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함정
2019.02.01.
[민혁 씨 전화…… 기다리셨어요?]
“…….”
[그렇잖아도 스페인 가 있단 소식은 들었는데…… 아직 안 돌아왔나 보네요.]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일순 온몸이 굳어버렸다.
퍼뜩 고개를 든 예원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혜인 씨?”
[어머, 바로 알아보시네요. 모르실 줄 알았는데.]
혹시나 했더니 정말이라니.
천연덕스럽게 맞장구를 치기엔 상황이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
이 여자가 이 시간에 왜 전화를 한 거지.
그것도 나한테?
“조혜인 씨가 제 번호는 어떻게…….”
예원의 물음에, 아, 하던 혜인은 곧바로 대답했다.
[전에 에덴 갔다가 매니저님한테서 받아뒀어요, 혹시 몰라서.]
“……매니저님한테서요?”
[네. 기분 나쁘신 건 아니죠?]
베테랑 알바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는 에덴에는 매니저라고 해봤자 하연과 가윤 둘뿐이었다.
둘 중 누구인지는 몰라도, 왜 허락도 없이 남의 연락처를 넘겨준 걸까.
쉬이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이유는 얼추 예상이 됐다.
민혁과 함께 연기하고 있는 배우이자 인기절정의 연예인.
그런 ‘조혜인’이 와서 묻는데, 당연히 줘도 별 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가뜩이나 이전에 저를 찾아온 적도 있는 여자였으니, 따로 친분이 있는가 보다 하고 오해를 했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나한테 얘기라도 하지. 이게 뭐야.’
‘기분 나쁘신 건 아니죠?’라는 말을 곱씹자 문득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물을 걸 물어야지. 너 같으면 좋겠냐?
“근데, 혜인 씨가 저한테는 무슨 일로…….”
일부러 대답하지 않고 화살을 돌렸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대 쪽에선 자연스러운 대꾸가 돌아왔다.
[사실은, 부탁 좀 드리려고 전화했어요.]
“부탁……이요?”
[네. 며칠 뒤면 저희 드라마 종방연인 거 아시죠?]
“……그런데요?”
잠시의 머뭇거림 후,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그 날, 예원 씨도 참석하시는 게 어떤가 해서요.]
“제가요?”
이게 웬 자다 말고 커피머신 잡는 소리란 말인가.
“드라마 종방연인데, 제가 왜……?”
잠시 생각하던 예원은 느릿느릿 되물었다.
자신은 그저 거기 등장하는 현민혁의 ‘아내’일 뿐인데.
드라마 관계자들이나 모이는 그런 자리에 굳이 제가 참석할 이유는 없지 않느냐는 그런 뜻이었다.
[물론 1차부터 오시기엔 좀 무리가 있겠죠. 그치만 2차부터는 괜찮을 거예요. 그때부터는 원래 관계자 외 지인들이 참석하기도 하니까. 예원 씨야, 종종 촬영장까지 와서 도와주셨으니 아예 관계없는 분이라고 보기도 힘들고요.]
“…….”
[그리고 사실 이건…… 부탁이라기보단 전적으로 두 사람을 위한 거예요.]
……이건 또 무슨 소리지?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음.]
여자는 짧게 신음하더니 이어 대답했다.
[요즘, 민혁 씨를 두고 여론이 안팎으로 시끄러운 건 이미 알고 계실 거예요. 물론 아버지와 형 문제가 컸지만…… 그 안엔 사실 예원 씨와의 문제도 포함돼 있어요.]
“……?”
[기자들이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얼마 전부터 두 사람의 불화설이 나돌고 있더라고요. 두 사람이 연애 초반처럼 매스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도, 민혁 씨가 CF 때문에 간 스페인에서 금방 돌아오고 있지 않는 것도…… 다 예원 씨와의 사이가 소원해져서 그런 거라는 소리가 있고요.]
“……네에?”
……이럴 수가.
듣도 보도 못했던 소식을 접한 예원은 대번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알아요, 말 안 되는 거. 아니 땐 굴뚝에서도 연기가 나는 게 이 세계니까. 저도 그래서 전화한 거예요.]
“…….”
