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내 생애 최고의 선물
2019.01.04.
“흐읍!”
자제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남자는 마치 고삐가 풀린 말 같았다.
평소와는 너무도 판이하게 다른 그 모습에, 아직 채 단련되지 못한 그녀의 심장이 또 불규칙적으로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의 팔은 어느새 방금 전과는 정반대로 그녀의 허리를 깊게 끌어안고 있었고,
쉴 틈 없이 휘몰아치는 그의 입맞춤을 받아내느라 예원은 경황없이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미, 민혁 씨! 잠시만……!”
그렇게 얼마쯤 갔을까.
눈 깜짝할 새 제 방안으로 떠밀린 예원은 침대 코앞까지 가고 나서야 그의 가슴팍을 가까스로 밀어낼 수 있었다.
켜켜이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협탁 위에 놓인 스탠드 불빛에만 의지한 채 다시 올곧게 마주하게 된 남자의 눈빛은 무척이나 사나워 보였다.
아니, 어쩌면. 그보단 뭐랄까…….
“하아…… 왜.”
엄청나게 위험해 보였다. 마치 한 마리 고달픈 짐승처럼.
결혼식 날, 그가 한때 ‘시대를 앞서나간 짐승돌’이라 일컬어졌었다고 자랑스레 알려주던 지영의 말을 새삼 다시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저기. 우, 우리…….”
……어쨌든 저 눈빛을 보고 있자니 어째 용기가 스르륵 자취를 감추어버리는 것 같지만.
“……우리, 뭐.”
“……안 씻어요?”
이제는 결코 그를 피할 생각이 없었다.
다만, 생각해 놨던 절차를 밟아야겠다는 생각뿐.
같잖은 수로 꾀병을 부리고 그를 기다리는 동안, 예원에게도 나름대로 미리 생각해 놓은 바가 있었다.
그가 오면 무슨 말을 할지, 일이 잘 성사되면 무엇부터 해야 할지 등등.
그래도 처음이니만큼, 아무리 급해도 할 건 제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사를 치르기 전 목욕재개를 하는 것 또한 그녀가 생각한 ‘제대로 된’ 수순 중 하나였다.
혹여나 너무 작정한 티가 날까, 지레 걱정되는 마음에 미리 뽀득뽀득 씻어놓지도 못 했다.
고로 더 나아가기 전 이쯤에서 끊어주는 게 딱 적절한 타이밍일 터였다.
“…….”
하지만, 그런 그녀를 보며 흐트러진 숨을 삼킨 그에게선 이내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나중에 씻자.”
“…….”
“지금은 내가…… 좀 급해.”
엥?
그 말을 들은 예원의 눈은 일순 동그래졌다.
이게 정녕, 매사에 깔끔 떨기로 소문난 현민혁에게서 나올 얘기란 말인가?
“네? 읍……!”
무어라 대답을 하려 하기가 무섭게 입술이 또다시 틀어 막혔다.
제가 어디 도망갈 것도 아닌데, 그는 왜 이리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조급하게 구는지 모를 일이었다.
속으로 살짝 푸념하면서도 예원은 금세 그가 선사하는 꿈결 속으로 속절없이 빨려 들어갔다.
다급하고 급박한 손길마저도 그냥, 그만큼 그에게 자신이 간절해서 그렇단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하아.”
“하.”
그의 커다란 오른손이 어느새 스르르 올라와 그녀의 왼쪽 뺨을 가득 쥐어냈다.
반면 예원의 손은 잠시 갈피를 잃었다가, 결국 그의 옷자락을 필사적으로 쥐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서로를 붙든 두 사람은 한참이나 상대의 입술을 보듬고, 보드라운 혀를 쓸어내렸다.
그가 오기 전 혼자서 홀짝홀짝 들이켰던 와인 탓인지, 이제는 그에게서도 묘한 알콜 향과 포도향이 퍼지는 것 같았다.
입술에서부터 시작된 열정은 점점 모래시계처럼 내려가 아랫배 쪽으로 흘러 고였다.
손끝과 발끝이 절로 오므라들면서 머릿속엔 연이어 폭죽이 터졌다.
