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불타는 첫날밤
2018.06.26.
‘이…… 이게 뭔 일이냐?’
뜻하지 않게 남자의 벗은 몸을 목격하게 된 예원은 한순간 패닉 상태가 되어 있었다.
배 밑으로는 잘 세탁된 새하얀 이불이 덮여있고, 그 위로 올록볼록 튀어나온 근육들은 갓 구워나온 빵처럼 섬세하고 촘촘했다.
저 비슷한 걸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본 듯도 한데.
아, 맞아. 마치, 이름 있는 조각가가 세공한 남신상 같은 자태였다.
‘아오,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네.’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 남세스럽다 생각하면서도, 예원은 그런 그에게서 저도 모르게 눈을 떼지 못했다.
문득 지영의 한 마디가 그녀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시대를 앞서나간 짐승돌!’
그래, 실물로 본 이상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짐승 맞네. 저 정도면 짐승 인정. 백퍼센트 인정.
“……?”
그런데 그녀는 순간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잠깐만.’
참기름을 바른 것도 아니건만 이상하게 몸이 빤딱빤딱 빛나는 것 같다 싶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온몸에 흐르고 있는 땀 때문인 모양이었다.
거기다 불규칙하게 새근거리는 숨소리와 살짝 발개진 얼굴.
열기가 배어 있는 듯한 숨결.
확실히, 지금 남자의 상태는 그녀가 알던 평소와는 뭔가 달랐다.
“현민혁…… 씨?”
예원은 일단 동태를 살피기 위해 살금살금 그에게 다가갔다.
“사장……니임?”
고양이처럼 깨금발로 다가가 가까이서 보니, 남자의 상태가 더욱 적나라하게 눈에 들어왔다.
뭐야. 이 사람……?
“아픈가?”
그새 영락없는 환자가 된 그의 모습에, 예원은 굉장히 얼떨떨해졌다.
분명히 아무 기미도 없던 남자였다.
외양도 평소와 똑같았고 멀쩡했다.
아, 물론. 기내에서도, 여기로 오는 차 안에서도 그는 아무 말 없이 잠만 청하긴 했지만 그야 요 며칠 스케줄이 너무 빡빡해서 그런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럼, 아까도 몸이 안 좋아서……?’
그녀의 조심스러운 손길이 남자의 촉촉한 이마에 살짝 닿았다가 휙, 떨어졌다.
‘어머.’
열도 꽤 있네.
불덩이라고 할 것까진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냥 예사로 지나치기엔 너무 뜨거운 온도.
“……아프면 말을 하지.”
이게 뭐야, 사람 미안해지게.
예원의 입매가 스르륵 유하게 풀어졌다.
그때였다.
─지잉, 지잉.
침대 옆 협탁에 놓여있던 그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성환이 형?”
액정에 뜬 저장명을 읊어보던 예원은 이내 깨달았다.
‘아, 매니저님이구나.’
어쩌지.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예원 씨! 웬일로 전화를 예원 씨가 받아요?]
“아…… 그게요.”
머뭇거리던 예원은 저도 모르게 그럴듯한 거짓말을 지어냈다.
“민혁 씨가 지금 샤워 중이라서요. 지금 같이 있어요.”
[아아, 씻는 중이구나.]
“……네.”
내가 이런 뻔뻔한 거짓말을 하다니.
예원은 스스로의 기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쨌든, 잘 도착했어요?]
“아, 네. 숙소가 너무 좋아요. 다 매니저님이 예약해주신 거라고 하던데…… 감사해요.”
[뭘요, 그 정도 가지고.]
하하. 성환의 넉살 좋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말 못했는데, 아무런 생각 말고 잘 놀다 와요. 그나저나 한번뿐인 신혼여행인데, 고작 제주도라서 어떡해요?]
“에이, 아니에요. 제주도도 좋은데요, 뭐.”
[하하, 하긴. 신혼부부한테 장소가 뭐 그리 중요하겠어요. 둘만 있음 됐지.]
“…….”
[그럼 예원 씨는 민혁이랑 어디 단 둘이서 가보는 게 처음인 거죠?]
“……네.”
성환은 어느덧 진지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민혁이 걔가, 안 그렇게 생겨서 되게 비실비실하거든. 걸핏하면 몸살 나고 아프고 그래요. 특히 오늘 같이 중요한 날은 한 번 긴장 풀리면 난리난다니까. 어떻게, 지금은 좀 괜찮은 것 같아요?]
“……지금……이요?”
예원의 시선이 침대에 누워있는 그에게 닿았다.
‘흠, 확실히 괜찮지는 않아 보이네.’
하지만, 굳이 제3자에게까지 걱정을 끼칠 필요는 없었다.
