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당신에 대한 나의 대답
2018.11.09.
한편 그 시각, 민영은 이틀 뒤로 다가온 본선 합숙기간을 대비해 일찍부터 짐을 챙기고 있었다.
“옷이랑 속옷은 이쯤하면 됐고…….”
세면도구랑 잡동사니들도 거의 다 챙긴 것 같은데.
이제 뭐가 또 남았지.
“……아.”
그러고 보니, 화장품 같은 건 하나도 챙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본선 무대에서는 방송국에서 고용한 전문가가 알아서 메이크업을 해줄 테지만, 보컬 트레이너와 세션 연주자들 정도만이 함께하는 연습 현장에서는 그런 호강을 누리지 못할 터였다.
무엇보다 그 모든 곳엔, 그녀의 ‘파트너’ 홍지원이 당연하게 함께할 것이다.
그 사실은 민영으로 하여금 괜한 생각들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몇 개만 가져갈까.”
다소 성숙해 보이는 외모 때문에 오해를 많이 받지만, 그녀는 평소 화장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편이었다.
학생이 화장은 무슨. 그렇게 생각하며 대충 선크림과 립밤 정도만 바르고 때우기 십상이었는데.
막상 TV에 나가게 되고, 홍지원과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게 되리라 생각하니 자연히 겉치장에도 신경이 쓰였다.
‘어떡하지. 나만 너무 민낯이면 좀 그럴 것 같은데.’
아무리 노래를 중점적으로 본다지만, ‘스타’를 뽑는 오디션이니만큼 비주얼 좋은 참가자들도 대거 몰릴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바쁘게 준비해야 하는 프로그램 특성상, 막 자다 깬 부스스한 몰골로 연습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 닥칠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홍지원이 그걸 바로 코앞에서…….
“……씨.”
에라이, 몰라. 하는 수 없지.
결국 파운데이션과 아이라이너, 가벼운 틴트 등을 가방에 달린 작은 주머니 안에 쏙 챙긴 민영은 짐짓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였다.
“……짐을 벌써 싸 놔? 출발은 내일 모레라면서.”
살짝 열린 문 사이를 비집고 어렴풋한 참견이 들려왔다.
그녀와 달리 무척이나 착잡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
민영의 엄마였다.
“……알잖아, 나 완벽하게 준비 돼 있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거.”
금세 웃음기를 지운 민영이 저도 모르게 짐 가방을 옆으로 치웠다.
본능적인 회피.
그걸 본 엄마는 한숨을 쉬었다.
“민영아.”
“…….”
“아직도…… 엄마가 미워?”
그 나직한 물음에, 흠칫한 민영의 시선이 슬쩍 엄마에게로 향했다.
……진실이 밝혀지던 그날.
그녀가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고모는 호언장담을 하던 것이 무색하게, 일이 있는 것을 깜빡했다며 허둥지둥 자리를 떠 버렸다.
집에는 자연히 엄마와 민영 둘만이 남았고, 그녀의 화살은 애꿎은 엄마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왜, 왜 이제껏 숨긴 거야?! 왜?’
민영의 나이도 어느덧 열아홉.
이제껏 제가 엄마아빠의 딸로 태어났다는 사실에 추호의 의심조차 하지 않고 살아온 그녀였다.
한때는 괜한 자부심마저 있었다.
세상에 우리 집만큼 행복한 집은 없을 거야. 나만큼 행복한 아이도 없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던 나날들이 엊그제 같기만 한데.
그런데…… 그런 내가 엄마아빠의 친딸이 아니었다니.
배신감과 분노가 극에 달했다.
그것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그 순간을 떠올리면 아직까지도 몸이 부르르 떨려올 정도였다.
“……아니. 안 미워.”
하지만, 그런 민영을 더욱 절망스럽게 만든 사실은 따로 있었다.
“엄마가 일부러 날 속이려고 그런 게 아니니까.”
자신에겐, 그들을 탓할 자격조차 없다는 것.
