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이상징후
2018.08.28.
‘실수……? 공평……?’
꼬리가 뚝뚝 끊긴 그의 말들이 머릿속에 동시다발적으로 입력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예원은 지금 그의 말이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중이었다.
과하게 밀착된 자세 탓일까.
실질적으로 닿아 있는 부위도 없건만, 이상하게 그의 품안에 폭 안겨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거기다 바짝 다가와 있는 얼굴은 또 어떻고.
매끄럽고 흰 뺨 위로 푸른 달빛이 어룽어룽하는 모양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 뭐 이렇게 생긴 남자가 다 있냐.’
고작 반경 10cm 남짓 되는 거리에서, 그처럼 잘생긴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기란 매우 힘이 드는 일이었다.
거리가 거리인 터라 후각도 무척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에게 늘 어렴풋이 배어 있던 담배 냄새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전형적인 스킨 냄새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시원한 박하향 같기도 한 것이…….
“…….”
아무튼 뭐랄까, 늪에 둘러싸인 기분이었다. 금방이라도 머리끝까지 잠겨버릴 듯한 늪.
그러는 사이 남자의 얼굴은 서서히, 서서히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극히 건강하고 활달한 그녀의 심장도 그에 맞춰 더욱 거세게 뛰어댔다.
콩닥, 콩닥, 콩닥!
‘어떡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한 예원이 눈을 질끈 감던, 그때였다.
.
.
─꼬르륵.
별안간 차안에 울려 퍼진 우렁찬 소리.
꾹 눌려 주름까지 져 있던 그녀의 눈꺼풀이 도로 확 말려 올라갔다.
코앞까지 와 있는 그와 정통으로 눈을 마주친 것도 그때였다.
“…….”
“…….”
두 남녀 사이로 무겁게 흐르는 정적.
약 3초 정도 상황파악이 되지 않았지만, 예원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뭐, 뭐, 뭐야.
‘방금 그거, 설마 내 배에서 난 거야……?’
안타깝게도 그건 사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피식 하는 숨결이 그녀의 입술을 톡 건드렸다.
한숨처럼 내려앉은 그것은……
모르긴 몰라도 비웃음이 분명했다.
‘……젠장!”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던 집채 같은 몸뚱이는 눈 깜짝할 사이에 제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게다가, 그는 태연한 말투로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다.
“……이만 들어가죠, 배고픈 것 같은데.”
……못 들어가요.
이렇게 쪽팔린 상태로 어떻게 들어가요!
“홍예원 씨.”
“…….”
“괜찮습니까?”
간 떨리게 심각한 척을 하기에 화라도 났나 싶었는데.
그녀를 슬쩍 쳐다보는 남자의 입가에는 어느 새 슬몃 미소가 번져 있었다.
그걸 본 순간 푸시식 맥이 빠졌다.
‘뭐야. 설마…… 장난친 건가?’
허. 그런 줄도 모르고 난 대체 뭔 생각을……!
“근데, 갑자기 눈은 왜 감습니까?”
“네?”
“…….”
“아, 그. 제, 제가 안구 건조증이 있어서요! 하하, 갑자기 눈이 막, 따가워가지고…….”
“…….”
“야, 양파도 까고…… 하루 종일 불 앞에 있었더니…….”
하하하. 하하하.
‘아오, 변명할수록 더 이상해.’
난 지금 웃고 있지만 속으론 울고 있다.
억지미소를 지은 예원은 애써 기계적인 웃음을 내뱉었다.
“…….”
물론, 그런 그녀를 민혁이라고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짐짓 모른 체하며 화제를 돌렸다.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오늘 일은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뜬금없이 왜 거기 가서 밥을 하고 있어요.”
“……밥이요?”
심란한 와중에 그의 말을 무심코 곱씹던 그녀는 이내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입을 벌렸다.
“……아.”
그리고 곧바로 떠오르는 개구진 미소.
