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꼭 만나야 할 사람
2018.06.05.
“……예쁘니까.”
‘어라?’
지원의 당황스런 눈치에도, 뻔뻔한 얼굴의 남자는 이내 천연덕스럽게 덧붙였다.
“동생이니까 더더욱 부정할 수 없겠지. 예쁘잖아, 누구나 한 번쯤 돌아볼 만큼. 그게 우선 첫 번째 이유야.”
그래도 예의상 다른 이유를 먼저 꼽을 줄 알았다.
성격이 좋다거나, 착하다거나. 뭐 그것도 아니면 일하는 모습에 반했다거나.
그런데 설마하니 ‘예쁘니까’ 같은 이유를 대놓고 첫 번째로 들이댈 줄이야!
지원은 한순간 혼란스러운 눈빛이 되어있었지만, 민혁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둘째.”
“…….”
“같이 있으면…… 재밌어.”
이 또한 사실이다.
가끔은 예상치 못한 엉뚱함에 뻘하게 터지기도 하고, 가끔은 그냥 하는 짓이 귀여워서 웃게 되기도 하고.
이유가 뭐든지 간에 여자는 그를 웃게 하는 재주가 아주 탁월했으니까.
마지막으로 그는 쐐기를 박듯 꾹꾹 눌러 말했다.
“셋째. 내가 본 사람 중에 자기 일을 최고로 사랑하는 사람이야. 여자로서도, 부하직원으로서도. 꽤 매력적이라고, 너희 누나.”
“…….”
“벌써 세 개 했네. 더 해줘?”
그런 뒤 남자는 거만하게 팔짱을 꼈다.
“이걸로 부족하면, KBC <연예집중> 982회 한 번 구해서 보든지. 내가 자세히 인터뷰한 거 있으니까.”
약간, 한 방 맞은 느낌.
지원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뭐야, 이거.’
사실,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답이 돌아올 줄 알았던 지원이었다. 남자의 눈에 제가 얼마나 조무래기처럼 보일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남자는 제 생각 이상으로 성의 있는 대답을 내놓은 데다 무척이나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누나를 향한 마음이 정말 진심이기라도 한 것처럼.
‘설마 이 남자가, 진짜 우리 누날……?’
알쏭달쏭. 오리무중.
지원은 멍해진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건 그렇고. 나도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물어봐도 되나?”
“…….”
“너 혹시…….”
그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기타 칠 줄 알아?”
“……!”
방심하던 지원은 흠칫 놀랐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문장을 손수 마무리 지어준 그가 웃음기 띈 얼굴로 지원의 손 쪽을 눈짓하며 말했다.
“앉아서 공부만 한다는 애가 그런 데 굳은살이 있는데 빤하지. 내가 잘 아는 놈도 똑같은 자리에 굳은살이 있거든. 간혹 부딪칠 때마다 느낌이 아주 안 좋아. 꼭 돌덩이에 부딪치는 느낌이더라고.”
이윽고 그가 넌지시 턱짓했다.
“쟤 말이야.”
그가 가리킨 벽에는 또 다른 포스터가 있었다.
콘서트 장에서 마이크를 든 채, 땀 흘리고 있는 모습이 클로즈업된 유명 남자가수의 포스터.
“정재하. 내 친구야.”
그를 확인한 지원은 삽시간에 토끼 눈이 되어있었다.
눈앞의 아이와 똑 닮은 그 누나를 결국 설득해냈을 때처럼, 민혁은 밑지는 셈치고 미끼를 하나 던져보기로 했다.
“조만간 시간 한 번 낼래?”
아주 가볍게.
“원하면 소개시켜 줄게.”
그의 까다로운 처남조차, 절대로 거부할 수 없을만한 미끼를.
* * *
“아까 제 동생이랑 무슨 얘기하셨어요?”
화려한 첫 소개를 마치고 예원의 자취방으로 향하는 길, 궁금한 얼굴을 한 그녀가 물었다.
“그냥, 이런저런 얘기.”
예의 뜻 모를 미소를 짓던 민혁은 대뜸 물었다.
“홍예원 씨는 동생에 대해서 얼마나 안다고 생각해요?”
