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밝혀지는 진실
2019.01.29.
“왜, 왜 그래요?”
“뭐 깨졌어?”
예원의 외침에 일동이 동요했지만, 정작 사고의 근원지는 따로 있었다.
“민영아!”
그녀가 한순간 얼어버린 민영의 어깨를 잡고 다급히 물었다.
“괜찮아? 안 다쳤어?”
못이라도 박힌 듯 아래로 고정돼 있는 아이의 시선.
그 시선 끝으로는 선명한 주스 얼룩과 함께 산산조각 난 유리조각들이 즐비했다.
“……죄, 죄송해요! 저, 저도 모르게 그만…….”
민영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얼른 사과부터 꺼냈다.
깨진 건 단순히 주스 잔뿐만이 아니었다.
저로 인해 일순 와장창 식어버린 분위기가 몸소 피부로 느껴지고 있었다.
“시, 신경 쓰지 마세요! 이건 제가 치울 테니까…….”
민영이 얼른 몸을 낮추고 유리조각에 손을 대었다.
하지만,
“아!”
성마른 움직임은 오히려 손끝의 연한 살갗에 붉은 생채기만 만들어냈고,
그걸 본 예원은 단숨에 기겁했다.
“내가 치우면 되는데 거기 뭐 하러 손을 대! 일어나 봐. 어디 좀 보자.”
“아, 아니에요 언니! 괜찮은데…….”
“괜찮긴 뭐가 괜찮아!”
자꾸만 피하려는 민영을 억지로 일으켜 세운 그녀는 상처 부위를 유심히 살폈다.
다행히 상처가 깊어 보이지는 않았으나 피가 계속 새어나오는 걸로 보아 당장 응급처치를 해둬야 할 듯싶었다.
“휴, 안 되겠다. 가서 약 발라줄게, 가자.”
“…….”
“저흰 다녀올 테니까 마저 식사들 하고 계세요. 지원이 넌 여기 와서 이것 좀 치우고.”
“……어, 어. 알았어.”
예원은 민영을 대동한 채 부리나케 집안으로 들어갔고, 식사는 잠시 뒤에야 다시금 재개될 수 있었다.
지켜보고 있던 그들로선 방금 전의 상황이 그저 얼떨떨할 따름이었다.
“아니…… 갑자기 왜 저런 거야?”
“그, 글쎄요. 저도 정확히 못 봐서. 손이 미끄러졌나?”
“아이, 참. 조심 좀 하지, 다 큰 애가. 쯧쯧.”
“그래도 크게 다친 건 아닌 것 같으니까 다행이네요.”
“…….”
“…….”
“뭐, 아무튼. 그나저나 요즘 에덴은 어때요? 그럼 삼촌도 이제 복귀하신 거예요?”
“아니, 나야 뭐 이제…….”
막간의 소동 뒤, 화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다른 쪽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는 가운데서 잠시 서로를 힐끗거리던 지원과 지영은 묵묵히 식사에만 집중했다.
이걸 곤란하다고 해야 할지, 고맙다고 해야 할지.
끊겨버린 타이밍이 무척이나 절묘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 * *
“들어와, 여기 앉아.”
“……네.”
지원과 꽤 오래 작업을 함께 해왔지만 그 누나의 집, 아니, 현민혁과 그 아내의 신혼집 안으로 들어와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신기한 눈초리를 한 채 방안을 어색하게 둘러보던 민영은 이내 예원의 지시대로 잠자코 침대 맡에 자리했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예원이 금세 구급상자를 들고 나타나 옆자리에 풀썩 앉았다.
“갑자기 이게 뭔 일이야 진짜……. 넌 안 그렇게 생긴 애가 은근 조심성이 없구나?”
“…….”
부러 농담을 걸며 긴장을 풀어주려는 노력을 느끼지 못할 리 없다.
예원의 손에 순순히 제 손을 맡긴 민영은 문득 옅은 미소를 지었다.
