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두 번은 안 뺏겨
2018.09.04.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턱, 턱, 턱.
둔탁한 발소리가 크지 않은 골목길 안을 울렸다.
예원과 우진이 있는 쪽을 향해, 눈에 띄게 느려진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는 민혁이었다.
“…….”
고작 1미터 정도의 거리를 남겨두었을 즈음, 그는 다시금 멈춰 섰다.
나른한 눈빛의 우진과, 강렬한 눈빛의 민혁.
그리고…… 그 중간에 선 예원.
그녀는 괜스레 난처해진 얼굴로 두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물론 특히 신경이 쓰이는 건 제 남편 쪽이었다.
‘갑자기 왜 저렇게 화가 난 것 같지……?’
분명하고도 노골적인 적대감이 드러나 있는 표정.
문득, 아까 전 우진에게서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민혁이하고 나…… 같은 그룹 멤버였어요. 친형제만은 못해도, 꽤나 절친했던 사이죠.’
분명 그렇게 들었었는데.
그런데 지금의 그는…… 어째 철천지원수를 대하는 듯한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모르고 있는 무언가가 있는 걸까.’
예원의 입술이 살짝 깨물렸다.
두 남자 사이에 흐르는 조짐이 어쩐지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마침 잘 왔다, 민혁아. 아, 이제는 현 사장님이라고 불러야 되나?”
“……형이 여긴 어쩐 일이야.”
돌덩이처럼 딱딱한 어조에 우진이 픽 웃었다.
“야. 우리 근 십 년 만에 본 건데,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그러기냐.”
“…….”
“예원 씨랑 같이 저녁 먹었어. 다 먹고 집에 데려다주러 온 길이야.”
그 입에서 ‘예원’이란 말이 나오자, 민혁의 표정은 더욱더 미세하게 굳어졌다.
“형이, 이 사람을 어떻게…….”
우진에게 물었으나, 대답은 예원에게서 나왔다.
“……그, 우리 카페 옆에 있는 ‘카페 빈’ 아시죠.”
“…….”
“거기…… 사장님이세요.”
사장?
민혁의 눈썹 끝이 꿈틀했다.
반면 우진은 여유롭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몰랐구나. 하긴, 나도 몰랐어. 에덴 사장이 너로 바뀐 줄은……. 중간에 잠깐 외국을 다녀왔었거든. 근데 귀국하고 보니까, 그보다 더 큰 소식이 있었더라고.”
“…….”
“이렇게 지척에 있는 줄 알았으면 진작 축하해줬을 텐데. 좀 늦었지만, 결혼 축하한다 민혁아.”
그에게선 답이 없었지만, 우진은 꿋꿋하게 입을 열었다.
“네 소식은 그동안 여기저기서 들었어. 사업한다고 이것저것 손댄다는 소문은 있었는데, 그게 우리 카페 옆일 줄은 몰랐다. 우리 인연, 그래도 꽤 질기고 대단한 것 같지 않냐?”
“…….”
“야 인마. 이제 표정 좀 풀어라. 너 설마, 아직까지 맘 상해 있는 건 아니지?”
“…….”
“그때 그 일로 말이야.”
……그때 그 일.
그 한 마디에, 그의 눈초리에 깃들어 있던 감정은 일순 적개심을 넘어 분기로 변했다.
‘고작 그걸 갖고 아직까지 꽁해있냐. 애도 아니고.’
씩 올라간 입가가 그리 뻔뻔하게 말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눈을 치켜뜬 민혁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비닐봉지를 들고 있는 주먹 위로 굵은 힘줄이 툭툭 불거졌다.
모든 게 변했다고 생각했지만……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의 제 모습이, 바로 그 증거였다.
“…….”
순간, 그의 머릿속 한 구석에서는 모래알처럼 산산이 부서져 있던 기억들이 슬금슬금 원형을 찾았다.
그리고 그것들은 금세 눈덩이만치 불어나, 그를 서서히 옥죄기 시작했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이자 족쇄.
눈앞의 남자는 그에게, 곧 그런 의미였다.
* * *
사실, 민혁이 처음부터 ‘최우진’이란 인간을 증오한 것은 아니었다.
우진의 말마따나, 오히려 그는 한때 우진을 진심으로 동경하고 따랐다.
그룹의 주축으로, 언제나 저보다 한 발 앞서나가는 것 같은 형이 멋있어 보였으니까. 한껏 빛나보였으니까.
