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 좋아질 수 없는 남자-43화 (43/102)

43. 내 남자의 비밀

2018.08.31.

남자의 뜬금없는 제안에, 예원은 어리벙벙해진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저녁……이라니.

내가, 저 남자랑?

“저랑…… 저녁을 드시겠다고요?”

“네.”

“둘이서만요?”

“네. 왜요, 싫어요?”

“……아니 뭐, 싫다기보다는…….”

솔직히 님과 제가 저녁을 같이 먹을 사이는 아니잖아요.

퉁명스런 대답이 속에서 맴맴 돌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웃사촌 간에 최소한의 예의라는 게 있는 법이었다.

예원은 애써 어색한 웃음을 입가에 띄웠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전 집에 가서 밥 먹으면 돼요.”

하지만 그도 전혀 물러설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집? 휴무일에 기껏 간다는 게 집이에요?”

“…….”

“에이. 그렇게 안 봤는데 홍예원 씨, 엄청 집순이 스타일인가 보네.”

……우씨. 뭐래?

‘그래, 나 집순이다. 뭐 어쩔래? 네가 뭐 보태준 거라도 있어?’

갈수록 썩어 들어가는 표정을 제어하기가 참 힘들었다.

“그럼, 우산은 있어요?”

“아뇨.”

“집엔 어떻게 가려고요.”

“아직 많이 안 오잖아요. 버스정류장까지만 뛰어가면 돼요.”

“비 많이 맞으면 대머리 되는데.”

“…….”

“그러지 말고, 이왕 여기까지 나온 거 밥 먹고 들어가죠. 내가 데려다 줄게요.”

“……괜찮아요.”

“내가 사줄 텐데?”

“……됐습니다.”

누가 돈 없어서 밥 굶는 줄 아나. 물론 뭐 많은 것도 아니긴 하다만…….

자꾸 밥 얘길 해서 그런가, 진짜로 배가 고파오는 것 같기도 했다.

대답 없이 쓴 미소만을 머금은 예원은 그를 향해 고개를 한 번 꾸벅하고는, 그대로 뒤를 돌았다.

“……홍예원 씨!”

그런데 그 순간.

“혹시, ‘치킨’은 좋아합니까?”

미끼를 품은 유혹적인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내가 이 근처에 잘하는 집을 알고 있는데.”

그리고 그건, 그녀에게 꽤나 효과적인 미끼였다.

애석하게도.

“치킨…… 이요?”

……팔딱팔딱, 팔딱.

월척이었다.

* * *

“형.”

“어, 이제 다 끝났어?”

“어.”

“아이고. 오늘도 고생했다.”

씩 웃은 성환이 민혁의 어깨를 툭 쳤다.

그새 피곤이 잔뜩 내려앉은 얼굴의 민혁은 촬영하는 내내 제일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전화는. 말했어?”

“어. 혹시 모르니까 기다리지 말고 집으로 가라고 하긴 했는데,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전화는 왜 안 받았대?”

“폰을 집에다 두고 나왔다더라고.”

하여튼 칠칠치 못하기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이 되었다.

설마…… 화가 나진 않았겠지.

“……목소리는 어땠어. 밥은 먹었대? 혹시 화난 거 아냐?”

자식이 꼬치꼬치도 물어보네.

성환은 그런 그가 귀엽다는 듯 웃었다.

“야 이 자식아. 나한테 그런 거 물어볼 시간에 얼른 집에 가기나 해. 예원 씨 기다리겠다.”

“……아.”

참, 그러면 되겠구나.

깨달음을 얻은 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본의 아니게 일방적으로 약속을 깬 모양이 되어서일까.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조급해져 있었다.

“그럼 나 먼저 갈게, 형.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그래, 알았다.”

대답을 마치자마자 불붙은 망아지처럼 부리나케 달려가는 제 배우의 모양을, 성환은 그저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좋~을 때다, 참.”

자식, 진작 좀 저랬으면 얼마나 좋아.

언제는 죽을 둥 살 둥, 사람 애간장을 다 끓여 놓더니.

“하긴, 이제라도 저러니 다행이지.”

후련하게 미소 지은 성환은 반대편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

.

한편, 그렇게 얼마쯤 뛰듯이 걸었을까.

민혁의 귓가에는 어느 순간 예기치 못한 부름이 들려왔다.

“민혁 씨!”

목소리의 근원지를 따라 시선이 이동했다.

복도 중간 쯤 선 혜인이, 그를 향해 맑게 웃고 있었다.

“…….”

