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엎친 데 덮친 격
2019.02.15.
다시 눈을 뜨기까지가 찰나의 순간 같았다.
예원은 잘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렸다.
창문을 통해 스민 아침햇살이 곧장 눈을 아프게 때려왔다.
“어, 정신이 좀 들어?”
이윽고 게슴츠레하게 뜬 시야 안에 누군가가 잡혔다.
걱정을 가득 담은 채 저를 응시하고 있는, 제 남편의 얼굴이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꽤 오랜 시간 입을 열지 않은 터라 잔뜩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연히 집인 줄로만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곳은 병실이었다.
그제야 병원 특유의 시큼한 냄새를 감지한 예원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링거바늘이 꽂혀 있는 손등이 아릿아릿했다.
“일시적인 쇼크 같대. 자세한 원인은 검사해봐야 알 수 있다고 하더라고.”
“아…….”
“너무 안 깨서 깨울까 하다가, 간만에 푹 자는 것 같아서 그냥 뒀어. 몸이 많이 놀라고 피곤했나 봐.”
“…….”
“미안해. 내가 너무 늦게 가서.”
간밤 새 까맣게 타버린 것 같은 남자의 얼굴이 눈에 아프도록 박혔다.
나도 나지만, 이 남잔 이 남자대로 얼마나 놀랐을까.
예원은 몸이 따라주는 최대한의 빠른 속도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설마 그런 일이 있을 줄 누가 알았나……. 나도 도착하고 나서야 알았는데요, 뭐.”
“…….”
“……가윤 씨는, 어떻게 됐어요?”
그녀의 질문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듯, 쓰게 미소 지은 민혁은 차분하게 설명했다.
“경찰에서 연행해 갔어. 죄목이 여러 개이긴 한데, 개중엔 주거 침입죄만 성립될 것 같아. 따로 절도를 하거나 한 건 아니라서 벌금형 정도로 끝날 것 같긴 하다는데, 내가 어떻게든 끝까지 처벌 주장해보려고.”
“…….”
“걱정 마. 이제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정말 그럴까.
제 남편은 확실히 믿음직스러운 사람이었지만 이 상황에서 그의 말을 무작정 믿기는 힘들었다.
입술을 꾹 다문 예원이 눈을 잠시 내리깔았다.
순간, 희미해져 있던 뇌리에 종이 한 장이 펄럭 스쳐지나갔다.
“맞다. 그, 계약서는…….”
“아, 그거.”
눈을 번쩍 뜬 예원이 말끝을 흐리자, 민혁은 곧바로 말을 받았다.
“내가 바로 찢어버렸어. 파쇄기 수준으로 아주 갈기갈기 찢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아, 그랬구나.
제일 결정적인 증거가 사라졌단 소식에 예원은 그나마 안도했다.
물론, 이렇게 된 지금 이 시점에 별 소용은 없는 일이었지만.
“……미안해요. 괜히 그런 거 만들자고 하는 게 아니었는데.”
“쓸데없는 소리는. 미안한 건 나지. 안 그래도 나 당신한테 미안해 죽겠는데, 더 미안하게 만들려고 그래?”
“…….”
“신경 쓰지 마. 그런 일이 있을 줄 누가 알았나.”
방금 전 제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남자 덕에 피식 웃음이 났다.
전쟁 같던 마음이 그나마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몇 시간 있다가 바로 검사해야 된대. 그때까진 아무 생각 말고 쉬어.”
“……네.”
“깨어난 거 봤으니까, 난 이제 이만 가 볼게.”
“지금요?”
“응. 실은 아까 전에 갔어야 되는데, 내가 일어나는 거 보겠다고 고집 부린 거거든.”
“……아.”
“성환이 형이랑 이모님께 말해둘 테니까, 검사 받고 퇴원하면 잠깐 이모님 댁에 가 있어.”
“나 혼자요?”
“응.”
침착한 그의 말에, 잠시 눈을 굴리던 예원이 머뭇머뭇 물었다.