……갑자기 뭐 저런 질문을?
대답은 않고 오히려 되물어오기나 하는 남자가 뭔가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입술을 쭉 내민 채 생각해보던 예원은 이내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뭐…… 모르는 게 없죠. 걘 옛날부터 뛰어봐야 제 손바닥 안이었거든요. 음하하.”
“…….”
“근데…… 그건 왜요?”
남자의 얼굴은 그새 더더욱 알 수 없게 변해 있었다.
“아니에요. 때 되면 알 수 있겠지.”
“……네?”
미지근한 의문이 남긴 했지만, 어차피 궁금해 한다고 친절히 대답해줄 남자도 아니다. 그것은 그녀가 짧은 시간동안 그에 대해 학습한 내용 중 하나였다.
덕분에 빠른 포기를 한 예원은 바로 화제를 돌렸다.
“아, 참. 아까는 이모가 실례했죠. 죄송해요.”
“…….”
“자제시키려고 했는데, 우리 이모가 워낙 연예인이랑 드라마를 좋아해서…….”
저녁 때 한 번이었으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은아는 저녁을 다 먹고 나서도 한참동안이나 민혁을 붙잡고 있었다.
궁금한 게 뭐가 그리도 많은지. 그냥 옆에만 있었던 예원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어야 할 정도였다.
그냥 계약으로 묶였을 뿐인 남자가 뭐라 말도 못하고 얼마나 짜증이 났을까.
“…….”
그러나 지금, 그녀의 예상과 달리 남자의 입가엔 오히려 미미한 미소가 띠어있었다.
“덕분에 맛있는 밥도 먹고 실컷 대접받고 왔는데, 그 정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죠. 괜찮습니다.”
“…….”
“일찍 가길…… 잘한 것 같아요.”
웬일인가 싶은 듯 저에게로 와 닿는 여자의 시선을 민혁은 애써 외면했다.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듯 말했지만, 그건 사실 그의 오롯한 진심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가족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간 느낌.
언제 마지막으로 느껴봤는지도 까마득한 감정이지만, 그는 오늘 진심으로 기뻤었다.
비록 그것이 남의 가족 안이었을지라도.
“…….”
그가 곰곰이 생각을 곱씹던 그때, 예원이 불쑥 입을 열었다.
“저기, 근데요…….”
“네.”
“혹시…….”
그녀답지 않게 질문에 머뭇거림이 있었다.
의아해진 그가 조수석 쪽을 슬쩍 돌아보자, 그제야 그녀는 재빨리 물었다.
“박해준이랑 진짜 친하세요?”
아, 난 또 뭐라고.
“아뇨. 안 친해요.”
“……근데 왜 친하다고 하셨어요?”
여자야 당연히 모르겠지만, 그가 ‘친하다’고 말하는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절친한 사이까진 아니라도 알고 지내는 사이는 맞으니까. 사인 같은 거야 얼마든지 구해다 줄 수 있죠. 어려운 일도 아니고.”
기껏 대답해주었건만 여자는 여전히 의문스러운 듯한 얼굴이었다.
“박해준 실제 성격 또라이라던데. 진짜예요? 그래서 안 친한 거예요?”
“누가 그래요?”
“그냥…… 소문이.”
이 여자는 대체 어디서 그렇게 소문을 주워듣고 오는 건지.
어쨌든 사실이긴 했지만, 그는 그 사실을 굳이 긍정하지 않았다.
“그 형 아니라도 어차피 이쪽은 죄다 또라이 천지예요. 성격파탄자도 더럽게 많고. 안 그런 사람은 살아남기가 힘든 바닥이거든.”
“…….”
“그러니까, 웬만하면 안 믿는 게 좋아요. 분칠한 사람들.”
‘……분칠한 사람들?’
그의 말을 듣던 예원의 눈빛이 일순 짓궂게 변했다.
“그 말은, 사장님도 믿지 말라는 얘긴가요?”
……아, 그게 또 그렇게 되나.
잠깐 멈칫하던 민혁은 이내 무덤덤한 얼굴로 덧붙였다.
“아뇨, 나만 빼고.”
