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 좋아질 수 없는 남자-19화 (19/102)

19화. 저한테 왜 화내시는 거예요?

2018.06.08.

“예. 아, 물론 그래주시면 저희야 감사하죠. ……네, 그럼 일단은 신랑신부랑 상의해본 후에 추후 다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 예, 들어가십쇼.”

기나긴 통화가 드디어 끝난 순간.

“후.”

액정을 확인하던 성환은 진력이 난 얼굴로 옆자리에 폰을 툭 내던졌다.

“현민혁 네가 확실히 뜨기는 떴구나.”

그 말에, 며칠 뒤 찍을 CF의 콘티를 확인하고 있던 민혁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보면 모르냐?”

성환의 턱이 옆에 놓인 폰을 가리켰다.

“천하의 현민혁 님께서 결혼을 하신다니까, 초대형 웨딩 업체서부터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곳에서까지 극진한 협찬 제의가 마구마구 쏟아지고 있잖냐. 사람 감당도 못하게.”

그의 결혼 기사가 언론에 뜬 것은 불과 어제였다.

그리고 오후를 넘기기가 무섭게, 민혁의 유명세에 어떻게든 업혀가 보려는 업체들의 달콤한 속삭임이 줄을 지어 이어졌다.

물론 대부분의 연락은 다행히 소속사 홍보팀 선에서 마무리되었다지만, 그럼에도 하루 새 성환에게 쏟아진 전화만 무려 몇 십 통에 달할 정도였다.

본격적으로 일이 잘 풀리기 시작한 때가 아직도 엊그제 같기만 한데.

이럴 때마다 성환은 피곤하면서도 새삼 감개무량해지곤 했다.

“…….”

허나 당사자인 민혁은 늘 그렇듯 별 흥미 없이 눈을 돌렸다.

“적당히 둘러대고 잘 거절해. 신영호텔에선 뭐래?”

“네 이름 대니까 바로 된다고 하지, 뭐. 그 날은 어떻게든 스케줄 비울 테니까 오시기만 하라고 막…….”

“잘됐네. 그럼 거기로 픽스 시켜.”

“어. 신혼집은 어떡할 거야?”

“필요 없어. 우리 집 있잖아.”

“애프터 파티는.”

“그런 거 안 해. 본식 1, 2부로 끝낼 거야.”

짤막짤막하게 답한 그가 마지막으로 성환을 쳐다보았다.

“힘들겠지만 형이 신경 좀 써줘. 메이크업이나 드레스 같은 건 최대한 그 사람 취향대로 맞춰주고.”

“걱정 마라.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쫙 포진해 계시는데, 뭐.”

소속사 식구들에게 결혼 사실을 공표하던 날,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단호하게 못 박던 민혁의 모습이 성환의 눈앞에 또렷하게 떠올랐다.

‘결혼식은 무조건 신부 맞춤형으로 갈 겁니다. 세상에서 제일 멋진 것까진 아니더라도 꽤나 폼 나는 결혼식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그러니, 부디 협조 좀 부탁드립니다.’

만날 나무토막 같기만 하던 녀석이 어느 새 자기 색시 챙긴답시고 저러고 있다니.

‘짜식, 네가 진짜 결혼을 하긴 하려는 모양이구나.’

성환은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흐뭇한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처음엔 좀 걱정했는데, 좋은 사람 같더라. 네가 신붓감을 골라도 아주 제대로 골랐어.”

“…….”

“예원 씨 말이야.”

빈말이 아니었다.

민혁을 통해 비로소 만나게 된 신부는 정말 딱 그 나이답게 발랄하고, 착하고, 예뻤으니까.

민혁이 왜 그렇게 홀랑 넘어갔는지 알 수 있었을 만큼.

“…….”

하지만 부끄러운 건지, 무심한 건지. 시선을 내리깐 그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부모님한텐 인사 안 시킬 거야?”

슬금슬금 그의 눈치를 보던 성환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아주 절연할 것도 아니면서 어쩌려고.”

‘부모님’ 얘기엔 늘 같은 반응이다.

그 상태 그대로 묵묵부답이던 민혁은 잠시 뒤에야 고개를 들었다.

“……맘속으론 이미 수십 번도 넘게 절연했어. 내 뜻대로 안 되는 건 그것만으로도 족해.”

