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제주도의 푸른 낮
2018.06.29.
“사, 사장……님?”
삽시간에 토끼눈이 된 예원은 여전히, 모델들이나 입을 것 같은 섹시 브라를 활짝 펼쳐든 채 부동자세가 되어 있었다.
하여간 선물이랍시고 덥석 받아 챙기기로 한 게 잘못이었다.
김지영 이게 진짜!
“아, 이, 이건……. 그러니까…….”
입술아. 넌 먹기 위해서만 달린 게 아니잖니.
말을 좀 해, 말을! 네 본 임무를 다하라고!
“하…… 하하하…….”
예원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뒤 황급히 브라를 캐리어 안에 도로 감춰 넣었다.
언뜻 본 남자는 어느 새 시선을 다른 곳에 둔 채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헛기침을 하는 모양이 딱 봐도 무척 민망해하는 중인 듯했다.
‘으…… 이게 뭔 개쪽이냐.’
마침내 캐리어의 뚜껑을 확 덮은 그녀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순간, 그의 입술은 그제야 열렸다.
“……홍예원 씨.”
“네, 네?”
“……난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예원의 눈이 의외라는 듯 변했다.
“네?”
“난 못 봤다고요, 아무것도.”
“…….”
“그러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뭐야, 저 배려 가득한 멘트는?
그녀는 되레 놀랐다.
“저 근데…… 제 방엔 왜 오셨어요?”
아. 그가 그제야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혹시…… 말입니다.”
“…….”
“혹시 어젯밤에…… 내가 무슨 실수 한 거 있습니까?”
저건 또 뭔 소리래.
예원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실수라뇨?”
“그러니까, 약에 취해 헛소릴 했다거나…… 뭐 그런 거요.”
“아뇨? 그런 건 없었는데요.”
“……정말입니까?”
“그럼요. 제가 그런 거짓말을 왜 하겠어요.”
사실이었다.
한밤중에 열이 들끓어서 사람을 놀라게 한 것을 빼면, 그가 따로 실수한 점은 없었으니까.
“아…… 네.”
“…….”
“아무튼 고맙습니다. 많이 당황스러웠을 텐데.”
남자는 어쩐지 눈에 띄게 안도한 얼굴이었다.
“뭐…… 아니에요.”
덕분에 좋은 구경도 했으니까 쌤쌤으로 치죠, 뭐.
저도 모르게 그의 몸 쪽으로 향하려는 시선을 그녀는 재빨리 막았다.
“근데, 저 지금 좀 씻을 거라서. 얘기는 좀 이따 하면 안 될까요?”
“아, 네. 그래요.”
그런데, 고개를 끄덕거린 뒤 제 방으로 가는가 싶던 그가 다시금 그녀를 돌아보았다.
“뭐 먹고 싶은 건 없습니까?”
“네?”
“어제저녁부터 내내 굶었잖아요. 내가 배고픈데, 홍예원 씨만 안 배고플 린 없을 테고.”
“…….”
예원은 왠지 모르게 홀쭉해진 듯한 제 배를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꼬르륵 소리가 뭉근하게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내가 살게요, 점심. 지난밤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
“이따 나랑 같이 좀 나갑시다.”
그가 씩 웃었다.
* * *
[야, 야. 어땠어? 완전 죽이지? 내가 특별히 젤 섹시한 걸로 골라 보냈는데!]
응, 죽이더라.
덕분에 내가 하마터면 수치사로 죽을 뻔 했지 뭐니, 친구야.
“네가 정녕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지? 그딴 걸 선물이라고 캐리어에 넣어놔?”
[아, 왜! 예쁘잖아. 첫날밤에 제일 중요한 걸 선물해줬더니 왜 이래, 반응이?]
이건 아주 끝까지 지 잘했대지.
열이 받아 한껏 삐죽이고 있는 와중에, 반대편에서 오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아, 몰라 끊어! 나중에 통화해.”
예원이 서둘러 폰을 내리자, 그가 아는 척을 했다.
“그, 친구 분입니까. 지영 씨?”
“아, 네. 맞아요.”
“많이 친한 사인가 보죠? 통화 되게 자주 하는 것 같던데.”
일전에 가짜 데이트를 할 때에도 몇 번 통화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 터였다.
“저랑 제일 친한 친구예요. 대학 동기이기도 하고.”
“성향이 영 반대 같던데 의외네요.”
“원래 반대가 더 끌리는 법이라잖아요.”
