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열병
2018.11.02.
“뭐야, 벌써 간다고?”
“응. 그래야 될 것 같아.”
다음날 아침, 이미 양손에 짐을 챙긴 예원이 제법 단호하게 말했다.
못해도 일주일은 있을 줄 알았더니 이게 웬 일이람.
은아는 당연히 서운한 표정이었다.
“갑자기 왜 그래. 어차피 현 서방 오려면 며칠 더 있어야 한다며. 좀만 더 있다 가면 안 돼?”
결국, 예원은 예정된 시간을 채우기 전에 빠르게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택했다.
사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어젯밤 지원에게 우는 모습을 들킨 것이 너무나 마음에 걸렸기에.
그것이 어찌나 신경 쓰이던지, 내내 스스로를 자책하느라 밤을 꼴딱 새워야 했을 정도였다.
“……응. 미안해, 이모.”
이렇게 있다간 또 언제 그런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감정상태로 더 이상 하하호호 아무렇지 않은 척할 자신이 없었다.
“아휴, 참. 그 큰 집에서 혼자 뭐하려고.”
“뭐하긴. 카페 일 관련해서 할 것도 좀 있고, 또…….”
“또?”
……이 계약을, 어찌 해야 할지도 좀 생각해야 하고.
“……하여튼 가봐야 돼. 다음에 또 올게, 이모.”
“에휴, 알았어. 정 그럼 어쩔 수 없지……. 밤에 지원이 오면 서운해 하겠다.”
그때, 아쉬운 맘에 콧잔등을 찌푸리던 은아가 의아한 듯 물었다.
“근데 너…… 안색이 좀 안 좋은 것 같은데. 얼굴도 좀 하얀 것 같고.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니니?”
“어?”
“아니, 너 이맘때쯤 꼭 한 번씩 앓잖아. 가뜩이나 편도선도 안 좋고.”
은아의 말에 멈칫한 예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가?
그러고 보니 조금 어지러운 것 같기도 했지만, 이 정도 어지럼증은 일상다반사였다.
어쩌면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한 탓일 수도 있고.
그도 그럴 것이, 요즘 그녀는 제대로 된 잠을 이룬 날이 거의 없었으니까.
“……에이. 아냐, 그런 거. 나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냥 평소랑 똑같아.”
“그래? 뭐, 그럼 다행이지만…….”
“…….”
“하여튼, 환절기에는 조심해야 돼. 안 그래도 감기 한 번 들면 잘 낫지도 않는 애가……. 알지?”
“알았어. 조심할게.”
“얼른 가. 도착하면 연락하고.”
“응, 갈게요. 나오지 마.”
자나 깨나 조카 걱정뿐인 이모를 위해 애써 미소를 지어보인 예원은 늘 그랬듯 씩씩하게 집을 나섰다.
* * *
그로부터 이틀 뒤.
“후, 드디어 서울이네. 수고했다, 민혁아.”
운전대를 잡은 성환이 룸미러를 통해 민혁을 힐끗 보며 말했다.
장장 6일에 달했던 고달픈 지방 촬영이 드디어 끝났다.
단기간 안에 지역 몇 개를 순회하며 찍어야 했던 숨 가쁜 일정이었기에, 모든 일정을 마친 스태프진과 배우들은 그야말로 녹초 상태가 되어있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본래 일주일로 잡혀 있던 촬영이 예정보다 하루 일찍 마무리되었다는 것이었다.
기상 상태와 배우들의 컨디션, 장소 조율 문제 등의 여러 가지 조건들이 운 좋게 잘 맞아떨어져 준 결과였다.
“……형도 수고했어.”
이제 막 새우잠에서 깬 민혁은 평소와 다른 허스키한 목소리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운전석에서 힘껏 기지개를 켠 성환이 씩 웃었다.
“나야 뭐 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그래도, 이번을 끝으로 지방 촬영은 한동안 없을 거라잖냐.”
촬영이야 언제나 힘든 편이지만 그 중에서도 지방 촬영은 특히 그 피로도가 더할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 답은, 무조건 잠을 많이 자 두는 것.
평소 잠이 많지 않은 그에게도 몇날며칠의 강행군은 고역이었다.
몸도 일종의 배터리.
좋은 연기를 위해서는 충전이 반드시 필요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바로 집으로 들어갈 거야?”
