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 좋아질 수 없는 남자-80화 (80/102)

80.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랑

2019.01.08.

그 후로 몇 번의 별천지가 지나가고, 또 그 속에서 몇 번이나 허우적댔는지 모르겠다.

어느덧 사이좋게 샤워까지 함께 마친 두 사람은 몰라보게 정갈하고 말끔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옷을 입으면 불편해서 못 잔다는 남편의 단단한 맨팔을 베개 삼아 모로 누운 채, 예원은 마치 온 세상 만물의 영롱함을 빼다 박아 놓은 것 같은 그의 그윽한 눈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진짜 이상하다.”

그러다 불쑥 입을 열었다.

“응? 뭐가?”

“……민혁 씨랑 이러고 누워 있다는 게요.”

진짜 이상해.

정말이지 이 상황이 진심으로 믿기지가 않는다는 눈빛.

의문스럽게 눈썹을 치켜 올리던 민혁은 그만 픽 웃었다.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이게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부부의 모습이지. 진작부터 이랬어야 하는데.”

“……그러게요. 남자랑 발가벗고 누워 있는 게 이렇게 행복한 걸 줄은 몰랐어요.”

에게. 진짜 발가벗고 있는 그 입장에선 그저 코웃음만 나올 노릇이다.

혼자 속옷에 슬립까지 다 챙겨 입고 있으면서 무슨.

“이게 뭐가 발가벗은 거야. 발가벗은 건 나지.”

“이, 이 정도면 내 기준에선 충분히 발가벗은 거거든요?”

뭘 얼마나 더 벗어야 만족하시려고!

그녀의 눈초리가 대번 그를 찍 흘겨보았다.

“쳇, 뭘 잘했다고 사사건건 말대꾸예요?”

“내가 뭘.”

“……몰라서 물어요, 지금?”

지난 몇 시간을 떠올리자, 한순간 폭풍처럼 밀려드는 부끄러움과 쑥스러움.

“하, 한 번만 더 하자더니…… 도대체 도합 몇 번을…….”

휴, 애초부터 속지를 말았어야 했는데.

세상 달콤한 목소리로 ‘한 번만’, ‘한 번만 더’ 해대는 통에 계속 홀랑 넘어가버린 게 화근이었다.

초인적인 힘으로 누르고 눌러왔던 그의 욕구는 그 입구를 열어주기가 무섭게 반작용처럼 펑펑 터져버린 것 같았고,

덕분에 한껏 자극 받은 건 가만있던 그녀의 예민한 근육들이었다.

그것들은 난생 처음 겪어본 고통 아닌 고통에 아주 극렬한 후유증을 맞이해야만 했다.

지금의 쓰라림과 욱신거림이 바로 그 증거였다.

“아, 미안.”

민혁은 그제야 비로소 말뜻을 알아듣고 즉각 사과했다.

당장엔 지은 죄가 있기에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에게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예쁘래. 좀 적당히 예뻐야 내가 자제를 하지.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고.”

아무리 마시고 마셔도 갈증이 이는 사막의 물처럼, 마침내 제게 완전히 허락된 그녀는 도무지 헤어 나올 수 없는 늪 같았다.

놓고 싶어도 놓을 수가 없었다.

순간순간에 어찌나 정신없이 몰입을 했던지, 다 지나고 나니 제가 뭘 어떻게 했는지조차 까맣게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쳇.”

진짜 말이나 못하면.

오리처럼 모아진 그녀의 입술이 뾰로통하게 내밀어졌다.

“음……. 근데…… 근데요.”

“응.”

다시금 운을 뗀 예원은 웬일인지 잠시 주저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민혁 씨…… 진짜 처음 맞아요?”

“……어?”

“아니, 처음이라는 사람이…… 나랑은 비교도 안 되게 능숙하니까…….”

……이건 또 웬.

그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처음이면 능숙하면 안 되나? 그걸 꼭 해 봐야만 아는 건 아니잖아.”

“물론,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좀 어지간해야 그런가 보다 하지.

솔직히 말해서 예원은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놀란 상태였다.

어쨌거나 그도 처음이고 저도 처음이기에, 첫 시도엔 어느 정도 헤맬 수밖에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그는 그야말로 엄청난 프로였다.

물론 처음이라는 그의 말을 믿지 않는 건 아니었다.

자타공인 남자주인공 캐스팅 1순위라는 배우답게, 그는 아마 그동안 숱한 여배우들과 커플 연기를 하며 비슷한 경험을 쌓아 왔을 터였다.