하지만 당신과 나는 절대 그럴 일이 없겠지.
예원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실은 걔, 민혁 씨 열혈팬이에요. 옛날에 스톰 시절 때부터 좋아했었대요.”
“아, 그래요?”
그렇잖아도 식장에서의 반응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던 그였다.
민혁은 순간 저도 모르게 물었다.
“그럼, 홍예원 씨는요.”
“……저요? 전…… 아무 팬도 아니었는데요?”
어리둥절해하던 그녀가 아, 하고 퍼뜩 생각난 듯 말했다.
“정재하 씨는 나름 팬이었다. 그, 어제 축가 해주신 분이요.”
“……걔 팬이었다고요?”
“네!”
예원의 눈빛이 일순 꿈꾸는 듯 변했다.
“그 분 노래 되게 잘하시잖아요. 외모도 멋지시고. 옛날엔 빛을 별로 못 봐서 안타까웠었는데, 결국엔 잘되셔서 다행이에요. 참, 축가 너무너무 좋았다고 전해주세요. 사장님이랑도 되게 친하신 것 같던데. 아니에요?”
“……아뇨, 맞습니다.”
연예계의 소문난 절친인 두 사람이긴 했지만, 엄밀히 말해 재하와 민혁은 닮은 점이 한 군데도 없었다.
풋풋한 꽃미남 스타일인 재하에 반해 민혁은 이른 바 ‘상남자’ 스타일이었으니까.
눈앞의 여자는 아무래도 전자 쪽이 취향인 모양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그 전남친이란 작자도 비슷했던 것 같은데.
“취향 한 번 소나무 같네.”
“네?”
“……아닙니다.”
민혁은 괜한 상념을 지워내며 그녀를 향해 고갯짓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빨리 나가죠. 배고플 텐데.”
* * *
“우와……! 진짜 예쁘다!”
바다 구경에 알맞은 맑은 날씨였다.
렌트카에 탑승한 그들은 널찍하게 펼쳐진 해안도로를 씽씽 달리고 있었다.
바람이 꽤나 찬데도 불구하고, 예원은 반쯤 열린 창가에 붙어 연신 감탄했다.
“그렇게 좋습니까? 태어나서 바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니잖아요.”
“쳇. 바다는 처음이 아니라도, 제주도 바다는 처음이니까요.”
예원의 볼멘소리에 그가 멈칫했다.
“여기…… 처음 와본 겁니까?”
“네, 처음이에요.”
“제주도를 한 번도 안 와 봤다고요?”
“그렇다니까요.”
아니, 이 여잔 나이가 몇인데.
그는 한순간 의아해졌다.
“수학여행이라든가……. 뭐 그런 거 안 가봤어요?”
그도 14년 전쯤 제주도에 처음 와본 기억이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수학여행.
아이돌이라면 으레 그렇듯 이른 나이에 데뷔를 했었다.
자연히 학생 때의 기억이 흐릿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수학여행은 학창시절에 마지막으로 남은 좋은 추억이었다.
“네, 안 갔어요.”
“왜요. 그것도 인생에 단 한 번뿐인 이벤튼데.”
“…….”
그 얘길 하려면 꽤나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심드렁하게 입맛을 다신 예원은 창가에 팔꿈치를 올리며 턱을 괴였다.
“실은, 그때 이모가 잠시 병원 신세를 졌었거든요. 웬 교통사고가 나서.”
“…….”
“이모도 그러고, 집엔 지원이만 혼자 있고 그런데, 나 혼자 신나서 휙 가버릴 순 없겠더라고요.”
물론 서운했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거라 생각하고 치우기로 했다.
그녀에게 그런 타협이라든가, 자기위안은 언제나 익숙한 것이었으니까.
“그래도 이렇게 왔으니까 됐죠, 뭐. 두 번째였으면 감흥도 덜했을 걸요?”
“…….”
운전대를 잡은 그는 말없이 그녀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지난번 카페에서 했던 얘기도 그렇고.
제 생각 이상으로 꽤나 의젓한 나날들을 살아온 여자였다.
또 그걸 얼마나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지.
그 태도 탓에 오히려 더 대단하게 느껴지는 면도 있었다.
‘나와의 계약도, 1년 뒤 이 여자에겐 아무렇지 않게 말할 이야깃거리가 되려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맛있는 거 뭐 사주실 거예요? 비싼 거 먹어도 돼요?”