시선을 내리깐 채 열중해 있는 여자의 모습이, 제가 늘 보아오던 어떤 이의 모습과 오버랩 된 탓이었다.
‘……내가 어딜 봐서 이 언닐 닮아? 그 자식이 닮았지.’
홍지원의 그 잘난 외모는 다 이 핏줄에서 나온 게 틀림없었다.
근데 이왕 닮는 김에, 제 누나의 살가운 성격까지 닮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새삼 짜증이 났다.
“이럴 줄 알았음 처음부터 플라스틱 잔으로 갖다 놓을 걸 괜히 멋 부린다고……. 근데 대체 어쩌다 그랬어? 잔이 미끄러웠어? 그래도 나름 안 미끄러운 걸로 골랐는데.”
“아,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그럼?”
예원의 반문에 민영은 덜컥 말문이 막혔다.
조금 전, 제 안에서 불어 닥쳤던 그 감정을 어찌 설명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아, 저, 그게. 실은…….’
언젠가부터 민영에게 습관이 돼 버린 일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홍지원의 시선을 조용히 좇아가는 거였다.
카메라가 피사체에 자동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과 같이, 민영의 시야 안엔 언제나 그가 있었다.
그가 보는 것이 곧 그녀도 보는 것이었다.
한데 평소처럼 그의 시선을 따라가던 민영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y양이 누구냐’는 소리에 그 올곧은 눈빛이 향했던 곳은,
제가 아닌 제 옆 옆에 앉은 ‘누군가’ 쪽이었다는 것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만은 누구보다 확실히 알아챌 수 있는 것이었다.
“…….”
착각이었다면 좋았으련만, 애석하게도 그 눈빛의 교환은 ‘일방’이 아닌 ‘쌍방’으로 보였다.
실은 내심 부정하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으니까. 무려 아홉 살이나 차이 나는 누난데.
그럴 리가…….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미적지근한 의심을 거두지 못한 게 사실이었다.
그냥 아는 누나 동생 사이치고는 너무나 각별해보였던 둘의 사이.
제가 나타날 때마다 괜스레 어색해지는 것 같던 상황.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실은…….”
다만, 그것을 실제로 맞닥뜨리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아까는 그것이 정말 마침내 진실로 드러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순간 저도 모르게 덜컥 겁이 났다.
어떻게든 그 입을 멈추게 하고 싶었다.
멀쩡히 잔을 쥐고 있던 손에 갑작스레 힘이 쭉 빠져나갔던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어때? 이렇게 누르면, 아파?”
“……아, 아뇨. 아프긴 아픈데 크게 아프진 않아요.”
“음, 조각은 안 박혔나 보네. 다행이다.”
예원이 상처부위를 조심스레 소독하고 약을 발라주는 동안, 민영은 아무 말 없이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제 동생과 제 친구 사이에 그런 묘한 감정이 오가고 있다는 사실을 과연 알고 있을까.
“……언니.”
“응?”
“저…….”
……실은.
운을 뗀 민영이 한참 머뭇거렸다.
“……홍지원 좋아해요.”
당사자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한 고백을, 허무하게 그 누나에게 털어놓고 말다니.
저가 말해놓고도 놀란 민영은 헙, 속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
그런데 잠시 눈썹을 치켜세우는 듯하던 여자는 그런 민영을 향해 오히려 피식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알아.”
“……아신다고요?”
“그래.”
“그걸, 어떻게……?”
설마 홍지원이 얘기한 건가?
아닌데, 걔가 알 리가 없는데?
여자의 말 한 마디에, 순식간에 온갖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치고 올라왔다.
“어떻게는 뭐가 어떻게야. 티라는 티는 다 내고 다녔으면서.”
“…….”
“그러면서 설마 숨기고 싶었던 건 아니지?”
당연히 모를 거라고 생각했건만.
민영의 예상과 달리, 여자의 얼굴은 무척이나 태연했다.
“아, 아니, 전…….”
“내내 그렇게 걔 뒤만 쫄쫄 쫓아다니는데 모를 수가 있나. 지나가던 강아지도 알겠다.”