그야말로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아…… 녹아버릴 것 같아.’
이러다간 까딱하면 그에게 잠겨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순간.
두 사람은 마침내 서서히 겹쳐지며 침대 위로 쓰러졌다.
시트가 와 닿는 등의 감촉에 예원은 본능적으로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그런 그녀의 왼쪽 어깨를 떨리는 손이 살짝 그러쥐는가 싶더니,
예원은 이내 슬립가운을 부드럽게 풀어헤치고, 천천히 제 살결 위로 미끄러지기 시작하는 손길을 느꼈다.
살갗에 닿는 그의 손끝 하나하나가 어딘가에 달구어지기라도 한 듯 무척이나 뜨거웠다.
“…….”
그렇게 그가 그녀의 몸을 천천히 유영하나가고 있던 그때.
어느 순간 입술을 뗀 민혁은 문득 예원의 가슴께를 내려다보곤 일순 멈칫했다.
잠잠해져 있던 입꼬리도 미세하게 씰룩였다.
“……하.”
결국, 그의 입가에는 살짝 웃음이 번졌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서 그를 반긴 것은,
오래 전 그도 한 번 언뜻 본 적이 있는, 검정색 레이스 브라였다.
“……이건, 누구 아이디어야.”
이런 기특하고 깜찍한 생각을 대체 누가 했냐는 듯한 투.
그러면서 그것의 밑동과 갈비뼈 부근을 천천히 문지르는 손길이 그답지 않게 무척이나 음험했다.
“설마 당신은 아닐 테고. 지영 씨?”
……하여튼 귀신같은 남자라니까.
그걸 또 어떻게 알았대.
“……네.”
아무래도 이 남자 앞에선 뭐든 도무지 숨길 여력이 없다.
그녀가 소리 없이 삐죽거리자, 그가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이따 지영 씨 번호 좀 가르쳐줘.”
“……걔 번호는 왜요?”
이 남자가 웬일로 김지영 번호를 궁금해하나 싶었는데.
“직접 고맙다 인사라도 하려고.”
“……네?”
순간, 방심하던 그녀에게서는 풉, 웃음이 새어나왔다.
사실 아까 전, 혼자서 이걸 입어야 했을 때는 그야말로 질색 팔색을 했던 예원이었다.
아무리 그를 사로잡기 위해서라지만, 내가 살다 살다 이런 짓까지 해야 하나 싶어서.
허나 지금 그의 반응으로 미루어 볼 때, 확실히 쪽팔림을 무릅쓴 보람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같아선 그가 아닌, 그녀 자신부터가 먼저 지영에게 절을 하고픈 심정이었다.
‘크흡. 고맙다, 김지영. 네가 이런 식으로 날 도와주는구나.’
저번엔 무턱대고 화내서 미안. 너의 깊은 뜻을 언니가 미처 몰라봤구나.
이 은혜는 앞으로 살며 두고두고 갚을게.
너의 평생 커피는 이제부터 내가 책임진다.
“……예쁘죠, 이거. 섹시하고.”
“응.”
어쨌거나, 이왕 입었으니 자랑은 해야지.
의기양양하게 묻는 그녀를 향해, 제게 펼쳐진 광경을 황홀하게 바라보던 그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엷게 미소가 떠올라 있던 입매는 금방 완고해져 있었다.
“……근데, 당신보단 아니야.”
이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기껏 호기롭게 물었건만 되레 그녀의 볼이 화끈 달아올랐다.
예, 예쁘단 거야, 섹시하다는 거야.
말을 할 거면 똑바로 해야지, 이 남잔.
사람 헷갈리게시리.
“…….”
……그런데 의식의 흐름이 거기까지 이르자, 순간적으로 짓궂은 생각이 하나 발동했다.
“민혁 씨.”
“응?”
“……조혜인이 섹시해요, 내가 섹시해요?”
“……뭐?”
“대답해요. 누가 더 섹시하냐고요.”
반은 농담, 반은 진심으로 물어본 거였다.
물론 제가 소름끼치도록 유치하게 굴고 있다는 것쯤도 알았다.
