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 좋아질 수 없는 남자-10화 (10/102)

10화. 이 새끼가 바람을 피웠거든요

2018.05.08.

“왜. 뭔데 그래?”

“빨리 나와 보세요. 얼른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표정들로 보아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진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예원은 순간, 저도 모르게 민혁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에게는 매장에서 크고 작은 소란이 일어나는 게 매우 익숙한 일이라고 해도, 어딜 가나 사람들이 알아보는 연예인이자 신참내기 사장인 그에게는 그렇지가 않을 터였다.

“사장님은 여기 계세요. 제가 나가보고 올게요.”

남자를 뒤로한 예원은 다급히 사무실을 나섰다.

내심 끽해봐야 진상 손님의 클레임 정도이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나간 그녀를 반긴 것은,

“홍예원! 홍예원 빨리 나와!”

뜻밖에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중년의 여자였다.

그것도 그냥 중년의 여자가 아니라,

“……호오, 드디어 나왔네.”

다름 아닌…… 민혁의 어머니였다.

“어머니……?”

어머니.

‘엄마’란 단어조차 까마득했던 그녀가 그런 호칭으로 부른 유일무이한 상대.

“잘 지냈니?”

한데 여자는 ‘어머니’라고 지칭하기에는 너무나도 쌀쌀맞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평소처럼 고상하고 차분하기보다는, 어쩐지 매우 흥분해 있고 격앙돼 있는 것 같은 모양새.

아무것도 모르는 알바생들마저 그 분위기를 눈치 챈 나머지 슬금슬금 뒤로 빠지고 있을 정도였다.

“얼굴 참 좋아보이는구나. 아주 활짝 폈어.”

“어, 어머님께서 여, 여긴 어쩐 일로…….”

굳이 일터를 숨긴 적은 없지만, 여자가 이곳까지 발걸음한 것은 처음이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놀라웠다. 평소 자신의 직업을 무시했던 여자이기에 더더욱.

그런데, 예원의 더듬거리는 목소리를 들은 여자에게선 이내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 아들 그렇게 차고 잘 지내나 싶어서 보러 왔지. 보아하니, 내 생각보다 더 잘 지내는 것 같구나.”

“……네?”

저게 지금 뭔 소리야?

상황파악이 안 된 예원이 눈을 굼뜨게 끔뻑였다.

“너, 당장 이리와!”

무슨 상황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점장 신분으로서 매장이 떠나가라 소리치는 손님을 가만히 두고 볼 순 없었다.

예원은 치밀어 오르려는 화를 애써 누르며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지었다.

“죄송한데, 제가 지금 근무시간이어서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자중하시고, 이따 저녁에…….”

“자중? 너 지금 자중이라고 했니?”

그러나 여자는 수그러들기는커녕 코웃음을 치더니, 오히려 고개를 더욱 빳빳이 쳐들 뿐이었다.

“내가 지금 자중하게 생겼어? 하나뿐인 내 아들이 너 땜에 오늘 내일 하게 생겼는데?”

“……네? 그게 무슨?”

하나뿐인 내 아들이라. 그렇다면 전민혁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단 뜻일 텐데.

여자는 기어이 남들 앞에서 볼 장을 다 볼 속셈인 듯, 전혀 목소리를 낮출 기미도 없이 쏘아붙였다. 손님들이 그들을 힐끔거리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우리 민혁이, 너랑 그렇게 되고 나서 내내 아팠어. 이젠 밥도 안 먹고 내내 울기만 해. 다 죽어간다고! 근데 넌, 이렇게 멀쩡히 일도 다니고, 다른 남자도 만나?”

“…….”

“우리 민혁이가 너한테 얼마나 잘했는데! 이 고얀 것. 빨리 이리 나오지 못해!”

나오란다고 나가면 뭔 일이 일어날지 빤한 상황.

예원은 여자를 당황스럽게 쳐다볼 뿐,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를 한껏 노려보던 여자는 이윽고 부러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다. 네가 정 안 나오겠다면, 내가 가주는 수밖에.”

