들어온 거 한 번 보고 있었어. 생각보다 재밌네.”
“그래요? 이번엔 어떤 작품인데요?”
“음, 드라만데. 비교적 신인 작가 작품이야. 소재가 꽤 신선한 것 같아. 여러모로 위험부담이 있는 것 같아서 처음엔 좀 망설여졌는데. 이상하게 점점 마음이 기우네.”
“그래요? 그럼 나도 한 번 읽어봐도 돼요?”
“당연하지. 나 씻고 올 테니까 한 번 읽어봐. 읽고 어떨지 코멘트도 좀 해주면 고맙고.”
“헤헤, 그런 거야 뭐. 맡겨 주시죠. 오늘도 반신욕 할 거예요?”
“응, 아마도.”
배우의 아내라서 좋은 점 중 하나는 바로 이런 것이다.
아직 시중에 풀리지도 않은 걸출한 작품을 미리 감상할 수 있다는 점?
처음에는 그저 그랬는데, 이제는 그녀도 갈수록 욕심이 붙어 그를 도와 좋은 작품을 매의 눈으로 골라내는 데 톡톡히 일조하고 있었다.
그가 욕실로 떠난 뒤, 날로 무거워지는 배를 부여잡고 침대로 들어가 앉은 예원은 꽤나 진지한 자세로 1화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와, 재밌네.”
그렇게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한 번의 멈춤도 없이 1 화를 빠짐없이 정독한 그녀의 첫 감상은 바로 그것이었다.
이전에도 몇 번 이런 식으로 그의 대본을 얻어 읽은 적이 있었지만,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이런 젠장.’
아, 임신한 주제에 욕하면 안 되는데. 그래도 입 밖으론 튀어나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어쨌든 본능적으로 빡 느낌이 왔다.
이건 저 남자한테 찰떡이야.
무조건 해야 해! 저 남자한테 선택권이란 없어!
“벌써 대상 확정이다, 대상 확정.”
이러다가 2년 연속 대상 먹는 거 아니야? 어머 어머.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설레발을 친 예원은 대본을 덮고 다시 맨 처음 커버를 보았다.
흠, 잠깐만.
근데 이 작품은 다 좋은데, 딱 하나…….
“……제목이 좀 별로네.”
꼭 이런 제목으로 했었어야 했나?
뭐, 어쩐지 우리 얘기 같아서 왠지 모를 동질감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래.
대본의 제목을 보며 잠시 고심하던 예원은 이내 검정색 펜을 가져왔다.
그리고, 맘에 안 드는 제목 위로 꼬물꼬물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됐다.”
좋아. 이 정도는 돼야 저 남자한테 어울리지. 암.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완성된 것 같은 대본의 제목을 내려다보며, 예원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참. 오빠 한약 데워준다는 걸 깜빡했네.”
으유, 맨날 맨날 하는 거면서 이렇게 까먹는다니까.
임신을 한 이후, 다른 것은 거의 다 민혁의 몫이 되었지만 적어도 민혁의 몸을 챙겨주는 것만큼은 제가 하고 싶다고 고집에 고집을 부렸던 예원이었다.
제가 알아서 하겠다는 그의 말 따윈 당연히, 아주 가볍게 무시해 버렸고.
나오자마자 주려면 지금 바로 가야겠네.
예원은 대본을 침대에 내려놓고 부리나케 몸을 일으켜 1층으로 내려갔다.
“예원아. 다 읽었어?”
그런데 그때, 마침 특유의 반라 차림에 수건만 걸친 채 욕실에서 나온 그가 다시금 안방으로 들어왔다.
“……어. 어디 갔지? 1층 갔나?”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진 그녀의 자취에 민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방을 다시 나서려던 그는 불현 듯 침대 위에 눈길을 두었다.
아까 전과는 뭔가 다르게, 일부가 바뀌어 있는 것 같은 대본의 제목이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하, 참.”
도톰한 A4용지 뭉치 한가운데, 대문짝만하게 나와 있는 제목을 보며 민혁은 피식 웃었다.
‘하여튼 귀여워가지고는.’
거기엔, 방금 전 예원에 의해 재탄생된 제목이 아주 자랑스럽게 씌어 있었다.
현민혁
절대 좋아질 수(밖에) 없는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