“나도 이제 클 만큼 컸고, 알 만큼 알아. 엄마아빠가 지금껏 나 키워 준 은혜, 나 앞으로 평생을 살아도 그거 다 못 갚아. 절대 잊지도 못할 거고.”
몰랐던 사실을 알아버렸다 해도 변하는 건 없었다.
모든 것을 알고도 여전히, 민영은 제 가족을 무척이나 사랑했다.
이 세상, 그 어느 무엇보다도.
“민영아…….”
애달프게 이지러지는 엄마의 눈을 보며, 민영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근데 엄마. 엄마아빠한테는 미안하지만, 나 꼭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다만 그들에 대한 분노가 사그라지자, 그 분노는 또 다른 쪽으로 발현되었다.
아니, 이제야 제대로 된 상대를 찾았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지만.
“다른 이윤 없어. 엄마아빨 저버리겠다는 것도 아냐. 난 그냥…… 그렇게 어렸던 내가 왜 버려졌는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어째서 날 아무도 찾지 않았는지…… 그걸 알고 싶을 뿐이야.”
한 살배기 갓난아기를 그렇게 무참히 버릴 만큼 비정했던 부모.
그 인간만도 못한 사람들이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었다.
과연 두 발 쭉 뻗고 잘 살고 있을까.
날 기억하고 있기는 할까.
하루에도 그런 온갖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넘나들었고, 그럴 때마다 민영은 죽고 싶어졌다.
좋은 추억으로만 남아 있던 제 어린 날의 기억을 졸지에 오물로 뒤덮어버리고 만 그들.
그들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또 혹시 알아? 이 세상에, 이 우월한 미모를 똑 닮은 핏줄이 또 있을지도 모르잖아.”
“…….”
“그러니까…….”
……좀 도와줘, 엄마.
“나…… 내 친부모를 찾고 싶어.”
눈시울이 붉어진 민영이 작게 속삭였다.
* * *
날이 풀려 그런지 평소보다 손님이 많았음에도, 오늘의 마감은 꽤 이른 시간에 끝낼 수 있었다.
물론 민혁의 보살핌 덕에 빠른 시간 안에 거의 회복을 마친 예원과, 에덴의 베테랑 알바 채린이 한 몸처럼 합심한 결과였다.
“수고하셨어요, 점장님.”
“채린이 너도 수고했어. 늦었는데 얼른 가봐.”
“히히, 넵! 점장님도 안녕히 들어가세요!”
채린을 보낸 후, 조명을 끄고 문단속까지 마친 예원은 황급히 에덴을 나왔다.
조금 이따 그에게 ‘고백’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마음이 무척이나 조급해져 있었다.
‘얼른 집에 가야겠다.’
그에게서 온 연락은 아직 없었다. 아무래도 촬영이 조금 늦어지는 모양이었다.
가서, 조용한 집안에서 천천히 생각을 정리해야지.
그리고 침착하게 말하면 될 것이다.
미루고 미루어왔던 마음들을. 그리고 그 고백을 위해 제가 포기하기로 한 나머지 것들까지도.
‘어?’
그런데, 그렇게 옆 카페 ‘빈’을 지나쳐 가려던 중 안쪽에서 누군가를 발견했다.
잘빠진 은색 드립포트를 들고, 드리퍼에 따끈한 물을 붓고 있는 남자.
바로, 최우진이었다.
‘순 뺀질거리게 생겨선. 일할 때는 꽤 진지하네.’
예원의 얼굴에 살짝 의외라는 빛이 떠올랐다.
평소엔 개뿔 모르겠더니, 저렇게 해놓으니 그래도 사장답긴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정도면 양반이지. 우리 사장은…… 저런 거 하나도 못 하는데.’
에휴. 생각이 어쩌면 이렇게 만날 한 곳으로 빠지는지.
상념을 지워낸 예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 앞을 벗어나려 했다.
“어?”
