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아이를 가졌습니다
2019.02.22.
“왜 그랬냐.”
“……뭘.”
“계약결혼. 너 원래 그런 캐릭터 아니었잖아.”
조명을 최소로 켠 덕에 비교적 어두컴컴한 카페 안.
그 곳에서 민혁과 우진은 테이블 하날 사이에 두고 맥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장소도 그렇고 우중충한 분위기도 그렇고, 민혁은 자연스레 예원과 첫날밤을 보냈던 그 날을 떠올렸다.
물론, 오늘은 그 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소박한 술자리였지만.
그다지 달갑지 않은 술친구와 함께하고 있기도 하고.
“내 캐릭터가 뭔데.”
“글쎄.”
“…….”
“좀 무식하고 우직해도, 잔재주 같은 건 안 부리는 놈?”
“뭐?”
아니 이 인간이 보자보자 하니까.
언뜻 들어도 칭찬보다는 시비조에 가까운 말이었다.
민혁의 양 눈썹머리가 사납게 맞붙었다.
도와주겠다는 말에 낚여, 지겹게 증오하기만 했던 놈을 이리 무력하게 앞에 둔 것이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이유가 있었을 거 아니야. 왜 그랬냐고.”
“……그딴 거 없었어. 계약결혼도 사실이 아니고.”
“참나. 이 상황에 그걸 누가 믿겠냐.”
“상관없어, 믿든 말든.”
어차피 공식적인 해명만 하고 나면 그뿐이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저, 사랑하는 그녀를 제 품에서 놓치지 않는 것.
그렇게만 된다면 그까짓 의미 없는 기자회견쯤은 몇 번이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진은 그와 생각이 좀 다른 모양이었다.
“야, 넌 네 생각만 하냐. 예원 씨 생각은 안 해?”
“…….”
“그렇잖아도 현민혁 와이프라고 여기저기서 시기 질투 다 받았을 판인데, 거기다 계약결혼에 팔려간 여자라는 오명까지 붙는 건 좀 곤란하잖아. 좀 더 확실하게 해명해야 더 큰 오해를 안 받지. 안 그래?”
맥주를 한가득 입에 담은 그가 혀를 천천히 굴리며 우진을 쳐다보았다.
그런가. 듣고 보니 그도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와 그녀 중 더 안 좋은 소릴 듣게 될 쪽을 꼽으라면, 당연히 십중팔구 그녀 쪽일 터였다.
안 그래도 미안한 것만 많은 입장인데. 그녀에게 그런 시선까지 덧입혀지는 건 죽어도 싫었다.
근데 그럼, 뭘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민혁의 얼굴엔 금세 수심이 가득 찼다.
여기 오면 그래도 속이 좀 시원해질 줄 알았건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생각은 더더욱 많아지고 있었다.
물론 그 이유의 팔 할은 눈앞의 저 놈 때문일 것이다.
애초에 이따위 혹을 붙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민혁아.”
“…….”
“말이 나온 김에 말인데. 그때, 나 사실은 좀 후회했다.”
“……뭘.”
그 와중에 본능적으로 가시를 세운 민혁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런 그를 알아챈 듯, 엷은 미소를 지은 우진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너한테, 내가 너무 말을 아꼈던 거.”
“…….”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널 기만하려던 게 결코 아니었다고.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고 생각했어. 다 알고도 그런 거면 그건 그냥 미친놈인 거니까. 우리 사이에 그 정도 믿음은 있을 줄 알았어. 그래도, 우리 꽤 오래 붙어 지냈잖아. 연습생 생활도 같이 하고.”
민혁은 그 상태 그대로 정지한 채 우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우진에게선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금 와서 이런 얘기하는 거 웃기단 건 아는데, 그래도 그냥 들어.”
“…….”
“네가 혜인이랑 사귀고 있는 줄 알았으면, 그런 일은 절대 없었을 거야. 근데 차마 그런 식으로 말을 할 수가 없었어. 네 입장에선 내가 그저 죽일 놈이었을 텐데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도 아니고, 나만 보면 펄펄 뛰는 너를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어가면서 자극시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냥 시간이 지나면 어련히 알아서 오해가 풀리겠거니, 내 나름대로 선을 지키자고 한 거였는데.”
“…….”
“근데…… 그게 내가 제일 잘못한 거였더라고.”
민혁은 아마도 절대 믿을 수 없겠지만, 딱 한 번의 입맞춤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평소 친하게 지냈던 혜인은 그저 여동생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인지 몰라도 그때는 펑펑 울고 있는 혜인이 예뻐 보였고, 마냥 달래주고 싶었다.
그래서 다소 충동적으로 입을 맞춘 거였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큰 파장으로 돌아올 줄은 그도 예상하지 못했다.
제 앞에서 아무런 내색도 않던 혜인이 알고 보니 민혁과 사귀는 사이였다니.
일이 터질 대로 터진 뒤에야 알게 된 그 사실은 민혁 뿐만 아니라 우진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었다.