단지 ‘실제’가 오늘이 처음이었을 뿐.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또 기분이 나빴다.

‘씨. 연기고 뭐고, 난 이 남자랑 하는 게 죄다 처음인데.’

급기야는 살짝 억울한 마음까지 들려고 했다.

하지만, 억울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인지 아닌지가 그렇게 중요한가.”

“…….”

“믿든 말든 상관은 없지만…… 나도 맹세코 당신이 처음이야.”

솜사탕처럼 포근한 저 목소리와,

“뭐 그래도 정 의심이 든다면, 내가 남들보다 상상력이 뛰어난 편이라 그렇다고 해두지.”

부드럽게 뺨을 어루만지는 이런 손길 하나면.

“혼자서 음흉하게 상상한 보람이 있네.”

언제 심통이 났냐는 듯 이렇게 마음이 사라락 녹아버리게 되니까.

‘아, 진짜.’

진심으로 짜증이 난다. 이 남잔 왜 이렇게 잘난 거야?

하나밖에 없는 마누라 감당하기 힘들게.

“왜 그렇게 쳐다 봐. 왜, 봐도 봐도 잘생겼어?”

이렇게 나올 땐 또 드럽게 재수가 없는데 말이야…….

맘 같아선 ‘아니요?’라고 하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그녀의 입은 마냥 진실했다.

“……네. 이러다 민혁 씨 스토커 될 것 같아요.”

“뭐?”

“너무너무 좋아서.”

갑자기 웬 스토커 타령.

그녀의 솔직 발칙한 발언에 멀뚱해하던 민혁은 어이가 없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이 아직 진짜 스토커를 못 봐서 그러는데. 스토커는 그 정도 갖곤 택도 없어.”

“어? 민혁 씨 스토커 있었어요?”

“있었지. 사생팬.”

“헉.”

난 그냥 장난으로 한 말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야기 전개에 예원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사생팬이요?”

“응. 옛날에 나 숙소 생활 할 때는, 아예 집안까지 들어온 사생도 있었어.”

“헐……. 정말요?”

“주민등록번호나 휴대폰 번호 같은 거 털어가는 건 예사였고. 건조대에 넣어놓은 속옷도 훔쳐가고, 몰래 숨어 들어와서 자는 거 빤히 쳐다보고 가기도 하고. 뭐 그랬지.”

“와…… 미친 거 아니에요? 그건 그냥 범죈데?”

세상에 어떤 미친 돌아이가 우리 민혁 씨한테!

이미 다 지난 일인데도 그녀는 과하게 흥분해 소리쳤다.

“혹시 그 사생팬 얼굴, 기억해요?”

“아니. 잘 기억 안 나. 그런 적이 워낙 많아서.”

“아…….”

“그래도 점점 나이 먹고, 가수 쪽보단 배우 쪽으로 나가다 보니까 그런 애들은 자연스럽게 없어지더라고. 그것도 다 한때지 뭐. 걔들도 지금은 아마, 다들 결혼하고 아줌마 돼서 잘 살고 있을 거야.”

그리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먼 옛날의 동화를 풀어놓는 것처럼 무덤덤하기 짝이 없었다.

대체 얼마나 시달렸으면, 그런 심각한 사생활 침해를 입고도 저리 초연하게 말할 수 있는 걸까.

후련하게 웃는 그와 달리 예원은 마음이 아팠다.

어쩔 수 없는 연예인의 숙명이란…….

돌연 맘속 깊은 곳에서부터 뭉클함이 솟구쳤다.

그와 동시에 이상한 의지도 불끈 일어났다.

“……이제 걱정 마요, 민혁 씨. 나만 믿어요.”

“어?”

“이제 내가, 민혁 씨 지켜줄게요!”

알죠? 나 안 그래 보여도 은근 힘 센 거. 그런 조무래기들은 한손으로도 부셔버릴 수 있다고요.

언제든지 말만 해요. 그것들, 내가 다 싸그리 처리해 버릴 테니까!

입술을 앙다문 그녀가 그의 앞으로 주먹을 야무지게 쥐어보인다.

딴엔 굉장히 비장해보이겠다고 지었을 표정이 분명했다.

“…….”

이 여잔, 가끔씩 본인이 미치도록 귀엽다는 사실을 알까.

이럴 때는 특히 더.

민혁은 그런 그녀를 보며 잠시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대신, 그 부드럽고 작은 몸을 제게로 홱 끌어당겨 안았을 뿐이었다.

“켁! 민혁 씨!”

