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뜻밖의 메신저
2018.11.06.
“나…… 실은.”
“…….”
“민혁 씨한테, 할 말 있어요.”
순간, 예원을 바라보던 민혁의 눈썹이 들썩였다.
사람 당황스럽게 갑자기 눈물을 막 흘려대던 것은 언제고,
이젠 또 웬 할 말?
“어……. 그게…… 뭡니까?”
“…….”
“해요, 할 말 있으면.”
이미 한 번, 그녀의 발언으로 인해 적잖은 충격을 받은 적이 있는 그였다.
저 조그만 입에서 또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알 수가 없어서, 그는 긴장한 맘을 숨기며 부러 가볍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긴장한 듯 보이는 여자는 무어라 말하려는 듯 몇 번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이내 폭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양이 이상하리만큼 착잡해 보였다.
‘무슨 말이길래 저러지.’
나 없는 새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그것 때문에 운 거고?
그렇게 불안한 눈빛으로 얼마쯤 지켜보았을까.
드디어 그녀의 입이 열렸다.
“혹시 오늘, 촬영 몇 시에 끝나요?”
“……글쎄요. 어제 막 힘든 촬영 마쳐서, 오늘은 좀 일찍 끝날 것 같기도 하고.”
“…….”
“그래도 한…… 한밤중?”
그러면서 그는 은근슬쩍 여자의 눈치를 보았다.
미루지 말고 좀 더 빨리 말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이쯤 말하면 당연히,
‘아, 그럼 너무 늦네요. 지금 당장 할게요.’
정도의 반응이 나오리라 생각했는데.
그런데…….
“그럼 기다릴게요. 그때 다시 말할게요.”
“……꼭 밤이라야 되는 얘깁니까? 지금은 안 되고?”
“……네. 그래야 될 것 같아요.”
제 생각을 뛰어넘는 단호한 목소리에 그는 잠시 주춤했다.
무슨 얘기인지는 몰라도, 여자가 저렇게까지 망설이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뭐 그럼…… 그렇게 하죠. 혹시 내가 좀 늦으면 내일 아침에 해요. 괜히 늦게까지 안 자고 기다리지 말고.”
그때, 때마침 그의 폰이 울렸다.
“어, 형. 나 이제 곧 준비해서 나가려고. 어, 알았어. 이따 봐.”
성환에게서 온 전화를 끊은 그는 곧장 일어섰다.
“얼른 먹고 쉬어요. 난 이제 그만 씻고 가 볼게요.”
평소와는 뭔가 다른 것 같은 여자의 상태가 맘에 걸렸지만, 그래도 그녀가 하룻밤 만에 이정도로 몸을 회복한 것은 다행이었다.
민혁은 그렇게, 가볍고도 무거운 기분으로 돌아섰다.
“저, 민혁 씨.”
그런데 그때, 그녀의 목소리가 그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네?”
“아무래도…… 저 오늘 출근해야 할 것 같아요.”
아, 왜 또.
자동적으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왜요. 사장으로서의 명령이라고 말했을 텐데.”
“……마음이 안 편해서요.”
얼굴에 있는 물기를 슥슥 닦아낸 그녀가 조곤조곤 읊조렸다.
“어쨌든 스케줄은 점장인 제가 짠 거고 제가 해내야 할 몫인데, 이 정도 아픈 걸로 쉬기는 좀 그래요. 그렇잖아도 이래저래 신세 많이 지고 있는 상황에서…… 같이 일하는 매니저님들한테도 예의가 아니고요.”
“…….”
“정 마음에 걸리시면, 오전 근무 말고 저녁 근무로 바꿀게요. 그건 괜찮죠?”
괜찮기는. 하나도 안 괜찮아.
그러나 그는 이내 인상을 풀고 유한 얼굴을 했다.
기어코 일을 나가겠다는 것이 내심 못마땅하기는 했지만, 여자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된 탓이었다.
“……알았어요. 예원 씨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럼, 좀 쉬고 저녁에 가요.”
“네.”
고개를 끄덕인 여자는 그제야 메마른 입술로 미소를 지었다.