“어, 그래야지.”
“그래. 내일 또 일찍부터 촬영 있으니까 얼른 들어가서 자라.”
“응.”
“참, 제수씨는?”
“…….”
민혁의 눈꺼풀이 별안간 높게 치켜 올라갔다.
그 여잘 일컫는 말에 여느 때보다 곤두서는 신경.
그날의 충격이 아직 채 다 가시지 않은 터였다.
“……아직 이모님 댁에 있을 거야.”
문제의 ‘실언’ 발언 이후.
기다렸다는 듯 이모님 댁에 가겠단 얘기를 꺼내는 여자를 보며 그는 순간 패닉 상태가 되었다.
‘그렇게나 고대한 시간이니, 아주 잘 지내고 있겠지.’
나는 이렇게나 힘든데.
한바탕 즐겁게 웃고 있을 그 얼굴을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배알이 꼴렸다.
“아쉽네. 가는 김에 얼굴이나 좀 보고 가려고 했더니.”
“보긴 뭘 봐. 보지 마.”
“허, 참. 아니, 멀쩡히 있는 사람을 왜 보지 마?”
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중적인 마음이 들었다.
“……내 거니까.”
그 얼굴은, 오직 나만이 보고 싶다는 마음.
“뭐?”
뜨악.
경악한 얼굴의 성환이 그를 곧장 돌아보았다.
“너 진짜 왜 그러냐, 요새.”
“내가 뭘.”
“아니, 사람이 바뀌어도 분수가 있지……. 넌 어째 갈수록 중증이냐? 이제 신혼도 다 끝나가는구만.”
“…….”
“왜, 그럴 바엔 차라리 엄지공주처럼 주머니에 넣어갖고 다니시지?”
짓궂게 이죽거리는 성환의 말에, 그는 비로소 자그마한 미소를 지었다.
머릿속엔 엄지공주처럼 작아진 홍예원의 모습이 자연스레 연상되고 있었다.
“……좋은 생각이네.”
그렇잖아도 요즘, 그런 맘이 굴뚝같았던 참인데.
정말로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 * *
“얼른 들어가, 이 꼴 보기 싫은 놈아.”
“……고마워 형. 잘 가.”
웃음과 함께 성환을 배웅한 민혁은 지친 걸음을 터덜터덜 옮겼다.
현관문을 열고 1층에 들어서자, 아니나 다를까 사람 없는 집의 어둡고 차가운 공기가 그를 은은하게 덮쳤다.
‘……역시나 안 왔군.’
그래도 뭐, 내일이면 다시 올 테니까.
아쉬운 발걸음을 2층으로 돌린 그가 제 방으로 들어가기 직전, 안방 쪽을 슥 돌아보았다.
그 여잔 없을 거라는 걸 너무나 잘 알면서도.
왜 이렇게 확인하고픈 충동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
조심스레 들여다 본 안방은 바깥과 마찬가지로 어두웠다.
하나의 소음도 없이 고요하고 적막한 방.
다시 에라, 하고 닫으려던 순간.
“……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침대 속에 뭔가 잔뜩 웅크린 인영이 있었다.
“……홍예원 씨?”
이윽고 탁, 스위치 소리와 함께 불이 켜졌다.
핑크색 이불을 덮은 채 곤히 자고 있는 여자.
여자는 분명,
분명 그가 보고 싶었던 그녀가 맞았다.
“……!”
피곤함에 찌들어 있던 눈이 일순 번쩍 뜨였다.
반가움과 야속함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뭐야. 있었으면서 나와 보지도 않은 거야?
“홍예원 씨!”
자는 사람을 깨우는 게 도리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그는 침대 맡으로 다가가 본능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전무했다.
“…….”
뭣 때문인지 여자는 무척 곤히 잠들어 있었으므로.
미동도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 제 남편이 왔다는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 자리 그대로 멈춰선 민혁은 며칠 만에 보는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긴 속눈썹을 가지런히 드리운 채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여자.
그에게선 실로 며칠 만에 제대로 된 미소가 흘러나왔다.
‘……참, 짜증나게 예쁘네.’
촬영으로 인해 축적돼 있던 피로가 이제야 조금씩 날아가는 기분이다.
근데 그나저나, 이 여잔 왜 벌써부터 자고 있지?
‘원래 이렇게 일찍 자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시간이 늦었다고는 해도 아직 잠들기엔 이른 초저녁이었다.