촬영 탓에 불과 몇 분 전까지 보던 얼굴임에도 새삼스레 얼굴이 굳어진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그녀는 특유의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그의 앞에 다가와 섰다.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 왜, 누구 만나기라도 해?”

“……눈치 챘으면 이만 비키지.”

“싫다면?”

“…….”

“그러지 말고, 우리 얘기 좀 해.”

“너랑은 할 얘기 없어.”

“난 있어.”

“난 없다고.”

고작 이런 곳에 허비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간다.”

단호하게 말한 그는 그대로 그녀를 스쳐지나가려 했다.

그런데,

“우진 오빠랑 관련된 얘기야.”

여자의 단단한 목소리가 그런 그를 잡아챘다.

“그래도, 할 얘기 없어?”

보이는 건 뒤통수뿐이지만, 그가 동요했다는 사실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역시.’

혜인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 얘긴, 이미 다 끝난 걸로 알고 있는데.”

그래, 나도 그런 줄 알았지.

“아니. 이건 아마 민혁 씨도 모르고 있을 얘기야. 내가 아주 놀랄만한 이야기를 알아냈거든. 민혁 씬 전혀 생각지도 못했을 이야기.”

이번 촬영을 시작한 이후, 혜인은 어떻게든 그와 독대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 기가 막힌 소식을 접했다.

그녀와 관련된 일이라면 철저히 개무시를 시전하는 민혁이었지만, 이정도 떡밥이라면 그도 분명 그냥 넘어가진 못할 터였다.

천천히 굳어지는 그의 얼굴을 보며 혜인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

그런데 잠시 뒤.

느지막하게 이어진 그의 답변은, 그녀에게서 미소를 앗아가기에 충분했다.

“……안 궁금해. 듣고 싶지도 않고.”

혜인의 얼굴에 대번 이채가 띠었다.

“……뭐?”

태연하게 내뱉는 그의 목소리엔 오로지 냉기만이 가득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내가 너와 같은 작품을 선택했다고 해서 우리 관계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 건 아냐. 난 여전히 네가 아주 끔찍하고 싫어. 난 지금 네 껍데기만 상대하는 거지, 너 자체를 상대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

“그러니까, 이제 이런 허튼 짓은 그만해. 쓸데없는 관심도 좀 꺼주고.”

서늘한 목소리로 답하던 그는 그 길로 곧장 자리를 떴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던 혜인은 문득, 그가 남긴 말을 입에 담아보았다.

“……껍데기?”

허. 날 고작 그딴 식으로 생각했단 말이야?

어차피 쉬우리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한순간 짓밟혀버린 자존심은 꽤나 뼈아팠다.

피곤으로 살짝 충혈된 눈가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고, 소매 아래로 드러난 주먹도 부들부들 떨렸다.

혜인은 분한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어디 두고 보면 알겠지.”

당신이 이대로 쭉 껍데기를 보게 될지.

아니면, 그 안의 나를 보게 될지.

* * *

“이게…… 치킨이에요?”

“네. 왜요. 무슨 문제 있어요?”

“아,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예원은 제 눈앞에 놓인 접시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치킨’을 사주겠다기에, 당연히 프라이드치킨이나 양념치킨 맛집 같은 곳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휘황찬란한 ‘치킨 스테이크’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여기가 예전부터 이 근방에서 치킨 스테이크로 유명한 곳이었어요. 얼른 먹어봐요.”

“……아, 네.”

치킨이면 치킨이고 스테이크면 스테이크지, 치킨 스테이크는 또 뭐람.

어쩐지 웬 장소가 필요 이상으로 고급지다 했다.

남자의 성화에, 예원은 어색한 몸짓으로 치킨 스테이크를 한 점 썰어 입안에 넣었다.

“어때요? 맛있죠.”

“……네, 뭐. 맛있네요.”

닭이니까 당연히 맛은 있지. 맛이 없으면 그게 비정상이잖아.

문제의 치킨 스테이크는 예원이 평소 먹던 치킨보다는 뭔가 고품격의 맛이긴 했지만, 확실히 그녀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맛으로만 치면 차라리 그 남자랑 집에서 시켜 먹었던 그 치킨이 훨 맛있겠다. 고급스러운 걸로 치자면 그때 그 결혼식장에서 먹은 스테이크가 훨씬 고급스럽고…….’

지난 기억을 곱씹고 있으니 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그와의 추억.

그러고 보면 짧은 사이에 꽤나 많은 추억이 쌓인 것 같다.

연한 살점을 씹는 그녀의 입가에 배시시 미소가 배었다.

“그나저나, 누굴 그렇게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 사이 우진은 제 몫의 치킨 스테이크를 썰며 지나가듯 물었다.

