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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좋아질 수 없는 남자-41화 (41/102)

41. 내가 잡아먹기라도 하나?

2018.08.24.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이 가지런히 묶은 머리에, 배 앞으로 정갈하게 모은 손.

지금의 예원은 누가 보아도 ‘나 새색시요!’ 하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

놀란 민혁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놀란 건 라희였다.

“아니, 새아가. 그 옷은……?”

“아, 이거요?”

제 차림을 내려다본 예원이 방긋 웃었다.

“일전에는 제가 제대로 된 인사도 못 드린 것 같아서…… 일부러 준비했어요. 원래 새색시는 처음 뵐 때 한복을 입어야 한다고 해서요.”

“…….”

“인사가 늦었습니다, 아버님. 홍예원이라고 합니다.”

며느리를 처음 보게 된 시아버지이자 생일의 주인공, 태균은 마뜩잖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크흠, 그래. 반갑다.”

“참, 시장하실 텐데 얼른 식사하러 오세요. 준비 다 됐어요.”

말을 마친 예원이 주방 쪽으로 쪼르르 달려가자, 이내 정신을 차린 라희는 속으로 비웃음을 날렸다.

‘흥, 말은 저래도 제대로 준비 됐을 리가 없지.’

“그럼, 어디 가볼까?”

처음부터 성대한 저녁식사에 대한 기대는 없었다.

그저, 결혼식까지 올리고도 한 번을 찾아오지 않은 건방진 며느리에게, ‘시댁이 얼마나 힘든 곳인지’를 일깨워주고 싶었을 뿐.

‘무슨 잔소리로 기를 죽여 볼까.’

하지만, 그런 생각과 함께 무심코 주방으로 들어서던 라희는 막상 식탁을 발견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머!”

이, 이게 다 뭐야?

빈약해 마지않아 큰 망신만 당할 거라 생각했던 식탁은, 오히려 무지막지하게 풍성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생일상에 빠질 수 없는 미역국은 물론이고, 갈비찜, 잡채, 모듬전, 계란말이 등 손이 많이 가는 음식들이 잔뜩이었다.

게다가 밥 하나도 그냥 밥이 아니라 때깔 좋은 전복돌솥밥이었다.

입가심하기에 좋은 샐러드와 색색깔로 예쁘게 잘려 있는 과일은 보너스.

화룡점정으로, 식탁 정중앙에는 멋들어진 생크림케이크까지.

쩍 벌어진 입을 도저히 다물 수가 없었다.

“이, 이걸…… 새아기 너 혼자 다했니?”

헤헤, 웃은 예원이 쑥스러운 듯 대답했다.

“케이크는 산거고요. 나머지는 어머님 말씀 듣고 오랜만에 실력 발휘 좀 해봤어요.”

“…….”

“자, 어서들 앉으세요. 다 식겠어요.”

예원은 제일 먼저 민혁의 어깨를 톡톡 쳤다. 앉으라는 의미였다.

마치 제 집이라도 되는 양 능숙하게 자리를 안내하고 있는 여자를 보고 있자니, 문득 그는 헛웃음밖에 나오질 않았다.

‘아주 물 만난 고기구만.’

지난번엔 결혼식장에서 사람을 놀라게 하더니, 갈수록 점입가경.

아니나 다를까 여자는 특유의 무서운 친화력으로 좌중을 휘어잡았다.

제일 가관인 것은, 모두가 자리에 앉은 바로 직후였다.

“아버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이건 제가 준비한 선물이에요. 약소하긴 하지만 받아주세요.”

“……이게 뭐냐?”

“아, 별 건 아니고요. 커플 목도리예요. 아버님 생신이긴 하지만 오늘은 제가 두 분께 정식으로 첫 인사드리는 자리이고 하니까, 이왕이면 어머님까지 같이 챙겨드리고 싶어서요.”

붙임성 100% 모드로 그렇게 말하던 여자는, 막상 민혁의 형에게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아주버님 선물은 준비를 못 해서 어쩌죠. 오신단 소식을 미처 못 들어서……. 죄송해요.”

“……제 생일도 아닌데요, 뭐. 흠, 괜찮습니다.”

표정은 전혀 괜찮지가 않은데.

묘한 통쾌함을 느낀 민혁이 속으로 조소했다.

“……아무튼 고맙다. 다들 배고플 텐데 얼른 밥부터 먹자.”

그렇게, 편하지만은 않은 저녁식사가 시작되었다.

네 사람이 젓가락질을 개시하자마자, 여자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들의 눈치를 살폈다.

“어떠세요? 입맛에 맞으세요?”

반응은 생각 외로 금방 나왔다.

