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도와줄게, 내가
2019.02.19.
언젠가는 물론 저에게도 이런 날이 오지 않을까 막연히 상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상황을 맞닥뜨리는 것은 생각보다 더욱 현실감이 없었다.
“홍예원 씨, 임신 중이시잖아요.”
임신. 내가 임신을 했다고?
의사로부터 모든 소견을 듣고 나온 예원은 병실로 가다 말고 우뚝 멈춰 섰다.
이제야 비로소 최근의 제 몸 컨디션이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랬구나. 내가 아이를 가져서 그런 거였구나.
어쩐지,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이렇게 좁은 곳에 생명이 움을 틔웠다니.
모든 것이 새삼 신기하게 다가왔다.
아직 형체도 제대로 잡히지 않았을 아기의 따뜻하고 포근한 숨결이 저 밑에서부터 전해져오는 느낌이었다.
“어쩜, 너무 잘 됐다! 어떻게 넌 네 뱃속에 애가 있는 줄도 모르니. 그러고도 네가 엄마야? 응?”
엄마, 라니. 아직은 너무도 낯설고 생경한 단어였다.
뒤따라오며 짓궂게 장난을 걸어오는 이모 덕분에 저도 모르게 스멀스멀 웃음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예원은 이내 입가를 곱게 접었다.
“어. 왜 또 표정이 시무룩해. 왜, 어디 안 좋아?”
“……그런 거 아니야. 괜찮아.”
민혁이 아이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내심 간절히 기다려 왔던 소식이었다.
응당 기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지. 그의 아이를 가졌단 사실이 너무 너무 좋다.
너무 너무 좋고 행복한데. 그런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는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하여튼. 날을 골라잡는 운이 나빠도 이렇게 나쁠 수가.
‘……휴.’
왜 하필 오늘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어제 알게 되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래서 그 사람이 귀국하자마자 이야기를 전해주었더라면, 종방연 같은 것 따위 따라가지 않고 집에 얌전히 붙어 있었더라면.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겠냐고.
그럼 우린 어제 마냥 행복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일은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얘, 얼른 현 서방한테 전화해. 그래도 제일 먼저 알아야지, 이런 건. 아빠잖아.”
“…….”
사실, 그렇잖아도 제일 먼저 생각난 게 바로 그의 얼굴이었다.
물론 지금 당장 전화를 걸 수도 있었다.
‘정말이야?’ 하면서 환하게 웃음 지을 그의 모습도 눈앞에 선하게 그려졌다.
하지만 예원은 머뭇거렸다.
“……아냐. 조금만 나중에.”
“나중에? 왜.”
“…….”
“……어제 일, 신경 쓰여서 그래?”
부정도 긍정도 없이 이모를 바라보았지만 실은 맞는 말이었다.
이렇게 기쁜 소식을, 이렇게 그가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타이밍에 전하긴 싫었으니까.
그는 인터넷과 TV를 끊으라고 단호히 말하고 갔지만, 주위엔 이미 여럿 사람들이 있었고 그녀는 엄연히 귀가 트여있었다.
사태는 벼락처럼 벌어졌고 누군가는 어떻게든 수습해야 한다.
저를 보호하기 위해, 그가 혼자서 이리저리 고군분투해야 하는 현 상황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 판국에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이걸 어떻게 말해.
“그냥, 그게 나을 것 같아서. 나중에 깜짝 놀라게 해 주면 되지 뭐.”
비록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조금 늦게 알려준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모든 게 원래의 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예원은 딱 그때까지만 이것을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장이라도 입이 근질근질해져 오는 것만 같지만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지금은 영 때가 아닌 것 같으니까.
“이모. 나 집에 가서 맛있는 거 해 줘.”
“어? 어, 그럼! 얼마든지 말만 해. 일단 요 며칠은 몸보신부터 하자. 아무래도 너 기력이 너무 떨어진 것 같아. 그러니 그렇게 픽픽 쓰러지지.”
“쳇, 이모가 안 당해 봐서 그래. 이모도 목 한 번 졸려봐, 정신이 확 나갈 걸.”
“어쭈, 얘가 이모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어!”
아무튼, 그러려면 체력을 보충해야 했다.
아자. 힘을 내자. 물론, 아가 너도.
앞으로 엄마랑 같이 헤쳐 나가야 할 길이 구만리란다.
아직 납작하기만 한 배를 공연히 한 번 쓸어보고선 이모를 따라 경쾌한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씨앗에도 못 미칠 크기겠지만, 엄연히 한 생명의 무게를 몸에 더 담게 되어서일까.
평소와 똑같은 걸음으로 걷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자신이 왠지 모르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까딱하다 눈물이 찔끔 날 뻔 했다.
새삼스럽게 그가 보고 싶었다.
* * *
그 날 저녁.