“…….”
“근데 걱정 마. 내가 보기엔 걔도 너 좋아해. 아까 그 y양도 실은 너였잖아. 안 그래?”
“……네?”
y양이…… 나라고?
이건 또 웬 뜬금없는 말일까.
민영은 멍하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원래 강한 부정이 강한 긍정이랬다고, 네 얘기만 꺼내면 아니라고 펄펄 뛰는 게 딱 봐도 그래. 그놈이 꼴에 자존심만 세서 말 못 하고 있는 걸 텐데……. 기다려 봐. 얼마 안 지나서 바로 고백할 걸?”
“…….”
“잘될 수 있게 팍팍 도와줄 테니까 민영이 네가 조금만 참아주라. 내 동생이지만, 그 자식이 영 숙맥이어서 그렇지 본성은 나쁘지 않은 애야.”
……아니라고, 언니가 오해하고 있다고.
그 자식이 좋아하는 사람이 저는 아닐 거라고 말해야 하는데.
여자의 말마따나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드는 나머지 입이 좀체 떨어지질 않았다.
그렇다고 또 제가 생각하고 있는 진실을 여자에게 말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게 사실이건 아니건, 그것을 알리고 말고는 온전히 그들의 몫일 터였으므로.
“…….”
어쨌든, 그런 민영의 속을 까맣게 모르는 예원은 마지막으로 밴드까지 척 붙여주곤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자, 다 됐다. 또 어디 다친 덴 없어?”
“……아, 아뇨. 이제 없…….”
“어, 무릎에 그건 뭐야?”
문득 무언가를 발견한 예원이 눈짓했다.
교복 치마 밑으로 삐죽 나와 있는 무릎에 발간 상처 같은 것이 드러나 있었다.
“어디 봐봐.”
혹시나 파편이 튄 걸까 싶어, 예원은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치맛자락을 무심코 살짝 들췄다.
그런데 그 순간.
“……!!!”
그녀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정지하고 말았다.
그 차이가 너무도 확연한 나머지, 민영 또한 그것을 알아채지 못할 수 없었다.
“왜, 왜요?”
“……이거, 아까 다친 거야?”
갑작스레 낮아진 그녀의 목소리에 민영은 의아한 듯 대답했다.
“아, 아뇨. 이건 되게 어릴 때부터 있었어요. 약간 점 같은 거예요.”
“……어릴 때?”
“네. 아기 때부터요.”
다소 붉은 빛을 띠고 있기에 아까 일로 인한 상처인 줄 알았건만, 자세히 보니 그것은 상처가 아니라 점 혹은 자국에 가까웠다.
그것도 그냥 자국이 아니라, 흡사 나비의 형상을 빼다 박아 놓은 듯한 자국.
‘이, 이럴 수가…….’
예원은 순간 제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고층에 올라가 있는 것처럼 아득해진 귓가에서는, 얼마 전 들었던 남자의 목소리가 자동적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근데, 무슨 자국이에요? 동생 무릎에 무슨 자국 있었다면서요.’
‘음…… 나비. 대충 나비 모양이었어.’
‘엥, 나비요?’
무슨 해리포터도 아니고, 세상에 나비 모양으로 흔적이 남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장난스레 대꾸했던 것도 기억이 난다.
하지만 지금. 그런 제 생각을 비웃듯 그 증거가 떡하니 제 눈앞에 디밀어져 있었다.
상상 이상으로 또렷한, 바로 그 붉은 빛의 나비 모양이.
“왜…… 그러세요?”
‘민영’이란 이름을 가진, 그 남잘 쏙 빼닮아 있는 얼굴이 저를 말갛게 마주본다.
예원은 혼란스럽게 그 얼굴을 뜯어보았다.
‘민영이랑 예원 씨, 되게 닮지 않았어요?’
‘에이. 고민영 쟨 우리 누나보단 차라리 매형을 많이 닮았죠. 맞다. 너, 별명 한때 ‘여자 현민혁’이었다고 하지 않았냐? 전에 누가 그랬던 것 같은데?’
