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회식자리에서 생긴 일
2018.07.10.
그날 저녁.
카페 근처의 한산한 고깃집에서는 에덴 식구들의 회식이 한창이었다.
“카페 에덴의 무궁한 번창과, ‘개진상’ 손님의 감소를, 위하여!”
“위하여!”
하연의 건배사와 함께, 모두가 너나 할 것 없이 소주 한 잔을 원샷했다.
아침의 일로 괜스레 기분이 좋지 않았던 예원 또한 얼굴을 풀고 모처럼만의 술자리를 즐겼다.
“크으. 그러고 보니까 회식도 되게 오랜만이다. 안 그래?”
“맞아요. 윤 사장님 계실 땐 꽤 자주 했던 것 같은데.”
“……그러게 말이야.”
그 말에 문득 생각이 났다.
교수님은…… 잘 지내고 계시려나.
‘내 결혼식엔 무조건 교수님이 계실 줄 알았는데.’
여전히 미국에 거주중이라는 윤정한 교수는 아들의 피치 못할 사고로 인해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전해왔었다.
조금 아쉽기도 했지만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교수님이 계셨다면, 괜스레 그를 의식한 나머지 연기가 부자연스러워졌을 수도 있으니까.
“그나저나, 사장님은 언제 오신대요?”
“민혁 씨? 글쎄. 좀 늦을 것 같은데.”
오후에 스케줄이 있다던 그는 아마 늦은 밤쯤에야 참석할 수 있을 거라고 했었다.
‘쳇, 오든지 말든지. 그냥 오지 말고 곧장 집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막상 질문을 한 채린은 웬일인지 놀란 눈치였다.
“우와, 그렇게 부르시는 거 처음 봐요.”
“응? 뭐가?”
“‘민혁 씨’라고 하시는 거요. 저희 앞에선 맨날 ‘사장님’이라고만 하셨잖아요.”
“……아, 내가 그랬나?”
하긴. 호칭 문제에 있어선 유독 철저했던 그녀였다.
부부 사이랍시고 괜히 카페 내에 위화감을 조성하기는 싫었으니까. 잘못했다간 점장으로서의 위엄이나, 카페의 기강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그런데 요즘은 ‘사장님’이란 호칭보다 ‘민혁 씨’라는 호칭이 좀 더 많이 튀어나오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어쩌면 결혼을 한 이후, 그와 단둘이 있는 시간이 많아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야 집에서까지 ‘사장님’이라 깍듯하게 호칭하진 않으니까. 습관처럼 입에 붙어버린 거지.
“근데 말이 나온 김에 말인데요 점장님……. 사장님, 평소엔 어떠세요?”
“어? 뭐가?”
“아니, 궁금해서요.”
채린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솔직히, 저희 앞에선 사장님 좀 무뚝뚝하시잖아요. 원래 그런 성격이신 건 아는데 점장님 앞에서도 그러시나 해서요. 점장님 앞에선 좀 다르시죠. 그쵸?”
“……어?”
“맞아! 사장님 좀 츤데레 스타일이실 것 같아요. 막, 안 그런 척 애정표현도 자주 하고.”
대충 얼버무리려 했으나, 잠자코 있던 예빈까지 맞장구를 치고 나오니 그러기는 힘들어 보였다.
예원은 새삼 쑥스러운 듯 웃었다.
“어…… 뭐, 그냥…….”
그런데 그때.
그런 예원의 머릿속에 별안간 그의 목소리가 재생되었다.
[정 그럼 홍예원 씨도 에덴 사람들 앞에서 지어내요. 천하의 현민혁이 나한테 아주 사족을 못 쓴다고.]
언젠가 그가 농담조로 했던 말.
그땐 오히려 그의 수에 말리는 것 같아 화를 냈었는데, 다시 생각하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오호, 가만있어 봐.
‘이거, 그 인간 엿 먹이기 딱 좋잖아?’
내가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지?
유레카. 예원의 얼굴은 급격히 밝아졌다.
갑작스레 엔돌핀이 마구마구 샘솟는 기분이었다.
“어! 점장님 얼굴 빨개지셨다. 뭐예요, 생각만 해도 좋으신 거예요?”
응, 좋아.
그 인간 골탕 먹일 생각을 하니 갑자기 삶이 아주 즐거워졌어.
“아니 뭐……. 솔직히 말하면, 남들 앞에서랑은 좀 다르긴 하지. 보기보다 되게 로맨틱한 편이거든, 그 남자.”
“우와!”
“헐, 정말요?”
후후. 미끼를 아주 콱 물었구만.
예원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럼. 잊을 만하면 자꾸 꽃을 사다 줘서 큰일이야. 요즘은 은근슬쩍 안 어울리게 애교도 부리고. 심지어는 나 치킨 좋아한다니까 치킨도 직접 튀겨주겠다는 거 있지.”
