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예비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
2018.06.12.
“사장님, 저한테 지금 왜 화내시는 거예요?”
“……네?”
“왜 저한테 화를 내시냐구요. 제가 뭘 잘못했다고.”
카페 안에서야 사장과 부하 직원일지 모르지만. 밖에선, 그것도 철저히 계약으로 맺어진 이 관계에선 상하관계가 따로 있을 수 없었다.
제 나름의 노력과 배려를 무시당한 느낌.
그래서 예원은 더욱 화가 났다.
“…….”
한편, 그 조막만한 얼굴에 가득 찬 분기를 확인한 민혁은 졸지에 할 말을 잃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순식간에 상황이 역전돼 있었다.
“화내는 거 아닙니다.”
“맞잖아요.”
“아니라고요.”
“말만 아니라고 하면 다예요?!”
그런 구분쯤은 지나가던 어린애도 할 수 있을 테다.
화가 난 예원이 한껏 씩씩거렸다.
“방금 사장님이 그러셨잖아요! 앞으론 절대 사장님 말없이 움직이지 말라고. 대체 언제부터 사장님이 제 거취에 그렇게 신경을 쓰셨어요?”
“…….”
“아님, ‘넌 이제 나랑 계약한 몸이니까, 내 허락 없인 어디 맘대로 나다니지도 마.’ 뭐 이런 건가요?”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면요!”
봇물 터지듯 튀어나온 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기다리래서 기다렸고, 어머님 뵙자고 해서 뵈러 왔어요. 하필이면 나 혼자라서 어색해 죽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사장님이랑 약속한 게 있으니까 눈치껏 견뎠다고요. 그랬더니, 돌아오는 게 이거예요?”
“…….”
“그리고. 어머님한테는 그게 무슨 말버릇이에요? 누군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무진 애쓰고 있는 판국에, 그렇게 꼭 초를 쳐야 돼요?”
거듭되는 공세에 살짝 미안해하는 듯하던 그는 ‘어머님’ 소리에 금세 또 얼굴을 굳혔다.
“그럴 필요 없는 사람이에요. 신경 쓰지 마요.”
“……어떻게 그래요, 어머님인데!”
하아.
“제가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요. 이렇게 된 이상, 할 말은 해야겠어요.”
“…….”
“지난번에, 우리 이모한테 왜 거짓말 하셨어요?”
그날, 그의 부모님은 분명 돌아가셨다고 했었다.
물론 무슨 말 못할 사정이 있었겠지만, 그렇다면 그녀에게만이라도 그 이유를 솔직히 설명해주고 납득시켜주었으면 될 일이었는데.
그런데 왜.
“저렇게 멀쩡히 살아계시는 부모님 놔두고, 왜 굳이 돌아가셨다고까지 해가면서 그런 거짓말을 했냐고요.”
“…….”
“아니, 이럴 거면 어머님은 왜 보여준다고 하셨어요? 처음 뵙는 분 앞에서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사람 우스워지게!”
결국, 맘속에만 담아두었던 말을 모조리 다 꺼내고야 말았다.
물론 철저한 비즈니스 부부인 사이에 이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 쓰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어느 일에든 ‘상도’라는 게 있지 않은가.
응당 변명이라든가, 사과의 말이 돌아오는 게 맞는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
그러나 잠시 뒤.
눈앞의 남자에게서 튀어나온 말은, 뜻밖에도 몹시 차가운 것이었다.
“다 사정이 있어요. 이유 없이 이러는 거 아니니까,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런 식으로 쉽게 말하지 마요.”
“…….”
“불쾌하니까.”
‘……불쾌하다고?’
정나미가 없어도 너무 없는 단어 선택에, 예원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뱉었다.
하. 어처구니가 없네, 진짜.
‘그럼 그렇지. 고작 이런 사람한테서 대체 뭘 기대한다고.’
알고 보면 괜찮은 사람일 거라 생각한 내가 바보다.
바보.
“……그러게요. 전 정말 사장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네요. 죄송해요.”
“…….”
“근데요.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은 알 것 같아요.”
예원의 눈이 그를 한껏 노려보았다.
“제가 이 결혼을 너무 성급하게 결정했다는 거.”
순간, 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먼저 갈게요.”
“……예원 씨!”
여자를 부르는 목소리가 절로 다급해졌다.