맨 먼저 갈비찜의 맛을 보던 태균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한 것이었다.

“……네가, 올해로 나이가 몇이라고 했지?”

“아, 저 스물여덟입니다.”

순간, 그의 눈썹이 살짝 들썩였다.

무뚝뚝하게 다물려 있던 입가에도 미소가 살짝 스몄다.

“……나이치고 솜씨가 제법이구나.”

빙 에두른 말이었지만, 그것이 칭찬이라는 것은 누구라도 알아챌 수 있었다.

예원의 얼굴은 전구를 켠 듯 곧장 환해졌다.

“별 말씀을요. 많이 있으니까 얼마든지 드세요.”

그제야 안심한 듯 천진하게 웃는 여자를, 민혁은 그저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우습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약간 화가 나기도 했다. 저들이 이런 극진한 대접을 받아야 할 인간들은 결코 아니었기에.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뭔지 모를 이상야릇한 감정을 느꼈다.

하여튼, 저 여잔 정말…….

‘……귀엽다니까, 진짜.’

그는 수저를 드는 것도 잊은 채 홀린 듯 예원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그때였다.

“…….”

그와 눈이 마주친 여자가 별안간 찡긋, 윙크를 날린 것은.

그건 마치,

‘나, 잘했죠?’

……라고 말하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입술을 살짝 벌린 그는 졸지에 저도 모르게 탄식을 뱉었다.

“허.”

일순 모두의 눈빛이 그에게로 쏠렸다.

금세 낯이 뜨거워졌다.

“……흠흠, 아무것도 아닙니다. 드세요.”

어쨌거나, 덕분에 꽤나 통쾌한 구경을 하게 된 것만은 틀림없었다.

둘만의 비밀을 공유한 두 남녀가 그렇게 기분 좋은 미소와 함께 시선을 교환하는 사이.

그런 둘을 보는 라희의 시선은 얼음처럼 차갑게 식었다.

.

.

.

그로부터 몇 시간 뒤.

“허허허…….”

침대 위에서 신문을 보던 태균이 껄껄 웃자, 화장대에 앉아있던 라희는 그런 남편을 보곤 팩 돌아앉았다.

“아니, 당신은 지금 웃음이 나와요?”

남자는 신문 한 장을 더 넘기며 심상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래도 이번엔 당신이 진 것 같은데. 생각보다 아주 맹랑한 애더구먼. 기죽이려면 꽤나 힘들겠어.”

그건…… 분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그 많은 음식을 대체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었단 말인가!

푸짐한 양에 훌륭한 비주얼로도 모조라, 맛 또한 하나 같이 다 빼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할 수밖에.

뭔지는 모르지만, 꼴에 같잖은 수를 쓴 게 틀림없다.

도움을 청하려도 청할 수 없게끔 일부러 철저히 혼자 남겨둔 거였는데.

그 때문에 당최 뭔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 참. 기집애가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너무 그러지 마. 아직 고작 스물여덟이라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짜증을 내던 그녀가 태균을 휙 쏘아보았다.

“설마 당신…… 그 생일상 하나 때문에 걔가 맘에 든 건 아니죠?”

그에게선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별 관심 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하는 반응이 되돌아올 뿐이었다.

* * *

한편 그 시각.

말도 못 하게 어색해져버린 민혁과 예원은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은 채 정면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집 앞엔 이미 한참 전에 도착해 있었다. 누구 하나 먼저 내리지를 못했을 뿐.

이쯤 되면 차라리 그 사람들과 저녁을 먹을 때가 나았다 싶다.

둘만 남겨지고 나니 이 숨 막히는 어색함을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저…….”

“저기.”

아, 하필이면 또 타이밍이 겹칠 게 뭐람.

“머, 먼저 말씀하세요, 사장님.”

하지만 그도 침묵을 견디기 힘들었을 뿐, 딱히 먼저 말을 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아뇨. 먼저 해요, 할 말 있으면.”

하아. 지은 죄가 있기에 평소처럼 당당하게 나갈 수도 없고.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이내 결단을 내렸다.

이렇게 된 이상, 자진납세밖엔 달리 방법이 없겠다고.

“……죄송해요, 사장님.”

“……뭐가요.”

뭐긴 뭐야.

그럴 타이밍이 아닌 줄 알면서도 예원은 그를 살짝 흘겨보았다.

제가 사장님한테 뽀뽀한 거요, 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냥, 다…….”

하는 수 없이 대충 얼버무렸다.

허나 그는 그녀의 대답이 영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

“왜 그랬습니까?”

예원의 고개가 그에게로 휙 돌아갔다.

“……네?”