“헐, 대박. 완전 참사랑!”
“그리고요, 그리고요?”
“나 일 하느라 힘들다고 집안일에는 손도 못 대게 해. 내가 손도 대기 전에 화장실 청소까지 싹 다 해버리니까 어쩔 수 없지 뭐. 어찌나 빡빡 닦아대는지 파리가 미끄럼틀 타다 실족사 하겠더라니까.”
“……와. 사장님 완전 공처가셨네요? 전 그것도 모르고.”
“뭐, 자기 말론 공처가가 아니라 애처가라니까. 그렇게 쳐줘야지?”
못 이긴 척 할 말은 다 해버린 예원이 숨죽인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나 이런 얘기한 거 비밀이니까, 그 사람 앞에서 괜히 놀리고 그러지 마. 알았지? 괜히 자존심 상해할라.”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지퍼 꽉 닫고 있을게요.”
말은 저렇게 해도, 분명 티를 안 내려야 안 낼 수가 없을 것이다.
이유 모를 시선에 곤란해 할 그를 떠올린 예원은 참기름 한 병을 삼킨 듯 고소함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흥. 너도 한 번 당해봐라, 이 자식아.
“암튼, 빨리 부지런히들 먹어. 고기 다 타겠다.”
“네!”
바로 그때, 옆에서 잠자코 있던 가윤이 은근슬쩍 그녀를 불렀다.
“근데 점장님.”
“……네?”
“하연 매니저님한테서 들었는데, 점장님이 술을 그렇게 잘 드신다면서요?”
어라? 갑자기 웬.
예원은 순간 얼떨떨한 표정이 되었지만, 하연과 알바들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나같이 동조하고 나섰다.
“네! 완전!”
“우리 점장님 완전 술짱이에요!”
“야. 잘 마시면 잘 마시는 거지 모양 안 나게 술짱이 뭐야, 술짱이.”
어이없어진 예원이 피식 웃는 와중에도 가윤은 진지한 표정이었다.
“저 그러면…… 제가 소맥 한 잔 말아드릴까요? 그 얘기 듣고 나서, 나중에 점장님이랑 술 마실 때 꼭 한 잔 드려야지, 했었거든요.”
“와. 가윤 매니저님도 술 좀 하시나 보네요?”
“하하, 조금이요.”
소맥?
평소 소주를 주로 파는 예원이 딱히 즐기는 쪽은 아니었지만, 굳이 준다는 걸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소맥 몇 잔 정도야 그녀에겐 음료수와 다를 바가 없기도 하고. 또, 이 기회에 새 매니저와 친해질 수도 있으니까.
“아, 네! 그래주시면 고맙죠. 대신, 맛있게 말아주셔야 돼요.”
“그럼요.”
씩 웃은 가윤은 이내 귀신같은 손놀림으로 소맥을 뚝딱 제조했다.
예원은 그것을 순순히 받아든 뒤 쭉 들이마셨다.
“……와, 완전 부드럽다.”
“괜찮으세요?”
“네. 맛있는데요?”
이제 보니 커피만 잘 만드는 게 아니었구만?
한순간 기분이 좋아진 그녀가 흡족하게 웃었다.
왠지 모르게 붕붕 뜨는 기분.
역시, 기분전환엔 이 술만 한 것이 없다.
그간 남자로 인해 쌓여 있던 스트레스가 휙 날아가 버리는 느낌이었다.
“자, 이번엔 매니저님도 한 잔 받으세요.”
“아, 네. 그럼.”
눈에 띄게 발랄해진 예원과 함께, 화기애애한 술자리는 그렇게 무르익어갔다.
* * *
그리고 그로부터 약 두 시간 뒤.
“…….”
무르익다 못해 발갛게 익어버린 예원을 내려다본 민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이 사람, 언제부터 이랬습니까?”
“한, 한 시간 전부터요…….”
“음냐…… #$%…….”
바닥에 대자로 뻗은 채, 정체 모를 언어를 잠꼬대처럼 중얼거리고 있는 여자의 꼴은 정말 가관이었다.
충동적으로 휴대폰을 꺼내들려던 그가 이내 손을 거두었다.
양옆에 이렇게 수많은 구경꾼들만 없었어도, 당장 사진 백 장은 찍어두는 건데.
“대체 뭘 얼마나 마신 거예요?”
“그냥, 소주랑 맥주랑 이것저것요. 평소에 마시던 양이랑 별로 다른 것도 없으셨는데. 오늘따라 유독 이러시네요.”
“저도 점장님 취하신 건 처음 봤어요…….”
술 가지고 그렇게 잘난 척을 해대더니만, 혼자서 아주 찬란한 흑역사를 남기셨군.