매니저라고는 해도 서울에 있는 성환이 당장 뭘 어떻게 해줄 수도 없는 일이고.
“……네, 괜찮은 것 같아요. 민혁 씬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잘 챙길게요.”
[그래요. 이젠 예원 씨가 있는데 내가 걱정할 필요 없지. 아무튼 잘 좀 부탁해요. 신혼여행 재밌게 보내고 오고요.]
“네. 나중에 민혁 씨한테 따로 전화 드리라고 할게요. 네. 들어가세요.”
짧은 통화를 끊은 예원은 폰을 제자리에 올려두고는 허리손 동작을 취했다.
딱히 통화소리를 죽인 것도 아니었는데, 남자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보통의 신혼부부라면 마냥 행복해야만 하는 결혼 첫날밤에, 세상모른 채 앓고 있는 남자.
은근히 안쓰러운 마음이 올라왔다.
“……에잇.”
이렇게 된 이상 할 수 없지, 뭐.
고민하던 그녀는 생각 끝에 그의 폰이 아닌 객실 전화를 들었다.
“실례합니다. 저기, 부탁드릴 게 좀 있는데요.”
* * *
한편 그 시각, 맥주 캔을 든 지영의 손은 우뚝 멈추었다.
“……가수?”
“네, 가수요.”
“…….”
“놀라셨어요?”
무척 뜻밖이기는 했다. 그런 쪽으로는 전혀 기미가 없던 녀석이었기에.
“어…… 조금.”
가수. 가수라.
외양으로만 봤을 땐 지원에게 퍽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제 선에선 좀 뜬금없게 다가오는 직업이었다.
“어쩌다가 그런 꿈을 갖게 된 거야? 언제부터?”
“…….”
“무턱대고 공부만 하는 줄 알았더니. 실은 너 땡땡이 치고 만날 노래방만 다닌 거 아냐?”
그녀의 실없는 우스갯소리에 지원은 말갛게 웃기만 했다.
그러다, 그의 눈빛이 다시금 진지해졌다.
“누나, 기타 치는 남자 좋아하죠.”
“……어?”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픽 웃고 있던 지영의 얼굴에 살짝 이채가 띠었다.
얘가,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알았어?”
설핏 웃은 지원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누나가 옛날에 저 과외해줄 때, 지나가듯이 말했었어요. 기억 안 나요?”
내가 그랬나?
지영은 문득 생각에 잠겼다.
‘듣고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고 나자 번뜩 생각나는 옛 기억.
‘음. 난 기타 치는 남자가 그렇게 멋있더라. 멋들어진 기타연주에다가, 감미로운 노래까지 더해지면. 크으, 금상첨화지.’
‘선생님은 이상형이 어떻게 되냐’는 질문에, 별 생각 없이 그리 답했던 것이다.
그제야 아, 하고 신음하던 지영은 이내 감탄했다.
“와, 지원이 너 기억력 진짜 좋다. 그걸 어떻게 기억해?”
그렇게 스쳐지나가듯 한 말을…….
순수하게 놀라워하고 있는 여자를 보며, 지원은 담백하게 웃었다.
기억하지 못할 수가 없지. 당신이 한 말인데.
“그때부터였어요.”
“…….”
“제가 기타를 치기로 마음먹은 게.”
순간, 지영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어?”
“기타를 치다 보니까 기타가 좋아졌고, 그러다 보니까 노래가 좋아졌어요. 그래서 결국엔, 가수가 되고 싶어졌어요.”
“…….”
“누나가, 제 꿈을 만들어준 거라고요. 누나 때문이에요.”
‘나 때문이라고……?’
멍하니 그의 말을 곱씹은 지영은 멈칫했다.
그리 말하고 있는 지원의 얼굴이 마치…… 고백을 하는 얼굴 같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에이, 그럴 리가.’
이딴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다니. 김지영 나가 죽어라.
일순 민망해진 그녀는 괜스레 머리를 파드득 흔들었다.
“……아하하. 내, 내가 뭘 했다고. 난 그냥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
“뭐 그래도, 기분이 썩 나쁘진 않네? 홍지원의 꿈을 만들어준 상대가 나라니. 이거 완전 영광인데!”
오버하며 깔깔 웃는 지영을 보며, 오늘도 지원은 조용히 쓴 웃음만을 삼켰다.
그래, 이렇게 나올 줄 알았지. 어차피 기대도 안 했다.
유독 저에 한해서는 눈치가 굼벵이만큼이나 느린 여자가, 그 말을 곧이곧대로 알아들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근데, 네가 왜 예원이한테 숨기려고 하는 건지는 알겠어. 네가 가수 하겠다고 하면, 걘 분명히 안 좋아할 거야. 그치?”
“……네, 아마도요.”