“그럼…… 민혁 씨는요.”
그녀라면 이런 식으로 나올 줄 알았다.
민혁은 안심하라는 듯 애써 미소를 지었다.
“난 괜찮아. 이런 일 익숙해. 내가 걱정하는 건, 오직 너야.”
“…….”
“어쩌면 기자들이 이모님 댁에도 찾아갈지 몰라. 절대 문 열어주지 말고, 혹시나 밖에 나갈 일 있으면 꼭 성환이 형한테 말해. 무조건 피해 있어야 돼. 내 걱정은 말고. 알았지?”
아니, 내가 어떻게 당신 걱정을 안 해.
예원은 금세 울상이 되었다.
“싫어요……. 그냥 민혁 씨랑 같이 있으면 안 돼요?”
그녀가 살짝 울먹임 섞인 목소리로 물었지만, 민혁은 그것을 단호하게 잘라냈다.
“……안 돼. 지금은 일단 내 말 들어, 예원아.”
“…….”
“조금만 참아. 이번 일만 무사히 넘기면, 그때부터는 같이 있기 싫다고 해도 같이 있을 거니까.”
다 잘 될 거야. 그러니까 나 믿고 기다려 줘. 알았지?
평소보다 유독 다정하게 들리는 목소리는 그녀로 하여금 신뢰를 심어주고 싶은 듯했다.
그런 그의 맘을 너무도 잘 알 것 같아서, 예원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참, 가기 전에 나랑 약속 하나만 하자.”
“……약속이요?”
“응, 약속.”
발걸음을 돌리려다 우뚝 멈춰 선 그가 무척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심심하면 TV 봐도 되는데, 대신 연예정보 프로그램은 금지야. 인터넷 기사 댓글 찾아보는 것도 안 돼. 차라리 네이버 어플을 지우든가.”
“네?”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어대건 신경 쓰지 말라는 소리야. 눈 감고 귀 막고, 온종일 놀고먹고 자는 일에만 집중하라고. 알았지?”
나참. 문득 드는 억울함에 예원의 입술이 부우 튀어나왔다.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무슨 백수 같네.”
최소 임산부든가.
하지만, 반면 그는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그녀가 귀엽기라도 한 듯이.
“맞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백수처럼 지내. 그게 내가 제일 바라는 거니까.”
“…….”
“에덴은 잠깐 휴업할 거라고 말해 뒀어. 삼촌한테 부탁드리는 것도 생각은 해 봤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더라고. 한동안은 안팎으로 시끄러울 것 같아서. 괜히 민폐 끼칠 것 같아.”
하긴, 이 상황에서 영업은 좀 무리겠지.
잠시 생각하던 예원은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긍정하는 얼굴을 했다.
“나랑 약속해. 괜히 허튼 생각 같은 거 하지 않기로. 응?”
“……알았어요.”
“그래. 그럼, 그런 의미에서.”
순순히 대답하는 그녀가 기특한 듯 씩 웃어 보인 그가 뒤편에서 무언가를 가져왔다.
“자, 빠른 회복을 기원하는 선물.”
엥, 갑자기 웬 선물?
몸을 살짝 일으킨 예원은 그것을 엉거주춤 받아 들었다.
엄청나게 뻔한 모양임에도, 그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는 없었다.
“원하던 게 이게 맞는지 모르겠네. 기억나는 대로 설명하긴 했는데.”
“…….”
“이 와중에 이런 거나 사러 갔다 온다고 형이 엄청 뭐라 하는 거 있지.”
그건…… 꽃다발이었다.
연하고 진한 색의 핑크 라펄 장미들이 푸른 잎사귀, 다른 꽃들과 한데 어울려 향긋한 빛을 발하고 있는 꽃다발.
다음에 달라던 그녀의 말을 잊지 않은 그가 준비해 놓은 선물이었다.
“…….”
진짜 이 와중에 이런 선물이라니.