그런데 그때, 고개를 든 남자와 떡하니 눈빛이 마주쳐버렸다.
……아뿔싸. 예원은 뭔가 들킨 사람처럼 얼른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예원 씨!”
하지만 몇 발자국쯤 갔을까.
언제 나왔는지 모를 남자의 목소리가 곧장 뒤통수로 꽂혔다.
‘……젠장.’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뒤로 돌아 떫은 미소를 지었다.
“……네?”
“봤으면서 왜 그냥 가요. 인사라도 하지.”
“……아, 네. 안녕하세요.”
그렇게 바로 인사하라고 한 말이 아닌데.
언제나처럼 즉각적인 여자의 반응에, 우진의 입가에도 살짝 미소가 스몄다.
“으음, 마침 잘됐네. 혹시 별 일 없으면, 잠깐만 들어왔다 갈래요?”
“……네?”
“드립하기 좋을 것 같은 원두가 있어서 오랜만에 한 번 해보려던 참인데, 두 잔 분량은 충분히 나올 것 같아서요.”
뜻하지 않은 제안을 받은 예원은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였다.
냉랭하게 선을 그은 것이 언제적 일인데, 저 남잔 나한테 왜 또 저런 말을?
“아아, 부담 주는 거 아니에요. 잠깐이면 됩니다. 커피 한 잔 마시는 데 뭐 얼마나 걸린다고.”
“…….”
“그러지 말고 들어와요. 최대한 맛있게 내려 줄 테니까.”
……어쩌지. 칼자루를 쥔 예원은 잠시 고민했다.
사실 귀찮음 탓에 드립을 안 한 지도 꽤 된 터라, 오랜만에 드립커피를 맛보고픈 마음은 있었다.
드립은 머신에서 만드는 커피와 또 다르기에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 중의 하나다.
즉, 이번 기회에 옆 카페 사장의 실력을 어느 정도 확인해볼 수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실은, 지난번 그에게 과도하게 쌀쌀맞게 군 것이 조금은 마음에 걸리기도 하던 차였다.
내가 그렇게 대했는데도, 저 남잔 아직까지 저렇게 웃고 있는 얼굴이라니…….
“…….”
그래, 뭐. 기분이다. 그래봐야 아주 잠깐일 텐데 뭐.
“……네, 그럴게요.”
“여기 앉아서 잠깐만 기다려요. 마침 딱 린싱(종이필터에 물을 미리 부어 종이냄새를 빼고 커피의 맛을 더 좋게 해주는 일)까지만 해놨어요.”
그래도 나름 배운 게 있는지, 드립포트를 든 남자에게서는 꽤 그럴 듯한 태가 나오고 있었다.
가느다란 물줄기가 소담히 담긴 원두가루 위로 고르게 떨어졌다.
몇 번의 커피 빵(신선한 원두로 드립을 했을 때 빵처럼 부푸는 현상)이 부풀어 오르고, 예원의 앞에는 금세 완성된 커피 한 잔이 놓였다.
“자, 여기. 맘껏 들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드립커피 전용 잔을 든 예원은 우선 향기를 맡았다.
멀리 있을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 오니 그 향기에서부터 이미 티가 확 나고 있었다.
“……예가체프(에티오피아 남부 이르가체페(Yirgacheffe)에서 생산되는 커피)네요.”
웃음과 함께 읊조린 말에, 맞은편에서 커피를 들려던 남자는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참나, 저 바리스타거든요? 예가체프 정도도 구분 못할 만큼 실력 없지는 않아요.”
후훗. 그녀가 살짝 우쭐해하며 말했다.
그는 여전히 놀란 얼굴이었다.
“뭐, 물론 그렇긴 하지만……. 마시지도 않고 알아챌 줄은 몰랐는데.”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커피거든요. 원래 신맛 나는 커피를 좋아하기도 하는데, 이 특유의 꽃향기가 맘에 들어서요.”