하지만…… 부러움과 시기는 어쩔 수가 없었다.
십몇 년 전 아이돌 그룹 ‘스톰’으로 함께 활동하던 시절, 우진은 민혁과 재하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인기를 구가했다.
다만 그때도 나름의 실력파 루키 이미지와 꽃미남 이미지를 보유하고 있었던 재하에 반해, 민혁은 가진 외모와 능력치에 비해 이상하리만큼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 하는 편이었다.
오죽하면 방송가 일각에서는 이런 말들도 속속 나돌 정도였다.
<민혁? 에이, 걔는 우진인가 뭔가 하는 애랑 포지션이 너무 겹치잖아. 써먹기가 너무 애매해. 그렇다고 애 성격이 걔만큼 능청스럽길 해, 어린놈답게 끼나 패기가 있길 해. 만날 우중충해가지고. 끼워 팔아 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우연한 계기로 자신에 대한 평판을 듣게 된 그는 물론 화가 났다.
하지만 더 화가 나는 건…… 그 말에 그 스스로조차도 부정할 수 없었다는 것.
엄마와 동생을 잃었던 14살 이후, 무신경한 아버지와 새어머니, 같잖은 이복형의 그늘에 가려 있던 그는 언제나 주목받을 수 있는 삶을 꿈꿨다.
그런 그에게, 지하철을 타다 우연찮게 받았던 캐스팅 명함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 연예인이 되자. 유명해지자. 그러면 어떻게든 길이 보이겠지.’
하지만, 그는 제가 직면한 현실이 그리 녹록치가 않다는 것을 곧 깨달아야 했다.
연예계 생활에 잘생긴 외모는 다가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든, 사람들은 그보다 우진을 먼저 찾았다.
그는 늘 두 번째. 그것도 운이 좋아야 두 번째지, 그마저 따라주지 않으면 세 번째, 네 번째 이상까지도 가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덕분에 그는 번번이 좌절했다. 그러나 그런 걸로 우진을 탓할 수는 없었다.
모든 건 제 탓이었다.
우진만큼 사람들을 사로잡지 못하는 제 탓.
우진만큼 잘나가지 못하는 제 탓.
그때 그에게, 제일 큰 위안이 되어주었던 사람이 바로……
조혜인이었다.
<오빠. 너무 조급해하지 마. 우진 오빠는 우진 오빠고, 오빤 오빠인걸. 오빠한테도 곧 기회가 올 거야. 그러니까 힘내. 응?>
<……정말 그럴까?>
<그럼, 당연하지.>
<……너, 나 힘내라고 괜히 해주는 말 아니야?>
<쳇. 그럼 내가 뭐 오빠한테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말이야?>
사랑스럽게 팩 쏘아붙이던 그녀는 곧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지 말고 믿어. 내가 오빠한테 거짓말할 이유가 없잖아.>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말을 섣불리 믿지 말았어야 하는 거였는데.
애석하게도 그 말을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민혁은 우진과 혜인이 전보다 눈에 띄게 가까워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맞닿는 손, 스스럼없는 장난, 그에게만 보여주던 미소를 담뿍 머금고는 우진을 향해 즐겁게 웃어대는 그녀.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보고도 그는 굳게 믿었다.
‘착각이야. 설마 혜인이가 그럴 리 없어.’
열등감과 불안감에 제가 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거라고,
모든 건 자신의 피해망상일 거라고 여겼던 것도 잠시.
민혁은 어느 날, 그 모르게 차 안에서 애틋한 키스를 나누고 있는 두 남녀를 목격하고야 말았다.
<……!>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버지가 엄마 몰래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안 이후,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은 분노를 다시 한 번 느낀 것은.
<형이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어떻게!>
<야, 현민혁……!>
티 하나 없이 매끈했던 그 볼에, 덜 여문 주먹을 힘껏 메다꽂았던 것도 그때였다.
.
.
그로부터 몇 개월 뒤.
아이돌 그룹 ‘스톰’은 결국 장렬하게 해체했다.
주요 사유는, 주력 멤버 우진의 탈퇴였다.
* * *
그 날 이후, 민혁은 ‘가수’라는 길을 과감히 포기했다.
그 대신 그나마 반응이 왔었던 연기 쪽, 즉 배우 쪽으로 완전히 전향했고, 어떻게든 배우로 성공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 백방으로 오디션을 봤다.