생뚱맞게 튀어나온 그의 성의가 감동적이면서도 왠지 모르게 짠해서, 새삼스럽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아씨, 이러면 안 되는데.
“실은, 이거 주려고 기다린 것도 있어. 일어났을 때 바로 주고 싶어서.”
“…….”
“어때. 맘에 들어?”
힐끔 제 의중을 살피는 그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예원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괜스레 고개를 숙여 향기를 맡았다.
“……네, 예뻐요.”
너무 너무 맘에 들어요. 정말 진심으로.
진정 기쁜 듯 입가에 미소가 만개한 그녀를 보며, 민혁도 덩달아 기분 좋게 웃었다.
이렇게 예쁘게 웃으니, 내가 미처 발걸음을 뗄 수가 있나.
“사실, 나 지금 수 쓰는 거야. 어제 일로 까먹은 점수 다시 따려고.”
“…….”
“당신에 비하면 한없이 부족한 남편이지만, 예쁘게 좀 봐줘.”
앞으로도 물량공세 열심히 할 테니까.
미소를 머금은 두 사람은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마주보았다.
맞닿아 있는 시선이 창문을 넘고 들어온 햇살보다도 더 따스했다.
입맞춤보다도 더 달콤한 눈빛이었다.
간밤의 그 시끄러운 일마저 잠시 잊게 만들 정도로.
* * *
“제수씨는. 괜찮아?”
“어, 이제 괜찮아. 확인하고 왔어.”
병원 지하 주차장.
아쉬워하는 그녀를 뒤로하고 온 민혁이 조수석에 올라탄 순간, 이미 운전석에 타 있던 성환이 말을 걸었다.
“야. 그나저나 너 이제 어떡할래.”
“……뭘.”
“몰라서 묻냐.”
“…….”
“이거 봐.”
성환에게서 폰을 넘겨받은 그의 미간에는 이내 깊은 주름이 졌다.
[인기배우 현민혁과 그 아내의 진실을 낱낱이 폭로합니다]
하얀 바탕에 똑똑히 담겨 있는 제 이름을, 민혁은 참담한 심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오늘 새벽, 한 익명 계정의 SNS를 통해 퍼진 게시글이었다.
비록 인증은 못 하지만 모두가 사실임을 주장한 그 글은 이미 일파만파 퍼져 네티즌들로 하여금 엄청난 파급력을 낳은 듯했다.
그와 더불어 어제 막 그의 드라마가 종영을 하기도 했기에 검색어 순위 1위에서는 꼭두새벽부터 단연 그의 이름이 빠질 줄을 몰랐다.
아직은 비교적 잠잠하지만, 지난밤 가윤과 있었던 소동 또한 아마 점점 빠른 속도로 퍼질 터였다.
“현태균 아들로도 모자라서, 스토커의 만행에 이번엔 계약결혼?”
“…….”
“하, 참. 너도 정말 여러모로 스펙터클하게 산다.”
근심 가득한 성환의 말에, 민혁의 입가에선 이내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자신 또한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타이밍이 이토록 절묘하다니.
누가 올렸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주가윤과 관련되어 있는 인물임은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어쨌든 그건 그렇다 치고.
“근데, 정말이냐.”
“……뭐가.”
“계약결혼. 사실이냐고.”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한 입장이라 마냥 당당할 수는 없었다.
잠깐의 머뭇거림 끝에 민혁은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이었지.”
“……사실이면 사실이지, ‘사실이었지’는 또 뭐야.”
“사실이었는데, 지금은 아니라고.”
그런 그를 탐색하듯 바라보던 성환은 돌연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그래. 네가 그런 걸로 날 속일 군번은 못 되지. 너 같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놈이 세상에 또 어디 있는 줄 아냐.”
“…….”
“처음부터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어. 결혼을 서둘러도 너무 서두르길래. 근데 어느 순간부터 희한하게 의심이 안 들더라. 그냥, 네가 그러는 것도 당연해 보여서.”
“…….”
“넌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 넌 처음부터 제수씨한테 빠져 있었어 인마. 알아?”
