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하나가 되는 밤
2019.01.01.
그 시각.
장 감독이 특별히 섭외해 놨다는─물론 그 밑의 수하를 시켰겠지만─ 강남의 유명 고깃집에서는 민혁이 빠진 뒤풀이가 한창이었다.
“혜인 씨, 그동안 진짜 진짜 수고했어. 여기, 내 잔도 좀 받아.”
“네, 감독님.”
극소수의 스태프들만 모인 룸 안에서 장 감독은 가장 상석에 앉아 있었다.
그 바로 옆 편은 주연배우 혜인의 차지였다.
“혹시 속상한 거나 서운한 거 있었으면 오늘 마시고 다 풀자고. 응? 종방연 때는 이렇게 소수정예로 모일 수가 없잖아. 기자들도 많고.”
장 감독이 혜인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호쾌하게 말했다.
말로는 소수정예 모임을 표방하고 있지만, 기실 이런 자리는 뒷담화를 위한 자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간단히 말해 알 거 다 아는 사람들끼리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할 말 못 할 말 다 하는 자리라고 해야 할까.
그걸 잘 알고 있는 혜인이기에, 이런 자리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기를 쓰고 참석하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뭘요. 하도 바쁘게 달려와서 그런지, 그동안 뭔 일이 있었는지 기억도 잘 안 나는 걸요.”
“하하. 하기야 그건 나도 그렇네. 아이고. 그나저나, 다윤이는 여기 있는데 우리 석준이는 어디 갔나 그래.”
다윤은 극중에서 혜인의 역할명이었고, 석준은 다윤의 파트너이자 민혁이 맡은 남자주인공의 이름이었다.
“그러게나 말이에요. 우리 다윤이 쓸쓸해서 어떡해?”
“어쩌겠어요. 천하제일 사랑꾼을 남주로 데려다 쓴 우리 잘못이지, 뭐.”
“쯧쯧쯧. 이래서 애처가, 공처가들은 안 된다니까. 이런 날 마누라 아프다고 쪼르르 달려가기나 하고……. 안 그러던 사람이 왜 그러나 몰라. 하여튼 유난은.”
“뭐 하루 이틀입니까. 결혼하기 전부터도 아주 난리였잖아요. 얼음왕자, 얼음왕자 하더니 알고 보니까 완전 불꽃왕자더만!”
장난스러운 그 말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으나, 혼자서 조용히 술잔을 들이킨 혜인의 입가에는 그저 쓴 웃음만 번졌다.
……그래,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이 돼 버렸지. 나 같은 사람은 미처 적응도 못하게끔.
아까 전, 제 앞을 쌩하니 돌아서서 바쁘게 뛰어가던 그의 뒷모습이 아직까지도 선했다.
저도 모르게 깨문 입술 끝에서 아릿한 아픔이 느껴졌다.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예전에는 민혁 씨 관련해서 별 희한한 얘기도 있었지 않아?”
“무슨 얘기요?”
“왜, 있었잖아. 그…….”
“아. 그, 게이 얘기요?”
“그래, 그거!”
한데 바로 그때, 어떤 이야기가 툭 불거져 나왔다.
축 처져있던 혜인의 구미를 절로 잡아끌게 만든 이야기가.
“솔직히 말이야. 난 처음에 그 두 사람, ‘쇼윈도 부부’가 아닌가 했거든.”
목소리를 낮춘 장 감독이 살짝 은밀하게 말하자, 자리에 있는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혜인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다.
“정말요? 왜요?”
“왜, 예전에. 탤런트 중에 레즈비언이랑 게이랑 둘이 짜고 위장 결혼한 경우 있었잖아. 루머 없애겠다고.”
“아! 누구더라. 그, 그…….”
“설마. 김진호랑 서예은이요?”
“그래, 그 둘. 듣자하니 요즘도 둘이 각자 애인 만드느라 정신 없다더구만.”
“헐, 전 그거 루머인 줄 알았는데. 그럼 둘이 진짜 쇼윈도였던 거예요?”
“암암리에 알면서 다들 쉬쉬한 거지. 워낙 민감한 얘기잖아, 그게. 늬들도 혹시 모르니까 입조심해라. 어디 가서 내가 얘기해줬다고는 입도 뻥끗하지 말고. 알았지.”
“당연하죠! 와, 근데 대박이다 진짜.”
쇼윈도 부부……?
아직 소주의 여운이 남아있는 혀를 굴리며, 얼굴을 찌푸린 혜인은 그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고작 다섯 글자밖에 되지 않는 낱말이 이상하리만큼 귀에 팍 꽂히고 있었다.