예가체프는 본래 복숭아, 자두, 살구 등 달콤한 베리류의 향미와 은은한 꽃향기를 가진 것이 특징이었다.
다른 원두에 비해 취향에 맞고 상대적으로 구하기도 쉬웠던 터라, 대학에 다닐 때부터 꽤 즐겨 마셨던 기억이 난다.
무지막지하게 아팠던 와중에도 그녀 특유의 예민한 후각과 미각은 온전했다.
“오……. 예원 씨 꽃 좋아하나 봐요?”
“네, 좋아해요. 받아본 적은 거의 없지만.”
“민혁이더러 사달라고 하죠, 왜.”
지나가듯 던져진 남자의 말에, 예원은 곧바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요.”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얘기를 안 했지.
한 거라곤 계약결혼밖에 없는 사이라도, 그 정돈 얼마든지 요구할 수 있는 일이었을 텐데.
하다못해 이모 꽃집에서 한 다발 사다 달라고 했어도 되고.
이럴 땐, 제가 그와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 새삼 생경하게 다가오곤 했다.
“뭐, 앞으로 많이 사달라고 하면 되죠. 어차피 남은 앞길이 구만린데. 안 그래요?”
하지만 그런 예원을 전혀 모르는 우진은 그녀와 커피를 마시고 있단 사실이 마냥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저, 근데 홍예원 씨.”
“…….”
“나…… 이쯤에서 우스운 얘기 하나 해도 됩니까?”
예원이 무심코 고개를 들자, 우진은 괜스레 혀로 입술을 축이더니 낮게 입을 열었다.
“나, 사실은.”
“…….”
“홍예원 씨 좋아했었어요.”
그 순간, 커피를 마시던 예원의 눈은 곧바로 휘둥그레졌다.
“……네?”
금세 왕방울만 해진 그녀의 눈을 보며, 우진은 방금 전의 그녀와 마찬가지로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는데, 그래도 너무 과하게 놀라네요.”
“……아, 저, 전 그냥…….”
때마다 와서 치근대는 듯했던 그가 어쩐지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냥 저를 놀리는 게 재밌어서 그러는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가 저를 상대로 그런 진지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니.
무척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그냥 흔하게 스쳐지나가는 사람들 중 하나 정도로만 생각했어요. 근데 참, 보면 볼수록 새롭더라고요.”
“…….”
“내가 찾아갈 때마다 은근하게 틱틱대는 것도 귀엽고, 안 그래 보이는데 은근히 마음도 약하고. 착하고, 여리고……. 그렇게 자꾸 나도 모르게 관심이 갔어요.”
“…….”
“그 오래 알고 지냈다는 남자친구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진지하게 대시해봤을 텐데.”
“……최우진 씨…….”
당황스러워진 예원이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지만, 우진은 태연하게 말할 뿐이었다.
“물론 다 지나간 얘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얘기도 할 수 있는 거고.”
“…….”
“민혁이가 운이 좋았죠. 걔도 은근히 보는 눈이 있어요. 예원 씨 같은 여잘, 그렇게 홀랑 아내로 맞아들인 걸 보면.”
얼떨결에 선수를 빼앗겨 버리긴 했지만, 그 구남친과 헤어지고도 행복해하는 예원을 볼 때면 그녀를 놓친 사실이 전혀 아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를 그렇게 만들어준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현민혁’이었기에 더 그랬다.
다시 생각해도 참 얄궂은 인연.
“근데, 이미 남의 여자가 된 지 오래지만……. 홍예원 씨가 참 매력 있는 사람이라는 내 생각엔, 아직까지도 변함이 없거든요.”
“…….”
“그래서 말인데…….”
커피 잔을 탁, 내려놓은 그가 문득 조용히 물었다.
“우리, 친구할래요?”
“친구…… 요?”
“네.”
그의 고개가 작게 끄덕여졌다.