여전히 세상모른 채 잠들어있는 여자를 내려다보던 민혁은 짜증스럽게 입술을 물었다.
“미안하지만, 오늘 회식은 여기까지 해야겠네요.”
행여 원망이나 하지 않기를. 이게 다 당신 때문이라고.
신속히 몸을 숙인 그가 예원의 어깨를 잡고 살살 흔들었다.
“홍예원 씨. 홍예원 씨!”
그렇게 몇 번의 흔들림 끝에야, 마침내 그녀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떠졌다.
“홍예원 씨. 정신이 좀 들어요?”
느릿하게 눈을 끔뻑끔뻑해대는 게 꼭 거북이 같다.
내내 센 척만 하던 여자가 한껏 흐트러진 모습을 하고 있는 게 꽤나 귀여워서, 그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
그런데 잠시 뒤.
그런 그를 올려다보던 여자의 입에선 이내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민혁이?”
“……예?”
잠깐. 내가 민혁……이는 맞는데.
당신이 찾는 민혁이는 내가 아닌 것 같은데.
“민ㅎ……. 민혁아!”
“호, 홍예원 씨, 잠깐만 이것 좀…….”
그때였다.
퍽!
그를 붙잡고 늘어지던 여자가 돌연 가공할 힘으로 그의 품에 안긴 것은.
그는 얼떨결에 팔을 감아 그녀의 등을 받쳐 안았다.
여자의 달콤한 향기가 술 냄새와 섞여 훅 끼쳐오고,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민혁아…… 흑흑, 민혁아…….”
“…….”
“왜 이제 왔어…… 흑흑,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오 마이 갓.
여자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본 그는 금세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뒤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야 안 봐도 뻔했다.
이게 대체 뭔 일인가, 동물원에서 코끼리 똥 싸는 모습을 구경하는 얼굴들을 하고 있겠지.
‘젠장.’
당혹감에 열기가 머리끝까지 뻗쳤다.
민혁은 어떻게든 여자를 떼어내려 애썼다.
“히히…… 민혁아…….”
하지만 그럴수록 여자는 오히려 더 달라붙기만 할 뿐이었다.
가련하게 눈물지었던 게 언제냐는 듯, 이젠 또 실실 웃고 있다.
거기다 한 술 더 떠,
─쪽! 쪽!
“……!”
그의 볼에 거침없는 뽀뽀세례까지!
“…….”
“…….”
잠깐 눈을 돌려 보니, 죄다 하나같이 ‘역시나…….’ 하고 있는 것 같은 표정들이다.
졸지에 볼에 선명한 키스자국들이 찍힌 채로, 그는 그저 허무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 하하하, 하하…….”
젠장! 이 여자가 정말!
* * *
“읏차!”
여자의 몸이 침대 위로 휙 나동그라졌다.
민혁은 그제야 몸을 쭉 펴고 숨을 고를 수 있었다.
“후.”
치킨을 그렇게 먹어대는 것치고는 보기보다 가볍네.
잠시 허탈한 웃음을 짓던 그는 문득 뒷짐을 진 채 오랜만에 들어온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짐을 들여오기 전 밋밋하기만 하던 방은, 어느 새 여자의 취향대로 나름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사진들이 다양하게 많이 걸려 있었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여자의 평소 취향이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물인 듯했다.
그렇게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던 그의 시선이, 어느새 침대 옆에 있는 협탁으로 향했다.
거기엔 또 하나의 사진이 작은 액자에 끼워진 채로 있었다.
그는 슬쩍 액자를 집어 들고 유심히 살펴보았다.
갓난아기를 품에 안은 부부가 초등학생 정도의 여자애를 앞에 두고 찍은 사진.
아마도 그녀의 하나뿐인 가족사진인 모양이었다.
사진 속 여자아이의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그는 그렇게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
문득, 묘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그 아이와는 나이차도 꽤 나고, 닮은 구석도 없는 여자일 텐데.
이상하게 이 여자가 가끔은 그 아이와 닮은 것 같단 느낌이 종종 들었다.
그 아일 다시 찾게 되면 꼭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 것 같은.
어쩌면 이 여잘 은근히 챙겨주게 되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아이와 닮아서. 자꾸만 그 아이를 생각나게 하니까.
그는 요사이 제 마음속에서 일고 있는 모든 감정들을 다 그렇게 단정하기로 했다.
하기야, 그것 말고는 이 감정을 달리 설명할 길도 없었다.
“…….”
상대적으로 좀 울보인 것 같긴 하지만, 외로워도 슬퍼도 늘 씩씩한 만화 속 여주인공 같은 여자.
그의 눈길이 잠든 여자의 모습을 올곧이 내려다보았다.
으레 그래왔듯 살짝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당신의 테리우스가 되진 못해도, 안소니 정돈 돼 줄 수 있겠지.’
