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 좋아질 수 없는 남자-89화 (89/102)

89. 직감

2019.02.08.

[얼굴이 좀 달라져서 못 알아봤는데, 하연이랑 얘기하다 보니까 기억이 났다. 걔, 예전부터 우리 민혁이 죽자사자 쫓아다니던 애였어. 민혁이한테 그러다 못해 나한테까지 찾아올 정도였으니까 아주 악질 중에 악질이었지. 신고를 할까 하다가 어린애한테 영 못할 짓 하는 것 같아서 그만뒀는데, 고새 쌍꺼풀이라도 했는지 애가 딴 사람이 돼서는…….]

윤 교수의 말은 그 뒤로도 한참 이어졌다.

그런 애가 대체 우리 카페에 왜 매니저로 오게 됐느냐며. 무슨 이상한 꾀라도 있는 것 아니냐며.

물론 예원은 그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까마득하게 묻혀 있던 기억이 머릿속을 쏜살처럼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사장님이요? 아뇨. 왜요?’

그를 아냐는 질문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답하던 그 얼굴.

‘사장님 뜻대로 하시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은연중에 그녀의 의견을 배제시키고 은근슬쩍 그를 편들던 그 목소리.

‘사진 같은 건 못 본 것 같아요. 죄송해요.’

순수한 척 답하며 짓던 그 미소.

‘예, 예전에…… 여기 손님으로 자주 들른 적은 있어요. 아마 그래서…… 기억하시나 봐요.’

당황한 듯 말을 더듬거리던 그 모습까지…….

동시다발적으로 선명해지는 기억의 조각들을 주섬주섬 모으며 예원은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

왜, 왜 이제야 알았을까.

알아달라고 외치지만 않았다 뿐이지, 매번 그렇게 온몸으로 티를 냈는데.

‘사생팬이요?’

‘응. 옛날에 나 숙소 생활 할 때는, 아예 집안까지 들어온 사생도 있었어.’

‘헐……. 정말요?’

‘주민등록번호나 휴대폰 번호 같은 거 털어가는 건 예사였고. 건조대에 넣어놓은 속옷도 훔쳐가고, 몰래 숨어 들어와서 자는 거 빤히 쳐다보고 가기도 하고. 뭐 그랬지.’

‘와…… 미친 거 아니에요? 그건 그냥 범죈데?’

그럼, 그 사생팬이었다던 애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만 가슴이 철렁했다.

귓가에 폰을 가져다 댄 채, 한참동안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던 그녀는 어느 순간 스르르 폰을 내려놓았다.

순식간에 과부하가 걸린 머리는 어느새 용광로처럼 뜨거워져 있었다.

“……왜요, 무슨 일 있대요?”

그렇게 얼마쯤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을까.

넌지시 물어오는 목소리에 가까스로 정신이 들었다.

“…….”

예원은 대답 대신, 저를 향해 뜻 모를 미소를 머금고 있는 여자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물었다.

“오늘…… 왜 날 여기로 부른 거죠?”

실마리를 잡는 것은 어려워도, 그걸로 꼬여있는 수수께끼를 푸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모든 걸 깨닫고 나니 본능적으로 뭔가 감이 잡혔다.

“거짓말이죠? 나한테 말했던 이유.”

이 여잔 분명 뭔가를 알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무슨 얘길 하고 계신 건지 모르겠네요.”

“…….”

“내가, 왜 거짓말을 해요?”

그것을 순순히 실토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믿던 사람에게서 발등을 찍히는 기분,’

‘…….’

‘혹시 알아요?’

뻔뻔하게 미소 짓는 얼굴 위로 방금 전 저를 향해 속삭이던 여자의 얼굴이 색칠하듯 덧그려진다.

독한 술을 마신 듯, 목구멍이 타들어갈 것처럼 따가웠다.

‘……당했구나, 나.’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말은 딱 하나였다.

“잠깐만요. 어디 가시려고요?”

가야 해. 지금 당장.

“놓으세요.”

“홍예원 씨.”

“놓으라고요!”

자리에서 일어난 두 여자의 눈빛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예원은 자신을 필사적으로 부여잡은 듯한 여자의 손을 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한순간 저와 여자에게로 몰린 근처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지고 있었다.

“왜요?”

“…….”

“내가 지금 가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 보죠?”

당신이 날 떠봤으니, 이젠 내가 당신을 떠볼 차례인가.

저에 맞서 눈에 날을 세울 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는 여자를 노려보며, 예원은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당장 놔요. 좋은 말로 할 때.”

뭐 애초에 기다려 줄 생각도 없긴 했지만.

여자의 팔을 팩 내팽개친 예원은 또각또각 바쁜 구두 소리와 함께 자리를 떴다.