이대로 보내는 건…… 아무래도 아닌 듯한데.
“……기다려요. 태워다 줄 테니까.”
한 걸음 떼다 만 그가 생각 끝에 말을 뱉었지만, 언뜻 그를 돌아본 예원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 혼자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간결하게 말을 마치더니, 지체 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걸음걸이.
민혁은 더 이상 그녀를 잡지 못하고 그 뒷모습을 멀거니 좇았다.
“…….”
돌계단을 내려가는 여자의 구두굽 소리가, 마치 조금 전 그녀의 목소리처럼 선명하게 들려왔다.
.
.
.
“갔어요?”
둘의 동태를 살피고 온 가정부가 득달같이 보고했다.
“예. 둘이서 잠깐 뭐라뭐라 쏘아대더니, 여자애가 먼저 뿔나서 가버린 모양인데요.”
훗. 찻잔을 모두 비운 라희는 살짝 웃었다.
계집애가 꼴에 성깔은 꽤 있는 모양이네.
“민혁이가, 골치 좀 아프겠네요.”
하지만 척 보기에도 맹해보이는 것이, 조사한 것보다도 더 별 볼일 없는 계집애가 틀림없었다.
‘별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살짝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 * *
“내가 미쳤지. 결혼은 무슨 얼어 죽을 놈의 결혼이야!”
잔뜩 뿔이 난 예원이 풍풍거렸다.
생각할수록 너무너무 괘씸한 남자가 아닐 수 없었다.
‘뭐, 불쾌해? 그렇게 불쾌한 여자랑 결혼은 왜 하려고 했냐?’
그리고 불쾌한 건 이쪽도 매한가지거든?
거짓말이나 한 주제에 뭐가 그렇게 떳떳해서!
“아오, 진짜.”
가다 말고 돌연 걸음을 멈춘 예원은 문득 생각에 잠겼다.
……가만.
‘지금이라도 안 늦었으니까, 확 파혼을 해버려?’
그녀가 이 결혼을 결심한 건, 애초부터 전민혁을 향한 알량한 복수심과, 앞으로의 탄탄대로를 위한 야망 때문이었다.
즉 지금 당장 결혼을 물러도 그녀에겐 아무런 손해가 없다는 것.
또 지금 이 감정이라면, 설령 파혼을 한다 해도 한 치의 후회조차 남을 것 같지 않을 지경이었다.
“…….”
하지만…….
그 상태 그대로 곰곰이 생각하던 예원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건 또 좀 그렇지.’
그래도 결혼은 결혼인데. 이렇게 유치하게 호떡 뒤집듯 막 엎어버리는 건 좀 아니잖아.
아후, 진짜.
“…….”
터덜터덜 걷는 몸뚱이가 솜뭉치처럼 무거웠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끝에 그녀의 무거운 발길이 닿은 곳은,
“어머, 네가 여기까진 웬일이야?”
이모 은아가 경영하고 있는 꽃집이었다.
“……웬일은.”
예원은 가게 한편에 놓인 의자에 털썩 앉으며 애써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집에 가서 오랜만에 이모랑 치맥이나 한 잔 하려고.”
“치맥?”
한창 꽃을 다듬는 중이었던 듯한 은아가 별 일이라는 듯 입술을 내밀었다.
“한동안 안 그러더니 또 갑자기 웬 치킨 타령이야. 무슨 일 있었어?”
“…….”
“그러고 보니까 옷도 웬일로 쫙 빼입었네. 그러고 있으니까 진짜 새색시 같다, 야.”
“……새색시는 무슨.”
이깟 불편한 건 괜히 왜 사가지고.
내 피 같은 7만 5천원.
“그냥 어디 좀 갔다 온다고……. 신경 안 써도 돼. 아무 일도 없었어.”
“뭐, 그럼 됐구. 여기 앉아서 쪼끔만 기다려. 곧 끝나니까.”
“응.”
그러고 보니 이모의 꽃집에 들러보는 것도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괜스레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예원은 가방을 내려놓곤 스르르 일어나 꽃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향기는 물론 커피의 향기였지만, 그 다음으로 사랑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꽃향기. 그것도 이모가 직접 고른 꽃들의 것.
너무 오래 맡으면 머리가 아플 정도이기는 해도, 이렇게 기분이 꿀꿀할 때는 이 꽃 향기만한 특효약이 없었다.