으레 그랬듯 모자와 마스크로 중무장을 한 민혁은 닫혀 있는 에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불 꺼진 그곳의 풍경은 생각과 다르게 다소 을씨년스러웠다.
보나마나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휴업까지 한 상황에 그 주인공이 설마 여기를 들를 거라고는 다들 예상을 못 한 모양이었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조용한 카페 앞에 선 채, 민혁은 문득 아까 전 장 대표의 말을 곱씹었다.
‘하다하다 이젠……. 정말 가지가지로 실망시키는구나, 현민혁. 너 나랑 장난 치냐? 내가, 배우질이 그렇게 우스워 보였어? 어?’
드디어 인내심이 한계에 이른 듯했던 장 대표는 급기야 그를 향해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냈다.
생전 처음 보는 그 모습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묵묵히 죄송하다 말하고 어떻게든 해결하겠다고 선언한 뒤 사무실을 나오면서, 민혁은 새삼스레 지난 일들을 되돌아보았다.
그땐 그게 탁월한 선택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서로의 이해관계를 따져 비즈니스적으로 임한 계약결혼. 아무도 손해 볼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윈윈 전략.
하지만, 제가 틀린 거였다.
그는 결국 나이만 먹었지, 철은 덜 든 철부지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렇게 될 줄 정말 몰랐냐?’
뒤늦게 돌아온 성환의 물음에 그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실은, 정말 몰랐다. 결혼이란 것의 무게를, 깊이를 생각하지 못했다.
거짓은 오래 가지 못한다는 걸 몸으로 겪어 알고 있었으면서도.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걸 가볍게 여겼던 게 실수였다.
뭐, 이제 와서 이런 걸 후회해봐야 무엇하겠냐마는.
“…….”
참회하듯 고개를 숙인 그는 말없이 뻐근한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어젯밤부터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온몸이 찌뿌드드하고 피곤했다.
평소였다면 당장 집으로 향했을 그였지만, 오늘만큼은 그러기 싫었다.
어젯밤 난리 때문도 있었고, 무엇보다 그곳엔 늘 있던 제 아내가 더 이상 없으니까.
그리하여 들르게 된 곳이 바로 이곳 에덴이었다.
아까 전, 오늘밤은 어디서 보낼까 생각하다 퍼뜩 떠오른 것이 있었다.
언젠가 예원과 함께 밤을 보낸 적도 있는, 사무실 안의 돌침대였다.
비록 호텔 같은 쾌적한 잠자리는 아니지만 최소 제 몸 하나 뉘일 곳은 있는 곳.
게다가 등잔 밑이 어둡다고, 사람들 눈을 피하기에도 나름 적절한 장소였다.
이렇게 된 이상 오늘밤은 꼼짝없이 여기서 지내야겠다.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갈 곳 없는 제 신세가 문득 처량했다.
“……현민혁?”
그런데 불시에 불린 제 이름에, 어둠 속에서 눈이 번쩍 뜨였다.
민혁은 자동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나 하고 왔는데, 진짜네.”
“…….”
“너 여기서 뭐하냐.”
한때 너무 멋있어서 닮고 싶다고 생각했던 중저음의 목소리.
저 못지않게 훤칠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는 인영은 바로, 빌어먹을 옆 카페 사장 최우진의 것이었다.
“…….”
제기랄. 잠시 잊고 있었다. 여기서 충분히 마주칠 가능성이 있는 상대라는 것을.
차분히 표정을 고친 민혁은 미련 없이 다시 뒤로 돌았다.
무시하고 얼른 안으로 들어갈 요량이었다.
“야.”
“…….”
“도망가지 말고 잠깐 얘기 좀 하자.”
그런데, 별 것 아닌 단어 하나가 묘하게 신경을 자극했다.
도망? 고개를 꺾은 그에게서 살짝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난 할 얘기 없는데.”
“난 있어.”
“…….”
“언제까지 그렇게 피해 다니기만 할 건데.”
엄밀히 말해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상당히 고까운 표현이었다.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피해 다니긴 누가 피해 다녀.”
“아냐? 아니면 잠깐 있어. 얘기 좀 하게.”
“……우리가 한가하게 얘기 같은 걸 나눌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하, 이 자식이. 이번엔 우진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니까, 이제는 좀 바로잡아 보자고.”
“…….”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순 없잖아.”
다 지난 지금, 이제 와 저렇게 나오는 저의는 무엇일까.
보나마나 쓸데없는 얘기만 잔뜩 늘어놓을 게 뻔했다. 사람 속을 있는 대로 뒤집으면서.
굳이 대답할 가치도 없군.
이제 차가운 눈길마저 아예 거둔 민혁은 다시금 카페 문을 여는 데 열중했다.
그렇게, 그가 매장 안쪽으로 발을 내딛으려던 순간이었다.
“기자회견 할 거지?”
“…….”
“어쩔 건데. 뭐 생각해 놓은 거라도 있어?”