“…….”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좀 이따 차 보내는 거나 잊지 마.”

……하여간에 짤 없는 자식 같으니라고.

“그래, 알았다.”

그때, 테이블에 놓여있던 그의 폰이 연이어 부르르 떨었다. 메시지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민혁은 무심한 표정으로 폰을 들었으나, 이내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홍예원’ [저기…… 저 지금 어머님께 가는 중인데]

‘홍예원’ [민혁 씨는 언제 와요?]

‘홍예원’ [혼자서는 좀 무서운데ㅠㅠ]

‘홍예원’ [최대한 빨리 오면 안돼요?]

좀 이따 만나기로 한 계약 신부에게서 도착한 메시지.

그런데 그 내용들이 어째 죄다 이상했다.

내가 여기 있는데, 이 여잔 지금 혼자서 어딜 가고 있다는 걸까.

“형. 차 벌써 보냈어?”

“아니? 네가 나중에 보내라며. 왜, 보내지 마? 제수씨가 혼자서 가겠대?”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가만.

그는 잠시 휴대폰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뭔가를 깨달은 듯,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변했다.

“……형.”

“뭐, 또 왜.”

그에게서 어느덧 심각해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당장 차 빼와. 갈 데가 생겼어.”

* * *

한편 그 시각, 예원은 쭈뼛쭈뼛 차에서 내린 뒤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와, 서울에 이런 데도 다 있었네.’

실은 그녀도 알고는 있었다. 이 일대가 예로부터 서울의 소문난 부촌이라는 것을.

다만 올 일이 없었기에 관심도 없었을 뿐이었다. 사람 사는 데가 다 거기서 거기겠지,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기도 했었고.

그런데 실제로 맞닥뜨리고 보니, 그 위용은 실로 대단했다.

TV 속에서나 나올 법한 번쩍번쩍한 주택들이 주욱 늘어서 있는 동네.

정치인이나 재벌, 뭐 그런 식으로 한 따까리 하는 사람들이 떼 지어 살고 있을 것 같은 곳이었다.

‘아니 그럼, 설마 그 남자 부모님이 그런 사람들……?’

……에이, 아니겠지.

그런 거라면 뭔 소문이 나도 진작 났을 터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현민혁’의 부모인데.

어쨌건 그가 말한 대로 차를 얻어 타고 오기는 했지만, 예원은 오는 내내 뭔가 이상하고 찝찝한 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중요한 자리라고 특별히 사 입은 원피스 또한 그 불편함을 더욱더 가중시켰다.

“어서 오세요. 사모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

“이쪽으로.”

그런 기분은 기사의 안내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 가정부 아주머니로 보이는 분을 마주하고도 여전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예원의 얼굴엔 별안간 이채가 띠었다.

“아.”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중년의 여자가 빠끔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민혁의 엄마, 표라희는 그 길로 곧장 일어나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어서 와요.”

생각했던 것보다 무척 젊고 세련돼 보이는 인상.

예원은 긴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 올린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뒤 살짝 놀란 눈을 했다.

‘저 분이, 그 남자 어머니라고?’

그런 거치곤 얼굴은 전혀 안 닮았는데…….

“…….”

뭐 어쨌든, 1년간은 꼼짝없이 시어머니로 모셔야 할 분을 처음 뵙는 자리다.

예원은 무작정 잘 보여야겠다는 마음으로 여자를 향해 꾸벅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호, 홍예원이라고 합니다.”

붉은 립스틱이 발린 라희의 입가에 다시 한 번 뜻 모를 미소가 띠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이리로 앉아요.”

“……네.”

여자의 옆으로 간 예원이 머뭇머뭇 소파에 착석하자, 앞에 놓인 테이블에는 기다린 것처럼 다과가 차려졌다.

“여기까지 오느라고 수고가 많았어요.”

“……아닙니다. 덕분에 편히 왔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으, 겁나 어색하네.’

겸연쩍어진 그녀가 괜스레 찻잔을 들어 홀짝이고 있을 무렵.

나긋한 여자의 목소리가 그녀를 깨웠다.