“그거, 제가 한 거 아닌데요?”
“……네?”
“저 밥 안 했어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밥’만 한 거지만.”
예원은 그제야 진짜 미소를 찾았다.
그녀는 가방에서 지갑을 찾더니, 그 안에 꽂힌 뭔가를 척 꺼내들었다.
그것은 바로,
“요걸로 해결했죠.”
신혼 첫 날, 그가 예원에게 주었던 카드였다.
“딱히 쓸 데가 없어서 묵혀두고만 있었는데……. 오늘은 까딱하면 저 혼자 독박 쓸 판이라, 그냥 이걸로 출장요리사님 불렀어요.”
“……출장요리사요?”
“네.”
그녀의 고개가 천연덕스럽게 끄덕여졌다.
“전부 제가 만든 것처럼 보여야 한다니까 메뉴 선정부터 요리까지 알아서 착착 해주시던데요? 제가 한 건 돌솥밥이랑 계란말이, 그리고 한복 입고 코스프레한 것밖에 없어요.”
“…….”
“어때요? 저 완전 똑똑하죠?”
이런 기막힌 아이디어를 생각해낸 자신이 무척이나 대견하다는 듯한 얼굴.
비로소 모든 전말을 알게 된 그는 저도 모르게 웃음 섞인 탄성을 터뜨렸다.
“……하.”
뭔가 있을 거란 생각은 했지만 그게 이런 종류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고래 등 같은 집에 멋대로 출장요리사를 부를 생각을 하다니.
하여간에 간 크고 굳센 홍예원.
“……왜요? 이거, 쓰면 안 되는 거였어요?”
“이미 다 써놓고 뭘 물어봅니까.”
“아니 그냥, 표정이 좀 안 좋아지신 거 같아서……. 근데 걱정 마세요. 그렇게 많이는 안 썼어요!”
지레 고개까지 흔드는 여자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났다.
“잘했어요. 앞으로도 그렇게 부담 갖지 말고 맘껏 써요.”
“……정말요?”
“네. 그리고…….”
“…….”
“다음부터는 그런 일 있으면 나한테 꼭 얘기해요. 그렇게 혼자서 가 버리면, 내가 커버 쳐주고 싶어도 쳐줄 수가 없잖아요.”
……나라고 뭐 그러고 싶어서 그런 줄 아나.
당신한테 전화를 걸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런 거지…….
혀끝까지 차오른 말을 예원은 애써 삼켰다.
“……네.”
“그럼, 이제 진짜 들어가죠.”
먼저 밖으로 나가는 남자를 따라 예원도 곧바로 차에서 내렸다.
그렇게 별 일 없이 안으로 들어가는가 싶던 순간.
그는 예원을 향해 돌아섰다.
“참, 홍예원 씨.”
“네?”
잠깐 망설이던 그가 대뜸 물었다.
“이제, 넘어지고 구를 준비는 됐습니까?”
“……네?”
이건 또 뭔 개풀 뜯어 먹는 소리?
그녀의 얼빠진 표정을 본 남자는 픽 웃더니 말을 이었다.
“자전거. 배울 준비 됐냐고요.”
아. 자전거!
그제야 예원은 그의 말을 이해하고 입을 벌렸다.
이런 저런 일들로 바빠 깜빡 잊고 있었다.
자전거…… 배우기로 했었지, 참.
“다음 주 중에 하루 시간 비워놔요. 스파르타 단기 속성 코스로 가르쳐 줄 테니까.”
다음 주면 드디어 제 오랜 숙원을 풀 수 있을 모양이었다.
다름 아닌 이 남자를 통해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예원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그에게 화답하듯,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그럴게요.”
.
.
.
잠시 뒤, 예원의 방.
가방과 외투를 훌훌 벗어놓은 그녀가 침대 위로 벌렁 누웠다.
실질적으로 한 일은 별로 없는데 이상하게 온몸이 쑤시는 것 같았다.