개중 작은 역할이라도 하나 떨어지면 온몸을 불사를 듯 연기했다.
문제의 ‘게이소문’을 안겨다 준 그 퀴어 영화도 다 그런 과정에서 찍게 된 거였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혹독한 나날들을 보낸 뒤에야, 그는 비로소 지금의 현민혁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래도 이젠 다 잊혔다고 생각했는데.
겨우겨우 다 극복했다고 생각했는데.
‘최우진’을 맞닥뜨린 순간, 그는 현재의 모습이 깡그리 지워진 그 옛날의 현민혁으로 다시 돌아가는 기분을 느꼈다.
내가 그동안 여기서 어떤 마음으로 버텼는데.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데.
형은, 어느 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웃고 있구나.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그렇게.
“…….”
예전엔 멋모르고 힘이 없어 손 놓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지만, 이번엔 그럴 수 없었다.
아니, 그래선 안 되었다.
“……홍예원.”
이번엔 안 돼.
내 걸, 두 번은 안 뺏겨.
두 번 다시는.
“이리 와.”
뜬금없는 반말에, 예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말 안 들려? 이리 오라고.”
“……네?”
왜, 왜 저러지?
평소와는 너무도 다른 그의 모습에, 예원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 하고 주춤거렸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우진이 아니었다.
“야. 그걸 뭘 그렇게 무섭게 말하냐. 예원 씨 겁먹은 거 안 보여?”
“…….”
일자로 다물어져 있던 민혁의 입가가 부드럽게 호를 그렸다.
냉골처럼 싸늘한 눈빛과는 무척 대비되는 미소.
“내 아내야. 형보다야 내가 훨씬 더 잘 알지. 형이 신경 쓸 일은 아닌 것 같은데.”
“…….”
“……예원아, 얼른 이리 와.”
예원아.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말투는 그새 조금 다정해져 있었다.
얼굴 또한 마찬가지였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은 같았지만, 지금의 그에게선 오히려…… 약간의 애처로움이 느껴졌다.
꼭, 어미를 잃은 사슴 같은 눈망울이라고 해야 할까.
이제껏 그에게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
뭣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그를 위로해주어야 할 것만 같다.
작심한 예원은 그의 옆으로 멈칫멈칫 다가가 섰다.
……그때였다.
남자의 팔이, 그녀의 오른쪽 옆구리를 급작스럽게 파고든 것은.
“……!”
욕심 많은 어린아이가 제 것을 악착같이 움켜쥐는 듯한 손길.
굵고 단단한 팔은 한순간에 그녀의 허리 전체를 옭아매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지레 놀란 예원이 그를 쳐다보았지만, 정작 그는 무척 태연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형. 안 그래도 걱정하고 있었던 참이었는데.”
“……아냐. 뭘 이 정도 갖고.”
“……근데.”
냉랭한 눈빛이 우진을 똑바로 직시했다.
“웬만하면 오늘 같은 일은 다신 없었으면 좋겠어. 내 아내가 다른 남자랑 단 둘이 밥 먹는 거,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뭐?”
“그럼.”
다른 볼 일은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읊조린 그는 예원을 이끌고 쌩 안으로 들어갔다.
말 그대로 완전한 개무시.
덕분에 홀연히 그 자리에 남겨지고 만 우진은 잠시 뒤 허탈한 웃음을 터뜨려야만 했다.
“……하.”
자식, 저 놈의 성깔은 여전하구만.
* * *
예원의 허리에 감겨 있던 손이 풀어진 건, 그들이 집안으로 완전히 입성하고 난 직후였다.
“…….”
“…….”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는 그녀를 뒤로 한 민혁은 주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잔에 물을 따라 벌컥벌컥 들이켰다.
물을 삼킬 때마다 목울대가 아래위로 사정없이 흔들린다.
예원은 멀찍이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참나, 물 한 잔 먹는 것도 꼭 CF 같네.’
하여튼, 안 그럴 것 같으면서 은근히 섹시한 면이…….
어머. 내가 또 무슨 생각을.
도리도리, 얼른 정신을 차린 그녀는 쭈뼛쭈뼛 그에게로 다가갔다.
“저기…… 민혁 씨.”
“…….”
“혹시 화났……어요?”
솔직히 말해서, 예원은 지금 그가 뿔이 난 이유를 잘 알 수 없었다.
그나마 하나 알겠는 건 최우진을 향한 그의 감정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 정도.