“……쳇.”
‘오빠 말고는 다 늑대야, 같은 소리하고 있네.’
예원의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렸다.
어쨌든 그러는 사이, 그들은 금세 또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암튼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네, 들어가요.”
생긋 웃은 예원이 곧장 차 밖으로 나갔고, 혼자 남은 민혁은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시점에서 번뜩, 그가 눈을 치켜떴다.
‘아, 맞다.’
지체 없이 차문을 열어젖힌 그가 차에 몸을 반쯤 걸친 채로 그녀를 불렀다.
“홍예원 씨!”
‘어우, 깜짝이야!’
공동 현관문을 열던 예원은 화들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왜,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
꽤 놀라울 만도 했다. 이제껏 그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으니까.
그녀가 무사히 집에 들어가는 걸 본 뒤엔 곧바로 이곳을 쌩 벗어나버리곤 했었는데.
“……아뇨, 그런 건 아니고.”
“…….”
“다음주 수요일에, 혹시 근무 있습니까?”
대뜸 건네진 질문이 의아했다.
예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뇨? 아마 없을 텐데요.”
“……그럼 그 날, 시간 좀 비워둬요.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
꼭 만나야 할…… 사람이라.
“그게 누군데요?”
눈을 내리깐 채 살짝 머뭇거리던 그가 금방 말을 이었다.
“우리 엄마요.”
“……네?”
예원은 순간, 제가 잘못 들은 거란 생각에 눈을 깜빡거렸다.
‘엄마라고? 아까 전에 부모님은 다 돌아가셨다고 하지 않았던가?’
뭐야, 이 남자. 앞뒤가 안 맞잖아!
“내일 모레 집 앞으로 차 보낼 테니까 그거 타고 와요. 보내기 전에 전화할게요.”
“…….”
“아, 그리고.”
그녀가 딜레마에 빠진 사이, 민혁은 지나가듯 무뚝뚝하게 덧붙였다.
“……문단속, 잘하고 자요.”
“…….”
“위험하니까.”
그 상태 그대로 멈춰선 예원은 그를 새삼스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남자에게서 처음 듣는, 염려 섞인 당부가 영 낯설게 느껴진 탓이었다.
“…….”
그는 또다시 옅은 웃음을 지었다.
“갈게요.”
그의 차가 떠나버린 이후에도, 예원은 그 자리에 서서 잠시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저 남자가, 왜 저러지?
‘……꼭, 진짜 남자친구 같이.’
어머. 뭐래?
불현듯 든 생각에 예원은 머리를 파바박 흔들었다.
‘진짜 남자친구는 무슨!’
애먼 착각은 이 계약에 하등 도움이 될 것이 없었다.
‘역시, 안 물어보길 잘했어.’
박해준이 또라이인지 아닌지는 전혀 궁금한 게 아니었다.
사실은……
‘……조혜인이랑 무슨 사이예요? 혹시…….’
그 여자랑 껄끄러운 사이인 거냐고. 그렇게 물어보고 싶은 거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어쩐지……
한낱 ‘계약직 아내’ 주제에 감히, 선을 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하긴, 내가 뭐라고. 자기가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
에이, 몰라.
입술을 다문 채 한숨을 내쉬던 예원은 서둘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
.
한편, 다시 도로 위로 나온 그는 방금 전 제가 했던 말을 떠올리곤 피식 웃었다.
‘……문단속, 잘하고 자요.’
애초에 그런 말 따윈 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계약으로 묶인 관계에, 그 여잘 상대로 굳이 그런 예의까지 차릴 필요는 없었으니까.
다만…….
‘가끔 애가 좀 까탈스럽게 굴 때가 있어서 그렇지 본성이 못된 애는 아니니까, 옆에서 잘 좀 챙겨줘요. 응?’
순간 그녀의 이모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예 안 들었으면 모르지만, 들은 이상은 신경이 쓰였다.
거창한 부탁도 아니고. 그런 말 한 마디 건네는 것쯤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챙겨줄 수도 있지, 뭐.”
그래도 내 아내가 될 여잔데.
어찌 됐건 그 여자라면, 수진도 분명 맘에 들어할 것이다.