‘설마…….’
그러고 보면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긴 했다.
무엇보다, 그가 선뜻 결혼을 하겠다고 나섰던 것부터가 최고로 이상한 일이었다.
저와의 일을 겪은 후 여자라면 돌보다도 못하게 취급하던, 장장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맘을 굳게 닫아놓고 있던 현민혁이.
만난 지 고작 몇 달 정도밖에 안 된 계집애와 결혼을 하다니.
다 지나고 난 지금 돌이켜봐도 쉬이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아무튼 그때는 좀 의심스럽더라고. 솔직히 나만 그런 생각한 거 아닐 걸. 안 그러냐?”
“하긴…… 저도 좀 이상하게 생각하긴 했어요. 이제 막 떠오르는 배우가 갑자기 생뚱맞게 웬 결혼인가 싶기도 했고. 배우한테는 그런 거 치명타잖아요.”
“그렇지. 근데 그게 만약 루머 때문이라고 하면 상식적으로 말이 되잖아? 그래서 잠깐 그런 의심을 했었다고. 잠깐.”
“그럼, 지금은요?”
“지금?”
눈썹을 치켜올린 장 감독은 물을 걸 물으라는 듯 웃었다.
“마누라 아프다고 그렇게 득달같이 달려가는데 퍽이나 쇼윈도겠다. 저번에 보니 그 와이프도 싹싹하고 예쁘장하더구만. 자기들끼리는 정말 불꽃같은 연애를 했나 보지, 뭐.”
“아, 하긴……. 일반인 치고 아까운 외모긴 하더라고요, 그 분. 아무리 날고 기는 현민혁이라도 반할 만 하겠던데.”
“그런 거 보면 세상사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다니까. 아무튼, 그 덕분에 그놈의 게이루머도 싹 사라졌잖아. 일석이조인 거지 뭐. 하하하.”
“…….”
“혜인 씨, 혜인 씨는 그쪽 커플 얘기 뭐 들은 거 없어? 옛날부터 민혁 씨랑 친분 있지 않았나?”
“……네? 저요?”
그 사이, 혼자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혜인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장 눈을 내리깔고 느릿느릿 대답할 뿐이었다.
“아, 아뇨. 뭐…… 전 별로…….”
“그래? 하기야, 그리 꽁꽁 숨기고 감춰대는데 그 사연을 누가 알겠어……. 하이고, 됐다. 사랑꾼은 알아서 지지고 볶고 하라고 하고, 우린 우리끼리 즐기자고. 자, 건배!”
“건배!”
그 이후엔 언제 무슨 얘기를 했었냐는 양 대화주제가 금세 바뀌어버렸다.
현민혁 내외의 ‘쇼윈도 부부설’ 같은 거야, 그들에겐 그저 우스갯소리에 지나지 않는, 스쳐지나가듯 한 얘기였으므로.
하지만…….
“혜인 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네?”
그 속에서, 오직 혜인만은 알게 모르게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또렷한 실마리를 잡기라도 한 사람처럼.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리 말하는 혜인의 얼굴엔, 최근 그 어느 때보다도 생기가 가득해져 있었다.
* * *
한편, 다시 돌아온 두 사람의 신혼집.
“헉!”
방심하고 있던 민혁은 제 품으로 뛰어든 여자를 채 안지도 못한 채 굳어버리고 말았다.
허리춤을 와락 껴안는 힘이 어찌나 거셌던지, 그의 건장한 몸조차도 자칫 뒤로 떠밀릴 뻔했을 정도였다.
“예, 예원아……?”
그가 당황 가득한 눈으로 여자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여자는 어느새 그의 가슴팍에 온전히 얼굴을 묻은 채였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입술이 벌어질 때마다 가슴께를 뜨겁게 간질이는 야릇한 온기.
그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실크 소재의 보드라운 옷자락과 아슬아슬 닿아 있는 팔뚝이 어정쩡하게 붕 떠 있다.
그 부드러움만큼이나, 이 상황이 그에겐 미치게 자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미쳤지, 현민혁.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넌.’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남자로서의 본능이 고개를 드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최소한의 시와 때 정도는 가려야 할 것이 아닌가.
아픈 사람을 상대로……. 젠장.
“……미안. 최대한 일찍 온다고 온 건데. 좀 늦었네.”
속으로 스스로를 지탄한 민혁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가볍게 보듬었다.
그런데 이 여잔 갑자기 왜 이럴까.
너무 아파서 칭얼대고 싶어진 건가?
“몸은 좀 괜찮아? 아프다며.”