손끝과 발끝, 머리끝에서부터 본능적으로 전율이 일었다.
제 눈과 직감이 틀리지 않았다면, 지금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언니?”
“……어? 어어…….”
“…….”
“아, 아냐. 아무것도…….”
……말도 안 돼.
그럼 혹시 설마.
설마 이 아이가……?
예원의 눈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화장대 앞에 앉은 예원은 그 위로 팔과 턱을 괸 채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어? 누나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무엇보다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바로 민영의 가정사였다.
당사자에게 물어보기는 좀 그렇고, 혹시나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을까 해서 물어본 거였는데.
지원의 대답은 그녀로 하여금 완벽한 확신을 보태주었다.
‘응, 아주 어릴 때 입양됐었대. 그걸 최근에야 알았나 보더라고.’
친부모의 얼굴도, 이름도,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다.
친부모를 찾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마냥 보류해 놓고만 있던 상태라고.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무조건 돕겠다 제가 약속까지 떵떵 해놓았다는 지원의 말에 예원은 약간 안심했다.
‘역시…… 그런 거였어.’
찾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야. 그 애가 몰라서 못 찾은 거였다고.
물론 아직은 추측에 불과하지만, 그의 여동생이 이렇게 지척에 살고 있을 줄은, 그것도 제 동생의 친구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제 선에서 할 수 있는 모든 확인을 마친 예원은 바로 영덕과 성환에게 전화를 걸어 조사를 부탁했다.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딱딱 맞는 정황과 증거들 덕분에 두 사람은 예원만큼이나 몹시 들뜬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게, 지금까지는 그야말로 맨 땅에 헤딩하듯 찾던 거였으니까.
조금의 희망이라도 발견됐다는 것이 마냥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그 남자가 이걸 알면 뭐라고 할까.’
아마도 기뻐하겠지?
그 생각에 이른 예원은 배시시 웃다 화장대 서랍을 열었다.
케이스에 잠시 빼두었던 반지를 끼려는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다른 게 먼저 눈에 들어왔다.
구석에 봉투째로 놓인, 옛날 옛적에 작성해 놓았던 그와 자신의 결혼계약서였다.
‘와, 이게 언제 적 거야.’
여기다 넣어놓고 감쪽같이 잊고 있었네.
지난날 제가 멋모르고 혼자 엉터리로 꾸몄던 계약서를 꺼내 속으로 읽으며, 예원은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이걸 보면서 그 남잔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지.
제가 보아도 가소롭기가 짝이 없었다.
“……여기 좀만 더 있어라. 곧 없애줄 테니까.”
어차피 ‘혼인신고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라는 조항부터 이미 틀려버린 계약서다.
하지만 그들 나름의 추억이었고, 혼자서 처리해버리기엔 나름 뜻이 깊은 서류였다.
앞으론 이런 계약서 없이도 행복하게 잘 살자는 의미로,
일종의 의식처럼 박박 찢고, 불까지 화르륵 태워버릴 테다.
물론 그 남자가 오면 말이지…….
뿌듯하게 미소 지은 예원은 그것을 서랍 안에 도로 집어넣고, 반지를 찾아 손에 끼웠다.
그런데 그때, 옆에 놓아두었던 휴대폰에서 전화 벨소리가 들려왔다.
‘어, 남편인가 보다.’
스페인과 한국의 시차는 8시간.
혼자만의 여행을 시작한 이후, 점심 즈음 느지막이 일과를 시작하면 제일 먼저 그녀에게 꼭 전화를 하곤 하는 그였다.
그렇잖아도 오늘은 왜 안 오나 하고 있었던 차였는데.
예원은 한 치의 의심 없이 전화를 받았다.
“어, 민혁 씨. 잘 잤어요?”
그런데,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그녀의 예상보다 더욱 가늘었다.
“민혁 씨 전화…… 기다리셨어요?”
……조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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