“그래, 우리 민혁이랑…… 결혼할 아가씨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라희는 조곤조곤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렇게 불쑥 연락해서 미안해요. 실은, 나도 좀 놀랐거든요. 안 그러던 애가 이렇게 갑자기 결혼을 하겠다고 나설 줄은…….”

“…….”

“대체 어떤 아가씨길래 그러는 걸까 궁금했는데, 정작 민혁이한테선 통 아무 말이 없더라고.”

“……아.”

‘하긴, 인사도 안 드렸는데 대뜸 결혼 기사부터 나갔으니.’

여자의 입장에선 충분히 언짢을 수도 있는 일이었으리라.

예원은 눈치껏 얼른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먼저 얼른 찾아뵙자고 했어야 되는 건데…….”

하지만 여자는 옥구슬 같은 웃음소리와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호호, 아니에요. 젊은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지. 어쨌든 이리 봤으니까 됐어요. 원래 우물도 목마른 사람이 파는 거라고 그러잖아요?”

다 이해하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하는 말 같기는 한데.

‘난 왜 저 말이 더 뼈 있게 들리는 걸까.’

밀려드는 난처함에 예원의 정수리가 뜨끈해졌다.

“참. 근데 혹시, 나이가?”

“아, 네. 저…… 스물일곱입니다.”

“아아, 아직 나이가 좀 어리구나. 스물일곱이면, 우리 민혁이랑은 네 살 차이?”

“네.”

“어쩜, 나이차도 딱 좋네. 네 살 차이는 궁합도 안 본다는데.”

사실이긴 했지만 그런 것까지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어차피 진짜 결혼도 아닌 터라.

그녀가 다시 한 번 어색하게 웃는 사이, 약간의 머뭇거림과 함께 또 다른 질문이 돌아왔다.

“그럼, 양친께선 지금 어떤 일을……?”

순간, 예원의 가슴은 저도 모르게 철렁 내려앉았다.

‘……에잇. 방심했네.’

그렇게나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이런 질문엔 좀처럼 익숙해질 수가 없다.

예원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답했다.

“어렸을 때…… 두 분 다 돌아가셨습니다.”

“어머.”

라희는 그제야 제 실수를 깨달은 듯 입술을 슬쩍 벌렸다.

“아유, 미안해요. 내가 괜한 걸 물어봤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예원은 시선을 떨어뜨린 채 조용히 입술을 감쳐물었다.

내내 잠잠하기만 하던 가슴이 오랜만에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

졸지에 다시 또 무거운 침묵이 흐를 뻔했지만, 라희는 다행히 금방 그것을 깨뜨리고 들어왔다.

“저기…… 근데 내가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둘이 도대체 어떻게 만나게 된 거예요? 기사로 보니까 예원 양은 완전히 일반인이라든데. 둘이 만날 접점이 있었던 건가?”

“아.”

방금 전과 달리 이번엔 수월하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

예원은 반가운 마음에 냉큼 입을 열었다.

“네. 저, 그게…….”

그렇게 천천히 말을 고르던 그녀의 시선이 무심코 옆쪽 벽면에 가 닿았다.

“……어?”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녀의 눈은 곧바로 굴러 떨어질 듯 커다래졌다.

“응? 왜 그래요?”

“저, 저 분은……?”

그 곳엔 어느 중년 남자의 사진이 액자에 끼워진 채로 자랑스레 걸려 있었다.

아주 잘생겼지만 또 한편으론 무척이나 익숙한 남자.

“……아아, 민혁 아버지 보고 그러는 거예요?”

“저 분이…… 민혁 씨 아버님이세요?”

라희는 금세 새삼스러운 눈빛이 되었다.

“안 그럼 그 인물이 다 어디서 나왔겠어요. 다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거지.”

“…….”

“봐요. 예원 양이 보기에도 많이 닮은 편이잖아요?”

이럴 수가. 저 남자는…….

‘국회의원 현태균?’

다음 서울시장 자리의 유력 후보이자, 더 나아가 차차기 대권주자에까지 심심찮게 거론되고 있는 그 인물이 아닌가!

요즘 한창 주가가 상승하고 있는 정치인인 통에, 웬만한 대한민국 성인이라면 누구나 그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그 현태균이…… 그 남자의 아버지라고?

‘말도 안 돼……!’

예원의 눈치를 살피던 라희가 넌지시 물었다.