잠시 착잡한 표정을 짓던 그는 이내 차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 * *
“……야. 김지영.”
“…….”
“괜찮냐, 너?”
예원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앞에 앉은 지영은 벌써 몇 분 째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매니저님, 사장님한테서 전화 왔는데요?”
바 안쪽 사무실에서 달려 나온 알바생이 사장까지 들먹이며 지영을 호출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박제된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야, 안 가? 사장님한테 전화 왔다잖아.”
“넌 닥치고 있어봐, 좀.”
“……응.”
예원의 입술이 곧장 다물어졌고, 멍해있던 지영은 그제야 그녀를 똑바로 쏘아보며 물었다.
“네가, 현민혁이랑 결혼을 한다고?”
“……어.”
“예원이 네가…… 현민혁이랑?”
“그렇다니까.”
심각한 표정을 짓던 지영이 다짜고짜 예원의 손을 잡아끌었다.
“야, 나 좀 꼬집어 봐봐.”
“뭐? 왜.”
“꿈인 거 같으니까 좀 꼬집어보라고.”
엥?
“야, 무슨 그런 걸…….”
“아, 빨리!”
……이게 뭔 짓이야, 진짜.
성화에 못 이긴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지영의 유니폼 입은 팔뚝을 있는 힘껏 꼬집었다.
“아!!!”
그 순간, 곧바로 지영의 손이 예원의 손을 철썩 강타했다.
“야! 진짜 꼬집으면 어떡해! 아이씨, 졸라 아프네!”
“……아니, 네가 꼬집어 달라며!”
이 기집애는 태세전환이 왜 이렇게 심해?
졸지에 한 대 얻어맞은 예원이 억울해하는 사이, 짜증스럽게 팔뚝을 문지르던 지영은 다시금 몽롱한 눈빛이 되어 있었다.
“와…… 미쳤다, 진짜. 난 평생을 덕계못으로 살 줄 알았는데. 이게 웬일이야.”
“덕계못? 그게 뭐야.”
그녀로선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넌 그 나이 돼서 그것도 모르냐? ‘덕후는 계를 못 탄다.’ 이거잖아.”
“……근데 그게 지금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
아, 진짜.
지영은 매우 가소롭다는 눈빛을 한 채 그녀를 쳐다보았다.
“만날 모니터로만 보던 얼굴을 실제로 영접할 수 있게 된 거 아냐! 그것도 친구 남편으로!”
완전 대박이다, 진짜! 어떡해!
평소 매니저로서의 체신머리를 지켜야 한다며 점잔을 빼던 지영은 웬일로 제 매장 안에서 대놓고 난리법석을 떨어댔다.
생각 외의 반응에 오히려 당황스러운 건 예원이었다.
뭐지, 이거. 뭔가 이상한 거 아니야?
“너…… 화 안 내냐?”
한껏 기뻐하던 지영은 대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화? 무슨 화.”
“…….”
“내가 왜 화를 내야 되는데?”
그 말에 예원은 더더욱 어리둥절해졌다.
“아니…… 내가 현민혁이랑 사귄다니까? 현민혁이 우리 카페 사장인데다가…… 사귄 지 벌써 한 달도 넘었고 곧 결혼도 한다고.”
“그래. 근데 그게 뭐.”
예원을 쳐다보던 지영이 그제야 알겠다는 얼굴을 했다.
“아…… 질투 안 나냐고? 너한테?”
“……어.”
지영은 별 꼴이라는 듯 콧방귀만 뀌었다.
“참내. 내가 질투를 왜 하냐? 내가 현민혁이랑 사귈 것도 아닌데.”
“……그래도, 너 그 사람 되게 좋아했잖아. 만날 잘생겼다고 노래 부르고. 아니야?”
내가 기억을 조작하기라도 한 건가. 분명히 맞는데…….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예원을 보며, 지영은 호탕하게 웃더니 말했다.
“야, 그거야 그냥 팬심이지. 요즘은 그것도 시들해져서 휴덕한 지 좀 됐는데?”
“……아, 그래?”