“으음.”
예원은 간만에 천연 꽃 향수를 맘껏 들이마시며 눈을 요리조리 굴렸다.
그런데 오늘은, 개중에서도 왠지 유독 눈에 들어오는 꽃이 하나 있었다.
“이모.”
“응?”
“여기 이거, 이름이 뭐야?”
언뜻 장미 같아 보이기는 하는데 뭔가 다르다.
발그레 달아오른 신부의 볼 같은 연분홍빛 꽃잎이, 채 못 다 핀 봉오리 형태로 한 장 한 장 우아하게 말려 있는 꽃.
“에게. 너는 명색이 꽃집 조카면서 것도 몰라?”
“……그럼, 치킨집 조카는 다 치킨 잘 튀기게?”
쳇. 안 그래도 초저기압이구만 이모까지.
예원이 눈에 띄게 뾰로통한 표정을 짓자, 은아는 은근슬쩍 그녀의 옆으로 다가오더니 설명했다.
“으이그. ‘라펄’이란 장미야. 네가 아는 장미랑은 약간 묘하게 다르지?”
“아…….”
라펄. 부드러운 어감이 왠지 혀끝에 착 감겼다.
“너, 라펄 장미의 꽃말이 뭔지 알어?”
“……꽃말?”
잠시 뜸을 들이던 은아가 이내 자랑스럽게 말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랑.’”
“…….”
“어때? 네 부케도 이걸로 만들 생각인데.”
예원의 눈이 일순 동그래졌다.
“……어?”
그걸 본 은아는 깔깔 웃었다.
“뭘 그렇게 놀래. 이모가 꽃집 하는데, 설마 딴 데서 부케 만들려고 했어?”
은아의 얼굴은 어느새 진지하게 변해 있었다.
“지금껏 말은 안 했지만, 그게 이모 꿈이었어. 네 결혼식을 이모가 고른 꽃들로 멋들어지게 장식하는 거. 그리고…… 이모가 만든 부케, 네 예쁜 손에 꼭 쥐어주는 거.”
“…….”
“생각보다 좀 일찍 다가와서 서운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한데……. 우리 조카 멋진 신랑 만나서 결혼할 거라고 생각하니까, 이모가 부케 만들 맛이 날 것 같아. 호호.”
순간, 예원은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리 말하는 이모의 얼굴이…… 너무나도 행복하고, 기뻐보였으므로.
“어? 너 지금 감동받았구나.”
“……아냐, 그런 거.”
“아니긴 뭘 아니야. 딱 보니까 맞는데, 뭐.”
“……아니라니까!”
‘가짜 결혼식이고, 가짜 신랑이야. 그러니까…… 그렇게 좋아할 필요 없어, 이모.’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이모에겐 죽어도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사실.
한순간 마음이 무거워져버렸다.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으유. 알았어, 알았어. 얼른 끝내구 네 말대로 치맥 한 잔 하러 가자. 오늘은 이모도 술이 좀 땡기네.”
“……으응.”
해맑게 웃고 있는 은아의 앞에서, 예원은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응어리진 가슴 언저리가 쿡쿡 아파왔다.
* * *
똑똑.
“네.”
“잘 돼 가냐?”
무심코 뒤를 돌아보던 재하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현민혁!”
저 자식이 웬일로.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재하는 얼른 일어나 그를 반겼다.
“야. 뭐야, 갑자기.”
“잘 있었지?”
“뭐, 나야 항상 그냥 그렇지. 근데 진짜 웬일이냐. 만날 바쁘다더니.”
“……그냥, 간만에 스케줄이 비어서.”
민혁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수진의 집에 있었어야 하는 것이니, 스케줄이 빈 것도 엄밀히 따지면 맞는 말이었다.
“…….”
한편 금세 장난스러운 얼굴이 된 재하는 그런 민혁을 요리조리 살폈다.
“근데…… 오늘따라 우리 새신랑 얼굴이 왜 이렇게 다 죽어가실까? 싱글벙글만 해도 모자라실 판에.”
민혁은 그 말에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옆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을 뿐.
그런 그를 의아하게 보던 재하도 덩달아 제자리에 앉으며 마우스를 잡았다.
“뭐야, 왜 그러는데. 제수씨랑 싸우기라도 했어?”
“…….”