더구나 잠귀가 은근히 밝은 편이라 웬만한 기척에는 곧잘 반응하곤 했던 그녀였지 않은가.
좀 이상하다 싶기는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긴 그는 그녀의 위로 흐트러져 있는 이불을 다시 정리해 덮어주었다.
그런데,
‘……어라?’
보다 가까이 끼친 그녀의 숨결이 이상하리만큼 뜨겁게 다가왔다.
색색거리는 소리와 희미한 신음.
새근새근, 혹은 도로롱 정도일 줄 알았던 숨소리는 유난히 거칠었다.
게다가 얼굴엔 왠지 모를 물기가 어려 있고, 그녀를 싸고 있던 이불마저도 어쩐지 축축했다.
그는 머지않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설마, 아픈 건가?’
촉촉한 이마에 손을 짚어보자 꽤나 뜨끈한 열기가 전해져 온다.
이럴 수가.
그렇다면 잠이 든 게 아니라…….
아파서 정신을 잃은……?
“……홍예원 씨! 정신 차려 봐요. 홍예원 씨!”
그의 얼굴은 삽시간에 새하얘졌다.
* * *
앞머리를 가지런히 옆으로 넘기는 손길에 이어, 물기를 꼭 짠 새하얀 물수건이 매끈한 이마 위로 안착했다.
열에 들떠 끙끙거리던 신음이 조금 잦아들었다.
차가운 물수건의 온도가 맘에 드는지, 여자는 그제야 살짝 평온해지는 얼굴이었다.
“…….”
“…….”
침대 맡에 앉은 민혁은 전체적으로 붉게 상기돼 있는 여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근 일주일 만에 보는 얼굴.
그런데 그동안 계속 몸이 안 좋았던 건지, 여자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많이 핼쑥해지고 상한 듯 보였다.
이모님과 동생의 곁에서 잘만 지내고 있을 줄 알았더니.
떠나던 날, 속상하고 화나는 마음에 간다는 소리도 없이 휙 집을 벗어나버렸던 자신이 떠오른 그는 이내 후회스러워졌다.
탈 없이 잘 있으라고 안부 인사나 해둘 걸.
이렇게 아파하고 있을 줄 알았으면, 조금만 덜 미워할 걸. 조금만 덜 야속해할 걸.
제가 공연한 마음을 쓴 덕분에 그녀가 이렇게 아프고 있는 것 같아,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무진장 쓰라렸다.
‘근데 갑자기 웬 감기지.’
물수건을 가져오기 전, 혹시 몰라 옆을 살펴보니 두 알 정도가 빈 감기약 통이 있었다.
제 몸 상태를 깨달은 여자는 아마도 병원에 가는 대신 약에 취해 잠들기로 한 것 같았다.
응급실에 데려갈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 정도 호들갑을 떨 정도는 아닌 듯해 우선은 좀 더 경과를 지켜보기로 했다.
이마에 물수건을 올린 채 잠자코 잠들어 있는 여자를 보고 있자니, 그는 문득 딴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이건, 제주도 신혼여행 때와 완전히 같은 상황이지 않은가.
물론 지금은 그녀가 환자, 자신이 간병인이라는 점이 무척이나 달랐지만.
“…….”
참 희한하지.
그땐…… 당신이 이렇게나 애틋해질 줄 몰랐는데.
우린, 도대체 언제 이만큼 흘러온 걸까.
“……미안해.”
내가 다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아프지 마.”
민혁은 이불 바깥으로 삐죽 나와 있는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들었다.
그러고는, 그 연하고 가냘픈 손등에 살짝 입 맞추었다.
보잘 것 없는 제 맘이, 꿈나라를 헤매고 있을 그녀에게까지 닿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 * *
창밖으로는 어느 새 어렴풋한 햇살이 드리우고 있었다.
눈꺼풀을 몇 번 움찔거리던 예원은 어느 순간 스르르 잠에서 깨어났다.
“으음…….”
내가 언제 잠들었었지.
약을 먹고 누운 것까지는 떠오르는데 그 뒤로는 머릿속이 청소된 것처럼 기억이 없었다.
뭐, 물론 뻔할 뻔자.
‘……또 그 남자 생각하다 잤었나?’
휴, 내가 그럼 그렇지.