짝짝, 부러 손바닥을 터는 소리가 들리고. 그 다음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여자는 바 쪽으로 성큼성큼 들어서더니, 머리망으로 잘 감싸진 예원의 머리끄덩이를 거칠게 잡아챘다.

“으악!”

“점장님!”

깜짝 놀란 예원이 피하려고 해봤지만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1층에 있던 손님 모두가 경악하고 알바생들이 옆에 와 억지로 떼어내려는 와중에도, 여자는 눈을 부라리며 악에 받쳐 소리쳤다.

“내 아들 그렇게 만들어놓고, 너는 속 편하게 지낼 수 있을 줄 알았어? 천만의 말씀이야! 내가 그렇게 두고 볼 거 같애?”

“어, 어머님! 일단 이것 좀 놓으시고……!”

“누가 누구 어머님이야! 고아 주제에 예쁘게 봐주려고 했더니, 이게 어디서 증말!”

“아악!”

아오, 아줌마가 힘이 왜 이렇게 좋아! 무거운 거 나를 땐 금방이라도 뽀사질 듯 연약한 척하면서 사람을 다 시켜먹더니!

거의 머릿가죽이 다 뜯겨나갈 것 같은 세기였다. 너무 아파서 울음이 터지기 일보직전.

예원은 어떻게든 여자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때였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바 전체를 울리는 강한 목소리에, 모두의 고개가 그리로 돌아갔다.

사무실에 있던 사장이 특유의 긴 다리로 빠르게 휘적휘적 걸어오고 있었다.

졸지에 아귀힘이 조금 약해지는 것 같긴 했지만, 여자는 여전히 예원의 머리카락을 붙든 채로 민혁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뭔가 떠오르는 게 있다는 듯이.

“혀, 현……민혁?”

모자 아니랄까봐 어째 반응도 똑같냐. 머리가 뜯겨 아픈 와중에도 예원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알아보시니 다행입니다. 그럼 일단, 그 손부터 놓아주시죠.”

남자는 특유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긋하게 말했다.

TV에서나 보던 연예인이 별안간 카페에서 튀어나오니 신기한 일일 수밖에.

그러나 여자는 잠시 혹한 표정을 짓더니, 별 꼴이라는 듯 입술을 한 번 내밀고는 딱딱하게 말했다.

“얘는 나하고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까, 그쪽은 빠져요.”

웬만해선 전혀 물러설 것 같지 않은 태세.

모든 사람이 그리 느낄 정도였지만, 입가에 가벼운 웃음기를 띈 남자는 오히려 그들에게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그렇게는 안 되겠는데요.”

“…….”

“애석하게도, 아주머니께서 머리채를 잡고 계신 그 분이 저희 매장에서 가장 중요한 직원분이시거든요. 즉 그렇게 붙잡고 계시면 계실수록, 저희 영업에 막대한 문제를 초래하실 수도 있다는 거죠.”

“…….”

“물론 계속하시겠다면 말리진 않겠습니다만, 저희 쪽에선 어쩔 수 없이 영업방해죄로 신고하는 수밖엔 없겠네요.”

“…….”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비단결 같은 말투였지만, 거기에 담겨 있는 내용은 실상 협박이었다.

“……예?”

그리고 여자는 역시나, ‘영업방해죄’라는 소리에 덜컥 겁부터 집어먹은 듯했다.

그를 증명하듯 머리칼을 잔뜩 움켜쥔 여자의 손에 슬슬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난 저…….”

한술 더 떠, 그는 쐐기를 박듯 옆에 있던 알바생을 호출했다.

“거기, 112에 전화 좀 해줄래요? 통화는 내가 할 테니까.”

‘어머, 설마 진짜 신고하는 거야?’

지레 무서워진 여자는 곧장 예원에게서 손을 떼어내며 항복 자세를 취했다.

“자, 자! 됐지. 됐잖아요?”

남자의 눈길이 곧게 뻗은 여자의 손바닥으로 향했다.