잠시 말이 없던 민혁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난, 우리 관계가 이런 식으로 불편해지는 걸 원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내키지 않더라도 차라리 솔직하게 얘기하는 편이 낫죠. 그게 상호간에 더 편할 테고.”

“…….”

“왜 그랬습니까.”

어리벙벙해진 채, 통 대꾸를 하지 못하던 예원은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머뭇머뭇 대답했다.

“그게, 실은…….”

……하으.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어쩌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완전 미친년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흠흠, 사장님이 솔직하게 말하라고 하시니까 얘기는 하겠는데요……. 절대, 이상하게 듣진 마세요. 아셨죠?”

에이, 몰라. 까짓 거, 될 대로 되라지.

“그게, 실은요…….”

“…….”

“그때 그 순간만큼은, 사장님 입술이…….”

말을 하다 만 그녀가 꿀꺽, 침을 삼켰다.

그러더니, 땅굴로 파고들어갈 듯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마, 맛있어 보였어요. 그래서 그랬어요.”

민혁의 고개가 저절로 팽그르르 돌아갔다.

“……예?”

아이 씨, 이걸 또 리플레이하긴 싫은데.

“……그…… 흠, 흠.”

“…….”

“……맛있어 보였……다고요.”

그 말은, 숫제 폭탄과도 다를 바가 없었다.

“뭐요?”

여자의 말을 그제야 제대로 알아들은 민혁은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그건 실수였으니 제발 잊어 달라, 혹은 쌍방 잘못이 있으니 이대로 넘어가자 따위의 말들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사실 그는, 잠시 제가 ‘멋있어 보였다’는 말을 ‘맛있어 보였다’는 말로 착각해 들은 게 아닐까 하고 의심했다.

그거였다면 차라리 이해라도 갔을 것을.

맛있어 보여서 그랬다고? 내가 무슨 음식이라도 돼?

“……저, 놀라게 해드렸으면 죄송해요. 그거 말고는 달리 드릴 말씀이 없어서…… 진짜 진짜 죄송해요.”

“…….”

“근데, 저도 지금 제가 좀 이상한 말을 하고 있다는 건 아는데요……. 전 정말 그냥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씀드린 거거든요. 그때 제가 느꼈던 감정, 그거 그대로요.”

낮게 읊조리던 그녀가 답답한 듯 후, 숨을 내뱉었다.

“이상하게만 보지 마시고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사장님이 저만큼 굶어보셨으면…….”

앗.

순간 흠칫한 그가 살짝 인상을 쓰자, 여자는 금세 아뿔싸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니, 사장님도 제 상황이 한 번이라도 돼 보셨으면 이해하셨을 거라고요……. 일이 왜 그렇게 됐는지.”

남자의 눈빛이 금방이라도 저를 뚫어버릴 것만 같아서, 그녀는 턱턱 막히는 속을 조금이라도 편안케 하기 위해 애꿎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그게 실은…….”

굳이 이런 것까지 말해줘야 하나 싶긴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으니까.

“진짜, 처음이었단 말이에요.”

“…….”

“남자가 그렇게 먼저…… 가까이 막…….”

……들이대고 그러는 거.

난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었다고요. 28년 동안.

* * *

엄밀히 말해서, 홍예원은 모태솔로가 아니었다.

우선 최근만 살펴보자면, 지난 2년간 그녀에게는 나름 듬직한 남자친구가 있었다.

비록 그 상대가 유독 남다른 취향을 가진 놈이었을지라도, 절절하다고 믿었던 사랑이 알고 보니 그녀 혼자만의 ‘외사랑’이었을지라도……

그녀가 연애를 했다는 사실 그 자체는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전민혁을 만나기 이전인 10년 전에도 그랬다.

소꿉장난 같았던 만남들을 연애였다고 치긴 좀 뭐하지만, 어쨌든 그것도 사귀는 건 사귀는 거였으니까. 그리 생각하면 그녀의 인생엔 분명 남자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일은 결단코 한 번도 없었다.

코앞까지 가까이 다가온 상대에게 이상스럽게 마음이 동해, 제가 먼저 입을 맞춘다거나 하는 일들.

아니,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지 않은가.

그녀를 향해 그리 가깝게 다가왔던 남자는 이제껏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어릴 때야 상대들도 다 어렸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치고, 다 크고 나서는 그런 경험을 할 새가 없었다.

전민혁과의 스킨십은 가벼운 뽀뽀나 키스까지가 최대였다. 그것도 그녀가 먼저 시도해서.

고민 끝에 이야기를 털어놓았을 때 무척이나 놀라하던 지영의 목소리가 귓가에 선연했다.

‘뭐? 너네 아직도 키스를 안 했어? 와, 전민혁 그거 고자 아냐?’