하지만, 이참에 좀 더 확실히 해두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그에게 과연 누가 더 우위인지.
물론 누가 봐도 당연히 조혜인의 손을 들어주어야 마땅할 문제였지만, 예원으로선 이제 그의 눈이 객관성이란 것을 상실했길 바랄 뿐이었다.
저 잘생긴 눈에 콩깍지가 부디 두텁게 씌워져 있어야 할 텐데.
이렇게 된 마당에도 과연 그게 무사하려나…….
“……예원아.”
“빨리요. 대답.”
예원의 거듭된 촉구에, 그는 그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
“홍예원이 백만 배, 천만 배는 더. 아니, 비교조차 안 돼.”
“…….”
“됐어?”
……쳇.
솔직히 말해 완전히 성에 차지는 않지만, 나름 노력한 대답 같긴 하다.
백만 배, 천만 배 정도면 됐지 뭐. 무려 조혜인에다 댄 건데.
흐흐. 예원은 그제야 그를 올려다보며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그런데 그때, 그녀에게선 이내 단발적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악!”
예기치 못한 타이밍에 급습한 그가 목덜미를 확 베어 문 탓이었다.
평소 육안으로 보기엔 그저 매끈매끈하다고만 생각했는데, 밤이 깊어서인지 그의 입가에서는 미세한 수염이 돋아난 듯 약간의 까끌거림이 전해졌다.
하지만 그렇게 잠시 있으니, 그것이 아프기는커녕 오히려 묘하게 기분 좋은 쪽으로 다가왔다.
비로소 그가 장성한 어른 남자라는 것이 몸소 느껴지기도 하고.
이상하게 그 감각이 야릇하기도 한 것이…….
“괜찮아?”
“……네, 네. 괜찮아요.”
확인받듯 묻는 그에게 예원은 겨우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지금은 안 괜찮아도 괜찮아야 했다.
고작 이런 걸로 일을 이렇게 맥없이 끝내버릴 순 없었으므로.
하지만 그는 한없이 긴장한 그녀를 알아챈 게 분명했다.
그 증거로 그는 이제 목덜미를 베어 무는 대신, 뜨거운 입술을 이용해 그녀의 목선과 턱선, 귀 근처를 부드럽게 노닐고 있었다.
그저 입을 맞추고 이따금씩 고양이처럼 슬쩍 훑고 지나가는 것이 다인데도, 이상하게 예원은 그의 입술이 스친 자리마다 선명한 흔적 같은 것이 새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그라는 도장이 저를 상대로 쾅쾅 낙인을 찍는 것처럼.
“……하아, 민혁 씨.”
예원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의 굵은 어깨를 움켜쥐고는 밭은 숨을 내쉬었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훤히 내보이기는 진정 처음이었다.
조금은 어색하고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왠지 모를 기쁨 같은 것이 몸 곳곳에서 샘물처럼 퐁퐁 솟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제 위에서 다정하게 군림하고 있는 그가, 다른 누구도 아닌 현민혁이라는 남자여서 마냥 행복했다.
서로에게 닿는 숨결에 더욱더 열이 차오르고, 호흡이 절로 가빠진다.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듯 벅찬 마음을 쉬이 억누를 수가 없었다.
“……조금 아플 수도 있어.”
하지만 천천히, 최대한 안 아프게 할게. 당신, 다치게 안 할게.
쥐도 새도 모르게 상하의를 벗어던진 그가 제 품에 안겨 있는 예원을 따스히 내려다보았다.
맨살을 드러내면서 느낀 추위 탓인지, 아니면 과도한 흥분 탓인지.
그의 입술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물론 예원의 것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민혁 씨…… 나…….”
“응, 예원아.”
제게 얹어진 그의 팔을 잡은 예원은 힘줄이 불거진 그의 굵은 팔뚝을 불안한 듯 쓰다듬었다.
이까짓 것쯤 아무렇지 않게 해치워버리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모든 것이 현실로 이루어지고 나니 조금씩 두려움이 엄습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이 고스란히 눈빛으로도 비친 모양이다.