허나 그것만으로는 그의 분노가 충분히 설명되질 않았다.
‘뭐지. 갑자기 추가 촬영이 생겼다더니, 오늘 촬영이 잘 안 풀려서 그런 건가?’
아, 그래. 그럴지도 몰랐다.
일에 관해서만큼은 유독 예민하게 구는 남자였으니까.
“…….”
물을 다 마신 그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고, 예원은 왠지 모르게 안달이 났다.
묻지도 않은 말들이 마구 튀어나왔다.
“그, 오늘 일이 어떻게 된 거냐면요……. 매니저님한테서 전화 받고 나와서 카페 앞에 서 있는데, 갑자기 그 분이 옆에서 부르는 거예요. ‘홍예원 씨?’ 이렇게.”
“…….”
“그분이 예전부터 종종 카페에 놀러 와서 귀찮…… 아니, 약간 집요하게 말 걸고 그러셨거든요. 그래서 오늘도 그냥 별 생각 없이 잠깐 얘기했는데, 갑자기 그분이 치킨 맛있게 하는 데를 잘 안다고 하셔서…….”
아, 대체 뭔 소릴 하고 있냐. 이걸 이 남자한테 왜 얘기해?
그야말로 아무 말 대잔치.
하지만 그녀는 제 의식의 흐름을 막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이 적막을 깨야 할 것 같았다.
“아, 아무튼. 그 와중에 비도 막 갑자기 오는 거예요. 민혁 씨도 늦을 거라 그러고…… 그렇다고 혼자서 밥 먹기는 싫고 그래서…….”
“언제부터 알던 사입니까.”
그때, 뜬금없이 그가 물었다.
“네?”
“언제부터 알던 사이냐고요.”
“…….”
“그 자식이랑 친해요?”
……그 자식?
“……아, 아뇨?”
“그런데 저녁을 왜 같이 먹습니까.”
취조라도 하는 듯한 물음이 낯설기 그지없었다.
‘……그, 그러게. 왜 같이 먹었을까.’
예원은 당황스럽게 눈을 끔뻑였다.
“그냥…… 별다른 이유는 없었는데요?”
“…….”
“뭐, 그래도 아예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배도 고팠고, 치킨도 좀 먹고 싶었고 그랬으니까…….”
하. 그는 허무한 듯 작게 헛웃음을 뱉었다.
‘또. 또 치킨이군.’
고작 치킨 같은 게 뭐라고 이 여잔…….
그의 눈빛이 일순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홍예원 씨는 치킨이 그렇게 좋습니까? 치킨 하나 때문에, 안 친한 남자도 그렇게 덥석덥석 졸졸 좇아갈 만큼?”
“……네?”
잠깐. 이 남자가 뭐라는 거야, 지금?
남자의 말 사이 뚜렷하게 섞여있는 조롱의 기운에, 예원은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전 그냥, 어차피 저녁 혼자 먹어야 되니까 별 생각 없이…….”
“홍예원 씨.”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그녀의 말꼬리를 잘랐다.
“뭔가 잊고 있는가 본데. 당신, 지금 유부녀야. 내 아내라고.”
“……그래서요?”
그의 입가가 마뜩찮게 일자를 그렸다.
“미안하지만 난, 내 아내가 다른 남자랑 저녁 먹고 있는 꼴 못 봐. 그게 치킨이든 뭐든, 그것도 단둘이서 먹는 거라면 더더욱.”
“…….”
“그러니까, 앞으론 각별히 유념해줬으면 좋겠어.”
늘 맞존대를 하던 그의 말투가 순식간에 반 토막이 나 있었다.
기분이 확 언짢아진 예원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이 남자가 왜 이래? 뭐 잘 못 먹었어?
“아니, 저기. 제가 어디서 누구랑 밥을 먹든, 그게 현민혁 씨랑 무슨 상관이에요?”
“……말했잖아. 당신 내 아내라고.”
“그래서요. 그게 뭐 어떻다고요?”
어이가 없는 나머지, 대꾸하는 목소리가 저절로 삐딱해졌다.
“이보세요, 현민혁 씨. 우리가 아무리 계약을 한 사이라지만, 난 그쪽 소유물 같은 게 아니에요. 계약서 조항 기억 안 나요?”
“…….”
“우린 서로의 의무만 다하면 되는 사이예요. 내가 누구랑 저녁을 먹건 뭘 하건, 그건 그쪽이 터치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고요.”