[이번에 우리 드라마가 워낙 잘 되는 바람에, 아마 종방연도 꽤나 떠들썩하게 보도될 거예요. 그런 자리에서 예원 씨가 민혁 씨랑 함께 자릴 빛내주면…… 그깟 헛소리쯤이야 금방 불식되겠죠. 우리 스태프들이 그 증인이 되어줄 거고.]
“…….”
[민혁 씨와 예원 씨가 날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 알아요. 그치만 이건 내 문제가 아니라 두 사람 문젠 거 알죠? 진실과 해명을 위해선, 가끔은 이런 쇼맨십도 필요하다고요.]
그녀가 혜인을 좋아하지 않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지만, 막상 당사자의 입에서 그런 소릴 들으니 기분이 묘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편으론 약간 우습기도 하고.
“혜인 씨가 왜…… 우릴 신경 쓰시는 거죠?”
[……네?]
“그렇잖아요. 그래봤자 혜인 씨랑은 아무 상관도 없을 텐데.”
[그, 그야…….]
그녀에게서 이런 물음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 여자는 살짝 당황한 듯한 음성이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이내 단단해졌다.
[……난 두 사람한테 신세 진 입장이니까요. 민혁 씨한테는 시청률과 인기를 신세 졌고, 예원 씨는 손수 촬영장까지 와서 날 도와줬고……. 보답해야죠, 내 나름대로.]
“…….”
[예원 씨가 온다면야, 모르긴 몰라도 민혁 씨한텐 꽤나 색다른 선물이 될 거예요. 왜 예전에 김밥 싸가지고 왔을 때처럼요. 그때, 안 그런 척해도 되게 좋아하는 것 같던데.]
“…….”
[뭐 어쨌거나…… 선택은 예원 씨 몫이지만요.]
송곳처럼 날카로우면서도, 또 한편으론 봄바람처럼 살랑거리는 것 같은 여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예원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나마 정리되었다고 생각했던 머릿속은 또 금방 어질러진 방처럼 혼란스러워져 있었다.
[그럼, 전 이만 스케줄 때문에. 다음에 봐요, 예원 씨.]
전화는 그렇게 끊겼고 그녀는 조용히 폰을 내려놓았다.
꽤 긴 통화를 나누었건만, 머릿속을 끈질기게 맴도는 건 단 한마디뿐이었다.
[기자들이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얼마 전부터 두 사람의 불화설이 나돌고 있더라고요.]
불화설.
그와 자신이 소원해졌다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
“하…… 진짜.”
그의 여동생을 찾았을지도 모른다는 기쁨에 한껏 들떠 있던 기분은 순식간에 추락해 있었다.
아무리 아니 땐 굴뚝에도 연기가 난다지만,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싶다.
이제 막 혼인신고 마치고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커플한테.
뭘 어쩌고 저째?
“……뭐가 이렇게 첩첩산중이냐.”
안 그래도 골치 아파 죽겠구만, 씨.
습관적으로 한쪽 머리를 감싸 쥐던 예원은 이내 화장대에 팔베개를 한 채 옆으로 엎드렸다.
최근 들어 이런 저런 일들로 힘이 들었던 탓일까.
요 며칠 그녀는 잦은 두통과 열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다만 강도가 그리 심하지는 않아서, 혼자서도 퍽 견딜 만해 다행이었다.
“후…….”
……그래도, 얼른 그 남자가 왔으면 좋겠다.
여행 다녀오라며 등을 떠민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으면서도, 아이러니하게 불쑥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씨익 미소 짓는 그 얼굴이 환영처럼 눈앞에 아른거렸다.
‘보고…… 싶네.’
잠깐 갔다 오라고 할 걸, 너무 오래 갔다 오라고 했어.
하여튼 이럴 땐 더럽게 말 잘 듣는 남자라니까.
에잇. 입술을 잘근거리던 예원은 짜증스럽게 눈을 감았다.
.
.
.
“…….”
한편 그 시각, 마찬가지로 전화를 끊은 혜인은 뜻 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마침 지나가던 매니저가 보고 물었다.
“혜인아. 오늘 무슨 일 있어?”
“응? 왜?”