“글쎄. 따로 먹고 싶은 거 있습니까?”
퍼뜩 고개를 돌린 예원이 눈을 반짝 빛냈다.
“네! 있어요.”
* * *
“저기! 저기 어때요?”
그녀의 손가락이 ‘고기국수 전문’이라고 써진 식당을 가리켰다.
겉으로 보기엔 너무나 허름한 가게.
‘비싼 거 타령’을 하던 것에 비해 다소 소박한 선택이었다.
“이왕이면 유명한 데가 낫지 않겠습니까? 블로그 같은 데 검색하면 근방에 있는 맛집들 나올 텐데요.”
하지만 예원은 곧바로 모르는 소리 말라는 듯 그를 흘겼다.
“으유, 블로그 같은 데 나오는 맛집들은 거진 다 돈 써서 광고한 거예요. 물론 아닌 데도 있겠지만, 이런 데 와선 나만의 맛집을 찾는 게 또 재미죠.”
“…….”
“그리고, 그렇게 사람 많은 데 가셔서 어떡하시려고요. 감당되시겠어요?”
어차피 결혼까지 한 마당에 굳이 몸을 사릴 필요도 없지 않나.
하지만 그는 그 말에 수긍하듯 입술을 다물고 예원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가게 안에선 인상 좋은 초로의 여인이 그들을 곧장 반겨왔다.
“어서 오세요. 몇 분이신가?”
“두 명이요. 고기국수 두 그릇 주세요.”
그들을 포함해 두 테이블.
점심때를 놓쳤다고는 하지만 별로 인기가 없는 곳인지 식당 안은 무척 한산했다.
그나마 먼저 식사를 하고 있던 중년남자들조차도 빠르게 그릇을 비우고 자리를 떴다.
“……괜찮겠습니까?”
그들의 뒤꽁무니를 슬쩍 바라보던 민혁이 불안한 듯 작게 물었다.
“참, 진짜. 저 한 번 믿어보시라니까요. 그리고 설령 별로여도 걱정 마세요. 전 잡식이라 아무거나 잘 먹거든요.”
그렇게 속삭인 예원은 배시시 웃었다.
‘……어련하시겠어.’
난 안중에도 없으시구만.
어이가 없어진 나머지 그도 픽 웃었다.
“근데, 그 모자 좀 벗으시면 안 돼요? 어차피 우리 둘밖에 없잖아요.”
“……계시잖아요.”
그의 눈길이 가게 주인을 넌지시 눈짓했다.
“에이. 뭐 알아보시면 사인이나 하나 놓고 가면 되죠? 실내에서 답답하게 그러지 마시고 좀 벗으세요. 잠깐인데, 뭐.”
“…….”
여자의 말엔 매번 은근히 설득력이 있었다.
망설이던 그가 모자를 옆에 벗어놓는 사이, 뚝딱 완성된 고기국수 두 그릇이 그들의 앞으로 놓였다.
“맛있게들 들어요.”
“네, 잘 먹겠습니다.”
명랑한 인사를 마친 예원은 국수를 호기롭게 젓가락에 휘감더니 호로록 입에 넣었다.
“……우와!”
“맛있습니까?”
“빨리 드셔보세요, 빨리!”
그래봐야 뭐 얼마나 맛있을 거라고.
여자의 성화에 못 이긴 그가 속는 셈치고 국수를 입안에 넣었다.
이윽고, 그의 표정은 백팔십도 변했다.
“……오.”
“맛있죠?!”
“……괜찮네요.”
‘고기국수’라는 이름 때문에 왠지 누린내가 날 것 같단 생각을 했지만 완전한 기우였다.
담백한 고기국물과 큼지막한 살점, 따뜻하게 데워진 오동통한 면발의 조화는 가히 일품이었다.
“그쵸! 흑돼지라 그런가? 왜 이렇게 맛있냐.”
그러나 이것이 더욱 맛있게 느껴지는 건, 먹방 BJ라도 되는 양 맛깔나게 음식을 해치우고 있는 이 여자의 모습 때문일지도.
피식 웃은 민혁은 그녀를 따라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
그런데 그때, 그는 돌연 옆에서 와 닿는 따가운 눈빛을 느꼈다.
다름 아닌 주인아주머니의 눈빛이었다.
‘에구머니나!’
그와 눈이 마주친 여자는 황급히 눈길을 돌렸지만, 그게 너무 티가 나는 나머지 눈치를 못 채긴 힘들었다.