그는 언제 웃었냐는 듯 금세 날카롭게 물었다.

“뭐가 됐다는 거죠?”

“손 뗐잖아. 그럼 신고 못하지!”

여자의 말에, 다시 엷은 미소를 머금은 그는 아주 천천히 받아쳤다.

“안타깝지만, 그러신다고 있던 사실이 없었던 걸로 되는 건 아니죠. 기록이라는 게 괜히 있겠습니까.”

“……!”

“바에 CCTV 다 설치돼 있죠?”

“네?”

별안간 제게로 향한 물음에, 예원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행이네요.”

남자는 거만하게 팔짱을 끼며 눈앞의 여자를 쏘아보았다.

“증거도 충분하고, 목격자도 차고 넘칩니다. 누가 봐도 아주머니께서 불리한 위치이신 건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

“뭐, 하지만 우리 점장님과 가까우신 분인 것 같으니까, 신고까지는 좀 더 생각해보기로 하죠.”

“…….”

“자 그럼, 이제 여기서 나가주시겠습니까? 아예 매장 밖으로 나가주시면 더더욱 감사하구요.”

남자는 단 몇 마디 만에 상황을 정리시켜 버렸다.

그 모습을 모두가 할 말을 잃고 쳐다보고 있었다. 심지어 방금 전까지 길길이 날뛰던 중년의 여자까지도.

“얼른요.”

두말 할 것도 없이, 현민혁의 판정승이었다.

* * *

똑똑. 좀처럼 울리지 않던 노크소리가 울렸다.

침대에 누운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전민혁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보나마나 엄마겠지.

평소처럼 무시하려 했지만, 다시 한 번 똑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끼익.

어쩐지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당연히 엄마가 들어오실 것이라 생각한 것도 잠시, 민혁은 긴 머리가 치렁치렁한 여자의 등장에 불현 듯 놀란 얼굴을 했다.

“……예원아!”

근 일주일 만에 보는 듯한 얼굴.

곧장 이부자리를 제친 민혁이 제 눈을 비볐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 홍예원이 이곳에 있다니!

파리해진 그의 얼굴엔 놀라움과 기쁨이 동시에 스쳤지만, 무뚝뚝한 인사를 건네는 예원의 얼굴은 그렇지 못했다.

“……안녕.”

그녀의 무덤덤한 시선이 민혁의 옆으로 스륵 돌아갔다.

“마침 너도 있었네, 강세찬.”

사실, 놀란 이는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민혁의 침대 맡에 앉아있던 세찬이었다.

이젠 아예 대놓고 연애질이구나. 예원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뱉었다.

“뭐야, 이게.”

“…….”

“넌 왜 그러고 있어?”

‘곱게 헤어져줬음 둘이 지지고 볶고 잘 살기나 할 것이지, 왜 꼴에 식음을 전폐하고 이 난리냐고.’라는 말이 생략된 말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따라 들어온 민혁의 어머니는 그야말로 눈치를 엿 바꿔 먹은 소리를 해댔다.

“……넌 지금 그게 할 말이니? 뻔뻔하기가 짝이 없어, 정말.”

비록 애꿎은 머리채까지 쥐어뜯겼지만 저런 아들 땜에 속상해하는 것을 딱히 여겨 신고를 거두어줬다.

그랬더니 오히려 더더욱 기고만장이었다.

“하다못해 친구만 돼도 저렇게 열성으로 병문안을 오는데, 그러고도 네가 우리 민혁이 여자친구야? 아무리 남자가 생겼다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내 아들을 저런 거랑 결혼시킨다고, 어휴. 내가 미쳤지.”

“엄마!”

예원의 낌새를 눈치 챈 민혁이 애써 큰 목소리를 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이미 어제 에덴에서의 난동으로 인해 이 여자의 사태 파악 수준을 짐작하고 있었던 예원이었다.

이 여자에게 사건의 진상을 알리는 것도 오늘 여기 온 이유 중에 하나였다.

그녀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여자에게로 돌아섰다.

