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시월드를 극복하는 법
2018.08.21.
“네가 드림스타 코리아를 나가겠다고?”
놀란 재하가 물었다.
“네. 여기 이 친구랑요.”
지원의 손이 옆에 선 민영의 어깨를 자랑스럽게 척 짚었다.
방심하던 민영은 흠칫 놀랐지만, 다행히 아무도 그것을 눈치 챌 수 없었다.
“나 이번에 거기 심사위원 안 하기로 했는데? 특혜 같은 거 하나도 없을 거야.”
“알아요.”
“근데?”
“……그런 거 안 바라니까,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 승부 보려고요. 그럼 아담에서도 눈여겨 봐주시지 않을까요?”
오호라. 이 놈이?
재하의 눈빛이 곧장 의외라는 듯 변했다.
낙관적이지 못한 오디션 결과를 전해줘야 했을 때는 내심 걱정스러운 마음이었다.
결과에 실망하고 방황하면 어쩌나, 곧장 다른 길을 찾겠다 하면 어쩌나 했었는데.
이런 식으로 제 나름의 돌파구를 마련하려 하다니.
어리게만 봤던 놈이 그는 그저 대견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쌈박한 뉴페이스까지 등장시켜 주시고.
“좀 뜻밖이긴 한데, 좋은 생각이네. 나쁠 거 없지.”
“…….”
“근데 그건 그렇고…….”
두 사람을 좋은 눈으로 보던 재하가 어느 순간 힐끗, 고개로 민영을 가리켰다.
“여자친구?”
“네?”
……무, 무슨!
질문의 의도를 간파한 지원은 곧바로 기겁했다.
“아뇨! 여자친구가 아니라, 여자‘사람’친구요. 저스트 친구.”
“……친구?”
“네. 친구.”
순간, 민영의 눈길이 옆에 선 지원을 휙 째렸다.
그걸 본 재하의 한쪽 눈도 찡그려졌다.
흐음. 냄새가 나는데.
자고로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랬지 않은가.
“글쎄, 아닌 거 같은데?”
“……선생님.”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단단한 지원의 얼굴에, 재하는 묘한 눈길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이거 원, 제자 무서워서 장난 한 번 치겠나.
“아, 알았어, 인마. 그렇다고 정색까지야.”
“…….”
“아무튼, 이름이 뭐지?”
두 남자의 시선이 한꺼번에 민영에게로 쏠렸다.
긴장을 겨우 숨긴 그녀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고민영이요.”
“아, 그래. 민영이. 잠깐만 이리 와볼래?”
그녀가 쭈뼛쭈뼛 앞으로 다가서자, 의자에 앉은 재하는 물끄러미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노래 따로 배워본 적 있어?”
“……아니요. 그냥 야매로…….”
“음. 그럼, 애국가 한 번 불러볼래? 가사는 말 안 해도 알 거고.”
“애국가요?”
뜬금없이 웬 애국가? 팝송이나 가요도 아니고.
그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지만, 민영은 속는 셈치고 천천히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학교 조회시간마다 부르던 것이라 딱히 헷갈릴 것도 없는 노래.
그렇게 그녀가 애국가 1절을 무사히 완창하는 사이, 재하는 종이와 펜을 들어 뭔가를 체크하고 있었다.
“됐어. 그쯤해도 돼.”
“……네.”
잠시 종이를 들여다보던 재하는 마침내 분석을 끝낸 듯 말했다.
“목소리가 맑고 곱네. 고음도 청아하고 부드럽게 잘 내고. 음역대가 높은 편이라 쟤랑 잘 맞겠어. 쟤 완전 고음불가거든.”
“……?”
강 건너 불구경 중 뜬금없이 뼈를 얻어맞은 지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한편, 재하는 피식 웃는 민영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 이상하게도, 처음 본 여자애의 얼굴이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근데…… 우리 혹시 어디서 본 적 있나? 얼굴이 되게 낯익은데.”
“저요?”
민영의 표정이 금세 샐쭉해졌다.
“……아니요. 오늘 처음 뵙는데요.”
“그래? 혹시 내 콘서트 와본 건 아니고?”
“독고사준 씨 콘서트만 가봤어요.”
윽. 왜 하필 그 자식 콘서트를.
숙명의 라이벌이자 개자식인 사준을 떠올린 재하는 민망함을 숨기며 헛기침을 했다.
그나저나 희한하네. 분명히 익숙한데. 왜지……?
“흠흠. 아무튼, 둘이 잘 준비해봐. 힘든 거 있으면 그때그때 말하고.”
“네.”
이걸로 1차 검증은 일단 되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선곡과 연습뿐.
굳건한 눈빛이 된 지원과 민영은 서로 야심찬 시선을 교환했다.
그런데 그때, 재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야. 근데 이제 슬슬 말할 때도 되지 않았냐.”