“아니, 오늘따라 기분 좋아 보여서.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보지?”
“……아.”
후훗.
다시 한 번 의미심장하게 웃던 혜인은 대답은 않고 대뜸 물었다.
“오빠, 나 이제 가도 되지?”
“어. 집 가려고?”
“아니, 집은 아니고……. 잠깐 만날 사람이 있어서.”
“만날 사람? 누군데?”
“있어, 그런 사람.”
이 시간에 만날 사람이라니. 설마.
“……너 혹시나 해서 얘기하는데, 남자는 절대 안 된다. 알지?”
아차해서 당부하는 매니저에게, 뚱해 있던 혜인은 곧 호탕하게 웃어보였다.
“으유, 난 또 뭐라고. 걱정 마. 여자야.”
“아, 여자…….”
그제야 매니저는 안심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쨌거나, 제발 좀 그렇게 웃고 다녀라. 보는 내가 다 좋네.”
드라마 촬영이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한동안은 뭘 해도 통 웃질 않아 그의 속을 썩였던 그녀였다.
그랬던 녀석이 오늘은 뭐 때문에 저리 웃음을 되찾은 걸까.
밝게 쭉 찢어지는 입가가 신기하면서도 이상했다.
“알았어. 그럼 나 갈게, 오빠. 전화해.”
예의 미소와 함께 경쾌한 발걸음으로 자리를 뜨는 그녀를 보며, 매니저는 홀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나저나.
“……여자? 누구지?”
생전 친구도 한 명 없던 애가. 희한한 일이네.
* * *
그로부터 며칠 뒤, 공항 바깥 일각.
“현민혁!”
멀리서 들려온 성환의 목소리에, 언제나처럼 모자와 선글라스로 무장해 있던 민혁의 광대가 반짝 올라갔다.
“형!”
그는 그제야 성환의 모습을 발견하고 한달음에 걸음을 옮겼다.
“웬일이야, 형이 여기까지 다 오고. 안 바빠?”
“웬일은. 너 보려고 온 거 아니니까 신경 꺼.”
“그럼?”
짐짓 모른 체한 성환이 그의 뒤를 턱으로 가리켰다.
“쟤 감시하러 왔다, 왜.”
“실장님!”
아니나 다를까, 그 곳에선 양손에 짐을 바리바리 든 신입이 멀리서부터 해맑게 달려오고 있었다.
얼마 전 막 인턴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신입이었다.
“이야, 신삥. 해외서 놀고 오더니 얼굴 한 번 제대로 폈다 너?”
“헤헤, 다 실장님과 민혁이 형 덕분이죠.”
“……민혁이 ‘형’?”
배우들에게는 나이를 불문하고 반드시 존칭을 쓰라고 그리도 일렀건만.
금세 미간이 좁아지려는 성환을 눈치 챈 민혁은 얼른 선수를 쳤다.
“내가 그러라고 했어. 며칠을 둘이서만 같이 있는데 꼬박꼬박 배우님, 배우님 하면 불편하잖아.”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새파랗게 어린 것이 신이 나 쫄래쫄래 따라갈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쯧, 입맛을 다신 성환이 살짝 기세가 움츠러든 신입을 마뜩잖게 쳐다보았다.
저거 저래갖고, 머나먼 타국에서 배우 케어는 제대로 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난 괜찮으니까 뭐라고 하지 마. 근데 이거 짐을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가져온 놈이 갖다놔야지. 야.”
“네?”
성환의 부름에 신입이 뜨끔한 표정을 했다.
“사무실 복귀하기 전에 집 들러서 짐 안에 들여놓고 와. 비번은 알지?”
“……아, 예.”
“제수씨 지금 집에 계시대?”
“아, 아니. 오늘 내내 근무라고 했었어. 아마 없을 거야.”
“그래? 잘 됐네.”
그런데 그때, 민혁이 쭈뼛쭈뼛 다시 운을 떼었다.
“저기, 그래서 말인데 형.”
“뭐, 왜.”
“……나 잠깐 에덴에 좀 다녀오면 안 될까?”
“뭐?”
“잠깐. 잠깐만 보고 오게.”
……내 이럴 줄 알았지.