예원의 어깨를 붙들고 살짝 떼어낸 그의 손이 그녀의 이마를 덮으려 했다.
하지만 여자의 작고 마른 손은 그 손을 곧바로 붙잡아 내릴 뿐이었다.
“하지 마요.”
“왜, 열 있나 보려는데.”
“나 열 안 나요.”
“재보지도 않고 그걸 어떻게 알아.”
“그야…….”
눈꺼풀을 천천히 밀어올린 그녀가 그를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그 입가에 떠오르는 얌체 같은 미소.
“거짓말이었으니까.”
“……뭐?”
미간을 좁힌 그는 순간 제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거짓말이라니. 아니, 그런 거짓말을 왜……?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상황 탓일까.
아니면 품안에 바짝 밀착해 안겨있는 이 가느다란 여체 탓일까.
사고회로가 이상하리만큼 굼뜨게 반응했다.
어디 가서 빠지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한 후각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술 마셨어?”
숨결 끝으로 은은하게 퍼진 알싸한 냄새를 뒤늦게 감지했다.
그 말에, 눈꼬리를 곱게 접은 여자는 그걸 이제 알았냐는 듯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쪼금.”
“혼자서?”
“그럼 누구랑 마셔요.”
“…….”
민혁이 기억하기로 그녀가 혼자 술을 마셨을 때는 딱 한 번이었다.
다름 아닌 전민혁에게서 대차게 상처 받았던 그때.
에덴의 테이블 위로 술과 안주를 한 무더기는 쌓아놓고, 혼자 세상 다 산 얼굴을 하고 있던 여자의 모습을 떠올린 민혁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속상한 일 있었나?’
그도 그럴 게, 그렇지 않은 이상 그녀가 혼자서 술을 마셨을 리는 없을 노릇이었다.
정 뭣하면 친구 지영이라도 불렀을 텐데,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고.
‘설마, 나 때문인가.’
며칠간 마지막 촬영을 몰아서 해치우다 보니 집에는 거의 들어오지를 못했다.
들어와도 잠만 자고 나가는 날이 부지기수였고, 한참 예민하고 피곤해져 있었던 탓에 이따금씩 했던 전화통화에서도 밝게 응해줄 수만은 없었다.
안 그래보여도 꽤나 여린 성정을 가진 여자다.
그런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에 남몰래 속상해했을지도.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온갖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가운데, 턱 밑에서 여자의 조용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실은, 나 내일 생일이에요.”
“어?”
가만. 생일…….
생일!?
“……아!”
그것 때문이구나. 내가 생일을 잊어버렸다고 생각해서!
조각 하나가 모자랐던 퍼즐이 비로소 딱 맞춰지는 느낌.
그의 얼굴엔 금세 낭패감이 어렸다.
“맞다, 미안해. 안 잊어버린다고 그렇게 다짐을 해놓고…….”
그녀의 생일쯤이야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구태여 그녀에게 따로 묻지 않아도, 이력서를 통해 일찌감치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었으니까.
다만 그게 내일인지를 미처 몰랐을 뿐이었다.
바쁜 촬영을 소화하느라 날짜감각에 한껏 무뎌져 있었고, 그러다 보니 그만 그녀의 생일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진짜 미안해, 예원아. 내가 요즘 너무 바빠서 깜빡 잊었어. 정말 미안.”
“……진짜 미안해요?”
“응. 진짜. 정말로.”
“그럼, 나 선물 줘요.”
“……선물?”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그렇잖아도 이 일을 어찌 수습해야 하나 고민스러워지던 차였는데.
“뭐 줄까? 말만 해. 내일 바로 사다 줄게.”
“아니, 내일 말고.”
그의 얼굴엔 금방 화색이 돌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살랑 젓더니 다시금 속삭였다.
“지금 줘요.”
“……지금?”
“네.”
“…….”
“사실, 다른 건 필요 없어요.”
순간, 그의 목덜미에 뱀처럼 스르륵 감기는 손길.
“……민혁 씨. 민혁 씰 나한테 줘요.”
그에 이어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묘하게 섹시한 느낌마저 자아낸다.
그는 다소 얼떨떨한 눈으로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간만에 오른 술기운 탓인지, 그녀는 이전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른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예원아. 이미 난 네 거잖아.”
“아니, 그런 거 말고요.”
“…….”
“알잖아요. 꼭…… 더 말로 해야 돼요?”
그 말에, 겨우 진정시켰던 마음이 불을 지핀 듯 또다시 동했다.