어쨌든 얼른 일어나야겠다. 곧 출근할 시간일 테니까.
그렇게 생각한 예원이 몸을 일으키려던 그때였다.
“……?”
별안간 이마에 있던 물수건이 옆쪽으로 툭 떨어지며, 아래에 있는 누군가의 머리가 보였다.
머리와 팔을 침대에 올린 채 잠든, 언젠가의 제 모습과도 무척 닮아있는 자세.
그 결 좋고 까만 머리의 주인공은 바로…….
‘……민혁 씨?’
그녀가 수일 내내 그리던 바로 그 남자였다.
‘……뭐, 뭐야.’
오늘 밤에 오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된 거지.
게다가 이 물수건은 뭐고.
금세 얼떨떨해진 예원은 곤히 잠든 남자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옆으로 엎드려 있는 자세 탓에 단정하고 남자다운 이목구비가 새삼 한눈에 들어왔다.
집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남자는 촬영 때 세팅했을 머리를 그대로 하고 있는 채였다.
‘이 남자도 참. 멀쩡한 침대 놔두고 왜 여기서 이러고 있대.’
그리 생각하면서도 시선은 저절로 그를 향했다.
무척 보들보들해 보이는, 매끈하고 하얀 피부.
그렇게 잠시 그를 내려다보던 그녀는 저도 모르게 천천히 손을 뻗었다.
“…….”
떨리는 손끝이 그의 이마에 살짝 닿았다가, 이내 앞머리에 닿았다.
단단히 고정돼 있어 딱딱해 보이기만 했던 머리는 생각 외로 꽤 부드러웠다.
문득, 입술이 저절로 헤 벌어졌다.
넘길 것도 없는 앞머리를 괜스레 자꾸만 보듬으며 예원은 더없는 행복감에 잠겼다.
꿋꿋이 잘 참아내다가도, 이러한 순간순간에 욕심이 일어버리는 건 대체 어떻게 변명해야 할까.
하지만 이건, 그녀에게 거의 일생일대의 기회나 다름없었다.
남몰래 그를 맘껏 구경하고 만져볼 수 있는 기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를 온전히 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는 기회.
물론 그가 알면 기절초풍할 노릇이겠지만 할 수 없었다.
눈물겨운 짝사랑이라 그렇다고, 늘 멀찌감치 서서 일정 부분 이상은 다가갈 수 없는 안타까운 사랑이라 그렇다고 하면……
이 남자도 날 조금은 이해해 주려나.
조금은 날, 가엾게 여겨주려나.
“……으음…….”
그렇게, 그 몰래 혼자만의 유희를 얼마쯤 즐기고 있었을까.
그녀의 손길을 느낀 탓인지 남자의 등이 꿈틀했다.
예원은 황급히 손을 뒤로 빼고는 딴청을 부렸다.
“어, 일어났어요?”
“……네. 언제…… 오셨어요?”
“어젯밤에요.”
아, 어젯밤이었구나.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주억거리던 예원은 잠시 멈칫했다.
‘가만. 어젯밤……?’
복장으로 보나 머리로 보나 촬영을 갔다 막 온 사람이 분명한데.
제 머리에 얹혀 있던 물수건으로 보아 그는 아픈 저를 상대로 나름의 간호를 해주려 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바삐 돌아가던 예원의 머릿속이 어느 시점에서 딱 멈추었다.
아니 그럼, 밤부터 계속 여기서 이러고 있었다는 말인가?
……나 때문에?
“몸은 좀 괜찮습니까? 밤에는 열이 꽤 나던데.”
“어…….”
순간 혼란스러워진 예원은 홀린 듯 손을 들어 제 이마를 짚었다.
오래 잠들어 있던 탓인지 머리가 조금 띵하기는 했지만, 열은 거의 다 내린 것 같았다.
“괜찮은 것…… 같아요.”
“다행이네요.”
그가 안도하며 밝게 웃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오늘은 집에만 붙어 있어요. 내가 매니저들한텐 얘기해 뒀으니까.”
“네? 뭘요?”
“예원 씨, 오늘 아파서 출근 못 한다고요.”
헉. 그녀는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그, 그럴 필요 없어요! 저 이제 정말 괜찮은데……?”
사실, 오늘보다 심각했던 건 어제였다.
보는 사람마다, 심지어는 손님들까지도 ‘괜찮아요?’ 한 마디씩을 으레 했을 정도니까.