“고마워. 고마워, 정말.”

“윽! 수, 숨 막혀요!”

머리를 꽉 둘러 안은 팔뚝이 어찌나 우람하고 단단한지 도저히 숨 쉴 틈이 없다.

그녀는 결국 사생팬을 응징하려 했던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콩콩 친 뒤에야, 그에게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허억!”

괜히 처리해준다 나섰다가 졸지에 내가 처리당할 뻔했네!

후, 후. 다급히 모자란 숨을 들이마시는 예원을 보며 그는 속없이 웃었다.

하여튼 귀엽긴.

“어, 벌써 한 시 넘었네.”

몸을 돌려 협탁 위에 놓여 있던 휴대폰을 확인한 그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누우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나 오늘부터는 진짜 자윤데. 밖에 나가서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생일이잖아.”

“밖에서요?”

“응. 저번에 그 자전거처럼. 둘이서 할 수 있는 거, 뭐 없으려나.”

“아. 음…… 글쎄요.”

그러니까…… 데이트를 하자, 이건가.

전처럼 가짜 데이트가 아니라, 진짜 데이트……?

“……아. 생각났다.”

“뭔데?”

“……놀이동산이요.”

“놀이동산?”

곰곰이 생각하던 예원이 전구가 켜진 듯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언제 한 번 가보려고 했는데 기회가 없었어요. 어렸을 땐 여유가 없었고, 다 크고 나서는…… 유치하게 무슨 놀이동산이냐면서 지원이가 싫어하는 바람에.”

장장 10년을 넘게 알고 지내면서 같이 여기저기 많이 다녀봤지만, 이상하게 놀이공원만큼은 전민혁과도 가본 기억이 없었다.

남아있는 기억은 학창시절 소풍으로 다 같이 갔던 짧은 몇 번이 전부였다.

어렸을 때부터 연예인 생활을 하느라 바빴을 그에게도 아마 놀이공원에 대한 추억은 없을 것 같았다.

나도 별 추억 없고, 이 남자도 없고.

둘만의 새 추억을 만든다는 점에서 썩 맘에 드는 데이트 장소였다.

“아, 근데. 민혁 씬 거기…… 안 되려나?”

말을 이어나가던 그녀가 주춤했다.

그런 덴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안 되겠죠?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나…….

덧붙이는 목소리가 소심하게 작아졌다.

“……흐음.”

놀이동산이라.

잠시 고민하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가자.”

“……정말요?”

“우리가 무슨 몰래 연애하는 아이돌도 아니고. 어차피 우리 결혼한 거 세상 사람들 다 아는데, 쟤들도 놀러 나왔나 보다 하겠지.”

말은 이렇게 해도, 그놈의 유명세 탓에 이래저래 고달픈 날이 될 것은 자명했다.

하지만 이제껏 자신을 묵묵히 기다려 준 그녀를 위해 작게나마 보답을 하고 싶었다.

그녀가 기뻐할 수 있다면, 그까짓 놀이동산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데려다줄 수 있으니까.

사진 찍히고 머리털 좀 뜯기고, 강제 사인을 백 장 정도 하는 한이 있더라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다.

“그럼, 오늘 일어나면 바로 가요?”

“응, 그러지 뭐.”

“와.”

“좋아?”

“그럼요. 옛날에 소풍 때 가 본 거 이후로 완전 처음인데!”

아니나 다를까, 여자는 모처럼 애 같이 신난 얼굴을 했다.

“우리 가서 뭐 탈까요? 민혁 씨 놀이기구 잘 타요?”

“그냥, 남들 타는 정도는.”

“피이. 맨날 그 소리.”

“왜. 당신은 잘 타?”

“모르겠어요. 하도 어릴 적에 가봐서. 초중딩이 무서운 거 타봐야 바이킹이지.”

짤막한 대화 뒤, 따스한 미소를 머금은 그가 다정하게 물었다.

“어쨌든 그럼 그건 그렇게 하고. 뭐 또 갖고 싶은 건 없어? 생일선물.”

엥? 또 웬 선물.

“선물, 아까 벌써 받았잖아요. 오늘 내 선물은 민혁 씨라니까.”

“나 빼고. 선물이 꼭 하나여야 할 이유는 없잖아. 내가 덤도 얹어줄게.”

“……글쎄요. 딱히 받고 싶고 그런 건 없는데…….”

난, 정말이지 당신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입술을 내민 예원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음, 그러면요. 오늘은 나, 오는 길에 꽃 사 줘요.”

