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다 젖었잖아요
2018.05.11.
“이게 뭐하는 짓이야!”
세찬의 커다란 손이 예원의 오른쪽 어깨를 잡고 흔들었지만,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문 채 흔들림 없이 읊조릴 뿐이었다.
“……이 정도로 끝내주는 걸 다행으로 알아, 전민혁.”
네가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이것도 많이 봐준 거니까.
예원은 여전히 제 어깨를 붙들고 있는 세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최소한 상대가 여자이기에, 끓어오르는 화를 참고 있는 것이 여실히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지 좋아하는 애 몇 대 때렸다고 아주 죽일 기세네. 참사랑이다, 참사랑.’
답지 않게 순정파 행세를 하는 세찬을 보며 예원은 피식 웃었다.
“충고해준 건 고맙다, 세찬아. 근데.”
“…….”
“나 이제 남자는 안 믿으려고. 갖고 놀다 버리는 거면 몰라도 말이야. 다 니들 덕분이야.”
“…….”
“어쨌든, 충고에 대한 보답은 해야겠지?”
말을 마친 그녀가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너무나 차분한 반응에 화가 나던 것도 잊은 채 ‘왜 저래?’ 하고 생각할 찰나.
세찬에게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억!”
무슨 손을 쓸 새도 없이, 그녀가 세찬의 가장 중요한 부위를 거침없이 움켜잡았기 때문이었다.
예원은 원두가루를 탬핑할 때보다 더한 힘으로 그것을 으스러져라 쥐어짰다.
“아악! 야, 야! 잠깐만!”
“고자 되기 전에, 거시기 관리, 잘 해. 어?”
협박하듯 한 마디씩 끊어 말하는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위협적이었다.
‘어디 맛 좀 봐라, 자식아. 카페 일 하다보면 느는 건 손힘이랑 팔 힘 밖에 없거든.’
이건 네가 거시기를 함부로 놀리고 다닌 대가다. 물론 나한테 그딴 식으로 입 놀린 대가이기도 하고.
예원은 손아귀에 가차 없이 더욱 힘을 주었다.
그 날 받았던 충격을 고스란히 돌려주기 위해. 이 더러운 기분을 조금이나마 상쇄시키기 위해.
덕분에 세찬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예, 예원아!”
멀대같은 놈이 제 앞에서 무력하게 굴복하는 것을 구경한 예원은 호기롭게 손을 탈탈 털어냈다.
그러고는 등 뒤로 들려오는 민혁의 외침을 무시하며, 곧장 방을 나섰다.
다시 한 번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이제 너네랑은 완전히 쫑이다.’
다 죽었어, 썅.
* * *
마감을 모두 마치고 알바생까지 돌려보낸 시각.
평소 같았으면 당연히 바로 집으로 직행했을 그녀지만, 오늘만큼은 그러기가 싫었다.
그렇잖아도 쓸쓸해 죽겠는데 사람 하나 없이 차갑게 식어있는 집은 이 감정을 더욱 증폭시킬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 두 놈이 난잡하게 뒹굴었을지도 모를 침대에 아무렇지 않게 누울 자신이 없었다.
그리하여 예원은 어딘가에 홀린 사람처럼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미친 듯이 술과 안주거리들을 퍼 담았다.
그렇게 사온 술과 안주들을 1층 한 켠에 있는 테이블에 세팅하고 나니 어느덧 30분 정도가 흘러 있었다.
“……걍 집으로 갈 걸 그랬나.”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예원은 처량하기 짝이 없는 제 신세에 입술을 감쳐물었다.
어차피 이 정도 술에 취할 주량은 아니었지만, 꼭두새벽에 이걸 다 치우고 가야 할 걸 생각하면 귀찮고 막막했다.
하지만 어떡해. 집엔 죽어도 들어가기 싫은 걸.
이참에 아예 이사를 가야 하나.
“아오, 그냥 다 터뜨리고 왔어야 하는 건데.”
대충 세게 움켜쥐고만 온 게 한이다, 한. 그 타이밍에 맘은 왜 약해져가지고.
그렇게 맥주 한 캔을 신경질적으로 까려던 예원의 귓가로, 별안간 무거운 목소리 하나가 날아들었다.
“뭘 터뜨리고 와요?”
“엄마!”
─파카!
그 순간, 탄산이 부풀어 오른 맥주가 폭발하며 예원의 옷을 적셨다.