“원래 부부들이 제일 많이 싸울 때가 결혼 준비할 때라던데. 너네도 그러냐?”
뭐, 대충 비슷하긴 한 건가. 처음으로 다투긴 했으니까.
잠시 생각하던 민혁은 그저 조용히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까 전의 일은…… 그야말로 홧김이었다.
표라희를 ‘어머니’라고 부르며 깍듯하게 대하던 여자의 모습.
그걸 보고 있자니,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핀트가 확 나가버리고 말았다.
한바탕 성질을 내고, 결국 ‘왜 화를 내냐’는 말을 듣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잘 상대로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정작 보여주려던 사람은 보여주지도 못하고.
그렇게 여잘 허무하게 보내고 나자 막심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풀어줘야 한단 말인가.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하지?
“……재하 넌, 제수씨랑 싸울 때 없었냐?”
그렇게 홀리듯 찾아 들어온 곳이 바로, 재하의 작업실이었다.
뜬금없는 물음에 재하는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없긴 왜 없어. 서로 다른 여자랑 남자가 만났는데, 어떻게 안 싸우냐.”
“……그럼, 어떻게 화해했는데.”
그 말에, 재하가 문득 그를 돌아보았다.
언뜻 탐색하는 듯한 미소와 함께.
“……진짜구나.”
“뭐가.”
“……너 그 분 좋아하는 거.”
민혁의 미간에 곧바로 주름이 졌다.
“뭐?”
싱긋 웃은 재하는 다시금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며 대꾸했다.
“난 또 네가 뭐 이상한 수라도 쓰는 줄 알았거든. 평생 혼자 늙어죽을 줄 알았던 놈이 갑자기 웬 결혼인가, 싶어서.”
“…….”
“근데 지금 네 얼굴 보니까,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내 얼굴이 뭐가 어떻다고.
하지만 실제로 ‘이상한 수’를 쓴 놈은 차마 그 말에 반기를 들지 못했다.
“뭣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냥 다 잘못했다고 빌어, 인마. 그게 제일이야. 자고로 남녀 사이에 자존심은 독인 법이거든.”
“…….”
“야, 그건 그렇고. 식은 언제 올리기로 했는데. 사회는 누구냐?”
지나가듯 건네진 재하의 물음에, 표정이 싹 바뀐 민혁은 아주 당당하게 대꾸했다.
“너.”
“……나?”
한순간 얼떨떨해진 재하가 그를 쳐다보았다.
내가 사회면, 그럼…….
“축가는.”
“너.”
“뭐?”
이 자식이 보자보자 하니까.
재하의 입가에 피식 헛웃음이 흘렀다.
“너 내 행사 페이가 얼만 줄이나 아냐? 수틀리면 그냥 확 잠적해버리는 수가 있다.”
“안 돼. 넌 무조건 와야 돼.”
“왜. 네 빈약한 인간관계 들키기라도 할까봐?”
“……계속 그딴 식으로 나와라.”
픽 웃은 민혁이 대꾸했다.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결혼식인데 네가 구경은 해줘야지. 또…….”
“또?”
“소개시켜줄 사람도 있고.”
“누구. 제수씨?”
“그야 당연한 거고.”
“그럼 누구 말하는 건데.”
민혁의 입가에 돌연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너. 혹시 ‘후진 양성’ 같은 데는 관심 없냐?”
“후진 양성?”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일까.
재하는 곧바로 코웃음을 쳤다.
“야. 내가 무슨 30년 넘은 원로가수냐? 벌써부터 무슨 후진 양성이야.”
“왜. ‘드림스타’인가 뭔가 나온 걔들은 나름 잘 챙겨 주더니.”
드림스타 코리아. 재하가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면서, 심사위원으로 활약하기도 한 오디션 프로그램이었다.
물론 후배들이라면 으레 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만난 아이들은 유독 눈에 밟혔다.
마치, 아직 캐내지도 않은 원석 같다고나 해야 할까.
“그거야…… 좀 아까우니까 그렇지. 조금만 다듬어주면 꽤 쓸 만할 것 같은데, 거기까지 가는 방법들을 잘 모르니까. 보고 있으면 옛날 내 생각도 좀 나는 것 같고.”
“……됐네, 그럼.”
“되긴 뭐가 돼?”