“꽃?”

“네. 꽃다발. 이~따만큼 큰 걸로. 아, 라펄 장미면 더 좋고요.”

생각 끝에 추가사항을 요구한 예원이 수줍은 듯 웃었다.

실은 지난번, 우진과 잠깐 대화를 나눴을 때 이후로 내심 벼르고 있었다.

여자라면 좋아하는 남자에게서 으레 한 번쯤 받는다는 꽃 선물.

그래도 명색이 아내인데, 그거 하날 아직까지 못 받아봤다는 게 내심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생일선물 치고 너무 과하지도 않고, 의미도 있고.

딱 적절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엎드려 절 받기식이기는 해도.

“그래, 뭐. 알았어. 이따만한 걸로 사주지.”

“아, 근데 내일 나 저녁 근무 있는데. 일찍 나가면 그 전까진 돌아갈 수 있겠죠?”

“생일날 일은 무슨 일이야. 가지 마.”

“네? 그럼 그 시간엔 누가 일해요.”

“다른 매니저들 있잖아.”

“어…… 근데 아마 다들 일 있을 텐데…….”

“뭐, 그럼 잠깐 삼촌한테 부탁드리면 되지.”

“……교수님이요?”

“응. 지금 백수시잖아.”

“아.”

맞다, 그랬지. 그녀가 늦게야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괜히 일 떠넘긴다고 싫어하시는 거 아니에요? 혼날 것 같은데?”

“글쎄. 아닐 걸.”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의 여자를 보며, 민혁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삼켰다.

물론 첫판부터 좋은 소릴 듣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게 다 ‘손주 만들기 프로젝트’의 일환이라고 하면, 버선발로라도 나설 삼촌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일이잖아. 모든 게 용서되는 날.”

“…….”

“내일 미들은 가윤 매니저지? 삼촌한텐 내가 연락할 테니까, 걱정 말고 가자.”

늘 그렇듯 뻔뻔하게 나오는 그에게, 예원은 괜스레 새치름한 눈길을 보냈다.

“……제가 이런 말할 입장은 아닌 거 아는데. 사장님 진~짜 불량 사장님이에요. 알죠?”

“그래서, 싫어?”

하지만 이내 그 입가에 배시시 번지는 미소.

“……아뇨. 좋다고요.”

나도 참 나다.

점장씩이나 되는 주제에, 불량 사장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는커녕 동조나 하고 앉아 있으니. 에휴.

……그래도 뭐. 좋은 걸 어떡해?

히히.

“아무튼, 그럼 우리 얼른 자요.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응.”

“……자자니까요?”

“그래.”

“……근데 왜 자꾸 이리로 붙어요.”

순식간에 좁아진 자리 탓에 인상을 찡그리는 그녀에게, 어느샌가 옆으로 바짝 붙은 남자는 천연덕스럽고 능글맞게 대꾸했다.

“얼른 자자며. 씻은 기념으로 한 번 더 하잔 뜻 아니었어?”

“뭐, 뭐라고요?”

으. 이 악의 무리 같으니. 내가 또 넘어갈 줄 알고!

“어우, 진짜!”

하지만 그러면서도 예원은 못 이긴 척, 은근슬쩍 범접하는 그의 손길에 천천히 몸을 맡겼다.

까르륵, 까르륵.

그의 손길이 닿는 자리마다 어김없이 열꽃이 피었고,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사이에는 절로 웃음꽃이 피었다.

그러다 문득, 이모가 말해주었던 라펄 장미의 꽃말이 생각났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랑.’

그때 이모가 부케로 그 꽃을 골라준 건, 어쩌면 운명이나 계시 같은 일이 아니었을까.

뭐 이제 와서 괜한 의미부여라고 해도 할 말은 없지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하아.”

제게로 끈덕지게 엉겨 붙는 그의 체온을 느끼면서, 예원은 간절히 소망했다.

지금 그와 나누고 있는 이 사랑이, 이 시간이.

앞으로도 부디 쭈욱 영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 * *

그리하여 다음 날.

결국 어마어마한 늦잠을 자고 만 그들은 오후 때가 다 되어서야 놀이공원으로 출발했다.

그간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바깥엔 어느샌가 봄이 완연해져 있었다.

‘정식’ 첫 데이트에 걸맞은 화창하고 맑은 날씨였다.

“와, 오늘 날씨 진짜 좋다. 놀이기구 타기 딱 좋은 날씨 같아요.”

그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놀이공원으로 가는 길.