* * *
실력이 형편없진 않다던 그의 말처럼, 따끈한 옥수수 스프는 꽤나 맛이 좋았다.
처음엔 깨작깨작 먹던 것을, 막판에는 그릇까지 박박 긁어서 먹게 되었을 정도로.
무엇보다 며칠간 통 먹은 게 없어 까칠했던 속이 따뜻하게 데워지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
인스턴트 제품이다 보니 누가 만들어도 비슷한 맛이 나는 게 당연했겠지만, 그래도 오늘만큼은 그가 해준 스프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 엄마가 해주었던 것에 못지않은 정성과 애정이, 바로 그 옥수수 스프에 듬뿍 담겨 있는 것 같았으므로.
“어, 예원 양. 일찍 내려왔네.”
먹고 난 그릇과 쟁반을 챙겨 1층으로 내려오니, 도우미 아주머니가 한창 청소를 시작하는 중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이모님.”
“아팠다며. 이제 좀 괜찮아?”
“네, 많이 좋아졌어요.”
“민혁이가 맛있는 것 좀 해주라고 신신당부하고 가던데.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지금 바로 해줄까?”
“아니에요, 괜찮아요. 배 안 고파요.”
“먹은 것도 없으면서 뭘……. 아!”
순간, 아주머니의 시선이 예원이 들고 있는 쟁반으로 옮겨졌다.
“안 그래도 냄비에 웬 스프가 있나 했더니만. 민혁이가 해줬나 보네. 맛있었어? 아주 싹싹 비웠네.”
“……네, 맛있었어요.”
아픈 사람치고 내가 너무 말끔하게 먹기는 했지.
그녀는 쑥스러운 듯 웃었다.
“오늘은 일 못 도와드려서 죄송해요. 하필 몸이 이래서.”
“아유, 괜찮아. 아픈 사람이 일은 무슨 일. 설거지거리는 저기다 두고, 얼른 올라가서 쉬어.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꼭 얘기하고. 응?”
“네, 감사해요.”
그릇을 개수대 안에 넣어 놓은 예원이 꾸벅, 인사한 뒤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그 뒷모습에, 여자는 새삼스레 감탄했다.
“……어쩜 저리 예쁜 게 다 있을까. 우리 근오 색시 삼았으면 딱이었을 텐데.”
에휴.
여자가 그렇게 귀여운 후회를 하고 있을 무렵, 별안간 경쾌한 도어벨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이 시간에 딱히 올 사람이 없을 텐데.
여자는 서둘러 인터폰 쪽으로 다가갔다.
“누구세요?”
비디오폰을 통해 보이는 바깥에는 웬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홍예원 점장님과 같은 매장에서 근무하고 있는 주가윤이라고 합니다. 혹시, 저 기억하세요?]
갸웃,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보던 여자는 입을 벌렸다.
“아! 그 쿠키 공짜로 줬던 아가씨……?”
마침내 생각해냈다.
지난번 근처에 갔다 구경할 겸 들렀던 민혁의 카페에서, 그들 일행에게 서비스로 쿠키를 주었던 매니저였다.
[어머, 기억하시네요. 혹시나 했는데.]
“아……. 근데, 아가씨가 여긴 왜……?”
[점장님 문병 차 잠시 왔어요. 잠깐,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아, 안에……?”
생각지 못한 손님을 맞은 여자는 고민했다.
얼굴이 익은 사람이긴 하지만, 엄연히 외부인이다.
고용인인 제 맘대로 출입을 허용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저, 근데 이거 어쩌지. 예원 양이 지금 위에서 자고 있어서…….”
[아…… 그래요?]
가윤은 약간 실망한 듯했지만, 이내 다시 밝게 웃었다.
[그럼, 점장님 드리려고 가져온 게 있는데, 이거라도 좀 전해드릴 수 있을까요? 이왕 가져온 걸 도로 가져가긴 좀 그래서요.]
“아, 그럼 그렇게 해요.”
그 정도쯤은 괜찮겠지. 내가 받아서 전달해주면 되니까.
그렇게 생각한 여자가 대문을 열어주고 잠시 뒤, 가윤은 금세 현관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이모님. 오랜만에 뵙네요.”