“이렇게 가끔 커피도 같이 마시고, 적당히 남의 흉도 보고,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하고……. 뭐, 민혁이 그 자식이 못 살게 굴면 나한테 와서 이르기도 하고.”
“…….”
“그런 건…… 싫습니까?”
살짝 떨리는 입꼬리에서, 그답지 않게 긴장한 기색이 엿보였다.
그녀가 민혁을 상대로 미뤄온 고백만큼이나, 그 또한 이 말을 하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을 두고 고민했을 것이 분명했다.
‘친구를…… 하자고?’
승낙할지 거절할지, 아무것도 정해진 바는 없었지만…… 얼른 뭐라도 대답해야겠다는 마음이 앞섰다.
저의 대답을 초조히 기다리고 있는 남자에게서, 마치 몇 시간 뒤의 제 모습을 미리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기에.
“어……. 그, 글쎄요. 정확히 말해서, 싫다기보다는…….”
“예원아.”
그런데 바로 그때, 겨울바람처럼 서늘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때렸다.
“……뭐하고 있어, 여기서. 아직 몸도 안 좋으면서.”
남자의 훤칠한 인영이, 어느샌가 먼발치에 나타나 있었다.
“얼른 일어나. 집에 가게.”
성큼성큼 다가온 그는 상체를 숙여 다짜고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차갑게 얼어붙은 목소리와 이질적이게도, 그의 말투는 평소보다 한층 더 부드러웠다.
“현민혁.”
“가자니까.”
앞에 앉은 우진은 아예 투명인간 취급이었다.
어떡하지.
졸지에 궁지에 몰린 예원은 끝내, 두 남자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
“……먼저 일어나게 돼서 죄송해요. 커피, 잘 마셨어요.”
이변이란 건 없었다.
제 남편에게 이끌린 그녀는 그 상태 그대로 눈앞에서 사라져버렸고,
마시다 만 커피 두 잔과 함께 홀로 남은 우진은 출입문 쪽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대답은 해주고 가지.”
하여튼, 못 이기겠다니까. 현민혁.
* * *
카페 ‘빈’을 나와 그의 차로 함께 걸어가는 동안, 민혁과 예원은 짜기라도 한 듯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차 앞까지 도달했을 때, 예원은 그의 손아귀에 잡혀 있던 손목에 힘을 주었다.
손목은 생각보다 더욱 쉽게 빠져나왔다.
“민혁 씨.”
“…….”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넌지시 건네진 그녀의 물음에, 멈춰선 민혁은 그제야 그녀를 돌아보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
“……지난번엔, 화내셨잖아요.”
우진과 단둘이 저녁을 먹었던 날, 그는 그야말로 불같이 화를 냈었다.
엄연한 유부녀이자 제 아내로서의 본분을 기억하라며.
왠지 모르지만 엄청나게 불안해하는 것 같았던 그를 위해, 심지어 다른 어떤 남자와도 만나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했었는데.
지금의 그는, 다소 냉정한 얼굴을 하고 있을지언정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놀라우리만큼 차분해 보였다.
“화 같은 거 안 낼 겁니다.”
“……왜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본 그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화낼 이유가 없어졌으니까.”
그 말을 들은 순간, 예원은 이상스럽게 몸에서 힘이 전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왜…… 화낼 이유가 없는 거지?
이젠 나한테 기대감이 없어서?
그도 아니면, 그럴 가치조차 없는 상대여서?
어느 쪽이든 간에, 기분이 좋지 않은 건 매한가지였다.
“…….”
그 뒤로도 온갖 의문들이 머릿속에서 치고 올라왔지만, 귀결되는 결론은 딱 하나였다.
“……민혁 씨.”
지금이 바로, 그에게 진심을 고백할 타이밍이란 것.
“오늘 아침에, 제가 하려던 말이요. 그거…… 지금 할게요.”
……후.
깊게 심호흡한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고는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좋아져…… 버렸어요. 좋아하면 안 되는 거 다 알면서, 좋아져 버렸어요.”
“…….”