뭐 그 정돈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아직까지도 여자의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은 왼쪽 볼을 저도 모르게 쓰다듬은 그는 이내 피식 웃고는, 액자를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칭얼대는 여자의 위로 이불을 덮어준 뒤, 나직하게 속삭였다.
“……잘 자, 캔디.”
부디 좋은 꿈꾸고.
* * *
약 일주일 후.
“오늘은 그래도 네 덕에 빨리 끝냈다. 그치?”
“대충 그런 거 같네.”
크리스마스를 1시간 정도 남겨둔 시각이었다.
마침내 마지막 제기를 올려놓은 예원이 허리를 짚고 일어나며 웃었다.
하루 종일 전을 부쳐댄 집엔 기름 냄새가 진동을 했다.
이 많은 양을 이모는 도대체 혼자 어떻게 하려고 한 걸까.
이쯤 되면 그에게서 휴가를 받은 게 다행인 건가 싶을 정도였다.
“그러게 매번 제사음식을 왜 이렇게 많이 만드냐? 입도 별로 없는데.”
“으이그. 많이 만들어서 나눠주고 그러는 게 또 맛이지. 먹을 사람 없다고 요만큼만 만들면 뭔 재미야?”
“……제사상 차리는데 뭔 재미까지 찾아.”
사실은 예원도 알고 있었다.
식구 셋밖에 없는 집에서 이모가 제사 음식을 이렇게 많이 만드는 건, 친척 하나 찾아오지 않는 쓸쓸한 제사가 미안하고 싫어서라는 걸.
모든 준비가 된 제사상, 그리고 그 가운데 놓인 엄마아빠의 영정을 보며 예원은 설핏 웃었다.
“이모.”
“응?”
“난 곧 있음 서른인데. 울 엄마아빤 아직도 청춘이네.”
예원의 시선을 따라 은아의 시선이 영정사진에 가 닿았다.
그녀의 눈가 또한 예원처럼 애틋하게 이지러졌다.
“그러게. 네 엄만 나이 들어도 예뻤을 텐데. 한 번 보고 싶네? 어떻게 늙었을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이 그리움은 옅어지질 않는다.
오늘도 주책맞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예원은 쓸데없는 우스갯소리를 꺼냈다.
“저~기서도, 늙기는 늙을까?”
가느다란 그녀의 손가락이 위쪽을 가리켰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눈치 챈 듯, 은아도 픽 웃으며 답했다.
“글쎄. 저기도 사람 사는 덴데 늙겠지. 전생에 공덕을 쌓았으면 안 늙을 수도 있을라나.”
‘그랬으면 좋겠네. 우리 엄마아빤, 평생 천년만년 늙지 말고 청춘이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또 상념에 젖어들 뻔 했다.
예원은 문득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곤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암튼, 얼른 시작하자. 이제 12시도 거의 다 됐는데.”
“응? 응. 그래.”
그런데, 대답을 마친 이모는 앉은 상태 그대로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원래 같았으면 제일 먼저 부엌으로 달려갔을 사람인데 웬일인지.
근데 저 모양샌 뭔가…… 꼭…….
“뭐야. 누구 기다려?”
“어?”
“누구 기다리냐고.”
“아, 아니~ 기다리긴.”
“근데 왜 이러고 있어. 빨리 하자. 얼른 하고 치워야지.”
“아니, 얘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보채……. 잠시만 좀 있어봐. 아직 12시 안 됐잖아.”
참내, 언제부터 정시를 그렇게 따졌다고…….
자신을 힐끔 올려다보는 이모는 어딘가 초조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한 예원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바로 그때였다.
“어! 왔다.”
바깥에서 의문스런 인기척이 들려왔고, 예원은 금세 어리둥절해졌다.
“오긴 누가 와? 누구 불렀어?”
“지원아, 네가 얼른 나가 봐.”
“네.”
순식간에 외톨이가 된 예원은 황당해졌다.
“아니, 갑자기 누가 온다 그러는 거냐고?”
생전 안 오던 친척들이 올해 갑자기 올 리도 없고.
“누군데. 왜 나만 몰라?”
“글쎄 가만히 좀 있어봐.”
뭐야, 이거.
예원은 잔뜩 의문이 섞인 얼굴로 현관문과 이모를 번갈아 보았다.
그렇게 몇 분쯤 지났을까.
지원의 등 뒤로 들어온 사람은, 꼴 보기 싫은 친척들 중 하나가 아니었다.
검정색 코트. 깔끔하게 넘긴 앞머리와 훤히 드러난 이마.
흡사 귀공자처럼 너무나 잘빠진 남자가 하나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모님.”
“어, 그래. 어서 와! 춥지?”
“……!”
그가 누군지를 확인한 예원은 저도 모르게 입을 딱 벌렸다.
“……미, 민혁 씨?”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