……내가, 그랬나?
생각지 못한 성환의 말에 민혁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애초부터 그 말도 안 되는 계약결혼을 하려고 들었다는 것 자체가 자신에겐 크나큰 도박이자 모험이었으니까.
혜인과의 연애 이후 철옹성에 가까운 철벽으로 유명했던 그였다.
아무리 게이 루머가 고달프고 싫었어도, 예원에 대한 일말의 호감조차 없었더라면 그런 식으로 결혼을 선택하진 않았을 것이었다.
저런 여자라면 가짜 결혼도 괜찮을 것 같다, 처음부터 그런 우스운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이제 어떡할 거야.”
“……해명해야지. 아니라고.”
“어떻게?”
민혁이 그답지 않게 바로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어쩔 수 없는 거였다.
호기롭게 말하기는 했지만, 그로서도 딱히 뾰족한 방도가 없는 게 사실이었으므로.
“……잘.”
“미친놈.”
저런 소리에 딱히 반박을 할 수 없는 것도 짜증나고. 젠장.
“……아무튼 그건 내가 알아서 생각해 볼 테니까, 형은 최대한 빨리 기자회견이나 좀 잡아줘.”
잔뜩 어두워진 얼굴이 무지막지한 착잡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휴, 이 자식을 어쩌면 좋냐. 또 이 일은 도대체 어떻게 수습하고.
이게 연예인이 맞긴 맞나 싶을 정도로, 함께했던 수년 남짓 동안 누구보다 잠잠하고 조용한 생활을 이어왔던 현민혁이었다.
그러나 최근 일 년 새에는 이 자식 덕분에 바짝 바짝 늙는 기분이 들었다.
이러다 폭삭 늙은이 되겠구만.
푹 한숨을 내쉰 성환이 운전대를 거칠게 잡았다.
“……알겠으니까, 넌 인마 이따 대표님한테 깨질 것부터 걱정해.”
두 남자의 애환과 근심 걱정을 가득 싣은 차는, 그렇게 부릉 출발했다.
* * *
예정돼 있다던 검사는 생각보다 별 것 아닌 거였다.
순조롭게 모든 검사를 마친 예원은 몇 시간 뒤, 이모인 은아를 대동한 채 진료실에서 담당 의사를 접견했다.
“결과 보니까 별다른 이상은 없는데. 요즘 스트레스 받을 일이 좀 있으셨어요?”
차트를 들여다 본 여자 의사가 안경을 살짝 들어 올리며 물었다.
좀체 병원에 잘 드나들질 않아서일까.
의사를 대하는 것은 왜 이렇게 매번 어려운지.
예원은 저도 모르게 소심해져 대답했다.
“……아, 네.”
“미주신경성 실신은 건강한 사람한테도 간혹 일어날 수 있어요. 이런 일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면 문제지만, 보통은 저절로 회복되니까 큰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네에.”
휴, 그래도 다행이다.
요새 뭐만 하면 머리도 아프고 몸도 좋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역시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니까.
그나마 안심한 예원이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데, 뒤에 서 있던 은아가 대뜸 끼어들었다.
“그럼, 특별히 안 좋은 데는 없는 거지요? 멀쩡하던 애가 갑자기 쓰러졌다니까 걱정이 돼서…….”
“아, 예. 다만, 환자 분께서 현재 홑몸도 아니시니까 더욱 각별히 신경 쓰시긴 해야 할 거예요. 안 그래도 몸이 많이 약해져 있는 상황에 실신이 자꾸만 발생하면 그게 또 태아한테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거든요.”
“……네?”
그러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방금 뭐라고 한 것 같긴 한데, 내가 혹시 잘 못 들었나?
“홑몸이, 아니라뇨? 그게 무슨…….”
“네? 모르셨나요?”
그 말을 끝으로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영 의외라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린 의사가 당연한 진리를 읊듯 말했다.
“홍예원 씨, 지금 임신 중이시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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