“뭘요?”
“너희 누나 말야. 오디션 프로까지 나가면서, 끝까지 누나한테 숨길 수는 없잖아.”
“……아, 그렇죠.”
한순간, 지원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런 지원의 사정을 뻔히 알고 있는 재하는 힘내라는 듯 그의 어깨를 쥐었다.
“자고로 매도 일찍 맞는 게 낫다고, 괜히 질질 끌지 말고 빨리 말해. 정 뭣하면 나도 있잖아. 정재하가 막 옆에서 바람 넣었다고 해.”
“……아니에요.”
참스승의 시답잖은 농담에 지원은 그제야 픽 웃었다.
이제 진짜 말을 하긴 해야 하는데, 언제가 좋을까.
* * *
“사모님, 오셨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다시 찾은 곳이었다.
지난번처럼 예의 있게 차려입고 온 예원은 소파에 앉은 라희를 향해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셨어요, 어머님.”
“그래. 어서 와라. 오랜만에 보는구나.”
“그간…… 잘 지내셨어요?”
라희를 내려다보는 예원의 얼굴에 작은 불길이 일었다.
지난번 그녀는 미처 몰랐었다.
저 여자가…… 그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내 추억들을 산산조각 낸 사람들이거든.’
‘…….’
‘우리 엄마, 동생…… 그리고 나까지.’
그날 밤, 그녀의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버린 남자의 쓸쓸한 목소리.
더 이상 상종할 일은 없을 줄 알고 까맣게 잊고 지냈는데, 문제의 ‘어머니’라는 여자는 다시금 저를 친히 집으로 부른 것이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 같으니라고.’
자식 인생을 그렇게 망쳐놓고도 시부모 대접은 받고 싶은 걸까.
새삼 모든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우리야 뭐 늘 똑같지. 와서 앉아. 다리 아프겠다.”
“……예.”
차분히 식은 얼굴이 된 예원이 지난번과 똑같은 자리에 다소곳하게 착석했다.
“그래, 결혼생활은 어떠니?”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뭐, 따로 어렵거나 내가 도와줄 건 없고?”
“네.”
흐음.
가증스러울 정도로 상냥하게 굴던 지난번과 달리, 라희는 불편한 심기를 여실히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민혁이 걔가 워낙 유별나게 구는 바람에 내 따로 연락은 안 했다만. 그래도, 결혼까지 시킨 며느리를 이제야 보는 게 솔직히 달갑지는 않아.”
“…….”
“하지만 뭐 어쩌겠니. 그래도 아들 내왼데, 우리가 져주는 수밖에.”
‘쳇. 누가 누굴 상대로 져 준다는 거야.’
삐딱한 생각에 예원의 입가가 불편하게 씰룩거렸다.
그런데, 잠시 뒤 여자에게선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실은, 내일이 민혁 아버지 생신이야.”
“네? 생신이요?”
“그래. 민혁이가 얘기 안 해주든?”
“…….”
갑작스런 소식을 받아든 예원의 눈이 당황스럽게 깜빡거렸다.
생신이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이번은 처음이라 어쩔 수 없었다지만, 이젠 너도 엄연히 우리 집의 일원이 되었는데. 그런 날짜 같은 건 기억하고 있어야 되지 않겠니.”
“…….”
“내일은 아마 민혁이도 올 거다. 다른 날은 몰라도 생신은 챙겨야 자식이지. 그래서 말인데…….”
멍해진 그녀를 슬쩍 쳐다보던 라희가 넌지시 물었다.
“이번 생신상은, 새아기 네가 직접 차려보는 게 어떻겠니?”
잠깐만. 저게 무슨 소리?
“네? 제, 제가…… 직접이요?”
“응. 뭐 따로 사람을 부릴 수도 있는데…… 이참에 네 솜씨도 한 번 볼 겸, 좋은 기회이지 않니. 말은 안 하지만 민혁 아버지도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야. 이참에 점수 좀 따라고.”
“…….”
“어때. 할 수 있겠니?”
물론, 남은 1년을 순탄하게 보내기 위해서는 이 사람들에게도 잘 보이는 편이 좋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정말, 제가 해도 되는 건가요?”
“그럼, 며느린데. 해선 안 될 이유가 없잖니.”
선심이라도 쓰듯 웃던 라희는 마침 생각난 듯 덧붙였다.
“아참. 난 내일 중요한 모임이 있어서 아침 일찍 나가 봐야 한단다. 그리고 일해주시는 아주머니도 내일 일이 있으셔서 출근을 못 하실 거야.”
“……그, 그럼……?”
저는요. 혼자서 그걸 다 어떻게 하라고요?
잔뜩 당황한 예원의 눈동자가 팽창했다.
