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나는 스캔들이 싫어요
2019.03.15.
“그래서, 어제는 뭐 했는데?”
“뭐 그냥, 밥 먹고 영화 보고, 차도 마시고 그랬죠.”
“참나…… 아주 무슨 커플이 따로 없네.”
“왜요. 설마, 언니 지금 질투해요?”
“켁. 질투는 무슨?”
어느덧 시간은 꽤나 흘러, 에덴은 다시금 정상적으로 영업을 재개한 상태였다.
커피 머신 앞에 선 채, 바 바깥쪽에 서 있는 민영을 찍 흘겨 본 예원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질투할 게 없어서 오빠랑 동생 사이를 질투 하냐. 네가 아무리 예뻐도 그렇지.”
“쳇, 그래도 오빠는 언니가 세상에서 제일로 예쁘다던데요?”
“콩깍지 씌어서 그래. 몇 년만 지나봐.”
“에이. 그래도 똑같을 걸요. 울 오빤 진짜 언니밖에 몰라요. 내가 산증인.”
“에게, 울 오빠?”
그새 엄청 친해졌나 보다. 이제 진짜 자연스러워졌는데, 너?
예원의 말에 아, 하던 민영은 이내 수줍게 머리를 쓸어내렸다.
“아니 뭐, 이제 슬슬 그럴 때도 됐죠……. 이제껏 둘이서만 논 게 얼만데.”
“쳇. 아무튼, 근데 너 스케줄 안 가고 여기서 놀고 있어도 돼?”
“안 그래도 이제 가야 돼요. 그러니까 빨리 만들어 줘요, 커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주제에 맨날 커피 타령은. 커피 맡겨 놨냐? 너 다음부터는 카드 갖고 와.”
“예? 에이, 이 언니가 또 왜 이러실까. 내가 맨날 꽁으로 얻어먹어요? 친히 신 메뉴 테스터도 해주잖아요.”
“아이고. 벼슬이다, 아주?”
커피에 그다지 취미가 없는 제 오빠와 달리, 알고 보니 민영은 자라온 환경의 영향인지 꽤나 커피를 즐기는 아이였다.
생각보다 입맛이 꽤 예민하고 평이 날카로워서, 예원은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슬쩍 실물 음료를 만들고 민영의 의견을 물었다.
민혁처럼 따로 시간을 내지 않아도 두 사람이 자연스레 친해질 수 있었던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어쨌든 덕분에, 조만간 민영의 감수를 받은 신 메뉴가 실제로 추가될 예정이기도 했다.
고민영은 여러모로 굴러들어온 복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 빨리 가. 가서 잘하고.”
“히히, 네.”
또 올게요, 언니! 오늘도 많이 팔아요!
커피를 든 채 해맑게 떠나는 민영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매사에 뻣뻣한 지원을 대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
나쁘지 않았다.
내심 늘 갖고 싶어 하던 여동생이 늦게야 생긴 기분이었다.
“휴, 나도 이제 일하자. 일.”
아직 뭐 제대로 하기도 전인데 왜 이렇게 피곤하냐.
쟤 치우는 것도 은근히 일이라니까.
픽 웃은 예원은 싱크대를 향해 뒤로 돌았다.
그때, 뒤쪽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에덴입…….”
“홍예원 씨.”
너무나도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
그에 예원은 홀린 것처럼 고개를 팍 들었다.
“오랜만이네요.”
“…….”
“잘…… 지냈죠?”
아…….
다시는, 주가윤만큼이나 결코 보고 싶지 않았던 인물.
그녀를 향해 삐딱한 미소로 웃고 있는 이는 바로,
조혜인이었다.
* * *
“……이게 뭐예요?”
“카페모카요. 좋아하신다면서요?”
어느덧 예원의 차애로 떠오른 음료이자 애증의 음료.
상대의 취향을 고려해 아주 당연하다 싶게 가져온 카페모카였다.
하지만 보나마나 좋아하겠지, 싶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싸가지 없이 눈을 치켜뜬 음료의 주인은 잔뜩 눈살을 찌푸렸다.