예원과 눈을 맞춘 그는 일순 걱정스런 표정을 짓더니 물었다.
“예원아.”
“…….”
“……지금이라도 그만둘까? 아직 준비 안 된 것 같으면…….”
“네?”
무슨! 여기까지 와서 그만둔다는 것이 웬 말인가!
식겁한 예원은 있는 힘껏 도리질을 했다.
“아, 아니! 아니요! 무슨 소리예요……!”
내가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려왔는데……!
시작은 미비했을지 모르나, 그 날 이후의 기다림은 내 것이 당신보다 컸으면 컸지 작지는 않았을 테다.
겨우 여기서 멈출 것 같았으면 아예 시작도 안 했어.
예원은 다짐하듯 굳게 입술을 다물었다.
“싫어요. 난 오늘, 무조건 민혁 씨한테서 선물 받을 거니까.”
“…….”
“이제 그만…… 사랑해 줘요. 마음껏.”
그녀 딴엔 무척 직설적으로 던진답시고 한 말.
그를 아는 민혁은 졸지에 잠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조용한 눈빛이 다시금 얽히고, 그러면서 그는 이내 여유로움을 되찾았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요.”
사랑해, 사랑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밀착해 있는 내내, 포근하고 달콤해 마지않는 목소리가 서로의 귓가를 댕댕 울려댔다.
조금 아플 수도 있다던 그의 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아니, 사실 틀렸다고 보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조금 아프다고 하기엔, 그냥 ‘조금’ 아픈 정도가 절대 아니었으니까.
아무래도 그는 진정 짐승이 맞는 것 같다고, 예원은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매우 여러 가지의 의미로.
하지만 예원은 그가 선사하는 모든 것을 꿋꿋하게 잘 참아냈고, 결국 그와 함께 마침내 환희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었다.
“……하아.”
찰나 같기도, 억겁 같기도 했던 시간이 흐른 뒤.
민혁은 결국 그녀에게로 찬찬히 무너져 내렸다.
어느샌가 가슴께에 떡하니 올려진, 촉촉이 젖은 그의 머리칼과 이마를 쓰다듬으며 예원은 거칠게 뛰는 자신의 심장소리를 기꺼이 그에게 공유했다.
금방이라도 곤두박질 칠 듯 울리는 이 우렁찬 심장박동소리는, 고작 격렬한 운동을 한 직후여서뿐만이 아닐 터였다.
“…….”
봐요, 내가 이만큼이나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고작 이런 말 따위로는 다 표현 못할 정도로 정말 많이.
그가 부디 제 맘을 최대한으로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예원은 제게 기댄 그의 머리칼을 하릴없이 보듬었다.
저를 짓누르는 그의 육중한 무게감이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고마워요.”
“뭐가?”
“그냥, 다.”
“……그럴 땐 그냥 사랑한다고 하면 되는 거야.”
“……아, 그런가?”
남성미가 물씬 느껴지는 몸과 상반되는, 아이같이 퉁명스러운 말투에 문득 웃음이 터졌다.
이 남자, 사랑한단 말이 듣고 싶었나 보구나.
“뭐, 민혁 씨가 그 쪽이 좋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
“사랑해요. 사랑해요, 민혁 씨.”
다소 이를지는 몰라도, 예원은 또한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단언컨대, 오늘 당신에게서 받은 선물이야말로 내가 일생토록 받아본 선물 중 가장 최고의 선물이었다고.
그래서 당신에게 참, 깊이 감사한다고.
물론, 왠지 모를 부끄러움이 이는 나머지 금방 속으로 고이 집어넣어야 했지만.
“나도 사랑해.”
“…….”
“……근데 예원아.”
“네?”
어쨌거나 대신, 그녀는 뜻하지 않게 또 다른 기회를 얻어낼 수 있었다.
“한 번만, 이대로 한 번만 더 해도 될까?”
“……네?”
미처 말로 전하지 못한 그 맘을 그에게 몸소, 끊임없이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그들의 진정한 첫날밤은 그렇게 너울너울 쏜살같이 지나가고 있었다.
마치 첫눈처럼, 너무나도 하얗게 물들어 있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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