“그럼, 어떡하려고? 걔도 어쨌든 알긴 알아야 할 거 아니야.”
지원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해야죠, 조만간.”
그 전에 몇 가지만 확실히 해놓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하는 지원의 눈이 또렷하게 빛났다.
그래도 일단은 되었다. 가장 중요한 사람에게 사실을 알렸으니까.
“그래. 홍예원이야 어쨌건, 네 의지가 제일 중요한 거지. 네가 그렇게 하고 싶은 거라면 밀고 나가. 응원할게.”
“……고마워요, 누나.”
“고맙긴 뭘. 자, 건배.”
지원의 커피 캔에 맥주 캔을 짠 맞부딪친 지영이 씩 웃었다.
“그나저나 우리 ‘싸모님’은 지금쯤 뭐하고 계시려나. 불타는 첫날밤을 보내고 계시려나?”
* * *
아니나 다를까. 민혁과 예원의 첫날밤은 몹시 격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다만, 지영이 생각한 것과는 매우 다른 의미로.
“아…… 열이 생각보다 안 떨어지네.”
온도계를 확인한 예원의 얼굴이 마뜩잖게 굳었다.
영 정신을 못 차리는 그에게 억지로 약을 먹이고, 침대 맡에 상주한 채 물수건을 계속 갈아주며 경과도 지켜보았지만 생각보다 차도가 있질 않았다.
‘응급실에라도 데려갈 걸 그랬나.’
물론 그 생각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잠시 생각하던 예원은 이내 고민을 접었다.
엄연히 톱스타인 남자다. 결혼 첫 날에 응급실에 실려 갔단 기사가 떠버리기라도 한다면 그 뒷감당은 모조리 그의 몫이 될 터였다.
“…….”
얼음물에 적신 수건을 다시 한 번 꼭 짜서 남자의 이마에 얹어주며, 예원은 그의 얼굴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아파서 흐트러진 얼굴조차 참 잘생기긴 했다.
센 척은 혼자서 있는 대로 다 하더니.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
그래도…… 덕분에 하나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리 연기라도 그렇지 어쩜 저리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나, 나만 불안하고 떨리는 건가 생각했었는데.
당신도 이 상황이 그리 달가웠던 것은 아니구나. 나랑 다르게 마냥 태연했던 것만도 아니구나.
그걸 깨닫자 남자를 향한 야속함이 조금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
또한, 머릿속에 팽배했던 주도권에 대한 생각도 잠시 접어둘 수 있었다.
‘이렇게나 열심히 간병을 했는데, 이 남자도 양심이 있으면…… 알아서 기겠지.’
한편으론 이런 얄팍한 생각도 들고.
“휴.”
무심결에 고개를 들자 시계바늘은 벌써 새벽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 시간이 많이 늦긴 했구나.’
그걸 깨닫기 무섭게, 결혼식을 치르느라 쌓여있던 피곤함이 갑작스레 몸을 짓눌렀다.
‘안 되겠다. 잠깐 눈 좀 붙여야지.’
하지만 몸은 늘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예원은 그가 누운 침대 위로 팔베개를 만들어 옆으로 엎드린 채, 금세 긴 잠에 빠져들었다.
* * *
그 사이 민혁은 꿈을 꾸었다.
‘민혁아. 어서 일어나, 약 먹어야지.’
이제는 머릿속에서 너무도 까마득해진, 나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엄마?’
‘으응. 많이 아프니?’
어, 많이 아파. 머리도 아프고 열도 나고.
엄마가 보고 싶어.
‘한숨 푹 자면 괜찮아질 거야. 걱정 마.’
‘응…….’
머리칼을 쓰다듬는 간질간질하고 포근한 손길.
행복감에 젖은 그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그런데 잠시 후.
‘엄마.’
‘…….’
‘엄마?’
산들바람 같던 손길은 어느새 거짓말처럼 뚝 멈춰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보이지도 않는 형체가 저로부터 아스라이 멀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엄마. 엄마!’
.
.
“엄마!”
민혁이 마침내 눈을 떴다.
아침의 햇살이 들이치고 있는 커다란 창을 확인하고서야, 그는 그것이 꿈이었음을 알았다.
‘……그럼 그렇지.’
곧장 현실세계로 돌아온 민혁은 본능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어젯밤, 여자를 뒤로한 그는 이 곳으로 와 곧바로 샤워를 했었다.
그리고 머리를 말리다 두통을 느낀 나머지 침대로 왔었는데, 그 뒤론 기억이 없었다.
언제 잠에 들었는지도 모르겠는데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다.
그들의 생애 첫날밤은 그리 허무하게 지나가 버린 모양이었다.
“……하아.”
생각 많은 얼굴이 된 그가 본능적으로 제 이마 부근을 더듬거렸다.