“안 좋아해요. 몸매 관리해야 되는데 이렇게 지방 가득인 걸 어떻게 마셔요.”
“……네?”
“그거 아메리카노죠?”
바꿔요, 나랑.
부리나케 제 앞에 놓인 커피를 채가는 손길에 예원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저게 진짜.
“……그거 디카페인인데…….”
“나 디카페인 좋아해요. 아메리카노도 좋아하고.”
언젠 네가 네 입으로 카페모카 좋아한다며.
그때 그건 다 날 골탕 먹이기 위한 밑밥에 불과했냐?
아니, 하필 왜 임신한 사람 커피를 뺏어가?
“근데, 여긴 또 웬일이세요?”
안 그래도 별로인 기분을 초장부터 잡쳤다.
모카 위에 올린 달달한 휘핑을 슬쩍 퍼먹으며 가까스로 마음을 달래 보려는데, 그런 그녀를 마뜩잖게 보고 있던 여자는 다짜고짜 말을 걸어왔다.
“임신했다면서요.”
“……네.”
“거짓말이죠?”
“……네?”
이건 또 뭐야.
예원은 빨대 끝을 잘근 씹던 채로 퍼뜩 놀라 혜인을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민혁 씨를 알아요. 그 남자,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뻔뻔하게 그렇게 말할 사람 못 돼요. 거짓말이 아닌 이상은.”
거짓말이니까 그렇게 뻔뻔하게 얘기한 거지. 연기니까.
‘고로 넌 지금 임신한 게 아니란 소리고. 안 그래?’
라고 묻는 듯한 여자의 표정.
졸지에 예원은 잠시 멍해 있다가, 빨대를 음료에 다시 꽂고 피식 웃었다.
저건 또 무슨 멍멍이 논리인지.
“글쎄요. 예전의 민혁 씨는 그랬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닌데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거짓말 아니라고요. 그 사람, 조혜인 씨보다 내가 훨씬 더 잘 안다는 얘기예요.”
적어도 지금은.
눈앞의 여자가 급 가소로워지는 기분에 예원은 비릿하게 웃었다.
저 여자는 대체, 뭘 믿고 아직까지 저렇게 오만한 걸까.
“사실인지 아닌지, 어차피 몇 개월 뒤면 자연히 아실 수 있겠지만. 당장 임신 테스트기 사와서 보여드릴 수도 있는데.”
“…….”
“원하세요? 뭐, 원하시면 그렇게 하고요.”
그리 말하는 예원의 표정은 무척이나 여유로운 반면, 혜인의 표정은 무시무시했다.
당연히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아닌 듯도 하고.
설마, 진짜 임신을 했다고?
그럴 리가…….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던 혜인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여기서 더 캐묻는 건 어쩐지 자존심이 상했다.
일단은 후퇴가 답이었다.
“……믿던 사람에게서 발등을 찍히는 기분. 이젠 알겠네요?”
“……네, 뭐. 덕분에요.”
“민혁 씬 모르는 것 같던데. 내가 안다는 거.”
“내가 얘기 안 했으니까요.”
“왜요?”
혜인은 솔직히 조금 의외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주가윤 사건이 터진 이후, 다음 화살은 당연히 제게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홍예원은 이상하리만큼 잠잠했다.
며칠 전 방송국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됐던 민혁도 마찬가지였다.
주가윤과 자신이 가졌던 모종의 관계도, 저와 예원과의 사이에 있었던 일들도.
그는 하나도 모르는 것 같았다. 전혀.
“조혜인 씨를 떠올리게 하는 것 자체가 싫어서요.”
“…….”
“민혁 씨, 이제 주가윤 씨 얘기만 나오면 너무너무 끔찍해 해요. 평생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난, 민혁 씨가 그 쪽을 그렇게 평생토록 기억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상관없이요.
홍예원치고 꽤 의외라고 느껴지는 답변. 혜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다행이네요. 생각한 만큼 고귀하고 착한 이유는 아니라서.”
“착한 척할 때는 이제 지났으니까요.”
“……아주 당당하시네요. 이젠 나한테 이긴 기분이라도 드나 봐요?”
“아닌가요?”