“그, 그러게. 반가워요, 아가씨. 근데…… 손에 든 건?”
“아, 이거요.”
생긋 웃은 가윤이 설명했다.
“감기몸살에 특히 좋은 차래요. 근무 겹치는 날에 드릴까 하다가, 조금이라도 빨리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얼른 나으셨으면 좋겠다고 전해주세요.”
“아이고, 뭐 이런 걸 다…….”
제 것이 아님에도 여자는 어쩐지 황송해졌다.
그래봐야 직장 상사일 뿐인데 이렇게까지 챙겨주다니.
보기 드물게 착한 아가씨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왔는데 얼굴을 못 보고 가서 어째.”
“괜찮습니다. 어차피 이거 드리려고 온 건데요, 뭐.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꼭 좀 전해주세요.”
“응, 알겠어요. 그럼 조심히 가요.”
가윤이 떠난 뒤, 혼자 남은 여자는 꽤나 큼지막한 차 세트를 들어 보이며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 어려 보이는데 경우가 바르네. 둘 다 은근히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
어쨌든, 감기에 효과가 있다니 좀 이따 일어나면 이것부터 먼저 끓여주어야겠다.
픽 웃은 여자는 하던 청소를 마저 하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
.
.
한편, 대문 바깥.
도로가로 나온 가윤은 두 사람의 거대한 신혼집을 올려다보며 쩝 입맛을 다셨다.
“……아깝네.”
오늘은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그래도 뭐, 일단 일하는 아줌마한테 눈도장을 찍어놨으니 소기의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한 셈이었다.
그 집으로부터 이내 미련 없이 눈길을 돌린 가윤은 끈질기게 울리고 있는 폰을 들며 걸음을 옮겼다.
“여보세요. 네. 아뇨, 오늘은 좀 힘들 것 같아요. 네…….”
* * *
그 날 저녁.
“지원아!”
지영의 부름에, 그네에 앉아 있던 지원의 낯빛이 곧장 환해졌다.
“어, 누나. 왔어요?”
“응. 늦어서 미안. 일찍 온다고 왔는데…….”
“괜찮아요. 다리 아프게 서 있지 말고 여기 앉아요.”
지원이 제 옆에 있는 그네를 툭툭 치며 말했다.
하지만 지영은 잠시 그 앞에 선 채, 지원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
“안 앉을 거예요?”
의아한 듯 묻는 그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 아니.”
몇 번 눈을 깜빡거린 지영은 다소 쭈뼛거리는 모양으로 그곳에 앉았다.
며칠 전, 지원에게서 갑작스런 연락을 받은 뒤 그녀는 살짝 긴장해야만 했다.
이번엔 또 무슨 일로 나를 부르는 건가 싶어서.
혹시나, 또 저번처럼 이상한 말을 하지는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지원은 예원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게 있다고 말했고, 그 이유 때문이라면 굳이 못 만날 것도 없었기에 흔쾌히 수락했다.
약속 장소는, 예전에 예원과 함께 셋이서 자주 놀곤 했던 동네 놀이터.
밤공기 탓인지 어쩐지 스산하게 느껴지는 몸을 움츠리며, 지영은 옆에 앉은 지원을 다시금 슬쩍 바라보았다.
“…….”
학교를 마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 지원은 교복 차림이 아닌 캐주얼한 사복 차림이었다.
특유의 뽀얀 얼굴색과 대비되는 어두운 색의 상의 때문일까.
그는 어쩐지, 오늘따라 약간 차갑고 예민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저렇게 해놓으니까 완전 딴 사람 같네.’
사복 입은 걸 보는 게 처음도 아닌데…….
그제야 지영은 그가 스무 살이 얼마 남지 않은 어엿한 청년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실감했다.
아니, 실은 조금 놀랐다.
홍예원의 동생으로, 또 한때 열과 성의를 다해 가르쳤던 수제자로만 생각해 왔던 아이를.
이렇게 ‘남자’로 느낀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기에.
‘어후. 이게 다 그 말도 안 되는 고백 때문이야.’