“죄송한데요, 어머니. 웬만해선 조용히 있으려고 했는데, 뭔가 심각하게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아서 할 말은 해야겠어요.”

난 진짜 가만있으려고 했어. 전민혁, 네가 불붙인 거라고.

저도 모르게 어금니가 악물어졌다.

“쳇. 무슨 할 말?”

예원은 통 말이 아닌 속을 감춘 채, 부러 생긋 웃으며 답했다.

“저희 헤어진 거, 제가 아니라 민혁이 때문이에요.”

그리고 회심의 일격.

“이 새끼가 바람을 피웠거든요.”

그러자, 여자의 얼굴엔 금세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뭐, 뭐야?”

순식간에 당황하고 만 그녀의 시선이 민혁과 예원에게로 번갈아 머무르다, 이내 예원에게 고정되었다.

“……아니, 너 지금 어른 앞에서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뭐? 씨, 씹……?”

카페에 난동을 부리러 왔을 때부터 이미 고상함 같은 건 갖다버린 거라 생각했건만, 그럼에도 여자는 예원만큼 그 말을 유창하게 발음할 순 없는 모양이었다.

당신이란 사람이 그렇지, 뭐.

예원은 여전히 차분하게 답했다.

“죄송해요. 파혼 당한 것도 억울한데, 일방적으로 나쁜 년까지 되니까 기분이 너무 더러워서요. ‘어머니’께서 이해 좀 해주세요.”

조금만 참자. 오늘만 넘기면 이 여자를 ‘어머니’라 부를 일도 없을 테니까.

예원이 속으로 그리 되뇌는 동안, 여자의 얼굴은 눈에 띄게 붉으락푸르락해져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우리 민혁이가 무슨 바람을 피워? 여자라곤 너밖에 몰랐던 앤데!”

그랬겠죠. ‘여자’에 한해서는.

맘 같아서는 잘난 님 아들이 ‘남자’를 좋아한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한 자락의 측은함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대신, 예원은 곧장 민혁을 향해 휙 돌아보았다.

“전민혁. 빨리 말씀드려. 어머님이 오해하시잖아.”

“…….”

“강세찬, 아님 네가 말씀드릴래?”

하지만 기껏 기회를 주었는데도, 망할 두 놈들은 입에 본드를 붙여놓은 듯 말을 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사람 새끼가 아니라 개새끼들이라 그런 걸까.

그 꼴을 본 예원은 피식 웃었다.

“……민혁아?”

반면 여자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눈길로 민혁과 세찬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어찌 보면 당신도 참 딱하다. 물론 나보다는 못하지만.

예원은 다시금 여자에게로 돌아서며 차갑게 말했다.

“아셨으면 이제 자리 좀 비켜주시겠어요? 마지막으로 저희끼리 나눌 얘기가 좀 있어서요.”

한순간 혼란스러워진 듯한 여자는 쉽사리 물러설 것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를 알아챈 듯, 민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엄마, 잠시만요. 잠시만 얘기 좀 할게요.”

“……괘, 괜찮겠어?”

“네.”

하여간 아들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 여자다.

여자는 하는 수 없다는 듯 마뜩잖은 표정을 지으며 방을 나갔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민혁의 눈은 예원에게로만 향해 있었다.

“여긴…… 무슨 일이야?”

“……너희 어머니가 말씀 안 해주시디?”

“……뭘?”

예원의 이야기를 듣던 민혁은 잠시 멈칫했다.

“설마…….”

그래, 네가 생각하는 바로 그거.

입술을 깨문 예원이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어제 우리 카페 와서 난동 부리고 가셨어. 내 머리도 잔뜩 쥐어뜯으셨고.”

“뭐?”

깜짝 놀란 그가 반문했다.

그런 일은 감히 예상도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어…… 미, 미안해, 예원아. 난 전혀 모르고 있었…….”

“됐어. 어차피 다 끝난 일인데, 뭐.”