태연하게 되묻는 여자의 태도에 슬슬 약이 올랐다.
예원을 지켜보던 혜인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과연 그 기분이, 언제까지 갈까요.”
“…….”
“조심해요. 사람 마음만큼 변하기 쉬운 것도 없으니까.”
늘 그랬던 것처럼 뼈가 있는 듯한 말이었다.
덕분에 이번엔 예원이 눈썹을 찡그렸다.
“……무슨 뜻이죠?”
“그냥, 말 그대로예요.”
“…….”
“그 사람, 너무 믿지 말라고요.”
까딱하다간 또 어떤 풍파가 들이닥칠지 모르니까.
한 번은 그냥저냥 넘어갈 수 있어도, 두 번부터는 좀 힘들지 않겠어요?
통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혜인이 빨대를 쪽 빨며 이죽거렸다.
여자는 오랜만에 만나도 한 치의 변함이 없는 채였다.
변함없이 싸가지 없고, 변함없이 짜증이 난다.
“……조혜인 씨.”
“네.”
잠시 뒤, 나지막한 목소리를 낸 예원이 천천히 혜인을 직시했다.
불과 두 달 전 같았으면 찍 소리도 못 하고 여자를 보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예전 같은 홍예원이 아니었다.
더 이상은.
“충고는 고맙지만, 그쯤 해두시죠. 몇 번 당하니까 이제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해서요. 좀 지겹기도 하고.”
“……뭐라고요?”
“그 사람을 믿고 말고는 내가 알아서 할 문제니까 신경 끄시라고요. 그쪽이 뭐라고 떠들어대건 난 그 사람 믿을 거예요. 대체 그 쪽이 뭔데 자꾸 아는 척이에요, 짜증나게. 그래봤자 헤어진 지 십 년도 넘은 구 여친이잖아요?”
“…….”
“항상 필요 이상으로 주제 넘으신다는 건 당연히 알고 계실 테고……. 할 말씀 다 하셨으면 이만 가주세요. 영업시간이에요.”
마침내 봉인 해제된 예원의 독설을 듣는 혜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마냥 만만하게 봤던 상대여서일까.
그리 독하지도 않은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꽤나 뼈아픈 일격인 모양이었다.
“…….”
그 뒤론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인사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여자는 잠깐 예원을 따갑게 쏘아보더니 이내 쌩하니 카페를 벗어났다.
그런 혜인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예원은 여자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나서야 휴, 한숨을 내쉬었다.
“……잘했어, 홍예원.”
당한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간만에 속이 좀 풀리네.
솔직히, 아직도 성에 차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래도 이 정도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다시 쉽게 찾아오진 못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살짝은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물론, 그 와중에도 여전히 여자의 말이 마음에 턱 걸리기는 했다.
‘그 사람, 너무 믿지 말라고요.’
또 무슨 꿍꿍이가 있나, 저게? 아니, 왜 사람을 믿지 말래. 지가 뭔데?
……아니야. 괜히 지가 쫄리니까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거지.
지가 우위였어 봐. 저런 식으로 나왔겠어?
두 홍예원이 맘속에서 나름 치열하게 대립했지만, 결국 나온 결론은 그를 믿자, 였다.
그래, 그 사람 말고 누굴 믿어. 다 쓸데없는 소리야.
거의 새 것이나 다름없는 카페모카를 미련 없이 싱크대에 버리면서, 예원은 끓어오르는 짜증을 애써 눌렀다.
“……별 일 없겠지.”
설마, 별 일이야 있으려고.
* * *
“이름은 고민영. 나이는 열아홉. 현재 명지고등학교 재학 중이라고 합니다. 외모가 출중하고 실력도 준수한 편이라 최근 들어 인지도와 인기가 급속도로 상승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홍예원의 동생인 홍지원과 팀을 맺어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기도 했었고요.”
“그럼, 그 인연으로 처음 만나게 됐다는 건가요?”
“그런 걸로 추정됩니다. 그 외엔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접점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허. 걔도 참. 아무리 계약결혼이래도 그렇지, 어떻게 여고생이랑 바람을…….”
하여튼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엔 제일 먼저 올라간다더니.