감히 누구도 잡지 못할 만큼 싸늘한 태세였다.

‘……쳇, 하여튼 계집애가 꼴에 눈치는 있어서.’

하지만, 저래봤자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녀의 사라지는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혜인은 이내 더러운 것을 떨쳐내기라도 하듯 가볍게 손을 털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느긋하게 폰을 꺼내 들었다.

* * *

“말도 안 돼……. 말도…….”

길가로 나와 서둘러 택시를 잡으면서 예원은 연신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와의 일로 한껏 약이 올라 있는 저 여자가 절대 좋은 맘으로 날 불렀을 리 없었는데.

난 왜 그 술수에 홀랑 넘어가 준 걸까?

누군가는 우릴 진심으로 걱정해줄 거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다, 바보.

어리석었던 자신을 향한 자책과, 해봐야 의미 없는 후회만이 계속되고 있었다.

[전에 에덴 갔다가 매니저님한테서 받아뒀어요, 혹시 몰라서.]

여러 가지 정황, 그리고 본능적인 직감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조혜인과 주가윤이 한 패라는 것은 거의 확실했다.

그런데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은, 조혜인이 저를 ‘왜’ 이 곳으로 불러냈느냐는 것이었다.

‘무슨 속셈이지, 대체?’

그 여자가 날 부르지만 않았더라도, 난 그저 평소처럼 집에 조용히 짱 박혀 있었을 텐데.

그런 날 왜 굳이 여기까지……?

“어? 제수씨.”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사이, 마침 앞으로 차 한 대가 당도했다.

익숙한 호칭에 그녀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제수씨 맞네. 왜 여기 나와 있어요?”

운전석에 앉은 이는 다름 아닌 성환이었다.

“민혁이 아직 못 만났나? 아까 전에 출발했잖아요.”

서프라이즈 등장에 앞서, 예원은 성환과의 연락을 통해 민혁의 동태를 미리 파악해놓았었다.

작전이 꼭 성공하길 바란다며, 퇴근하는 길에 가능하면 잠깐 들르겠다더니.

아무래도 그냥 가기는 맘이 놓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제수씨?”

그런데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성환의 얼굴엔 금세 의문이 떠올랐다.

마주 서 있는 여자의 눈이 매우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는 탓이었다.

꼭 두려움에 떨기라도 하는 것처럼.

“왜 그래요. 어디 안 좋아요?”

“매니저님…….”

“…….”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를 쳐다보는 눈빛이 퍽 간절해서, 성환은 여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무슨 일이지?

* * *

“예원아. 많이 기다렸……?”

한편 이야기를 마치고 온 민혁은 자리로 돌아와 예원을 찾았다.

하지만, 제가 사랑하는 그녀의 자취는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어딜 간 거지?”

나한텐 말도 없이. 잠깐 화장실 갔나.

생각지 못한 상황에 머리를 긁적거리는데, 마침 근처에 앉아있던 혜인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 혹시 우리 와이프 못 봤어?”

그 한 마디에, 여유롭게 고개를 돌리던 혜인의 표정이 대번 구겨졌다.

우리 와이프라니. 호칭 한 번 듣기 거북하네.

“……글쎄, 난 못 봤는데.”

“그래?”

대수롭지 않게 눈썹을 으쓱거린 민혁은 습관적으로 자리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휴대폰이 주머니에서 부르르 진동하며 그를 깨웠다.

“여보세요?”

[……민혁 씨.]

“뭐야, 예원아. 어디 간 거야?”

끽해봐야 이 근처려니 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소음은, 누가 들어도 차 안임을 알 수 있을 만큼 시끌시끌했다.

[……나 지금 매니저님이랑 집 가고 있어요.]

“성환이 형이랑?”

어라. 여기서 갑자기 그 형이 왜 튀어나오지?

“집은 갑자기 왜.”

[……그냥, 급하게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요. 미안해요.]

“아니,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이왕 온 김에 마지막회도 같이 보고, 끝나면 간만에 바깥에서 오붓한 시간 좀 보내고 들어가려 했더니만.

이렇게 금방 갈 거였으면 구태여 왜 여기까지 온 건가.

민혁은 푸시식 실망한 마음을 저도 모르게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런데 그런 그의 귓가로, 곧이어 이상하리만큼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혁 씨, 마치는 대로 최대한 빨리 와요.]

“어? 왜. 무슨 일 있어?”

[……아, 아뇨. 그런 건 아닌데…….]

“…….”

[하여튼. 빨리 와요. 알았죠?]

평소보다 무진장 조용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맘에 걸렸지만, 그냥 전화상이라 그런 거라고 생각한 그는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누구 분부인데, 여부가 있겠습니까. 알았어. 금방 갈게.”