“설마, 민혁이가 얘기 안 해주던가요?”

얘기는 개뿔!

충격의 도가니에서 차마 헤어나오지 못한 예원은 겨우겨우 더듬거리며 대꾸했다.

“……네. 저, 저는, 전혀 모르고 있었…….”

그때였다.

─철컥.

“어머, 네가 여긴 갑자기 어쩐 일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당황한 듯한 가정부 아주머니의 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길쭉한 인영이 두 여자 앞에 뚜벅뚜벅 모습을 드러냈다.

“…….”

뚜렷한 이목구비, 그리고 서늘한 눈빛.

예원의 연락을 받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온 민혁이었다.

“민혁 씨!”

때마침 등장한 남자를 보며 예원은 놀란 눈을 했다.

반면, 라희는 마치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태연하게 반응이었다.

“……어, 민혁이 왔구나. 오랜만이다.”

“…….”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니.”

민혁의 눈이 대답 대신 여자를 강렬하게 쏘아보았다.

뭐라도 말할까 싶던 그는 이내 입술을 꾹 다물더니, 예원의 옆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차갑게 읊조렸다.

“일어나요.”

“……네?”

“일어나라구요.”

아니, 어머님 뵌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저, 저기…….”

“일어나란 소리 안 들려요?”

여자의 눈치를 본 그녀가 주춤했지만, 그대로 그냥 버티고 있기엔 남자의 기세가 너무나도 고압적이었다.

‘……이 남자가 왜 이래, 어머님 앞에서.’

예원은 하는 수 없이, 일단 눈치를 보며 미적미적 일어났다.

한데 그 순간.

─턱.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손이 예원의 손을 휙 낚아챘다.

“……!”

손가락 사이사이로 얽혀드는 온기.

몹시 적나라한 그 감촉에 예원은 본능적으로 움찔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생각 이상으로 큼지막하고 따뜻한 손이었다.

“……흐음.”

한편, 소파에 앉은 라희는 여전한 미소를 띤 채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오자마자 또 왜 이러니. 그러지 말고 너도 이리 와서 잠깐 앉아봐, 민혁아. 응?”

퍽 사근사근한 권유였지만, 그는 예원의 손을 꽉 잡은 채 딱딱하게 물었다.

“……이 사람은 왜 데려오신 겁니까. 저한텐 말도 없이.”

이런 반응쯤이야 이미 예상한 일이다.

그에게서 느긋하게 시선을 떼어내던 라희가 찻잔을 집어 들며 피식 웃었다.

“말하면, 네가 보여줄 생각은 있었니?”

“…….”

“그래도 우리 가족이 될 앤데…… 얼굴 정돈 미리 봐둬야지. 며느리를 식장에서 처음 보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

“안 그래?”

말을 마친 여자가 차를 홀짝 들이키자, 민혁의 입가에는 일순 비틀린 웃음이 띠었다.

지금껏 예원이 봐온 얼굴 중에 가장 차가운 얼굴.

“누가, 초대해드린다고 했습니까?”

라희의 몸짓이 우뚝, 멈추었다.

머금고 있던 미소 또한 싹 사라졌다.

“뭐?”

그는 예의 시니컬한 표정으로 가볍게 말했다.

“애초에 식장에서 뵐 생각 없었는데. 혼자 너무 앞서나가셨네요.”

“…….”

“……아, 혼자도 아니셨겠네. 당연히 아버지랑 상의하고 벌인 일이셨을 텐데.”

“민혁아.”

그 이름이 불리기가 무섭게, 꽉 잡힌 손에도 그만큼의 힘이 들어갔다.

흠칫 놀란 예원은 다시금 민혁을 쳐다보았다.

“이제 와서 굳이 그렇게 애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아무도 모르는 판국에, 피차 성가시기만 할 뿐이에요.”

“…….”

“그러니까.”

그의 입술 끝이 살짝 떨렸다.

“다시는 이런 식으로 이 사람 호출하지 마십시오. 인사는, 식 끝나면 나중에 따로 드리든지 하겠습니다.”

“…….”

“가요, 예원 씨.”

“네? 아니…….”

예원의 눈이 얼떨떨하게 깜빡였다.

‘이대로 가면 내 이미지가 뭐가 돼!’