하긴,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원래 더 중한 법이긴 하니까.
다만 육체적인 것도 문제이기는 했다.
허기로 홀쭉해진 배가 아직까지도 난리법석 요동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아오, 배고파…….”
출장요리사가 마련해준 저녁식사는 푸짐하고 맛있었지만, 막상 그녀가 먹은 양은 얼마 되지 않았다.
부담감과 눈치 탓에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으니까.
“아이씨. 하여튼 그 아줌마 때문에……!”
이럴 줄 알았으면 설사 체할지언정 일단 꾹꾹 욱여넣고 보는 거였는데.
문제의 꼬르륵 소리 뒤 피식, 하며 제 입술에 와 닿던 그의 웃음.
그것을 상기한 예원은 얼굴을 구김과 동시에 괴성을 내질렀다.
“아으, 몰라 몰라 몰라!”
하필이면 그때 꼬르륵거릴 게 뭐냐고! 운도 지지리 없어, 정말!
잔뜩 찌푸려진 얼굴이 핑크빛 베개에 사정없이 파묻혔다.
.
.
.
한편, 제 방으로 들어온 민혁은 예원과 똑같이 외투만을 벗어놓고는 침대에 털썩 몸을 뉘였다.
팔베개를 하고 누운 그의 시선이 멍하니 천장으로 향했다.
“사장님……?”
문득 떠올랐다. 아까 전, 촉촉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던 여자의 눈빛이.
사실은, 그도 그런 어쭙잖은 장난 따위를 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 여자에게서, 그런 말이 흘러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제가 사장님한테 반했다거나, 혹은 좋아하게 됐다거나. 그런 오해요. 그런 건 절대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
“……아시잖아요. 사장님이 저한테 어떤 분이신지.”
그래, 너무나도 잘 알지.
‘내가 당신에게 어떤 존재인지. 또, 당신이 나에 대해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도.’
알면서도 묵인하고 있었다.
어차피 언젠간 찢어져야 할 사이, 그런 걸 굳이 해명해야 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그 순간.
그는 약간…… 억울해졌다. 그리고 화도 났다.
제멋대로 남의 입술을 훔쳐 놓고는 본능이니 실수니 하며 횡설수설하던 여자의 말.
그게 뭐라고 그렇게 짜증이 났는지…….
정작 빌미를 제공한 건 자신이었으면서도, 그는 자꾸만 그녀 탓을 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했다.
오늘 일만 해도 그랬다.
뭐라 뭐라 종알거리는 입술이 왜 그리 탐스럽고 귀여워 보였을까.
만약 그녀의 굶주린 배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오늘 그 여자와 또 한 번의 키스를 나누었을지도 몰랐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자그마치 ‘세 번째’ 키스를.
“……하아.”
어쨌거나, 그날 밤의 키스사건이 무사히 일단락된 것만은 다행이다.
깊은 한숨을 내쉰 그는 다른 한 손을 들어 지끈대는 이마를 짚었다.
버쩍 마른 입술 끝이 왠지 모르게 쓰라렸다.
“……뭐 하는 짓이냐, 현민혁.”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계약신부를 상대로…….
정신 차려라, 이 자식아.
제발.
* * *
“이건…… 좀 오버인가.”
탈락.
“그렇다고 이건…… 너무 신경 안 쓴 거 같고.”
탈락.
“이건 또 너무…… 아이, 나 정말.”
탈락. 탈락. 탈락!
팔짱을 낀 예원의 눈썹이 심각하게 팔자를 이루었다.
침대 위에는 옷장에서 막 꺼낸 옷 무더기가 한가득 널려있었다.
그녀가 낮부터 이런 생쇼를 벌이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오늘은, 대망의 디데이(D-day)였으니까.
‘오늘, 같이 저녁 먹읍시다. 촬영 마치는 대로 바로 갈 테니까 에덴에서 기다려요. 자전거는 저녁 먹고 타는 걸로 하죠.’