미소를 지은 그는 수신이 끊긴 폰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평소와 별 다를 바 없는 통화였으나, 뭔지 모르게 스멀스멀 찝찝한 기분이 올라오는 탓이었다.

뭘까. 느낌이 좀 이상한데.

“왜, 무슨 일 있대?”

통화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었는지, 혜인이 득달같이 말을 걸어왔다.

물론 그는 단칼같이 끊어냈다.

“아니. 넌 신경 쓸 거 없어.”

하지만 그러고도 민혁은 좀처럼 폰을 도로 집어넣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여자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아직까지도 귓가에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그냥, 급하게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요.]

[민혁 씨, 마치는 대로 최대한 빨리 와요.]

저로 하여금 괜한 맘을 쓰게 하는 것이 싫어 웬만하면 속으로만 삼키고 말던 사람이다.

무슨 일이 있지 않은 한 그렇게 말할 여자가 아닌데…….

그는 맘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불안감을 딛고 선 채 치열하게 갈등했다.

대체 뭘 확인한다는 걸까.

어쩌지. 다 팽개치고 지금 당장 가봐야 하나.

“야, 저기…….”

“와, 이제 시작하나 봐요!”

그러나 타이밍은 어쩌면 이리도 얄궂은지.

언제 켜졌는지 모를, 멀찍이 자리한 대형 TV에는 그의 드라마 <마이 시크릿 맨>의 타이틀 롤 화면이 올라오고 있었다.

“앉아, 민혁 씨. 그래도 막방은 같이 봐야지.”

“…….”

“응? 얼른.”

퍽 살가운 말투로 제 옆 자리를 툭툭 치는 혜인을 내려다보며,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채로 서 있었다.

섬세하게 쌍꺼풀 진 그의 눈이 혼란스럽게 깜빡여졌다.

* * *

“민혁이가 뭐래요?”

“아, 마치는대로 곧 오겠다고요.”

“그래요.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되지.”

“……가뜩이나 많이 피곤하실 텐데.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매니저님.”

“아니에요, 그리 먼 거리도 아닌데요 뭘.”

늘 가던 민혁과 예원의 집으로 향하는 길.

가볍게 운전대를 톡톡 두드리던 성환은 고개를 돌려 예원 쪽을 힐끗 보았다.

방금 전 분명 살짝 웃고 있었던 여자의 얼굴에는 어느새 미소가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또 저 표정이네. 괜스레 신경이 쓰였다.

“저 근데, 진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아까부터 제수씨 안색이 영 안 좋아서…….”

“아…….”

……나름 티 안 낸다고 한 건데. 소용이 하나도 없구만.

잠시 침묵을 지키던 예원은 고민 끝에 성환을 불렀다.

“저, 매니저님.”

“예?”

“저 집에 가면 잠깐만, 안에 들어왔다 가주실 수 있을까요?”

“……안에요?”

“네.”

“…….”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제가…… 뭘 좀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

아까부터 계속 뭔가를 확인해야 한다고 했던 여자였다.

대체 그게 뭐길래?

아무것도 모르는 성환으로선 그저 의아할 따름이었으나, 딱히 거절을 할 이유는 없었다.

무엇보다 여자의 표정이 자꾸만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예, 그러죠 뭐.”

뭐 별 일이야 있을까.

그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평소 금방 도착한다고 생각했던 집이었는데 오늘따라 그 거리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일부러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레 집안으로 들어온 예원은 제일 먼저 1층을 살폈다.

다행인지 뭔지, 1층엔 아무런 기미도 없었다.

평소와 똑같은 깨끗하고 조용한 모습.

예원의 고개가 살짝 갸우뚱했다.

‘……이게 아닌가.’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아직 안심할 수 없다.

예원은 주차를 마치고 뒤따라 들어오는 성환을 향해 개미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매니저님은 여기 잠깐 계세요. 전 2층에 좀 다녀올게요.”

“……2층에 뭐가 있어요?”

슬쩍 눈치를 본 그가 덩달아 낮게 물었다.

예원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요.”

그녀가 언뜻 보이는 2층의 제 방문을 올려다보았다.

이제껏 별로 체감한 적이 없던, 여자로서의 육감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발동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후우. 심호흡을 한 예원은 성환을 뒤로하고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방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터져나갈 듯 두근거렸다.

솔직히 아직까지는 그녀 스스로조차도 자신의 직감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 이유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순전히 본능에 의한 판단만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그런 게 아니라면? 만약 지금, 내가 오버하는 거라면?

‘……나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여기까지 온 이상,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

열고 나왔는지 닫고 나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방문이 철창처럼 꼭 닫혀 있다.

예원은 떨리는 손을 문고리 위에 올리고, 그대로 잡아내려 문을 열었다.

그리고…….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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