하지만 남자는 이미 결심한 듯 막무가내였고, 그 힘이 너무 막강한 탓에 그녀는 속수무책으로 딸려갈 수밖에 없었다.

“저, 저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쾅!

다시금 문이 닫혔다.

일순 모든 것이 조용해져 있었다. 마치 한바탕 폭풍이 쓸고 지나가 버린 것처럼.

“…….”

진즉 이렇게 될 줄은 알았지만…….

그들이 사라진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라희는 이내 고개를 제자리로 돌렸다.

그리고 가벼운 웃음을 흘리곤, 남은 차를 마저 들이키기 시작했다.

* * *

“민혁 씨! 잠시만요, 이것 좀 놔봐요!”

“…….”

“네? 민혁 씨!”

“…….”

“사장님!!”

남자는 정원을 지나 대문 코앞에 다다르고 나서야 멈춰 섰다.

그녀의 손이 비로소 자유로워진 것도 그때였다.

“……휴.”

겨우 한숨을 돌린 예원은 사장 놈의 손아귀에 무자비하게 사로잡혀 있던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비록 빨개져 있거나 하진 않았지만, 남자의 손과 어찌나 밀착해있었는지 땀이 흥건히 배어 있었다.

‘갑자기 이게 뭐야. 다짜고짜 쳐들어와서는.’

일순 팍 짜증이 났다.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일을 이렇게 만들어 놓으면 뭘 어쩌잔 건지.

“사장님. 갑자기 왜 이러세요? 딴 데로 가는 건 좋은데, 이유나 좀 알고 가자고요.”

“…….”

“이 상황에 대해서 할 말이 있을 거 아니에요. 무작정 사람부터 끌고 가면 다예요?”

그녀를 등지고 선 남자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대신 그는 뭔가가 맘에 들지 않는 듯, 잠시 뒤 예원을 곱지 않은 눈길로 돌아보았다.

“여긴 대체 왜 온 겁니까.”

“……네?”

……참나. 지금 그걸 몰라서 묻는 건가?

“왜냐니요!”

‘수요일에 어머님 봬야 되니까 시간 비워놓으라고 한 건 당신이었잖아!’

뱉지 못한 말이 그녀의 속에서 웅웅거렸다.

“내가 연락할 때까지 집에서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왜 멋대로 단독행동을 하냐구요.”

“그, 그건…….”

석고상처럼 딱딱한 얼굴을 한 남자에게선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져서, 예원은 저도 모르게 우물쭈물 대답했다.

“아니, 전…… 어머님이 손수 전화하셔서 오늘 시간 있으면 좀 볼 수 있냐고 하시길래…… 좀 있으면 차도 곧 도착할 거라고 그러시고, 그래서 할 수 없이…….”

“…….”

“그 차, 사장님이 보내주신 거 아니었어요?”

후.

숨을 뱉는 모양새가 딱 봐도 아니라는 것을 온몸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왜 바로 얘기 안 했습니까. 그 일 있자마자 바로 전화했어야죠.”

“뭐 하러 그래요? 어차피 오늘 어머님 뵈러 가기로 한 거였는데. 이미 알고 있으니까 굳이 말 안 해도 될 줄 알았죠.”

“…….”

“그래도 혹시 몰라서 가는 도중에 메시지 남겼잖아요.”

너무 억울한 나머지 말끝에 살짝 울분이 섞였다.

난 엄연히 할 거 다 한 입장이라고!

“……알았어요. 알겠으니까, 앞으론 절대 내 말 없이 움직이지 마요.”

“…….”

“알았습니까?”

하지만 그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남자의 입가는 마뜩잖게 일자를 그렸다.

그녀가 마치 아랫사람이라도 되는 양 꾸중하는 말투.

얼음장처럼 차갑기만 한 목소리.

“…….”

예원은 순간 의문이 들었다. 또한 울컥하는 마음도 일었다.

‘내가, 지금 이런 말을 왜 듣고 있어야 되지?’

“……근데요. 저 지금 좀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지금 여기가 에덴도 아니고. 내가 이 남자한테 왜 이렇게 쩔쩔매야 돼?

내가 대체 뭘 잘못했다고?

“사장님, 저한테 지금 왜 화내시는 거예요?”

예원의 눈에 바짝 날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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