오늘 아침, 그렇게 말한 남자는 홀연히 촬영장으로 떠났더랬다.
혼자 남은 예원은 노릇노릇하게 굽힌 토스트를 씹어 먹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저녁 먹고 공원에서 자전거 타기, 라.’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코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건 꼭…….
“데이트…… 같네.”
뭐. 데이트?
헉. 지레 놀란 그녀는 파리라도 붙은 듯 고개를 잽싸게 흔들었다.
우, 웃겨. 데이트는 무슨 놈의 데이트?
‘그, 그냥, 밥 먹고 밖에서 잠깐 노는 거지 뭐…….’
암, 그 정돈 그냥 할 수 있는 거잖아.
단지 친구끼리라도 얼마든지…….
고로, 내가 이렇게 심사숙고하며 옷을 고르고 있는 것도 그것이 결코 ‘데이트’이기 때문은 아니다.
침대 위로 널브러진 옷가지들을 샅샅이 훑어보면서, 예원은 그 다짐을 마음 속 깊이 새기고 있었다.
“휴…… 그래도 이게 젤 낫네.”
결국 그녀의 손에 들리게 된 것은, 아주 아주 무난하고 평범한 맨투맨과 청바지였다.
얼른 샤워를 마치고 나온 예원은 다소 들뜬 얼굴로 젖은 머리를 말렸다.
평소처럼 생머리로 나갈까 하다, 오랜만에 고데기를 들어 적당히 구불구불한 웨이브를 넣었다.
복장이 심플하니 머리 정도는 볶아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물론 이 또한,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닌, 순전히 그녀 자신의 ‘자기만족’을 위해서였지만.
“가기 전에 잠깐 지영이한테나 들러야겠다.”
모든 준비를 마친 그녀는 여유롭게 방을 나서려 했다.
그런데,
‘잠깐.’
예원은 웬일인지 잠시 멈칫하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머뭇머뭇 화장대 앞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이어 드르륵, 화장대 서랍이 열렸다.
오른쪽 구석에 있는 벨벳 소재의 고급스러운 반지케이스가 곧장 그녀를 반겨왔다.
뚜껑을 열자마자 드러나는 영롱한 자태의 반지.
그것은 결혼식 때 그 남자와 나누었던, 무척 아름답지만 사실상 별 의미는 없는 결혼반지였다.
“…….”
평소 예원은 반지나 액세서리류를 잘 착용하지 않았다.
직종 특성상 청결이 중요한데다가, 유달리 손에 물이 많이 닿는 직업이다 보니 관리가 힘들었기에.
하지만…….
“……오랜만에 한 번 껴볼까.”
이런 근사한 반지를 이대로 썩히기만 하는 건 너무 아까웠다. 오늘 같이 노는 날엔 특히 더.
그깟 자전거 쯤 탄다고 반지가 상하지는 않을 텐데, 어떡하지.
껴, 말아?
그녀가 반지를 내려다보며 깊이 고민했다.
‘……에이, 몰라. 기분이다.’
결국, 케이스에서 나온 반지는 그녀의 왼손 약지에 부드럽게 들어가 안착했다.
예원은 제 눈높이에 맞춰 손을 척 들어보았다.
“으음, 예쁘네.”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평소와 다르게 반짝반짝거리는 손이 맘에 쏙 들었다.
* * *
“야. 오늘 너 무슨 좋은 일 있냐?”
“어? 아니. 왜?”
“그냥, 아까부터 내내 실실 웃고 있길래.”
성환에겐 확실히 그를 뜨끔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아차한 민혁은 옆에 있는 대본을 집어들며 얼른 딴청을 부렸다.
“……일은 무슨. 아냐, 그런 거.”
“그래? 뭐 아님 말고. ……아, 너 이따 저녁에 뭐 따로 할 일 있냐?”
“왜.”
“간만에 너랑 맥주나 한 잔 할까 싶어서.”