옛말 틀린 것 하나 없다니까요, 글쎄.
수하의 보고를 받은 라희가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둔 그들의 앞에는 민혁과 민영이 한데 찍힌 사진 수십 장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확실히, 예사로운 사이 같진 않았다는 거죠?”
“예. 연인 사이치고 스킨십이 많거나 터치 수위가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언뜻 보아도 꽤 깊은 사이 같았다고 합니다.”
“으음. 사진들도 생각보다 깨끗하게 잘 나왔네요.”
“어떡할까요. 바로 터뜨릴까요?”
수하의 물음에 태균과 라희는 짜 맞추기라도 한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시선을 사진으로 돌린 태균의 입가에는 주름이 졌다.
“흠……. 어딘가 좀 찜찜하긴 한데.”
“네? 뭐가요, 여보?”
“……저 놈 성격상, 저렇게 허튼 짓하고 다닐 놈은 아니지 않느냐 말이야.”
오로지 놈을 망가뜨리는 것이 목표였다.
사람을 붙이고 파다 보면 무언가 꼬리가 잡힐 것 같긴 했지만, 그것이 이런 소식일 거라곤 전혀 생각도 못 했던 그였다.
현민혁이 바람이라. 현민혁이 바람…….
어쩐지 이상했다.
가뜩이나 제 어미 때문에 유년 시절을 그렇게 혹독하게 보낸 녀석이 아닌가.
놈답지 않게 허술해도 너무 허술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세상에 뭐 바람피울 놈 안 피울 놈이 정해져 있나요. 나이도 아홉 살이나 어리겠다, 예쁘겠다. 예원인가 뭔가 하는 계집애보다 싹수는 더 있어 보이는 걸요. 이제라도 제 진짜 짝을 찾았다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잖아요.”
“흠…….”
일반적으로 보자면 라희의 말도 일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한 얼굴의 태균이 사진 한 장을 손수 들어올렸다.
앳된 얼굴의 여자애가 곧장 눈에 들어와 박혔다.
“얘 이름이, 민영이라고 했나?”
“예. 고민영입니다.”
민영이라. 민영…….
고개를 끄덕인 그가 무의식적으로 민영의 이름을 곱씹었다.
“왜 그래요, 여보?”
“아니……. 왠지 모르겠지만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 같아서.”
“그래요?”
갑자기 진지해진 그와 달리, 라희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듯했다.
“뭐, 민영이란 이름이야 흔하니까……. 제 친구 딸 중에도 민영이 있어요. 의원님이 어디선가 들어보셔서 그렇겠죠. 민혁이처럼 민 자가 들어가 있기도 하고.”
“…….”
그런 건가. 태균이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머릿속을 계속 더듬으면 나올 것도 같은데 이상하게 기억이 날 듯 말 듯 나지 않았다.
재채기를 하려다 하지 못한 것처럼, 왠지 모르게 코끝이 시큰했다.
“어떡할까요. 최근에 그쪽이 핫하긴 했어도, 현민혁 씨 개인에 대한 여론이 너무 좋은 상태라 기자들도 쉽게 건드릴 것 같지가 않습니다. 섣불리 보도했다가 혹시나 저번처럼 역풍을 맞을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정도 증거면, 거의 확실한 수준 아닌가?”
“예. 그렇긴 합니다만…….”
눈이 있다면 절대로 부정할 수 없을 증거가 이만큼이다.
이렇게 꾸물거리다가는, 약삭빠른 그 놈 쪽에서 먼저 눈치를 채고 선수를 칠지도 몰랐다.
“좋아. 그렇다면 굳이 기다릴 필요 없지. 우리가 먼저 터뜨리자고.”
이 모든 게 사실이라면, 현재의 여론이 좋건 말건 배우이자 연예인으로서의 현민혁은 바로 매장일 터였다.
잔뜩 커졌다고 생각한 호랑이 새끼가 이런 빈틈을 보이다니.
이번에야말로 제가 배로 되갚아줄 차례였다.
분부대로 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수하를 보며, 태균과 라희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젠 강 건너 불구경을 할 일만 남아 있었다.