물론 현민혁은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사나이 중의 사나이였고, 더 듣지 않아도 그녀가 말하고 있는 바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 정도로 노골적인 뉘앙스를 눈치 못 챈다면 그건 바보나 다름없을 테니까.
하지만…….
“……예원아.”
“…….”
“혹시 나 때문에 이러는 거면, 이러지 않아도 돼.”
그녀가 이리 조급하게 나오는 이유는 아마도 자신 때문일 터였다.
일주일 전, 그가 제 욕정을 이기지 못할 뻔 했던 그 날의 여파로.
“나 괜찮아.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
“…….”
“굳이 억지로 이러지 않아도 된다고.”
언제까지고 그녀를 기다려 주기로 했다. 사랑하니까.
결코 허투루 한 다짐이 아니었고, 민혁은 그런 제 맘을 그녀에게 일깨워주고 싶었다.
그뿐이었다.
“……억지로 이러는 거 아니에요.”
“예원아.”
“그런 거 아니라고요.”
허나, 여자에게선 생각지 못한 반항스러운 대꾸가 돌아왔다.
“그 날 이후로, 아니, 그 날 밤부터…… 많이 생각했어요. 이만큼이나 날 아껴주는 사람 앞에서, 난 대체 뭘 그리 두려워한 걸까. 계속 생각해 보니까 답이 나오더라고요. 이건 순전히 내 용기 문제라는 거.”
“…….”
“평소엔 안 그러면서, 난 꼭 누굴 좋아하고 사랑할 때만 주춤거리고, 용기를 잃더라고요.”
그래서 당신과도 이만큼이나 돌아온 거고.
돌이켜 보면 정말 어리석은 나날들이 아닐 수 없다.
예원은 입술을 힘껏 굳게 앙다물었다 놓았다.
“그치만 이젠…… 그러기 싫어요. 나처럼, 나답게. 솔직해지고 당당해지고 싶어요. 그래서 이러는 거예요.”
“…….”
“근데, 그래도 통 용기가 안 나서…….”
그래서 되도 않은 술의 힘도 한 번 빌려 본 것이었다.
워낙 술이 센 탓인지 별 효과는 없는 것 같긴 했지만.
어쨌든 수면위로 끌어올리기가 어려웠을 뿐, 한 번 터진 말은 물꼬를 트기라도 한 양 흘러나오고 있었다.
“민혁 씨.”
“…….”
“민혁 씨라면…… 지금 당장 내 모든 걸 줘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녀가 진심을 담아 말을 고르는 사이, 서로를 향한 눈빛이 대각선으로 맞물렸다.
“민혁 씨도 나한테, 남김없이 다 줬으면 좋겠어요. 몸도…… 마음도.”
고백은 이미 오래 전에 서로 나누었던 것 같은데, 마치 처음 받아본 고백처럼 마음이 온통 들뜬다.
저를 향해 수줍게 속삭이는 아내를 보며, 민혁은 잠시간 입을 열지 못했다.
“……촬영 끝나면, 하고 싶은 거나 받고 싶은 거 생각해보라고 했죠?”
“…….”
“이게…… 지금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거예요.”
……가장 받고 싶은 거기도 하고.
그리 말하는 그녀의 눈은 마치 밤하늘의 별빛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어찌나 가까워졌는지 금방이라도 맞부딪칠 것 같은 입술 사이.
그 사이로 이윽고 짧은 정적이 흘렀다.
“…….”
“…….”
그렇게 잠시 뒤.
그 상태 그대로 머뭇거리던 그는 뒤늦게야 물었다.
아주 조심스러운 듯한 어투로.
“후회……하지 않겠어?”
“……네?”
결코 웃을 타이밍이 아니건만, 그 말에 예원은 저도 모르게 픽 웃고 말았다.
문득 먼 옛날의 생각이 퍼뜩 떠오른 탓이었다.
‘어쩜,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다른 게 없냐.’
시간이 이렇게나 흐르고,
당신과 내가 이런 사이가 되었는데도.
“……후회는 무슨.”
“…….”
“난, 후회 같은 거 안 해요.”
칼끝처럼 단호한 그녀의 대답에, 민혁의 눈은 금세 파도처럼 일렁였다.
그 대답이, 언젠가 저가 그녀에게 했던 말과 닮아있었다는 것은 좀 더 나중에야 안 사실이었다.
“사랑해요.”
그 뒤에 이어진 말은, 그에게 곧 주문과도 같았다.
“……나도 사랑해.”
인내심 같은 건 이미 오래 전에 바닥 나 있었던 것 같다.
짤막하게 대답한 민혁은 그 말에 화답하듯, 곧바로 그녀의 입술에 저돌적으로 키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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