수상한 듯 묻는 재하를 뒤로하고 민혁은 빙긋 웃었다.
“그런 게 있다, 인마.”
그나저나 남녀 사이에 자존심은 독이다, 라.
그냥 무작정 빌고 들어가야 한단 얘기인가.
* * *
그 일이 있은 뒤 꼬박 일주일 만이었다.
열심히 달리고 있는 차안엔 여느 때와 다르게 정적만이 감돌았다.
“잘…… 지내셨죠.”
“……네.”
“…….”
“예원 씨는요.”
“……뭐, 저도…….”
차를 타기 전, 멋쩍은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입에 거미줄이라도 친 듯 말이 없었다.
문득 예원의 눈길이 운전석에 앉은 그에게로 향했다.
다툼이 일어난 직후에는 활화산처럼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지만, 일주일 정도 지나니 그녀의 화도 어느 정도는 누그러져 있었다.
그러던 차에 어제, 남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일 좀 만납시다. 꼭 보여줘야 할 사람이 있어요.]
따로 사과를 하지 않은 건 괘씸했지만, 그렇다고 진짜 파혼을 할 것도 아니기에. 못 이긴 척 그를 따라나서기로 했다.
단, 진심으로 이 결혼을 재고해볼 여지도 있었다.
오늘마저 사과를 하지 않는다면.
‘흥. 어디 두고 보자고.’
굳게 결심한 예원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 날은…… 미안했습니다.”
마침 타이밍 좋게 남자의 사과가 돌아왔다.
예원의 얼굴은 금방 당황으로 물들었다.
“……네?”
“미안했어요, 그 날은.”
“…….”
“그 날은 내가 너무 감정적이었어요.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마음 상했다면 부디 용서해줘요.”
뭐, 뭐야. 갑자기 왜 이렇게 정중해?
당혹스런 예원의 눈치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다시금 말을 덧붙였다.
“옷, 지난번이랑 똑같네요.”
무심하게 지나치는 것 같더니 그래도 용케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럼, 개시도 한 번밖에 못 했는데 뽕은 뽑아야지. 무려 7만 5천 원짜린데.’
사실 이 옷 말고는 딱히 격식을 차릴 수 있는 옷이 없기도 하고.
“……네.”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돌린 그가 담백하게 미소 지었다.
“예쁘네요.”
‘예쁘다고?’
옷이 예쁘다는 건지, 아니면 그녀가 예쁘다는 건지. 영 분간이 가지 않는 말이었다.
어느 쪽이든 절로 볼이 화끈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예원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근데, 오늘은 어떤 분을 뵈러 가는 거예요? 나한테 꼭 보여줘야 할 사람이라면서요.”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금방 답을 내놓았다.
“……우리 엄마요.”
“네?”
“…….”
“어…… 어머님은 저번에……?”
뵈었잖아요.
문장의 끝은 그녀의 속에서 맺어졌지만, 그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계속해서 운전할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이랑 조금 다른 방향인 것 같기는 한데…….’
뭐지. 뭘까.
.
.
그렇게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살짝 외딴 곳에 자리한 주택이었다. 저번의 그 집보다는 못 하지만 또 꽤나 번듯한 집.
별 무리 없이 안으로 입성한 그들은 곧 정체 모를 남자의 환대를 받았다.
“어, 민혁이 왔구나. 어서 와라.”
“안녕하세요, 아저씨. 잘 계셨죠?”
“그럼. 근데 이 쪽은……?”
“아, 예. 제 아내 될 사람입니다.”
“오, 그래. 반가워요.”
“……안녕하세요.”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인사부터 하고 보는 게 예의지.
남자를 뒤로한 두 사람은 이윽고 안방으로 보이는 곳 앞에 다가가 섰다.
민혁이 선뜻 문을 똑똑 두드렸다.
“엄마.”
“응, 들어와.”
‘열어봐요.’
그가 말없이 눈짓했다.
‘후. 이거 이상하게 떨리네.’
잠시 뒤, 예원은 조심스레 문고리를 잡고 당겼다.
그리고 마침내 마주한 그 안에서는…….
“왔구나. 어서 들어와.”
“…….”
“어서 와요, 예원 씨.”
‘국민 엄마’라 불리기도 하는 여배우, 채수진이 그녀를 향해 웃고 있었다.
햇살과도 같은 함박웃음을 머금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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