* * *
“아음…… 잘 잤다.”
에덴을 재개한 이후 실로 간만에 맞은 여유로운 오후.
느지막하게 침대에서 일어난 예원은 별 생각 없이 폰을 확인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이, 이게 도대체…….”
버릇처럼 확인하던 네이버 연예 뉴스란이 난리였다.
다름 아닌 그의 이름과 함께.
「[단독] 현민혁, 묘령의 여인과 데이트 장면 포착…… 임신했다는 아내는 어디에 두고?」
「현민혁, 현태균 아들-계약결혼설에 이어 잇따른 스캔들…… 이번엔 외도설?」
「현민혁의 그녀, ‘드스코6’ 출신 여고생 가수 ‘고민영’으로 밝혀져」
「‘현민혁 외도설’ 고민영, 우월한 미모로 시선강탈 “현민혁이 반할 만하네”」
「현태균, ‘현민혁 외도설’에 묵묵부답…… 우리가 모르는 의혹 있나」
허억, 이게 다 뭐야.
예원은 잠시 일시정지 상태로 눈만 깜빡였다.
세상에 이런 일이.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감히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안의 심각성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어디에 놓아뒀는지 모를 그의 폰은 진돗개 발령이라도 된 것처럼 시끄럽게 울려댔다.
애저녁에 알림을 꺼놓았던 그녀의 메신저 앱 또한 밀려드는 메시지들로 잠잠하게 불이 나고 있었다.
“오빠, 일어나 봐요. 오빠!”
“으음, 왜…….”
“빨리 일어나서 이것 좀 봐봐요, 민혁 씨! 네?”
간밤에 그녀와 알콩달콩하느라 늦은 시각에 잠이 들었던 민혁이 겨우겨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실처럼 가늘었던 그의 눈은 순식간에 최대 크기로 커졌다.
제 앞으로 디밀어진 그녀의 폰을 확인한 탓이었다.
“잠깐만. 이, 이게…… 무슨…….”
“민혁 씬 알고 있었어요? 이, 이런 기사는 원래 다 소속사랑 딜 해서 나가는 거 아니었어요?”
“…….”
예원의 질문에 민혁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보통은 대개 그렇지만, 그쪽에서 작정하고 터뜨릴 경우엔 달랐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옛날 옛적 그가 예원과의 스캔들이 났을 때도 이러했지 않은가.
“아니, 무슨 동생이랑 엮어서 이런 기사를 내! 어떡해요, 이거 빨리 해명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어, 그…… 그래야지.”
“이걸 어쩜 좋아, 진짜.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걸까요? 요즘은 기자들도 잠잠한 것 같아서 안심하고 있었더니!”
예원의 폰을 완전히 넘겨받은 민혁은 천천히 기사 헤드라인들을 훑었다.
그러다 맨 마지막 즈음에 있는 이름을 보고서야, 그는 조용히 입술을 물었다.
‘현태균.’
그 이름을 보자마자 확신까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감이 왔다.
하긴, 지난 번 그 일이 꽤나 아프시긴 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까지 벌이다니.
“……본인 발등을 스스로 직접 찍으셨구만.”
“네?”
어차피 끝났을 인생, 더 추악한 것까지는 안 들춰내고 고이 묻어주려 했더니.
보기 좋게 선빵을 맞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더 이상 착하게 굴어줄 필요는 없었다.
받은 대로 돌려주는 것이 이 바닥의 룰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이걸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어떻게…….
“…….”
어리둥절해하는 예원의 눈빛을 받아내며, 그는 잠시간 말없이 고심했다.
그러던 그의 눈에 어느 순간 온갖 아이콘들이 쪼르륵 떠 있는 휴대폰 상태 바가 보였다.
가만, 저거…….
“……예원아. 요즘도 엔스타그램 해?”
“네? 아, 아뇨……. 사진은 잘 안 올리는데. 가끔 다른 사람들 거 눈팅만 해요.”
“아이디는 여전하지?”
“그럼요. 탈퇴 안 했으니까.”
“저번에 그 일 이후로 갑자기 팔로워도 많이 늘었댔나?”