“호호, 너무 부담 가질 거 없어. 거창하게 차릴 생각 말고, 그냥 네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돼. 어차피 우리도 다 감안할 테니까.”
“…….”
“참. 내일은 아무래도 공식적인 첫 인사니까 옷차림도 좀 신경 쓰고 오면 좋겠다. 이왕이면 얌전하고 예쁜 걸로. 알았지?”
……이 아줌마가 지금 장난하나!
허. 황당해진 예원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살짝 흘렸다.
갑자기 분노와 오기가 솟구쳤다. 이건 뭐 저를 대놓고 엿 먹이겠단 것이 아닌가.
감히 이 홍예원을 살살 건드리다니.
나랑 지금 해보자는 거야? 어?
“할 수 있겠지?”
묘한 미소를 띤 라희가 떠보듯 재차 물었다.
그렇게 잠시 뒤.
예원은 끓어오르는 감정들을 애써 갈무리했다.
그리고 백팔십도 바뀐, 매우 결연한 눈빛으로 말했다.
“네, 할게요. 맡겨 주세요.”
* * *
다음 날.
민혁은 오랜만에 에덴을 찾았다.
며칠 동안 코빼기도 보지 못한 그녀를 드디어 제 발로 찾아 나서기 위함이었다.
‘스케줄표상으론 오늘 근무랬지.’
분명히,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왔다.
그런데…….
“사장님? 안녕하세요.”
매장으로 들어선 그의 눈앞에 보인 건, 홍예원이 아닌 주가윤 뿐이었다.
“……어, 주 매니저. 며칠 만이네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당혹스러움을 감춘 민혁이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원래 오늘 근무입니까? 오늘 홍예원 씨가 근무하는 날이었던 것 같은데.”
그 한 마디에, 웃는 낯이던 여자의 표정은 싹 돌변했다.
“아…… 네. 원래는 그랬는데, 개인적인 사정이 있으시다고 해서요. 제가 땜빵 중이에요.”
“개인적인 사정, 이요?”
갑자기 무슨 일일까. 나한테는 말도 없이.
의아해진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였다.
“저, 근데 사장님. 혹시 시간 있으시면, 잠깐 사무실에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예?”
“…….”
“아, 예. 그러죠.”
별 생각 없던 그는 흔쾌히 바 안쪽 사무실로 들어갔고, 그 뒤를 가윤이 곧장 뒤따랐다.
“무슨 얘깁니까?”
혹여 알바생에게 들리기라도 할까.
문을 조심스레 닫은 여자는 잠시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다른 건 아니고, 점장님 말인데요.”
“…….”
“사장님께 이런 말씀드리긴 좀 뭐하지만…… 약간, 너무하신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요.”
너무하다, 라.
민혁의 눈초리가 대번 가늘어졌다.
“……어떤 부분에서 말입니까?”
여자는 휴,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오늘 같은 경우엔, 하도 간곡히 부탁하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휴무를 바꿔드리긴 했는데요. 사실 저희가 휴무나 휴가가 그리 많은 게 아니잖아요. 주에 한두 번 있는 휴무를 이렇게 개인사정 때문에 막 바꾸시니까…… 제가 좀, 그래서요.”
“…….”
“그래도 명색이 동료인데, 바꿔달라는 걸 싫다고 말씀드릴 순 없는 거고…….”
그에게선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의 눈치를 보는 듯하던 가윤은 매우 움츠러든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이런 것까지 말씀드리고 싶진 않았지만…… 점장님이 요즘 카페 업무에 좀 소홀해지신 것 같아요. 두 분 다 원체 바쁘신 건 아는데, 그래도 사장님이 신경을 못 쓰시면 점장님이 더더욱 신경 쓰셔야 한다고 생각해요.”
“…….”
“점장님만 탓하려는 건 아니고요……. 그래도 주의를 좀 주셨으면 좋겠어서 드리는 말이에요. 제가 직접 말씀드리고 싶지만, 면전에선 통 말이 안 떨어져서.”
“…….”
“사장님이 좀 전해주실 수 있으세요?”
그렇게 잠시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민혁은 곧 입을 열었다.
“……예, 그렇게 하죠.”
그제야 가윤은 안심한 얼굴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잠시만요.”
그런데 돌아서려는 가윤을, 민혁은 다시금 잡아 세웠다.
“네?”
머뭇거리던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미안합니다.”
“네? 뭐가…….”
생뚱맞은 사과에 가윤은 어리둥절해졌다.
“홍예원 씨를 두둔하려는 건 아니지만, 카페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명백히 사장인 내 잘못입니다. 그러니 내가 사과해야죠. 앞으로도 혹시 일하다가 불편한 점 있거나 하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최대한으로 시정하겠습니다.”
“…….”
“어쨌든, 다시 한 번 미안합니다.”
사장이 대신 사과를 할 줄이야.