처음엔 좀 억울했지만, 이제는 딱히 그럴 것도 없었다.
좀 더 확실히 해명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 가장 크다고 생각했으므로.
다만, 이제는 이 지긋지긋한 감정의 골을 끊어내고 싶을 뿐이었다.
아무리 그가 마이웨이로 사는 최우진이라지만, 누군가에게서 지속적으로 미움 받는다는 것이 유쾌할 리는 없었다.
게다가 그것이 한때 나름 아꼈던 동생, 현민혁에게서라면.
“사람은 항상 자기 식대로 해석하게 돼 있어. 적당히 이 정도면 되겠지, 해도 그게 적당할지 안 적당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지. 이번 일도 그래. 이왕 기자회견 할 거면, 확실하게 뿌리 뽑아. 대충 아니라고 하면서 때우지 말고.”
“…….”
“아무튼, 그때 일은 내가 미안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사과할게.”
민혁은 여전히 우진을 보며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이참에 공개적으로 크나큰 약점이 생겼겠다, 몇 살 더 먹은 형이랍시고 또 잘난 척만 들입다 늘어놓을 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이 분위기는 뭔지.
하자던 이야기가 이런 이야기였나.
하는 쪽도 물론 그닥이겠지만 듣는 입장에서도 당황스러운 사과였다.
“……그래서, 이제 와서 뭘 어쩌자고.”
“뭐 어쩌잔 거 아냐. 그냥, 이쯤에서 말은 해둬야 할 것 같아서.”
“…….”
“그래도 명색이 옆 카페 사장인데, 사장들끼리 일상대화 정도는 나눌 수 있어야 하지 않겠냐.”
가벼운 웃음과 함께 맥주 한 모금을 삼킨 우진이 마침 생각난 듯 덧붙였다.
“아 근데, 내가 예원 씨 좋아했던 건 진짜다. 엄연히 너보다 내가 먼저 좋아했어.”
“……뭐?”
“계약결혼인 줄 알았으면 진작에 대시해보는 거였는데. 에이, 아깝다.”
……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예상외로 굴러가는 분위기에 약간 유순해져 있던 민혁의 눈썹이 다시금 꿈틀거렸다.
으이그, 자식. 아직도 저렇게 어린 티를 내요.
우진은 다 안다는 듯 여유롭게 웃었다.
“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 하겠네. 방금 너 눈에서 레이저 나오는 줄 알았다.”
“…….”
“그건 그렇고, 이제 그놈의 기자회견 멘트를 좀 생각해 볼까.”
맥주캔을 내려놓은 우진이 박수를 한 번 짝 치더니 말을 이었다.
“네가 기자회견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는 건 빤할 거야. 넌 그걸 역으로 이용해. 떡밥 주워 먹으려고 눈에 불을 키고 있는 사람들한테, 네가 먼저 거대한 떡밥을 투척해주는 거지.”
“……어떻게?”
“그거야 네가 차차 생각해 봐야지. 아, 네 아버지 건도 괜찮겠네. 곧 있으면 지방 선거잖아. 제일 효과적이겠다. 어차피 너 그쪽이랑 사이도 안 좋잖아.”
“…….”
“뭐, 굳이 그런 게 아니라도. 계약결혼에 관한 건 한 방에 정리될 수 있는 방법이 따로 있기는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아는 척하는 걸론 세계 제일인 놈이다.
한껏 거들먹거리는 우진의 태도에 민혁은 짜증이 올랐지만, 마지막 말만은 무척이나 솔깃하게 다가왔다.
“그게 뭔데.”
“궁금하냐?”
“…….”
“그럼 일단 건배부터 해.”
제 앞으로 대뜸 맥주캔을 치켜든 우진을, 민혁은 그저 멀뚱히 바라보았다.
“뭐해. 빨리.”
평소였다면 뭔 개소리냐며 바로 무시했을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제가 아쉬운 입장인 건 분명했다.
젠장. 내가 저 놈과 건배 나눌 사이는 좀 아니잖아.
그 옛날, 놈을 향해 날렸던 주먹이 왠지 모르게 지끈거렸다.
“……착각하지 마. 난 여전히 형이 소름끼치게 싫어.”
“알아, 인마.”
누가 뭐래냐.
우진은 웃음과 함께 뒤따라 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사실, 난 지금 너한테서 ‘형’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는데, 뭐.
그거면 된 거지.
애초부터 좋아해주길 바라지도 않은 그였다.
“자, 건배.”
툭, 커다란 맥주캔이 나름대로 사이좋게 부딪쳤다.
공허하기만 하던 카페 안은 이내 취기가 오른 두 남자의 말소리로 두런두런 채워졌다.
‘화해’까진 아니라도 ‘화합’ 정도까진 될 법한 시간이 지나간다.