하지만 예정된 근무였기에 참은 거였다.
그 지경을 하고도 8시간 근무시간을 꽉 채우며 투혼을 불살랐는데.
겨우 이 정도 아픈 걸로 결근이라니!
그녀의 자존심이 용납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괜찮긴 뭐가 괜찮습니까. 안 돼요.”
하지만, 민혁은 엄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제 겨우 나아가는데, 출근 때문에 말짱 도루묵 만들고 싶어요? 제대로 처치 안 하면 나중에 또 골치 아플 게 뻔하니까 그냥 내 말 들어요. 그리고 원래 이맘때쯤 감기 심하게 앓는다면서요.”
……어라?
예원의 표정이 다시금 묘하게 변했다.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그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이모님한테 들었죠. 어젯밤에 통화했었거든.”
“…….”
“좋은 말로 할 때 누워 있어요. 이건 남편으로서가 아니라, 사장으로서의 명령입니다.”
“…….”
“참, 잠깐만 기다려요.”
무슨 이유에선지 남자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아래층에서 뭔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약 10분 후.
다시 돌아온 그는 이상하리만큼 익숙하고 향긋한 냄새와 함께, 쟁반에 무언가를 받쳐 들고 온 채였다.
“일어나 봐요.”
“이게…… 뭐예요?”
사실은 냄새만 맡아도 알 수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보면 몰라요?”
하얀 볼에 담긴 채, 노오란 빛깔과 고소한 냄새를 풍기고 있는 그것.
“예원 씨가 좋아한다고 했던 거잖아요. 옥수수 스프.”
“…….”
“약 먹어야 되니까 식기 전에 얼른 먹어요. 자.”
침대 맡에 앉은 그가 예원의 손에 손수 숟가락을 쥐어주더니, 돌연 픽 웃었다.
“근데 나, 저번에 그쪽한테 완전 속은 거 압니까?”
“……제가, 뭘…….”
“이거요.”
그가 눈짓으로 옥수수 스프를 가리켰다.
“하도 자랑하듯이 그러길래, 난 또 하나부터 열까지 홍예원 씨가 직접 한 줄 알았더니……. 가루 사서 끓이기만 하면 된다는 거 듣고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요? 이모님 아니었으면 옥수수 사다가 직접 갈 뻔 했잖아요.”
“…….”
“뭐, 어머님이 해주셨던 거엔 당연히 못 미치겠지만…… 그래도 나름 성심성의껏 끓였으니까. 보고만 있지 말고 먹어 봐요.”
“…….”
“얼른요.”
민혁이 부드럽게 재촉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를 멀뚱히 보고 있을 뿐 옥수수 스프엔 손도 대지 않고 있는 채였다.
아무래도 영 못 미더운 표정인 것 같은데.
그가 다시 한 번 나직하게 웃었다.
“왜요, 못 먹을 맛일까 봐 그럽니까? 그래도 나, 그렇게 실력이 형편없지는 않은데…….”
그런데 바로 그때, 무심코 그녀와 눈을 맞춘 민혁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홍예원 씨?”
“…….”
그녀의 아래 눈꺼풀을 벗어난 투명한 액체가, 별안간 눈물줄기가 되어 그녀의 뺨을 타고 또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나의 눈물줄기는 곧 두 개가 되고, 눈물은 곧 흐느낌으로 번졌다.
옥수수 스프 앞에서 별안간 눈물을 터뜨리는 여자를 보며, 민혁은 급격히 당황했다.
“왜, 왜 그래요? 갑자기 왜 울어요?”
미안한 마음에 잘해준다고 한 것이 이런 뜻밖의 결과를 만들어 내다니.
그가 안절부절못하며 예원을 살폈다.
반면, 그녀는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으면서도 왠지 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냥, 고마워서요.”
“…….”
“너무…… 고마워서.”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솔직하게, 예원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정말이지, 이건 너무 반칙이잖아.
세상에 이런 남자를…….
도대체,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어?
“……민혁 씨.”
“네?”
그래. 이제 어쩔 수 없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 사람이 게이이든 아니든.
이제 더 이상은…… 나도 못 참겠어.
한계라고.
“나…… 실은.”
“…….”
“민혁 씨한테, 할 말 있어요.”
마침내 결심한 예원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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