“안 돼.”
단호박 백 개를 삼킨 듯 단호한 말투.
“뭐야. 왜 안 돼.”
“……나 약속 있어.”
“약속?”
“…….”
“아, 제수씨랑?”
어라. 그의 고개가 빙그르르 돌아갔다.
“……어떻게 알았어?”
“참나, 어떻게 알기는.”
픽 웃은 성환은 그의 앞에 있는 거울 쪽을 힐끗 턱짓했다.
“눈이 있으면 지금 네 얼굴을 좀 봐라. 색시 만날 생각에 헤벌레, 해가지고는 좋아 죽겠다는 표정인데. 그걸 못 알아채는 게 바보 아니냐?”
“…….”
그 말에, 민혁의 입술은 저절로 굳게 다물렸다.
그때였다.
“저, 현민혁 씨!”
별안간 조감독이 그의 대기실로 들이닥쳤다.
“죄송합니다. 잠깐 실례 좀 할게요.”
“예? 아, 예. 무슨 일입니까?”
“다른 건 아니고요. 혹시, 오늘 저녁에 다른 스케줄 있습니까?”
“갑자기 오늘 저녁은 왜……?”
곤란한 얼굴의 조감독이 설명했다.
“장소 섭외에 문제가 좀 생겨서, 다음 촬영 스케줄을 오늘 저녁으로 당겨야 될 것 같아요. 무리 없을까요?”
“‘오늘 저녁’……이요?”
그 말에, 민혁과 성환은 자동적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꼭…… 오늘 해야 되는 겁니까?”
“안 그럼 스케줄이 꼬여서요. 몇 씬 안 찍을 거라 비교적 일찍 끝나긴 할 겁니다. 죄송하지만 협조 좀 부탁드릴게요.”
“…….”
이런.
예기치 못한 돌발 상황에, 민혁의 얼굴에는 한순간 낭패가 어렸다.
사사로운 약속 때문에 일을 미룰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야, 어떡하냐? 오늘 너 제수씨랑 약속 있다며.”
“……말해야지, 뭐. 조금 늦을 수도 있다고.”
말은 그렇지만, 자전거를 가르치는 건 좀 더 뒤로 미뤄야할지도 모르겠다.
민혁은 잠시의 고민 끝에 핸드폰을 들었다.
* * *
“아…… 7시라 그래놓고는 왜 이렇게 안 와.”
카페 에덴의 매장 안.
벽 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던 예원이 울상을 지었다.
부지런한 시계바늘은 얄궂게도 벌써 7시 3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뭐야. 사장님 아직도 안 오셨어?”
저녁 타임 근무 중인 하연이 다가와 물었다.
“응.”
“이상하네? 무슨 일 있으신가. 전화는 해 봤어?”
“……아니.”
“으유. 다 언니 잘못이지 뭐. 그러게 왜 하고 많은 것 중에 폰을 까먹고 나오냐, 나오길.”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집에서 나와 버스를 잡아타고 나서야, 예원은 비로소 제가 핸드폰을 까먹고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도로 돌아가긴 귀찮아서 그냥 온 건데…… 다시 갔어야 했나 하는 후회가 새삼 밀려들었다.
생전 안 끼던 반지 챙길 정신은 있었으면서, 가장 중요한 폰을 챙길 생각은 왜 미처 못 했던 건지.
“저기, 점장님! 전화 왔는데요.”
그런데 그때, 사무실에서 달려 나온 채린이 바 너머로 소리쳤다.
“어? 누군데?”
“사장님 매니저분이시래요.”
“……매니저님?”
살짝 놀란 예원은 얼른 사무실로 달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예원 씨. 다행이다. 아직 카페에 있었네요.]
“……네. 그런데, 어떻게 여기로 전화를……?”
그는 어쩐지 살짝 다급한 목소리였다.