제가 되레 민망해지는 사과에, 한 방 얻어맞은 표정이 된 가윤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그리고.”
망설이던 그가 쐐기를 박듯 덧붙였다.
“그 사람이 말해서 못 알아들을 사람도 아니고, 그리 어려운 사람도 아니니까. 개인적인 불만은 다음부턴 직접 말해도 될 겁니다. 굳이 나여서가 아니라…… 누군갈 거쳐서 전달되는 말은 자칫 오해의 소지를 낳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 말하는 남자는 무척이나 냉랭한 얼굴이었다.
마치, 그에게 이런 말이 전해졌다는 사실에 불쾌한 것처럼.
“……그럼, 이만 나가서 일 보세요.”
해서, 가윤은 더 이상의 첨언을 하지 못했다.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꾸벅한 그녀가 바깥으로 나갔다.
그렇게 닫힌 문을, 민혁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사실, 직원으로서는 충분히 품을 수 있는 불만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카페 일에 소홀했던 것도 맞거니와, 예원 또한 아직 점장직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미숙한 점이 많았으니까.
숨기지 않고 말해준 것을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것이 맞는데.
그런데.
‘그 여자’를 향한 뒷담화 아닌 뒷담화를 듣고 있자니…… 마음이 왠지 편치 않았다.
사장으로서 이런 일엔 확실한 중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왔건만 한순간 소용이 없어졌다.
방금, 저도 모르게 그녀를 옹호한 꼴이 되어버렸지 않은가.
다름 아닌 직원 앞에서.
“……편들어주려던 건 아니었는데.”
젠장. 되는 일이 없구만.
혼자 남은 민혁은 저도 모르게 한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요즘 따라 그는 부쩍, 스스로가 어쩐지 낯설게 느껴지고 있었다.
* * *
그나저나 그 여잔 없던 휴무도 만들어가면서 대체 어딜 간 것일까.
그래도 부부 사인데, 어딜 가면 간다고 말은 해주지.
“휴우…….”
운전대를 쥔 그가 한숨을 토해냈다.
그렇잖아도 어쩔 수 없이 본가를 가야 하는 날이라 기분이 좋지 않은데, 늘 보이던 여자가 찾으려 해도 안 보이니 초조함이 더했다.
그렇다고 무작정 전화를 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놈의 ‘키스 사건’ 탓에.
‘안 되겠어. 최대한 얼른 집에 가 봐야지.’
뭐, 어쩌면 차라리 잘 된 걸 수도 있다.
그다지 중요한 날도 아닌데다가, 또 괜히 쓸데없는 신경을 쏟게 만들기는 싫었으니까.
그 또한 최소한의 도리는 해야겠기에 가는 것뿐 여차하면 바로 빠져나올 작정이었다.
“어, 민혁이 왔구나.”
그런데 하필이면, 들어가기도 전에 대문 앞에서 떡 마주쳐버렸다.
문 앞에 다정하게 서 있는 태균과 라희를 보며, 민혁은 입술을 일자로 만들었다.
“안녕하셨어요. ……오랜만이네, 형.”
“어, 왔냐?”
부부의 옆으로는 왜소한 체구의 남자가 서 있었다.
오랜만에 귀국한 것으로 보이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었던 그의 이복형이었다.
“간만에 보니 얼굴이 폈네. 결혼이 좋기는 좋은가 봐, 현민혁?”
그러는 형은 양아치 본새가 여전하네.
그는 대답 없이 멋쩍게 웃었다.
아무래도,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여자의 부재를 미리 알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저, 오늘 제 아내는 잠시…….”
한데 그런 그를 라희가 먼저 잘라냈다.
“어, 새아가는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얼른 들어가자.”
“……네?”
기다린다니. 그게 무슨?
“뭐하니. 얼른 들어가자니까.”
좀처럼 상황파악이 되질 않았다.
이상하게 들뜬 것 같은 라희의 성화에, 민혁은 거의 등 떠밀리다시피 집 안으로 입성했다.
허나 기껏 들어선 집 안은 사방이 어두웠다.
“아니, 얘가 밥 하다 말고 어딜 갔나?”
“……밥이라뇨?”
그러고 보니, 주방 쪽에서만 가느다란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네 사람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무렵.
별안간 거실의 불이 탁, 켜졌다.
갑작스런 빛에 적응하기 위해 눈을 끔뻑거리던 민혁은, 이내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예원 씨?!”
은은한 노란색 색동저고리에 다홍치마.
곱디고운 새색시 한복을 멋스럽게 차려 입은 예원이, 주방 쪽에서 사뿐사뿐 걸어 나오고 있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어서들 오세요. 생각보다 조금 늦으셨네요?”
특유의 눈웃음과 함께, 고운 입꼬리가 빙긋 호선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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