문득 억울해진 지영이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래, 그것만 아니었으면 내가 이런 이상한 생각을 할 일은 없었다고.
아무렴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설마하니 나보다 9살이나 어린 앨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겠…….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요?”
“어?”
순간, 지영은 잘못된 장난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아니. 아냐, 아무것도.”
재빨리 고개부터 흔들었다.
의식의 흐름을 파고드는 타이밍이 너무도 귀신같아서, 놀라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아, 맞다. 너 이제 곧 합숙 시작한다며. 언제부터야?”
“내일 모레부터요.”
“와, 진짜 얼마 안 남았네……. 힘들겠다.”
“괜찮아요. 별로 안 힘들어요.”
지원이 낮게 웃었다.
그거야 아무것도 아니지.
누날 한동안 못 보는 거에 비하면.
“그럼, 당분간 너 보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겠네?”
“……그렇겠죠. 가서 초반부터 떨어지지만 않는다면야.”
“에이, 잘할 거야. 떨지 말고 실력 발휘만 잘해.”
“네.”
“……암튼 그렇구나. 아쉽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듯한 말에, 지원의 나른한 시선이 퍼뜩 그녀에게로 향했다.
“아쉬워요?”
“응? 뭐가?”
“나 못 보는 거, 정말 아쉽냐고요.”
졸지에 두 눈빛이 정면으로 맞물렸다.
지영은 순간, 얼굴에 열이 확 몰리는 것을 느꼈다.
“어…… 그, 그럼. 당연히 아쉽지. 이렇게 가면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르는데…….”
“…….”
“아쉬울 수밖에 없잖아.”
그래도 나름의 역사를 지닌 사이인데, 당연히 못 보면 아쉬울 수도 있지.
단지 그뿐이다.
다른 이유는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건 그렇고, 예원이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은 얘기란 게 뭐야?”
“……아, 그거요.”
잠시 지영에게 정신을 파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
그제야 지원은 며칠 전 있었던 일을 천천히 털어놓았다.
“……걔가, 네 앞에서 울었다고?”
“네. 너무 갑자기 그래서 당황스러웠는데. 물어봐도 안 가르쳐주더라고요, 뭐 때문인지. 혹시 누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을까 싶어서 연락했어요.”
휴. 지영은 자동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불안불안하더라니. 결국엔 얘 앞에서까지…….
사실 오늘, 집을 나오면서도 긴가민가해했던 그녀였다.
설마 그 일 때문일까 하고.
‘뭐 나야, 그 이유를 너무 잘 알아서 탈이지만.’
그치만 그걸…… 얘한테 대체 어떻게 얘기하냐고.
“누난 알고 있죠. 그래서 지금 아무 말 안 하는 거죠.”
“……지원아.”
“말해 줘요. 우리 누나가 그렇게 우는 거, 분명히 예삿일은 아니잖아요.”
“…….”
후.
지영에게서 다시 한 번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난 말 못해.”
“누나.”
“차라리 걔한테 직접 물어봐. 그 편이 더 나을 거야.”
“이미 물어봤다니까요. 근데 자꾸 아무 일 없다고만 해요.”
……하긴, 당연히 그랬겠지. 걔 성격에.
“……네가 얼마나 답답할지 알아. 근데, 난 정말로 말해줄 수가 없어.”
“왜요?”
“……내가 함부로 떠벌리고 다닐 얘기가 아니니까.”
네 누나가, 널 최고로 뒷바라지 하고픈 욕심에 그런 말도 안 되는 계약결혼을 했다고.
게다가 그 상대는 ‘게이’로 추정되는 인물인데다가…… 어쩌다 보니 네 누나가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버렸다고.
이 모든 걸, 어찌 속 시원히 답해줄 수 있단 말인가.
대체 내가 뭐라고.
“…….”
하지만, 아무래도 지원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셈인 듯했다.
“혹시…… 우리 매형이랑 관련된 일이에요?”
“…….”
“민혁이 형 드라마 보던 중에 갑자기 그러길래 이상하다 싶긴 했어요. 둘이 싸우기라도 했대요? 그런 거면 잘 얘기해서 화해하게 만들면 되잖아요.”