그는 비록 고자는 아니었지만, 여자인 예원에겐 그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왜 진작 눈치 채지 못했는지 통탄스러울 노릇이다.

혼전순결을 강력하게 주장해오긴 했어도, 굳이 입술 같은 곳까지 순결하길 바란 적은 없었는데.

제기랄.

“하여튼 그건…… 실수였어요. 그러니까 오해하지는 마세요.”

“……오해요?”

“네.”

그녀는 일부러 꾹꾹 눌러 말했다.

“제가 사장님한테 반했다거나, 혹은 좋아하게 됐다거나. 그런 오해요. 그런 건 절대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

“……아시잖아요. 사장님이 저한테 어떤 분이신지.”

그가 잠시 보고 싶었고, 그에게 설레는 감정을 느꼈다고 해서…… 그것이 그를 좋아한다는 뜻이 되지는 않는다.

그녀에게 현민혁이란 아주 간단하게 정의내릴 수 있는 사람이지 않은가.

제가 감히 쳐다봐서도 안 될 사람. 정을 줘서도 안 될 사람.

1년의 시한부 결혼 상대. 그리고……

절대 좋아질 수 없는 남자.

‘남자’.

“…….”

그리고 그도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들은 것인지, 입술을 꾹 다문 채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때는 그냥, 그게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거였어요. 제가 그런 경험이 처음이라…… 게다가, 사장님은 제가 만나본 사람 중에 가장 잘생긴 분이시기도 하고…….”

“…….”

“그러니까, 본능적으로 그랬다고요.”

그녀는 문득, 사람들이 왜 카푸치노를 그리도 키스에 써먹었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로부터 커피는 초콜릿과 더불어 천연 최음제였다.

그런데 거기에 몽글몽글한 우유 거품까지 더해놨으니, 그보다 더 유혹적인 음료가 세상 어디에 있을까.

‘하여튼 그놈의 카푸치노가 문제였어.’

확실해. 그것 때문에 그랬던 거야.

다만, 하나 찝찝한 건 그거였다.

[한 번 생각해봐. ‘내가 이 남자랑 키스를 할 수 있을까.’ 상상해보면 바로 답 나올걸?]

이 남자와의 키스가…… 나쁘지 않았다는 것.

오히려 너무 달콤하고, 미치게 짜릿했다.

심지어는 뱃속 어딘가가 뭉근히 아려오는 것 같기도 했을 만큼.

‘그게…… 정상인 건가?’

……아, 나도 몰라. 뭐 남자랑 그래본 적이 있었어야 말이지.

예원은 속으로 푸념했다.

고개를 숙인 그녀가 그렇게, 한참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무렵이었다.

“……참, 쉽네요.”

“네?”

쉽긴 뭐가 쉬워?

얼떨떨해진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무슨……?”

그는 이상하게도 심각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몰랐다, 본능이었다.’ 그런 식으로 책임회피하고 나면 그만이냐고요. 홍예원 씨는 원래가 그런 식이에요? 그렇게 매사가 쉽습니까?”

“……네?”

예원은 일순간 황당해졌다.

어떡하면 내 말이 저런 식으로 해석이 되는 거지.

이런 일에 뭔 책임회피까지 나오고 난리야?

“아니 저는 그, 그런 게 아니라…… 흡!”

한데, 뭐라 대꾸해보려던 그녀는 순간 깜짝 놀랐다.

남자의 건장한 몸이, 그녀에게 기습적으로 확 다가온 탓이었다.

‘뭐, 뭐야?’

대시보드와 조수석 헤드에 양손을 짚은 그는 싸늘해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원은 급격히 당황한 얼굴로 눈을 치켜떴다.

“사장님……?”

바짝 밀착된 상태에, 자동적으로 그 날이 오버랩되었다.

남자치고는 과하게 고와서 그녀를 정신없이 홀려놓았던 입술이 굳게 다물려 있었다.

예원은 순간 등줄기에 땀이 배어나는 것을 느꼈다.

이 남자가, 갑자기 왜 이러지?

“…….”

“…….”

그 상태 그대로 얼마쯤 있었을까.

그녀를 조용히 내려다보던 민혁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뭘 그렇게 놀라요. 내가 잡아먹기라도 하나?”

“…….”

“하긴. 홍예원 씨 말대로라면, 내가 지금 여기서 무슨 짓을 하든 아무 상관없다는 건데.”

당신 말대로, 본능이니까.

“나도 실수 한 번쯤은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래야 공평하지.”

“…….”

“안 그렇습니까?”

그 말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예원은 커다란 눈알을 당황스럽게 굴렸다.

사방으로 깔린 어둠 속에서, 그의 눈만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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