“친구? 동생?”

“…….”

“아니면…… 남편?”

나이프를 놀리던 그녀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네?”

동그랗게 뜬 여자의 눈에, 그는 자동적으로 쓴 웃음을 머금었다.

“맞나 보네. 남편.”

“…….”

“왜 못 만났어요?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겼나?”

……음.

남자의 질문에 예원은 바로 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평소 별로 안 좋아하다 못해 싫다고까지 느끼던 옆 카페 사장과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다니.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대답…… 해야겠지?’

……하기야, 내가 따질 게 뭐 있냐.

치킨 얻어먹겠답시고 이렇게 충동적으로 따라온 것 자체가 심각하게 비정상적인데.

“……네. 배우라서 그런가…….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질 때가 많아서요. 처음엔 좀 짜증났는데, 이젠 익숙해요.”

그녀의 말에 우진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하긴. 그쪽 일이 다 그렇죠. 겉으로 보기엔 화려해보여도…… 힘들고 고달프잖아요.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은 나가떨어지기 마련인 거고.”

건성으로 듣던 예원의 눈썹이 일순 비뚤어졌다.

‘뭐야. 꼭 경험해봤다는 듯한 말툰데?’

“……그쪽 일에 대해서 좀, 아세요?”

여자의 샐쭉해진 얼굴을 보며, 우진은 픽 웃었다.

“예전부터 묻고 싶었던 건데. 홍예원 씨, 나 몰라요?”

“……네?”

“내가 누군지 모르냐고요.”

참나, 이 남자가 장난하나.

“알죠.”

“알아요?”

“최우진 씨잖아요. 카페 빈 사장님.”

“그거 말고요.”

“……그거 말고요?”

“네, 그거 말고.”

엥. 그거 말고 또 다른 게 있어?

“……그럼, 무슨…….”

뭔 소린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

자조적으로 웃은 우진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진짜 하나도 모르는구나.”

“……네?”

의아해진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별안간 뒤쪽에서 웬 여자의 고혹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우진 씨!”

여자는 티나게 친한 척을 하며 테이블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아마도 이 레스토랑의 주인인 모양이었다.

“이게 대체 얼마만이에요. 진짜 오랜만에 오셨네요.”

“네. 잠깐 외국엘 좀 다녀오느라고요.”

“아~ 그랬구나. 하여튼, 유유자적 삶은 여전하시네요?”

“하하, 그렇죠.”

호호거리며 웃던 여자의 눈길은 이윽고 예원에게로 향했다.

“근데, 이 분은 누구? 여자친구예요?”

“……네?”

뜬금없이 지목당한 그녀가 토끼눈을 떴다.

우진은 서둘러 대답했다.

“아뇨. 그냥 친굽니다.”

“……?”

내가 또 언제부터 당신 친구가 됐대?

당황한 예원이 눈을 끔뻑거렸다.

“아아, 친구…….”

여자의 묘한 눈빛이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예원의 표정은 절로 신문지처럼 구겨졌다.

‘뭐야. 왜 저렇게 쳐다봐?’

처음 보는 사람에게서 애먼 의심을 받는 일이 달가울 리 없었다.

저도 모르게 몸이 단 그녀는 본능적으로 왼손을 들어보였다.

기다렸다는 듯 반짝, 빛나는 물방울 모양의 다이아.

“……저, 결혼한 유부녀예요! 이 분이랑은 아무런 관계도 없으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절대로요!”

“……아, 네.”

여자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린 장미색깔 립스틱이 발린 여자의 입술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누가 물어봤냐. 얜 왜 이렇게 오버해?

“뭐 암튼, 즐거운 시간 보내다 가요. 다음에 또 보고요.”

“네. 다음에 또 봬요.”

여자가 사라지고 난 뒤, 우진은 다시금 나이프를 집어 들며 씩 웃었다.

“칼 같네, 아주. 어차피 친구라고 했는데 그렇게까지 딱 잘라 말할 거 있어요? 사람 무안하게.”

“…….”

“좀 섭섭해지려고 그러네.”

장난 반 진심 반인 듯한 목소리.

막상 얼굴에선 무안함이 1도 보이지 않았지만, 남자의 말도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미안한 마음이 든 예원은 얼른 사과했다.

“아…… 죄송해요. 오해하시는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하하, 그렇다고 뭐 죄송할 것까진 없고요.”

“…….”

“근데 못 보던 반지 같은데. 그거, 결혼반지예요?”

“……아, 네.”

반지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그가 짐짓 웃었다.