창밖을 내다보던 예원이 새삼 감탄했다.

“근데 이러고 가니까, 꼭 우리 옛날에 가짜 데이트할 때 생각난다. 그렇지 않아요?”

왕방울만한 선글라스에 푹 눌러 쓴 야구 모자.

너무 티가 날까 봐 고심 끝에 뺀 마스크를 제외하고는, 이미 할 수 있는 무장은 다 갖춰놓은 채의 두 사람이었다.

“그러게. 꼭 그때 같네.”

“에휴, 그땐 어떻게든 티내려고 용만 썼는데…….”

이젠 온통 가리기에만 급급하고 있으니.

새삼 그때와는 너무 많은 게 달라졌다는 것이 또 한 번 실감되는 순간이다.

“근데, 나는 이거 꼭 안 해도 되지 않아요? 어차피 얼굴 팔린 건 민혁 씨지 내가 아닌데.”

“혹시 모르잖아. 나 때문에 우연찮게 알아봐질 수도 있는 거고. 보다시피, 이런 걸로는 내 외모가 다 안 가려져서.”

“……녜에, 어련하시겠어요.”

내가 우주 대스타랑 나들이 간다는 걸 깜빡했네.

떫은 표정을 지은 예원이 티 나게 쳇, 소리를 내자 그는 픽 웃었다.

“그건 이제 그만 신경 쓰고. 가서 놀이기구 뭐 탈지나 생각해봐.”

“헤헤, 그거야 이미 다 생각해 뒀죠.”

“뭔데?”

의아하게 돌아보는 그를 향해, 예원은 해맑은 미소와 함께 답했다.

“청룡열차요!”

.

.

.

하지만 그로부터 한 시간 쯤 뒤.

예원은 청룡열차, 즉 롤러코스터를 타겠다고 호기롭게 나섰던 자신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꺄악! 악!”

일차로 바이킹도 타고 나름 준비운동을 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건 그야말로 큰 오산이었다.

이리로 갔다, 저리로 갔다.

바람으로 따귀를 휙휙 때려대는 롤러코스터의 위력은 그녀의 혼을 쏙 빼놓기에 충분했으므로.

머릿속은 핑핑 돌고, 표정은 이미 넋이 나간 상태.

놀러 나간다고 신경 써서 드라이한 머리는 이미 산발이 다 되어 있다.

딱히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이 잔뜩 울렁거렸다.

“예원아. 괜찮아?”

“…….”

이제 이 정도는 껌으로 탈 줄 알았는데…….

저와는 대조적으로 너무나 아무렇지 않은 그를 보자 억울함은 배가 되었다.

옆 편 벤치에 앉아 끙끙대고 있던 예원은 참다못해 일어섰다.

“아, 안 되겠다. 저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혼자 가도 되겠어? 많이 안 좋으면 같이 가고.”

“아니, 아니. 괜찮아요. 금방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요.”

이까짓 놀이기구 하나 못 타는 것도 부끄러워 죽겠는데, 볼품없이 웩웩거리는 것까지 들키고 싶진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직 이런 모습까지 보여줄 순 없다고.

신혼의 로망을 제 손으로 깨부수지 않겠다는 일념 하나로, 예원은 꿋꿋하게 혼자서 화장실로 향했다.

“하아…….”

혹시나 해서 화장실에까지 갔지만 변기를 붙잡고 끅끅거려봐도 나오는 건 없었다.

칸에서 나와 대충 매무새를 정돈하고, 의미 없는 가글까지 몇 번 하고나자 맥락 없이 뛰던 호흡이 그나마 정리되었다.

‘휴, 생일날 대체 이게 무슨 고생이냐.’

내 무덤을 내가 팠지.

안 되겠어. 다음은 무조건 회전목마야. 그 다음은 관람차고.

앞으로는 기필코 가벼운 기구만 타겠노라 굳게 다짐하며, 그녀는 서둘러 화장실을 나섰다.

“엄마!”

“응?”

그런데 그때였다.

누군가의 부름에 본능적으로 대답한 예원은 뒤를 돌아보았다.

재깍 향한 시선 끝에는, 웬 예쁘장한 여자아이 하나가 서서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엄마?”

“……어?”

혹시 잘못 들었나 싶었는데. 분명 제게 하는 말이 맞아보였다.

뭐, 뭐야.

‘얘 방금, 나 보고 엄마라고 한 거야?’

이게 무슨……?

순수하고 말간 눈빛으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아이의 눈길에, 그녀의 얼굴은 일순 당황으로 물들었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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