“당신은 게이인데. 그래서 이런 말도 안 되는 계약결혼까지 한 걸 텐데. 근데…….”
……좋아져 버렸어요. 정말 말도 안 되게.
흐려지는 말끝에 자조적인 웃음이 살짝 흘렀다.
“그렇게 당해놓고, 또 그쪽을 상대로 이러는 내가 너무너무 혐오스럽고 싫지만…… 이젠 어쩔 수가 없어요.”
“…….”
“좋아하지 않는 척, 싫어하는 척……. 아무렇지 않게 당신 옆에 있을 자신이…… 이젠 없어졌거든요.”
조금만 더 이렇게, 당신 옆에 있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여기까지이기에 차라리 다행인 걸 수도 있었다.
그의 옆에 있으면 있을수록, 마음은 하루가 다르게 그를 향해 가지를 뻗고 곧게 곧게 자라났으니까.
어느샌가 공룡만큼 거대해진 이 감정을 어떻게 갈무리해야 할지, 지금으로서도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때 좋아한다고 했었던 말, 실언 아니었어요. 후일이 두려워서…… 저도 모르게 무작정 거짓말한 거예요.”
“…….”
“어쨌든 이 모든 건 다 저 때문이니까……. 제가 책임질게요. 민혁 씨한테 받기로 했던 모든 거, 다 내려놓을게요. 에덴도 그만둘게요. 남은 시간 동안 그쪽이 절 필요로 하는 상황이 온다면 전부 동행하겠지만…… 그 외의 것들은, 전부 예전으로 돌아갔으면 해요.”
“…….”
“그러니까 우리…….”
울컥 북받치는 울음을 애써 삼켜낸 그녀가 마침내 말했다.
“……이제 그만해요.”
고백과 함께 투척해 버린 파혼, 아니…… 이혼 선언.
말을 마친 예원은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숙였다.
이 남잔 지금 무어라 생각하고 있을까.
생각까지는 몰라도, 무척이나 당황스런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은 분명했다.
밀려드는 자괴감에 절로 몸서리가 쳐지는 몸을, 예원은 간신히 부여잡고 서 있었다.
“…….”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한참동안 잠겨 있었던 것 같은 남자의 목소리가 그녀의 앞에 낮게 울렸다.
“……방금 그거, 고백입니까?”
남자의 물음에,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예원은 눈꺼풀을 살짝 들어올렸다.
고백은 맞는데, 곧이곧대로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들으셨다면요.”
에이씨, 할 말이 고작 이것밖에 없냐.
당장이라도 혀를 깨물고 싶어지는 와중에, 그는 연이어 물었다.
“고백을 했다는 건, 대답을 바란다는 뜻입니까?”
“……아, 아뇨?”
그에게 부담감을 지워주고픈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곧바로 고개를 쳐든 예원은 황급히 부인했다.
“아니에요, 그런 건! 그런 게 아니라, 전 그냥…… 이렇게 있다간 제가 도저히 못 버틸 것 같아서…….”
“홍예원 씨.”
그의 부름에 다시금 고개가 들렸다.
“지금부터 내 대답, 똑똑히 잘 들어요.”
말을 마친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두 뼘 정도였던 거리가 금세 한 뼘 정도로 좁혀지고.
두 사람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맞닿을 듯 가까워졌다.
이윽고 남자의 커다란 손은 그녀의 양쪽 어깨를 포근하게 감싸 쥐었다.
“미, 민혁 씨……?”
지금 이게 어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 수가 없다.
그를 올려다보는 채로 당황스럽게 눈을 굴리는 그녀에게, 민혁은 다시 한 번 읊조렸다.
“내 대답은, 바로 이겁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예원에게로 사납게 돌진했다.
두 입술이 곧장 빈틈없이 포개지며 맞물렸다.
뒤늦은 그녀의 고백에 대한 답.
그것은, 그녀의 모든 것을 삼켜낼 듯한 키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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