“……아니야, 그런 거.”
“그럼 대체 무슨 일인데요.”
“…….”
“……누나.”
그의 호소어린 목소리에, 지영은 마지못해 고개를 돌렸다.
“미안해, 지원아. 나도 진짜 말해주고 싶어, 정말이야. 근데,”
“나 이제 곧 합숙 들어가면, 몇 달 동안 우리 누나 얼굴 못 볼지도 몰라요.”
휙 끼어든 지원의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말끝을 갈랐다.
“그럼 난 그동안 내내 걱정뿐이겠죠. 우리 누나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대체 뭐 때문에 그러는 건지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채로.”
“…….”
“나, 그러기 싫어요 누나.”
그 말에, 지영의 입술은 지그시 깨물렸다.
원래대로라면, 예원을 생각해 절대적으로 함구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지원이었다.
그녀만큼이나 제 누나를 끔찍하게 걱정하는, 홍예원의 하나뿐인 동생 홍지원.
당장 제 꿈에만 집중해도 모자랄 애가, 제 누나 걱정으로 내내 맘을 졸이게 될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그렇다고 말을 해주자니, 혹시나 이 자식이 일을 그르치게 만들까 염려도 되고.
하여간에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은 이래서 힘들다.
숨겨야 할 때, 까발려야 할 때를 잘 선택해야 하니까.
“…….”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지영은 결국 무거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너 약속할 수 있어?”
“…….”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절대로 두 사람 일에 나서지 않겠다고.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든지, 무조건 두 사람을 믿고 가만히 놔두겠다고.”
그래, 어차피 언젠간 알게 될 일. 먼저 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었다.
단, 지영은 우선 지원을 확실히 단속해놓기로 했다.
어쨌든 이 일은 전적으로 그 두 사람만의 몫이니까.
쓸데없는 훼방 같은 건 절대 금물이었다.
“……네!”
약속하지 않으면 절대로 말해주지 않겠다는 그 태세에, 지원은 철석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럴게요. 절대 안 그럴 테니까, 무슨 일인지만 좀 알려줘요.”
“…….”
“제발요.”
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좋아. 처음부터 얘기하면 좀 긴 이야기니까, 놓치지 말고 잘 들어둬.”
머뭇거리던 지영은 이내 지난 일들을 순서대로, 찬찬히 꺼내어 놓기 시작했다.
* * *
그로부터 약 한 시간쯤 뒤.
야외에서 촬영을 대기하고 있던 민혁의 밴 안에서는 성환과 민혁이 간략히 대화 중이었다.
“형, 오늘 촬영 언제 끝날 거 같대?”
“글쎄. 좀 이따 몇 신만 더 찍고 오늘은 철수한다던데. 조금만 참아, 금방 끝날 것 같으니까.”
“……어.”
그 조금이 과연 얼마쯤이려나.
고개를 끄덕인 그는 절로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눌렀다.
‘그럼 기다릴게요. 그때 다시 말할게요.’
오늘 아침. 그녀가 남겼던 그 말이 여태껏 목에 걸린 생선가시처럼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 여잔 대체, 나한테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걸까.
무슨 말이길래 그렇게 복잡한 얼굴을 했던 걸까.
몇 시간 후 집에 가면 들을 수 있을 얘기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짚이는 바가 없었다.
‘진짜 지원이 때문인가.’
설마, 그새 또 생각이 바뀐 건 아니겠지.
걱정을 사서 하는 편인 여자의 특성상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것도 아니라면, 그럼…….
좀처럼 그녀의 생각을 종잡을 수가 없는 나머지,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에 탁구공처럼 떠올랐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드르륵, 탁!
굳게 닫혀 있던 밴의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뭐, 뭐야?’
갑작스런 돌발 상황에, 시선은 저절로 오른쪽을 향했다.
그 앞을 버티고 서 있는 늠름한 인영은…….
“……홍지원?”
바로 그의 처남, 지원의 것이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이건 뭐 말이 아니라 생각만 했는데도 나타나네.’
별안간 밴 안으로 들이닥치는 지원을 보며 민혁은 황당한 얼굴을 했다.