하지만 지금, 네가 도대체 뭔 이야기를 했기에 어머니가 그런 식으로 나온 거냐고 따지는 건 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봤자 그녀에게는 이제 무의미한 일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내가 오늘 여기 온 건, 너한테 경고하기 위해서야. 우리, 다신 엮이지 말자. 제발. 부탁이야.”

“…….”

“나, 지금 너 아니어도 삶이 충분히 복잡하고 피곤해. 그러니까 제발 이쯤 하자. 정신 차리고 잘 살아. 그 말도 안 되는 결혼 소린 집어치우고. 응?”

“…….”

“그리고 너.”

예원은 묘한 눈길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세찬에게로 뚜벅뚜벅 다가섰다.

“내가 너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지.”

“…….”

“얼마나 믿었는지도, 알지.”

사실 그녀가 이번 일에 더더욱 배신감을 느낀 데는 세찬의 몫도 컸다.

남자친구인 민혁 못지않게 믿고 의지했던 친구.

툴툴대고 못되게 구는 면도 있기는 했지만 남자애들이 다 그렇지, 하며 아무렇지 않게 넘겨왔었다.

평생을 함께할 남자들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이런 개 같은 일만 없었더라도.

“…….”

설령 전민혁이 바람을 피우더라도, 적어도 그 상대가 너는 아니었어야지.

너는. 절대 아니었어야지.

세찬을 노려보던 예원의 눈빛이 어느 순간 슬프게 이지러졌다.

“……니들이 나한테 어떻게 이래. 사람이 돼가지고 어떻게 이러냐고.”

“…….”

“나쁜 새끼.”

맨 처음 그 광경을 목격했던 그 날이 다시금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하지만 감정과잉 상태가 된 그녀와 달리, 세찬은 아무렇지 않은 기색으로 고개를 삐뚜름하게 꺾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 나 나쁜 새끼 맞아. 근데 그러는 넌? 홍예원 넌 뭐 항상 옳기만 했는 줄 아냐?”

“……뭐라고?”

예원은 제 귀를 믿을 수 없어 세찬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도 세찬의 태도는 그대로였다.

“내가 먼저 좋아했어. 먼저 만난 것도 나고, 먼저 좋아한 것도 나야. 너만 아니었으면 이렇게 오래 걸릴 일도 없었다고.”

“야!”

“…….”

침대에 앉아있던 민혁이 고함을 쳤지만, 세찬은 막무가내였다.

예원의 눈에는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더 얘기해줘?”

“…….”

“까놓고 얘기해서, 너 같은 여잘 어떤 남자가 좋아하겠냐? 그 지긋지긋한 혼전순결이니 뭐니 하는 것도 그렇고. 얼굴이 반반하면 뭘 하냐, 매력이 없는데. 눈치는 또 안드로메다에 갖다버린 수준이지. 그러니 지가 좋아하는 남자가 게이인지 아닌지도 구분 못하고 덥석덥석 사귀었을 테고.”

“……강세찬!”

“왜, 내 말이 틀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낸 그가 비웃음을 날리며 뇌까렸다.

“잘난 척 그만해라, 홍예원. 차라리 잘 됐어. 네 말대로 다신 보지 말자. 이제라도 잘 찾아봐. 게이 아닌 남자로.”

“…….”

“널 받아줄 남자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혹시 아냐? 그놈의 커피에 혹하는 놈이라도 있을지.”

어느 샌가 꼭 쥐고 있었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예원은 민혁이 곁에 다가온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세찬만을 강렬하게 쏘아보고 있었다.

“예원아, 오해하지 마. 다 얘 혼자 생각하는 거…….”

짝!

그 순간이었다. 그녀의 손바닥이 민혁의 뺨을 강하게 후려친 것은.

불시의 일격에 깜짝 놀란 민혁이 입술을 벌린 채 그녀를 쳐다보았다.

“예원아……?”

하지만 그걸론 성이 차지 않는다는 듯, 민혁의 뺨에 또 한 번의 폭풍이 일었다.

짝!

그 소리는 방금 전의 것보다 더욱 컸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세찬은 바로 발끈해선 소리쳤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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