어느덧 밤이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 * *
[배우, 그리고 유명인이라는 타이틀로 살아오면서 제 사생활에 대해 따로 밝히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니다. 연기로만 말을 하면 그뿐, 그런 걸 굳이 제 입으로 말하는 건 쓸데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저뿐만 아니라 제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걸 보면서 생각이 좀 달라졌습니다. 마냥 함구하는 것만이 옳은 일은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게 된 것입니다.]
꽤나 오래 생각을 정리한 듯,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차분한 목소리.
45도 각도로 시선을 내리깐 채, 천천히 말을 이어나가는 제 남편의 모습을 예원은 멍하니 지켜보았다.
[언론에 보도된 바와 같이, 전 국회의원 현태균 씨는 저의 생물학적 친부가 맞습니다. 물론 제게 이복형제가 있는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그 외의 것들은 대부분이 사실과 다릅니다.]
[저의 친어머니는 제가 어렸을 적에 돌아가셨습니다. 사유는 병환 때문이었지만, 그 전에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아버지의 외도였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현태균 씨는 지속적으로 외도했던 그 상대와 재혼을 했고, 저는 자연스럽게 그 집에서 외딴 신세가 되었습니다. 부모님이 두 분 다 돌아가셨다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까지 해가며 가정사를 지금껏 숨겨온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저에겐 가족이 없다고 생각했고, 밝히지 말아 달라 미리 부탁도 했었기에 영원히 비밀로 부쳐질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현태균 씨는 자신의 지지율을 위해 저의 유명세를 이용하고자 하였고, 그래도 그에게 최소한의 양심은 있을 거라 믿었던 저는 아버지의 언론 플레이로 인해 희생양이 되어야 했습니다.]
[저는 더 이상 그를 아버지라 부르고 싶지 않습니다. 단 한 번의 우애를 나눠 본 적 없는 형을 형이라 부르고 싶지도 않습니다. 사이가 유별나다 못해 돈독했다는 이야기는, 오로지 그쪽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입니다.]
늦게야 수면 위로 드러나는 충격적인 사실에, 카메라 플래시는 쉴 새 없이 터졌다.
거기에 사람들의 자그마한 웅성거림이 더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초연한 얼굴이었다.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오늘 이 시간부로, 어디에서든 저와 현태균 씨를 결부 짓는 일은 결코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천륜을 져버리려는 몹쓸 놈이라고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오늘 제가 이 이야기를 드리기까지 홀로 많은 고민을 거듭했다는 점만 알아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말씀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또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제 아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기나긴 서두 아닌 서두에 이어, 마침내 자신의 대목에 이르렀다.
예원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사이트에 익명으로 게재된 글을 읽었습니다. 저의 측근이라 주장한 주 모 씨의 이야기도 전해 들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저와 아내를 두고 최근에 불거졌던 그 소문은, 절대로 사실이 아닙니다.]
[며칠 전 저의 신혼집에 침입하여 저의 개인적인 사생활을 캐내려 했던 주 모 씨는 제가 가수 생활을 했을 때 만난 사생팬 출신으로, 저의 친인척마저 그 얼굴을 기억할 만큼 매우 악질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저와 아내를 갈라놓기 위해 제가 개인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업장에까지 침투했던 인물입니다. 주장의 신빙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다, 물론 사실이 아니기에 신빙성을 논하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사실 저희 두 사람은 얼마 전 혼인신고까지 마쳤습니다. 결혼을 한 지가 언젠데 이제야 혼인신고를 했느냐고 의문을 품는 분들도 당연히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시는 분들은 아시다시피 요즘에는 결혼식을 올리고도 일부러 혼인신고를 늦게 하는 커플들이 많습니다. 저희도 그런 경우에 불과했습니다. 만약 이런 일이 불거질 줄 알았다면 좀 더 시기를 당겼을 텐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도 못 했습니다. 이 또한 어찌 보면 저의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만약 그들의 주장대로 저희가 결혼 1년을 채우고 이혼을 하려 했다면, 법적으로 강제력이 있는 혼인신고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았겠죠. 무엇보다, 저희 두 사람의 결혼이 사실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따로 있습니다.]
그때. 한참 말을 잇던 그가 돌연 수줍은 얼굴이 되었다.
갑자기 왜 저러지?
순조롭게 잘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중에도, 예원은 이상하게 불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라면 어련히 알아서 잘 준비했을 텐데.
[이런 자리에서 공개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는데……. 이 어이없는 사태를 불식시키기 위해, 저는 이 기쁜 소식을 어쩔 수 없이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사실은, 제 아내가 얼마 전…….]
자리에 있는 모두가 숨을 죽이는 가운데, 머뭇거리던 그는 결국 목소리를 틔워냈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나 기쁘게도,]
그의 전매특허.
실로 오랜만에 나온 라스트 팡이었다는 것은 약 3초쯤 뒤에야 알 수 있었다.
[아이를 가졌습니다.]
고른 치열이 고스란히 보이는 그 특유의 시원한 미소를 보며, 예원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