“어…… 네. 근데, 민혁 씨가 그건 왜…….”
생전 SNS도 안 하던 사람이 갑자기 저런 건 왜 묻지?
예원의 얼굴이 잔뜩 의아해졌다.
“민영이 오늘 집에서 쉰댔지?”
“네. 걔도 엄청 놀랐겠죠? 오랜만에 하루 종일 퍼질러 잘 거라고 그랬는데 웬 날벼락…….”
“부르자, 걔.”
“네?”
방심하다 놀란 그녀를 향해, 씩 웃은 그가 쐐기를 박았다.
“여기로.”
* * *
그 날 오후.
민영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여고생들은 저마다 폰을 보며 수군대기에 여념이 없었다.
“야, 뉴스 봤어? 현민혁 미친 거 아니냐?”
“그니까! 혼자서 멋진 척은 다 하더니만. 고새를 못 참고 바람을 피워?”
“그럼 저번에 쇼했던 것도 다 찔려서 그랬던 거 아냐?”
“아, 그럴 수도 있겠다. 하, 고민영. 홍지원한테 꼬리 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헐, 그러고 보니까 현민혁이 홍지원 매형이네?”
“각 딱 나오네. 홍지원한테 들이대다 까이니까 현민혁으로 갈아탔나 보지, 뭐.”
“미쳤다. 아오, 예원 언니만 불쌍하네……. 그 언니 되게 착하고 예쁜데.”
“아 맞다. 너 전에 디엠(DM, 다이렉트 메시지) 보내서 답장도 왔었다며?”
“어어. 내가 그 날 이후로 예원 언니 짱팬 됐잖아. 어떡하냐. 지금 배신감 완전 쩔겠지, 그 언니…….”
“그렇겠지.”
그때, 여고생이 쥐고 있던 폰에서 별안간 알림음이 울렸다.
“어?”
“왜, 뭔데?”
“엔스타 라이브 알림.”
“오오, 누구누구.”
“……헐, 예원 언닌데?”
“뭐? 미친. 빨리 켜봐, 켜봐.”
순식간에 눈이 휘둥그레진 여고생은 다급히 예원의 라이브 방송에 접속했다.
놀란 것은 그녀뿐만이 아닌지 바로 엄청난 숫자의 시청자들이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카메라에 잡힌 모습은, 비단 예원의 것뿐만이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켠 지 몇 초 안 됐는데 벌써 많은 분들이 들어오셨네요.]
“……얘 미친 거 아냐? 뭔 자신감으로 낯짝을 들이밀어?”
떡하니 나타난 현민혁의 모습에 두 여고생은 얼굴을 찡그렸다.
카메라에 비친 두 남녀는 언제나처럼 사이좋은 부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배우 현민혁입니다.]
[안녕하세요. 홍예원입니다.]
[어, 저희가 라이브 방송이 처음이라 좀 어색하지만…….]
[왜요, 저번에 기자회견도 라이브였잖아요.]
[아, 그랬나? ……예, 아무튼 오늘은 꼭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요. 제가 따로 SNS를 하지 않는 관계로, 이렇게 아내 아이디를 빌려서 인사드리게 되었습니다.]
하루 종일 떠들썩했던 뉴스들이 무색하게 두 사람은 아무런 문제도 없는 모습이었다.
조금 이상하다 싶긴 했지만, 화면을 보는 두 여고생도 말없이 두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벌써부터 많은 분들이 격한 반응을 보여주고 계신데……. 실은 특별 게스트가 여기 한 명 더 와 있어요.]
“게스트?”
그 말에 이어 카메라 바깥을 보며 일루 와, 하는 듯한 예원의 입모양이 보였다.
이윽고 방송 속의 인물은 곧 두 명에서 세 명으로 변했고.
소심하게 자리에 앉는 인물을 확인한 두 여고생의 얼굴은 곧바로 경악으로 물들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현민혁이 반할 만도 했다는, 시선 강탈 외모의 소유자가 꾸벅 인사했다.
[감격스럽게도, 오늘 데뷔 후 첫 스캔들이 터지고 만…… 고민영입니다.]
스캔들의 장본인들이 나타난 것이었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