심지어 고기국수에만 정신이 팔려있던 예원조차도.
“……왜 그러세요? 무슨 할 말 있으세요?”
잠시 머뭇거리던 여자는 이내 웃음과 함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아니…… 가만 보니 젊은이가 참 잘생겼다 싶어서. 대체 뭐하는 젊은이길래 이렇게 인물이 훤해? 꼭 탤런트 같이 생겼네.”
“……네?”
일순 황당해진 예원의 입술이 오리처럼 쭉 나왔다.
맞은편을 보니 남자의 눈치도 그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주머니, 이 사람 모르세요?”
“아이고, 내가 생전 처음 보는 젊은이를 어떻게 알어? 티비에 나오는 것도 아닌데.”
이럴 수가.
대한민국에서 이 남잘 모르면 간첩을 넘어 원시인 소릴 듣는다는 판국에, 우연히 찾은 제주도에서 ‘진짜’를 만나게 될 줄이야.
“아주머니 혹시 티비 잘 안 보세요?”
“응. 자주는 안 보고, 간혹 뉴스랑 연속극이나 가끔 보지. 왜?”
“…….”
“근데, 정말로 직업이 뭐야? 키가 커서 모델을 해도 되겠구먼.”
당황하던 그는 이내 빙긋 웃으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아, 예. 카페 사장입니다.”
“카페 사장? 에이. 그런 거 말고 연예인을 한 번 해보지, 왜. 딱 보니 박해준인가 뭔가, 그런 놈은 명함도 못 내밀 것 같은데!”
“하하, 과찬이십니다.”
뻔뻔하게 모른 척 연기하는 남자의 특기가 여기서 또 발휘된다.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는 예원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그나저나 여기 국수가 참 맛있네요. 깜짝 놀랐어요.”
“아유, 그래? 호호. 실은 우리 집이 여기 사람들만 잘 아는 맛집이라니까. 어떻게, 양이 좀 모자라면 더 줄까?”
“그래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호호. 에이, 기분이다. 잘생겨서 더 준다, 내가.”
캬, 쿵짝 잘 맞는 거 보소. 그야말로 환상의 콤비가 아닐 수 없다.
‘눈꼴 시려서 못 봐주겠네, 정말.’
어느새 그 사이에서 쩌리가 된 예원은 조용히 국수만을 입에 넣었다.
신혼여행 와서까지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한다니.
잘생긴 남편하고 사는 게 이래서 피곤하다는 건가.
* * *
“인지도 부문에서 박해준 씨한테 밀린 소감이 어때요?”
“…….”
“설마설마 사장님을 모를 줄이야. 저 진짜 처음 뵀어요, 그런 분.”
“……나도 처음 봤어요.”
몇 년 새 그를 못 알아보는 사람은 정말로 전무했었다.
물론 라이징스타에서 벗어난 지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기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뭔가 색다른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무엇보다, 누군가 저를 못 알아본다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몇 년 만에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기분.
어찌 보면 이것도 다 홍예원 덕분이었다.
“오, 여긴가 봐요. 곽지해수욕장.”
어쨌거나 장소를 옮긴 그들은 서둘러 해변으로 나갔다.
제주도에 온 이상 바다랑 인사는 하고 가야 한다는 예원의 희한한 고집 때문이었다.
“우와. 바다 색깔이 에메랄드색이에요! 진짜 예쁘다.”
그녀의 말대로 해변은 초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눈부신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소금 같이 하얀 백사장과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바다의 모습에 그녀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저기, 저 사진 좀 찍어주세요.”
“네, 폰 줘요.”
“아뇨, 말고. 사장님 폰으로 찍어주세요.”
“……왜요?”
“제 폰은 화질이 구지거든요. 사장님 폰은 최신 폰이니까, 그걸로 찍어서 전송해주시는 편이 훨씬 나아요.”
참나. 그는 하는 수 없이 제 폰을 손에 들었다.
“자, 포즈 취해 봐요.”
귀엽게 브이를 하는 그녀의 모습이 곧바로 프레임 안에 잡혔다.
백사장과 에메랄드빛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는 여자.
새하얀 얼굴과 상큼한 눈웃음이 꼭 여름의 바다처럼 싱그러웠다.
차가운 바닷바람에 나부끼는 그녀의 머릿결 또한 나비의 움직임마냥 산뜻했다.
그는 그 모양을 저도 모르게 잠시 들여다보았다.