성환은 못 말리겠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야, 그 꼴을 하고 감히 어딜. 넌 방금 전까지 그렇게 시달려 놓고도 그럴 생각이 나냐?”
불과 몇 분 전, 팬들로 가득 찼던 입국장은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가 오는지를 몰랐다면 괜찮았을 텐데, 하필이면 종방연 날에 맞춰 입국을 한 덕분에 007 작전처럼 비밀 입국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이었고.
결국 민혁은 꽤 오랜 시간 그들에게 붙잡혀 애를 먹고 난 뒤에야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문제는, 요즘 에덴에도 부쩍 그런 손님이 늘어났다는 데 있었다.
바로 그 덕분에.
이제는 그 곳도 결코 안전지대는 아니었고, 거기 갔다가는 또 한 번의 곤욕을 치를 확률이 월등히 높았다.
성환이 걱정하는 바는 그것이었다.
“좀만 참아. 이따 집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데, 뭘.”
“…….”
“그렇게 보고 싶었으면서, 거기 있는 동안은 대체 어떻게 참았냐?”
놀리듯 묻는 성환에게, 민혁은 픽 웃으며 대꾸했다.
“……내내 허벅지에 바늘 찌르는 심정이었지, 뭐.”
정말이지 그녀가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 있는 그대로의 진심.
하지만 말은 이렇게 해도, 사실은 꽤 뜻 깊은 여행이었다.
연예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디딘 이후, 어딘가를 그렇게 아무 걱정 없이, 자유롭게 혼자 돌아다녀 본 적은 처음이었으니까.
원 없이 유랑했고, 마음껏 휴양했다.
이번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야 그는 ‘돈 주고도 못 살 경험’이라는 말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실감했다.
또한 왜 그녀가 굳이 ‘혼자’ 다녀올 것을 고집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여전히 그녀가 함께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은 유효했지만.
“아무튼 너 단단히 각오해. 대표님이 오늘부터 너 붙잡고 안 놔준댔으니까.”
“뭐? 왜.”
“왜긴? 너 때문에 그간 밀린 일거리들이 어마어마하다잖냐. 한꺼번에 다 해치우려고 면담 들어가신단다.”
당장 집에 가서 뻗을 예정이었는데, 이게 웬 청천벽력 같은 소리!
태평하게 말하는 성환을 보며 민혁은 금세 아연실색했다.
“이따 밤엔 종방연도 가야 되잖아. 그럼 난 언제 쉬라고?”
“그거야 네 사정이지. 그러게 누가 그렇게 놀고 오랬나.”
“와, 여독도 아직 안 풀린 사람한테 이거 너무하는 거 아냐?”
내가 무슨 굴렁쇠도 아니고. 해도 해도 너무 굴리시는구만.
배우 복지가 영…….
그렇게 구시렁구시렁 투덜대는 등짝을, 성환의 손이 냅다 후려갈겼다.
“아!”
“실컷 놀고 온 놈이 여독은 무슨. 잔말 말고 빨리 가.”
“아, 형!”
그가 뭐라 하건 말건, 성환은 빙긋 웃으며 한 마디를 더 덧붙일 뿐이었다.
“자, 이제 그만 현실 세계로 돌아올 시간입니다, 현민혁 씨.”
“…….”
“가시지?”
순간적으로 그는 직감했다.
이제 당분간, 제게 좋은 날은 다 갔다는 것을.
“…….”
……젠장. 좀 더 있다 올 걸.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린 그는 하는 수 없이 터덜터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 * *
“지금까지 모두 너무 수고하셨고, 여러모로 부족했던 저를 잘 이끌어주셔서 정말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다 같이 한 잔 하겠습니다. 건배!”
“건배!”
강남에 자리한 모 대형 술집.
1차에서 한참 떠들썩했던 종방연의 열기는 2차 장소인 그곳에서까지도 뜨겁게 이어지고 있었다.
“<마이 시크릿 맨> 파이팅! 감사합니다.”
우렁차게 건배사를 한 민혁은 파이팅 넘치게 마무리까지 마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그에 이어 다른 배우들의 건배사도 이어졌고, 시끌시끌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민혁은 자연스레 섞여 들어갔다.