오늘 하루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 같던 기분이, 약 반나절 만에 진흙뻘처럼 착 가라앉아 있었다.
입술을 한 번 깨문 예원은 거듭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요. 내가 진짜 속 좁고 치사한 것 같아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오늘 약속을 깨뜨린 건 내가 아니라 그쪽이에요. 그새 잊었어요?”
언감생심 사과 같은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래도 최소한, 집까지 혼자 오게 만든 것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기색이라도 보일 줄 알았는데.
“나 오늘 비 오는 줄도 모르고 우산도 안 챙겨갔어요. 그 사람 아니었음, 비 쫄딱 맞고 집까지 생쥐 꼴로 걸어왔을 수도 있었다고요!”
“…….”
“근데, 저녁 한 번 먹은 걸 가지고 이렇게 화를 내요? 내가 대체 왜 이런 소리를 들어야 돼요?”
금세 푸르딩딩해진 여자의 기세에 그는 살짝 당황한 눈초리로 변했다.
날을 세우던 눈빛 또한 어느 새 온데간데없는 채였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린 대놓고 열애설도 났던 사람들이라고요. 주시하고 있는 눈이 많다는 거, 홍예원 씨도 뻔히 알잖아요.”
“그럼요, 잘 알죠. 근데, 그러는 사장님은요?”
화가 난 예원이 씩씩거렸다.
순식간에 억울함이 밀려들었다.
“나, 어디 가서 내가 유부녀라는 거 숨긴 적 없어요. 어차피 1년 뒤면 아무도 모르게 제자리로 돌아가겠지만, 그때까지는 그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살 생각이었다고요. 당신 아내로서.”
“…….”
“이거, 안 보여요?”
그녀가 별안간 왼손을 척 들어보였다.
황홀한 빛깔로 빛나고 있는 다이아반지에, 그의 눈이 찡그려졌다.
“나는 그렇다 치고, 사장님은 결혼한 사람답게 행동한 게 대체 뭐가 있는데요. 말만 유부남이지, 결혼반지를 끼고 다니길 했어요, 얼굴에 써 붙이고 다니길 했어요? 밖에선 여배우들이랑 키스신이나 찍고 다니고. 우리가 언제 한 번 부부답게 외식이라도 한 번 한 적 있어요?”
이제껏 눌러왔던 서러움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슬플 일도 아닌데, 이상스럽게도 눈에 눈물이 맺혔다.
“어차피 카메라 꺼지면 바로 남남 되는 사인데, 내가 사장님 아내고 유부녀라는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
“오늘 약속도…… 난…….”
한껏 기대했던 나만 바보가 됐는데.
감정이 북받친 예원은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던 그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약속 못 지켜서.”
“…….”
“난 그냥…….”
그 놈 옆에 있는 당신을 보니 이상하게 덜컥 겁이 나서.
당신마저 그놈에게 뺏기는 건 아닐까 두려워서.
……그래서.
“…….”
하지만 그는, 끝끝내 그녀처럼 속에 있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대신, 회피하는 방법을 택했다.
“……미안해요, 괜한 얘기 꺼내서. 내가 오버한 거니까…… 신경 쓰지 마요.”
“…….”
“난 이만 들어가서 쉴게요. 예원 씨도 가서 쉬어요, 피곤했을 텐데.”
그 말만을 남긴 그는 묵묵히 2층으로 올라갔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그의 뒷모습을 멀거니 좇았다.
“……휴.”
잠시 뒤, 주방에 홀로 남은 예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폭풍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는 너무나도 허전했다.
‘또, 싸운 건가…….’
문득, 결혼 전에 그와 한 번 말다툼을 했던 때가 생각이 났다.
드디어 자전거 배운다고 신나있던 날에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예원의 얼굴엔 절로 우울함이 번졌다.
그런 그녀가 주방에 뭔가 맛있는 냄새가 감돌고 있다는 걸 안 것은, 그로부터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대체 뭘 사온 거야.”
이 고소하고 기름진 그 냄새의 근원지는, 바로 그가 들고 온 봉지 안인 것 같았다.
예원은 짜증스러운 표정과 함께 무심코 하얀 봉지를 들췄다.
그리고는 이내 입술을 깨물었다.
“…….”
그 안엔, 아직까지도 열기가 뜨끈뜨끈하게 올라오는 프라이드치킨 한 마리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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