“사장님? 안 찍으세요?”
의아해하는 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아, 네. 찍을게요. 하나, 둘, 셋!”
찰칵.
활짝 웃는 그녀의 모습이 마침내 그의 폰 안에 담겼다.
그렇게 몇 차례의 포토타임을 가진 뒤.
예원은 바다와 가까운 모래사장에 쪼그려 앉았다.
“여긴 꼭 꿈같아요. 꿈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에요.”
사실, 톱스타인 당신과 함께 이곳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참 꿈같은 일이긴 하지만.
그녀의 손가락이 젖은 모래 위로 슥슥 움직였다.
“바다를 원래 그렇게 좋아해요?”
“네, 좋아해요.”
“흠, 원하면 다음에 또 올 수도 있는데.”
“……아뇨, 그럴 필요까진 없고요.”
고작 1년인데, 그 안에 여길 이 사람과 또 올 일이 있을까 싶다.
안 그래도 바쁜 사람인데.
“다 됐다.”
예원이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발 앞으로는 어느새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홍예원과 현민혁 왔다감 2017. xx. xx]
아래를 내려다본 그가 픽 코웃음을 쳤다.
“앱니까? 유치하게.”
“왜요, 기념이잖아요.”
그러고서 또 사진을 찍는다.
제 폰으로 찍는 걸 보아하니 이번엔 화질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별 거 없는데 참 매사에 귀엽게 노는 여자.
이 여자를 보고 있으면 이상스럽게 웃음이 났다.
“많이 즐겨둬요. 앞으로는 꼭 즐거운 일만 있진 않을 테니까.”
“‥‥‥네?”
그녀의 눈이 퍼뜩 옆에 선 그에게로 향했다.
“그때마다 내가 막아주고 도와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간혹 여의치 않을 때가 있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럴 땐, 홍예원 씨 스스로가 이겨내야 돼요. 알았죠.”
물론 예원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각오가 없었다면 이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전 걱정 마세요. 사장님이나 주변 사람들한테 안 들키게 조심하세요.”
“나야 걱정할 거 없죠. 늘 완벽한데.”
“‥‥‥어우.”
저놈의 자뻑을 어쩜 좋냐.
“조만간 또 연기 몇 번 해야 될 거예요. 영화관 가는 컷이랑 길거리 돌아다니는 컷 몇 개 내보내기로 했거든요.”
“네, 뭐. 좋아요.”
“이젠 달리 거부도 안 합니까?”
“‥‥‥별로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초반과는 달리 눈에 띄게 초연해진 말투에, 그는 살짝 미안해졌다.
“……딱 1년만 참아요. 그 뒤엔 무조건 자유롭게 놓아줄 테니까. 더 이상 귀찮게 하는 일 같은 거 없을 겁니다.”
“…….”
“그때까진, 이해해줄 수 있죠?”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예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당연하죠.”
“…….”
“우린 계약관곈데.”
계약관계.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도, 입에 올릴 때는 이상하리만큼 낯설게 다가오는 그 말.
“……네, 그렇죠.”
“…….”
“참. 혹시 회는 좋아합니까? 저녁엔 진짜 비싼 걸로 내가 쏠게요. 이 근처에 성환이 형이 잘 아는 집이 있다고 했거든요.”
“……네. 좋아요, 회.”
짤막하게 답한 예원은 그를 보며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정말 이상하게도, 꼭 다문 입술 끝이 씁쓸해졌다.
또 왠지 모르게 조금은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설마, 그 짧은 새 이 남자에게 정이라도 든 걸까?
‘에이, 아니야. 정은 무슨.’
그래. 이건, 어젯밤 환자가 된 그를 간병하다 생긴 일시적인 감정에 불과한 것이다.
평소와 다르게 약한 모습을 보인 남자가 측은하고 안쓰럽게 보인 거지.
그 유명한 ‘나이팅게일 효과’라는 게, 아마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었나 보다.
“……아, 춥다. 이 근처에 괜찮은 카페 많다던데. 거기 한 번 가보실래요? 현장 견학 차원으로요.”
“아, 네. 그러죠.”
흔쾌히 승낙하는 그를 뒤로한 예원은 씩씩하게 앞장 서 걷기 시작했다.
‘홍예원, 정신 차려. 쓸데없는 생각 같은 건 금물이라고.’
지금은 물론이거니와, 앞으로도 말이다.
절대! 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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