“크으, 우리 민혁 씨는 참 언제 봐도 듬직해. 수고했어.”
“감사합니다. 감독님도 너무 수고하셨어요.”
“그래그래. 그나저나 여행은 어땠어? 잘 갔다 왔어?”
“예. 덕분에 좋은 것도 많이 보고, 푹 잘 쉬다 왔습니다.”
다행이라며 껄껄 웃던 장 감독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근데 참. 조만간 우리도 포상휴가 일정 나올 것 같은데, 민혁 씨 갈 거지?”
“……예?”
“이번엔 빠지면 진짜 섭섭해. 그래도 우리 드라마의 주축인데 안 가면 안 되지. 안 그래?”
포상휴가? 그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저번에 들었던 말이 그제야 떠오른 탓이었다.
“……아, 그게 저…….”
사실 포상휴가 같은 건 애초부터 갈 생각이 없었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작품을 잘 마무리하면 그뿐. 굳이 그런 데까지 참석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 했었으니까.
이전에도 이런 일은 여러 번 있었지만 한사코 일정 핑계를 대며 피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었다.
당연히 거절의 말을 날리려던 그때.
“가셔야죠, 당연히. 저도 갈 건데.”
“…….”
“그쵸, 민혁 씨?”
얄궂게도, 별안간 옆에 있던 혜인이 끼어들었다.
“그럼! 혜인 씨가 가는데 민혁 씨도 당연히 가야지. 남녀 주연배우가 그런 데 빠지면 모양새가 상당히 안 좋다고. 괜히 이상한 소문 같은 거나 나고 말이야.”
“…….”
“갈 거지, 민혁 씨?”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가지 않겠다고 말을 한단 말인가.
민혁의 입가엔 저절로 억지 미소가 번졌다.
“……하하, 저, 잠시만 화장실 좀.”
“어어, 그래. 다녀와.”
경험상 이럴 땐, 그냥 회피가 답이다.
애써 곤란함을 숨기며 자리를 뜨는 그의 뒷모습을, 자리에 앉은 혜인은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뒤 화장실.
볼일을 본 그가 손을 씻으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이미 군데군데 붉어져 있는 얼굴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시긴 진짜 오랜만이네.
술, 하니 또 저도 모르게 그녀 생각이 났다.
‘괜찮아요. 마치는 대로 보면 되죠, 뭐. 너무 늦지 않게만 와요.’
아까 전, 겨우겨우 연결된 통화에서 예원은 그렇게 말했었다.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이해하겠다고, 나중에 보자고.
당장 못 보는 것이 하등 아쉽지 않다는 듯한 무심한 말투였다.
문득 그는 술김에 다시 한 번 시무룩해졌다.
‘……나만 보고 싶어 하는 건가.’
난 당장이라도 집으로 달려가고 싶어 죽겠는데.
어째서 그 여잔 그리도 아무렇지 않은 건지.
선뜻 여행을 혼자 보낸 것도 그렇고, 이럴 때도 그렇고.
가끔은 제가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매달리는 것 같단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참. 너 어쩌다 이렇게 됐냐, 현민혁.’
하기야, 난 처음부터 ‘을’이었지. 이제 와서 뭘 새삼스럽게.
그녀가 손수 작성해왔던 계약서를 떠올린 그가 속으로 픽 자조했다.
그러고 보니 그거 어디 있더라. 예원이가 챙겨 놨다고 했던 거 같은데.
‘집에 가서 오랜만에 다시 한 번 봐야지.’
최대한 빨리 귀가하겠다는 목표를 다시금 굳게 새기며, 민혁은 천천히 화장실을 나왔다.
깔끔한 환경을 위해서인지, 화장실 복도는 홀과 꽤 먼 거리에 위치해 있었고 상대적으로 폭이 좁았다.
그렇게 그는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별 생각 없이 홀을 향해 걸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턱!
“민혁 씨!”
불현 듯 뒤쪽에서 허리를 꼭 끌어안은 손길.
헉. 무방비 상태였던 그는 곧장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아니, 너…….”
자신을 끌어안은 여자를 확인한 그의 눈은 삽시간에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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