절대 돌아보지 않으려 했는데.
기자회견. 내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던 그 단어가 다시 한 번 그의 발목을 붙잡고 돌렸다.
“……뭐?”
“기억하는지 모르겠는데, 나 옛날에 대외용 인터뷰 담당이었어. 그런 쪽으로는 아직도 빠삭해.”
“…….”
“네 성격에 어디다 말도 못하고 끙끙 앓고 있을 게 뻔하지. 근데 너, 지금 누구 도움이라도 필요하잖아. 아니야?”
까짓 거, 내가 도와줄게.
그러니까 우리 얘기 좀 하자고.
자신의 승리를 미리 예감하듯, 남자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 * *
그로부터 며칠 후.
민혁의 기자회견은 생각보다 더욱 빠르게 잡혔다.
그런데 나날이 높아져가는 그의 인기 때문일까.
차후 기사 정도로만 나갈 것 같았던 기자회견은 유명 스트리밍 사이트를 통해 인터넷 생중계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이거 갖고 기자회견을 왜 함? 어차피 끝난 거 아닌가]
[민혁 오빠 파이팅! 전 오빠 믿어요!]
[근데……. 계약결혼이면 나한텐 완전 개이득이네ㅠㅠㅠ 오빠 돌싱이어도 봐줄게요 나한테 와요]
[정신 차려 이것들아 그런다고 현민혁이 니들 봐줄 거 같냐 ㅉㅉ]
인터넷을 끊으라던 그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아휴. 참 가관이다, 가관이야.
시작하기도 전에 별별 내용들로 빠르게 스크롤이 올라가는 채팅들을 애써 모른 척하며 예원은 긴장되는 맘을 누르고 눌렀다.
휴대폰을 꼭 쥔 오른손이 살짝 떨렸다.
“괜찮아요?”
[응. 괜찮아.]
“떨리죠.”
[좀 떨리기는 하는데, 견딜 만해.]
말은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 같아도, 정말로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었다.
방구석에서 보고 있는 나도 이 정도인데 이 남잔 도대체 어떤 마음일까.
그녀로선 감히 가늠이 불가능했다.
“……힘내요. 내가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게 이렇게 한탄스러울 줄이야.
입술을 꼭 깨문 예원이 속으로 조용히 자책하는데, 그 와중에 그가 대뜸 물었다.
[예원아. 너, 나 믿지?]
“네?”
[이따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뭘 어떻게 하든……. 나만 믿고 따라올 수 있지?]
어째 과하게 진지한 목소리였다.
당연한 얘길 이 남잔 왜 이렇게 심각하게 물어보는 걸까.
상황에 맞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자그마한 웃음이 터졌다.
“대체 무슨 얘길 하려고 이렇게 무게를 잡아요?”
[……그냥. 나 믿지, 응?]
“치. 물어볼 걸 물어봐야지. 당연하죠.”
[그래, 그럼 됐어. 다 잘 될 거야.]
뭔 꿍꿍이인지는 몰라도 그 말에 퍽 안심이 되었다.
끝까지 힘내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은 예원은 이내 노트북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제 곧, 그가 기자회견장으로 들어설 시각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배우 현민혁입니다. 바쁘실 텐데 친히 이렇게 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천천히 걸어와 마이크 앞에 자리를 잡고 앉은 그가 침착하게 말했다.
왁스로 깔끔하게 고정한 머리에, 칼 같은 각이 잡힌 정장을 차려 입은 민혁은 언제나처럼 멀끔한 태를 자랑했다.
기자회견에서 으레 하는 것처럼 프린트된 종이 몇 장을 손에 잡은 그는, 그 안에 손수 적어 내려갔을 그 내용을 차분히 읽기 시작했다.
[최근 며칠 사이 일어난 일련의 일들로 인해, 아마 여러분께서 저에게 궁금하셨던 점이 많으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저는, 기왕 이렇게 자리를 거창하게 마련한 만큼 제 입장을 최대한으로 밝혀드리기로 결정했습니다. 다소 긴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지만 부디 잘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크게 울릴 것처럼, 기자회견장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조용히 숨을 삼킨 그가 다시금 입을 떼었다.
[우선, 다른 이야기에 앞서 가장 먼저 드리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 결혼 얘기겠지. 예원은 속으로 짐작했다.
저뿐만 아니라, 저기 자리에 앉아 있는 기자들 또한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애초에 이 기자회견이 잡힌 이유가 그 때문이었으니까.
그런데 잠시 뒤.
막상 그에게서 나온 발언은 상당히 뜻밖의 것이었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저의 아버지에 관한 얘기입니다.]
그때였다. 예원의 눈빛이 일순 멍해진 것은.
“…….”
뭔가 단단히 마음먹은 듯한 남자의 표정에 그제야 느낌이 왔다.
아니. 설마, 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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