“야,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자세한 설명은 됐고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지원은 거침없이 운전석 쪽으로 말했다.
“저 매니저 형, 잠시만 자리 좀 피해주실 수 있어요?”
“어?”
뜻하지 않게 지목을 받은 성환의 눈이 커졌다.
“어, 어. 그, 그래…….”
“…….”
“잠깐 얘기들 나눠라. 난 나가서 담배 좀 피고 올게.”
득달같이 달려온 어린놈의 기세가 꽤 심상치 않았다.
성환이 얼른 운전석에서 내리자, 실내등만 켜진 어두운 밴 안에는 마침내 두 남자만이 남았다.
지원은 그제야 민혁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형.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세요.”
“홍지원. 너 이게 무슨…….”
“일단 내 말부터 들어요.”
한 템포 쉰 지원이 당차게 물었다.
“형, 우리 누나 사랑하세요?”
“……뭐?”
“진심으로 사랑하시냐고요. 우리 누나.”
갑자기 이게 뭔…….
다소 당황스러운 상황이긴 했으나, 답하기 어려운 질문도 아니었기에 민혁은 순순히 입을 열었다.
“그래, 사랑해.”
“얼마만큼요?”
얼마만큼?
글쎄, 얼마만큼이라…….
“……내 일부라고 생각할 만큼. 어쩌면 나 자신보다 더.”
그 말과 동시에 예원의 모습을 떠올린 그의 입가에 슬몃 미소가 띠었다.
하지만 지원은 멈추지 않고 물었다.
“그게, 이성을 향한 사랑이에요? 동지애나 전우애 같은 그런 거 말고. 순전히 ‘사랑하는 여자’를 상대로 갖는, 그런 사랑이냐고요.”
“당연하지.”
근데, 이거 가만 듣고 있자니 뭔가 이상한데.
“너 갑자기 이런 건 대체 왜 묻는 거냐?”
의문을 품은 민혁이 물었으나, 지원은 지지 않고 다시금 물을 뿐이었다.
“그럼 형 혹시, 게이세요?”
“뭐?”
‘게이’란 단어에, 그의 얼굴은 금세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아니 이게 갈수록 점점?
“하, 참. 야, 홍지원.”
“나 홍지원인 거 아니까 대답이나 하세요. 형 게이예요?”
그야말로 딱 어이가 없었다.
참나, 이 자식은 물을 걸 물어야지.
“내가 게이면, 네 누나를 어떻게 좋아하냐. 네 누나가 남자도 아니고.”
“아니에요?”
“말하기도 입 아프다.”
귀찮다는 듯 대답한 그의 눈초리가 일순 가늘어졌다.
아무래도 어디서 뭔가 이상한 이야기를 듣고 온 것이 틀림없었다.
그 지긋지긋한 구닥다리 루머가 아직까지도 있다니.
이제야 좀 떨쳐냈나 싶었는데.
“홍지원. 네가 어디서 뭘 듣고 와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매형.”
그런데 그때, 지원이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저한테 한 말 그대로, 우리 누나한테 가서 당장 말하세요.”
“……어?”
“게이 아니라고. 나 당신 사랑한다고. 그렇게 말하라고요.”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에, 그는 한순간 얼떨떨해졌다.
사랑한다는 말이야 그렇다 쳐도, ‘게이’가 아니란 말은 대체……?
“아니, 야. 내가 갑자기 그런 말을 왜 해? 내가 게이가 아니라는 것쯤이야 그 여자도 이미…….”
어이가 없는 나머지 생각나는 대로 막 내뱉던 순간,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가만.’
뒤통수가 무언가에 꽝 얻어맞기라도 한 듯 멍해졌다.
그의 양 눈썹머리가 금세 맞붙었고, 미간에는 주름이 잔뜩 졌다.
입술 또한 어이가 없다는 듯 벌어졌다.
“……허.”
……말도 안 돼.
그럼, 그 여자가 설마……?
“…….”
네. 바로 그거요.
대꾸 없이 쓰게 웃고만 있는 제 어린 처남을, 민혁은 할 말을 잃은 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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