“예쁘네요. 딱 민혁이 스타일이네.”

“……?”

민혁……이?

그녀의 얼굴에 일순 물음표가 떠올랐다.

뭐야, 저 친근한 호칭은?

“우진 씨가, 우리 민혁 씨를 아세요?”

“그럼요, 알죠.”

우진은 스테이크를 한 입 더 잘라 먹으며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아아주 잘 알지.”

그 놈이 어떤 놈인지. 그리고……

그 자식이 얼마나 매운 주먹을 가지고 있는지도.

* * *

그 시각, 민혁은 한창 운전에 집중하고 있었다.

“…….”

비가 와서일까. 오늘따라 차가 너무 막히는 듯했다.

맘은 벌써 한달음에 달려가고도 남았을 정도인데.

앞으로 죽 늘어선 차 행렬을 보고 있자니, 맘 속 한구석에 있던 걱정도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해야 되지.”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사실 엄밀히 말해, 이번 일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꾸 이상한 죄책감 같은 것이 그를 콕콕 찔러왔다.

먼저 약속 잡아놓고 일방적으로 파투를 냈으니, 사람이라면 서운한 것이 인지상정일 테다.

분명 화가 났겠지. 어쩌면 짜증이 나서 끼니를 걸렀을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마른 편인 여자가 자꾸 그렇게 안 먹으면 안 될 텐데.

결혼을 하고 나서 어째 점점 야위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가만. 근데 내가, 지금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

그는 문득 멈칫했지만,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차분히 생각했다.

‘……여동생 같으니까. 그래서 그런 거야.’

그래. 그뿐이다. 다른 이유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차는 그 뒤로도 한참이나 빗속에 서 있었다.

홀린 듯 액셀러레이터를 몇 번이나 밟고 나서야, 도로 위는 슬슬 정체가 풀리기 시작했다.

“…….”

흠, 안 되겠어.

잠시 생각하던 민혁은 무슨 이유에선지 급하게 핸들을 꺾었다.

* * *

“저는 전혀 몰랐어요. 민혁 씨랑 그렇게 친밀한 관계이셨던 줄은…….”

“그럴 만도 하죠. 한동안 연락도 못 했으니까.”

예원은 씩 웃으며 운전을 하는 남자의 옆모습을 예전과는 다른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었다.

다름 아닌 이 남자가 민혁, 재하와 함께 같은 팀을 이뤘던 사람이라니.

그리고 그런 관계에 있던 두 사람이, 하필이면 딱 붙어 있는 경쟁 카페 사장으로 만나다니.

“……그럼, 스톰 탈퇴하시고 나서는 어떤 일을 하셨던 거예요?”

“그냥, 여기저기 떠돌았어요. 가수 활동 할 때는 못했던 것들 위주로 막 하고 다녔죠. 주로 여행을 많이 다녔는데, 그러다 갑자기 커피에 관심이 생겨서. 그걸 계기로 카페도 차리게 된 거고요.”

“아…… 그러셨구나.”

이제야 퍼즐조각이 좀 맞춰지는 느낌에 예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남자가 참 얄궂은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말하는 인연이라는 건, 바로 이런 관계를 두고 하는 말인 걸까.

“아무튼…… 오늘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비도 안 맞고, 저녁도 잘 먹었어요.”

“아니에요. 하마터면 혼자 먹을 뻔했는데, 오히려 같이 먹어줘서 내가 더 고마운 걸요.”

다행히 이제 비는 어느 정도 그쳐 있었다.

살짝 고개를 까딱인 예원은 그를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볼게요. 조심히 가세요.”

“네. 다음에 또 봐요.”

“…….”

“……참, 예원 씨.”

“네?”

그녀를 잡아 세운 우진이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저, 민혁이한테는…….”

그런데 그때, 때마침 하얀 헤드라이트 불빛이 돌연 그들의 옆을 쫙 비추었다.

주인과 닮은 것 같은 검정색 차가 골목 안으로 유연하게 미끄러져 들어오고 있었다.

주차를 마치고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는 손에 무언가를 든 채,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예원은 그가 누군지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물론 그건 우진도 마찬가지였다.

“현민혁.”

별안간 불린 제 이름에, 남자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오랜만이다.”

얼굴을 찌푸린 남자가 마주 서 있는 두 남녀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이어, 그의 미간에는 예정된 수순처럼 깊은 주름이 파였다.

“……최우진?”

민혁의 눈이 단박에 커졌다.

멀리 떨어져 선 두 남자는 잠시 동안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옛날 얽히고설켰던 그들의, 과연 운명과도 같은 재회였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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