그때, 무언가가 베개 옆으로 툭 떨어졌다.
‘어라.’
그것은, 미지근하게 버쩍 마른 물수건이었다.
잠에 들어있는 내내 이상하게 이마 쪽이 서늘하고 축축한 느낌이 든다 싶었는데, 아마도 이것 때문이었던 듯싶었다.
‘웬 물수건이지.’
물수건을 허공에 든 채 가느다란 눈초리를 하던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인영이 바로 침대 맡에 있었다.
그 쪽으로 엎드린 채 유순한 얼굴로 잠들어있는 여자.
홍예원이었다.
“……!”
놀란 그의 눈썹이 홱 치켜 올라갔다.
‘이 여자가 왜 여기에……?’
분명, 어제 거실에서 마주본 게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어떻게 간밤에 여기까지 들어왔었단 말인가?
“홍예원 씨. 홍예원 씨?”
“으음…….”
그리 깊은 잠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여자는 그의 목소리에 금세 꿈틀했다.
부스스한 몰골로 눈가를 비비던 예원은 그가 일어났음을 알고 자다 깬 목소리를 냈다.
“어? 일어나셨네요…….”
“어떻게 된 겁니까? 홍예원 씨가 왜 여기…….”
“아, 네. 놀라셨죠?”
살풋 웃은 예원이 간략히 설명했다.
“실은, 어제 사장님 좀 아프셨어요.”
“……내가요?”
“네. 갑자기 열이 끓길래 약도 먹여드리고 물수건도 해드리긴 했는데, 별 효과가 없더라고요. 기억 안 나세요?”
아, 그래서 물수건이…….
그는 물수건과 여자를 번갈아 보며 다소 뜻밖이라는 얼굴을 했다. 정말이지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한데, 그때였다.
“맞다!”
“네?”
미처 잊고 있었다는 듯, 여자의 서늘한 손이 그의 이마로 잽싸게 안착했다.
졸지에 놀란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뭐, 뭐하는 겁니까?”
“씁. 가만히 계셔보세요.”
무슨 환자 진맥하는 허준이라도 되는 양 진지한 얼굴.
그렇게 잠시 그의 이마를 지그시 누르고 있던 여자는 이내 싱긋 웃었다.
“음, 열은 다 떨어졌네.”
“…….”
“혹시나 했는데 가벼운 몸살 같은 거였나 봐요. 다행이다.”
그 재빠른 행동은 단순히 열을 재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여자의 손은 금방 떨어져나갔고, 당황한 그는 괜한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치만 혹시 모르니까 옷 입으세요. 그러다 또 감기 걸리시면 안 되잖아요.”
“……예?”
여자의 시선을 따라 무심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 민혁은 화들짝 놀랐다.
아뿔싸! 어쩐지 허전하다 했더니!
“그럼, 전 이만 제 방으로 돌아가 볼게요. 사장님은 조금만 더 쉬세요.”
한 치의 미련도 없이 자리를 뜨는 여자의 뒷모습을, 민혁은 약간 벙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잠깐. 어젯밤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 * *
“어으…… 찌뿌둥해.”
제 방으로 돌아온 예원은 곧장 기지개부터 켰다.
밤새 구부정하게 앉아서 잤기 때문일까. 등과 허리가 몹시 결렸다. 혹시나 미안해할까 싶어 남자 앞에선 아픈 티도 못 내고.
‘아무리 졸렸어도 그런 자세로 자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래도 할 수 없었다. 생각이 짧았던 지난밤의 자신을 탓하는 수밖에.
그래도 남자가 하루 만에 나아서 다행이지, 잘못하면 신혼여행 내내 병수발만 하다 끝날 뻔 했지 않은가.
운동을 많이 해서 그런지 회복력 하나는 끝내주는 남자였다.
‘어쨌거나, 나는 씻기 전에 짐 정리나 해볼까나.’
어제 입은 옷을 아직까지 입고 있었던 탓에 찝찝함과 불편함도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바닥에 푹 퍼질러 앉은 예원은 한 쪽에 널브러져 있던 트렁크를 가져와 비로소 열어 보았다.
그런데, 기존 짐들 위로 영 못 보던 것이 하나 있었다.
“어? 이게 뭐지?”
핑크색 배경에 알록달록한 무늬. 귀여운 포장지로 싸인 물건이었다.
“아, 김지영이 준 건가?”
예원은 아무 생각 없이 포장을 뜯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런데…….
“홍예원 씨!”
뒤늦게 황급히 옷을 주워 입고 그녀의 방으로 달려온 민혁은 발견하고야 말았다.
“……!”
몹시 야시시한 검정색 레이스 브라를 든 채, 저를 향해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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