“어. 그래도 이건 또 색다르네. 네 덕에 꺼져가던 불씨가 다시 타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지영은 간만에 재미거리를 발견한 듯 신나했다.
뭐, 생각했던 반응은 아니지만. 어쨌든 지영은 이만하면 이 상황을 아주 잘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된 거냐고 쏴대는 거보다야 차라리 이편이 훨씬 낫지.’
싱글벙글대는 친구의 얼굴을 보며 예원은 그나마 안심했다.
“아, 맞다. 근데 그럼…… 저번에 네가 말했던 그 또라이는 잘 해결한 거야?”
“어?”
“아, 왜 있잖아. 그, 너한테 계약연애니 뭐니 개소리했다는 남자.”
……또라이?
“…….”
풉…… 푸하하하!
순간, 예원은 저절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차마 막지 못했다.
‘사기꾼에 꽃뱀에 또라이까지. 참 가지가지 한다, 진짜.’
지 우상이 바로 그 또라이인 줄도 모르고 막말을 해대는 애라니.
상황이 이렇게 절묘할 수가 없었다.
“아, 웃지만 말고 얘기 좀 해봐. 바로 퇴짜 놨지? 다시 안 들러붙디? 어?”
“……괜찮았어. 잘 해결됐으니까 걱정 마.”
진지하지 못한 반응에 인상을 쓰던 지영은 그제야 안도하는 얼굴을 했다.
“아, 다행이다. 난 또 걱정돼서 지원이한테 좀 물어봤는데. 그런 거였음 괜히 물어봤네.”
“……지원이한테?”
“어. 하기야, 상대가 현민혁인데 그런 또라이 놈하고 쨉이 될 리가 없지.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긴 하다. 네가 아무리 일반인의 외모는 아니라지만…….”
“…….”
“크으, 내가 친구 잘 둔 보람이 있다. 장하다, 내 친구!”
지영 딴엔 칭찬이랍시고 어깨를 툭툭 쳤지만, 예원은 전혀 기뻐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네가 지원이한테 뭐라고 했는데?”
“어?”
“…….”
“아니 그냥, 너 요즘 만나는 남자 누군지 아냐고……. 내 생각엔 또라이 아님 사기꾼한테 잘못 걸린 것 같은데, 뭐 좀 아는 거 있냐고 그랬지. 그냥 그랬는데……?”
“…….”
“왜. 지원이가 알면 안 되는 거야?”
지영의 눈을 보던 예원은 시선을 내리깔며 살짝 한숨을 쉬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예원은 문득 그가 지원과 함께 있었던 때를 떠올렸다.
‘그래서 그때 걔가 그렇게 적대적인 모습을 보였던 건가.’
그 남자가 그 사기꾼인 줄 알고?
“아무튼,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엔 젤 먼저 올라간다더니 네가 딱 그 짝이다. 민혁이랑 그렇게 되고 나서 땅굴 파고 들어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더니, 웬 초특급 업그레이드 민혁이를 데려올 줄 누가 알았겠어……. 어휴.”
“……초특급 업그레이드는 무슨.”
지영의 그 말은 예원으로 하여금 또 쓸데없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전민혁도…… 애는 괜찮았지. 딱 하나 있는 문제가 너무 거대해서 그렇지.’
이 와중에 아직까지 이런 생각을 하는 나도 참…….
괜한 생각에 절로 울적해지려 하던 그때.
때마침 예원의 폰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야. 나 잠시만 전화 좀.”
“어, 그래.”
그런데, 액정에 떠 있는 번호는 예원이 이제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번호였다.
본래 이런 전화는 잘 받지 않지만, 점장을 달고 난 후부터는 일부러라도 꼬박꼬박 받는 습관을 들인 그녀였다. 혹시나 거래처 등에서 전화가 올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어쨌든 목소리를 가다듬은 예원은 조심스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저, 홍예원 씨 핸드폰, 맞나요?]
“네…… 그런데요?”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이윽고 그녀의 귓가엔 중년 여자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섬광처럼 날아들었다.
[나, 민혁이 엄마 되는 사람인데. 시간 괜찮으면 우리, 오늘 좀 볼 수 있을까요?]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