[오늘 민혁이랑 약속 있었다면서요. 실은, 민혁이가 지금 예정에 없던 추가촬영이 생겨서…… 당장은 못 갈 것 같다고 전해주려고요. 폰으로 전화했는데 예원 씨가 전화를 안 받길래.]
“아……. 저 깜빡하고 폰을 집에 두고 나왔어요.”
[그래요? 어쩐지. 안 받아도 너무 안 받더라.]
추가촬영이라면…….
잠시 생각하던 예원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촬영이 언제쯤 끝날까요?”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요. 혹시 모르니까 기다리지 말고 집으로 가 있어요. 민혁이한테는 내가 얘기해 놓을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허무해진 예원은 통화가 끊긴 수화기를 잠시 쳐다보다가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고대하던 자전거 레슨이 이런 식으로 파투가 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껏 고조되었던 마음이 한순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다.
인사도 대충 하는 둥 마는 둥, 그녀는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 얼굴로 터덜터덜 매장을 나왔다.
“……갑자기 웬 비가 오고 난리야.”
그 사이, 바깥에는 어느 새 이슬 같은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어차피 자전거 타기는 물 건너 간 거였네.
씁쓸해진 예원은 처마 밑에 몸을 숨긴 채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하아, 그럼 이제 나 혼자 뭐하냐.’
저녁을 먹기에도 늦었고, 집 말고는 달리 갈 데도 없다.
순간, 이상하게도 가슴이 너무나 허해졌다.
일 때문이라는데. 당연히 이해해줘야 하는 건데.
왜 이렇게 서운한 마음이 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비를 보고 있자니, 안 그래도 울적한 마음이 더더욱 배가 되었다.
‘나도 모르게 기대를 너무 많이 했나…….’
휴. 나오는 거라곤 오직 한숨뿐.
어쩌지. 진짜 다시 집으로 가야 되나.
그렇다고 이모 집으로 가기엔 시간이 너무 애매한데…….
갈피를 잃은 그녀가 그렇게, 혼자서 조용히 고민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홍예원 씨?”
웬 남자 목소리가 그녀의 고개를 돌아보게 했다.
“……어?”
그녀의 오른편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옆 카페 사장 우진이었다.
“오, 맞네. 오랜만이네요, 예원 씨?”
“아. 안녕…… 하세요.”
예원의 표정에는 금세 미미한 짜증이 물들었다.
아, 이 타이밍에 저 인간이 튀어나올 건 또 뭐냐.
“사복을 입어서 몰라볼 뻔 했어요. 유니폼 입었을 때랑은 완전 딴판이네요. 머리도 그렇고.”
“……아, 네.”
“근데, 이 시간에 어디 가요? 보니까 퇴근하는 건 아닌 것 같고.”
기껏 물어봤는데 답을 안 하는 건 좀 그렇겠지.
“……저녁 먹으러요.”
“지금? 저녁이 좀 늦네요?”
“……네, 어쩌다 보니까…….”
어쩐지 예의 꼬르륵거리던 소리가 다시금 배에서 들리는 것도 같다.
그때,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잘됐네요.”
“……뭐가요?”
“나도 아직 저녁 안 먹었거든요.”
“……그래……서요?”
그게 나랑 뭔 상관?
그녀의 반문에, 우진의 입가에는 돌연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딱 보니까 누구 기다리다가 바람 맞은 것 같은데. 맞죠?”
“……!”
흠칫 놀란 예원이 그를 쳐다보았다.
뭐야, 이 인간. 귀신이야?
“귀신같은 거 아니니까 놀라진 마요. 지금 예원 씨 표정 보고 알아챈 거니까.”
“…….”
“아무튼, 나도 지금 저녁 먹으러 가던 참이에요.”
“……그러세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따로 같이 먹을 사람 없는 거면…….
말끝을 흐리던 그는 그녀 보란 듯 우산을 쫙 펴들었다.
“어때요. 나랑 같이 저녁 먹지 않을래요?”
우산을 든 우진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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