아마도 오는 길에 생각 없이 봉지를 흔든 것이 화근인 모양이었다.
‘뭐, 뭐야, 이거!’
깜짝 놀란 그녀는 퍼뜩 뒤를 돌아보고는 두 번 놀랐다.
“사장님!”
졸지에 놀란 것은 그도 피차 마찬가지였다.
“어…….”
단순한 장난에 이렇게 극단적인 결과가 나올 줄은 미처 몰랐다.
민혁이 그답지 않게 살짝 당황한 모습으로 물었다.
“괘, 괜찮습니까?”
“……아이 씨, 다 젖었잖아요!”
터뜨릴 건 따로 있구만, 왜 이런 게 터지고 난리야.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옷을 내려다보며 그녀는 울상을 지었다.
그 과정을 다 지켜본 민혁도 잠시 동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실제로 제 잘못은 아니었지만, 여자의 표정으로 보아하니 뭔가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은 타이밍이었다.
“미안합니다. 난 그냥, 반가워서 그런 건데.”
예원의 눈길이 쓸데없이 긴 기럭지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아니에요. 제 잘못이에요.”
그래, 당신이 무슨 잘못이겠냐. 다 팔자 기구한 내 잘못이지.
“…….”
어딘가 찝찝한 대답.
그녀를 내려다보는 민혁의 눈가가 살짝 찡그려졌다.
‘근데, 이 여자는 이 시간에 여기서 혼자 뭐하려고 했던 거지?’
마감 마치고 혼자서 이러는 게 취미인가.
왠지 모르게 불쌍해 보이는 여자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는 문득 이상한 호기심이 일었다.
“근데…… 웬 술이에요?”
“네?”
“원래 마감 마치고 이렇게 매장에서 혼자 술 마시고 그럽니까?”
“……아, 아뇨?”
아뿔싸. 그녀의 당당하던 목소리는 어느 새 살짝 떨리고 있었다.
원래 매장에서 술을 마시냐니. 예원은 그 질문에 담긴 진의를 알 수가 없었다.
자칫 잘못 대답했다간, 걸핏하면 매장에서 술이나 퍼마시는 무능력 점장으로 비춰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거, 좀 잘 대답해야 할 것 같은데.
“아, 그게. 오늘 제가 아주아주 기분 나쁜 일이 좀 있었거든요. 그래서, 딱 한 잔만! 하고 가려고…….”
그러나 딱 한 잔이라고 말하기에는, 제가 생각 없이 벌여놓은 안주와 술병, 맥주 캔들이 한 무더기였다.
‘아 나, 진짜.’
재빨리 테이블을 훑은 그녀가 쭈뼛댔지만, 사장은 그런 그녀를 그저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아무 대답도 없이.
예원은 순간, 그 눈빛에서 뭔가를 직감했다.
‘뻘짓 그만두고 얼른 꺼지라고 하는 거 아냐? 아니면, 여기가 너를 위해 준비된 전용 술집이냐고 까대는 건?’
아무래도 양심이 찔렸다. 동시에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 파바박 들었다.
‘……안 되겠어. 옷도 이렇게 된 마당에 술은 뭔 술이냐. 오늘은 그냥 철수해야지.’
이래봬도 여기서 구른 것이 5년이다.
빠르게 눈치를 깐 예원은 얼른 선수를 쳤다.
“죄, 죄송합니다. 얼른 치우고 갈 테니까 사장님도 얼른 들어가십…….”
“홍예원 씨.”
그런데 그때, 불현 듯 그가 그녀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네?”
그 다음 이어진 질문은, 그녀의 예상에서 한참 벗어난 것이었다.
“술친구, 안 필요합니까?”
멍해진 예원의 눈이 신호등처럼 깜빡였다.
* * *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네.”
“운전은 어쩌시려고요?”
“그런 건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
에이씨. 딱딱한 대답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진다.
‘아니 뭐 걱정을 해줘도 난리야.’
남자의 셔츠에서 배어나는 향수 냄새가 코끝을 콕콕 찌르는 것을 느끼며, 예원은 입술을 비죽였다.
당연히 얼른 가라고 할 줄 알았던 남자는 오히려 술동무를 자처하더니, 그녀의 앞에 떡하니 자리를 잡았다.
게다가 젖은 옷은 얼른 카페 세탁기로 빨아서 말리라며, 차에 있던 제 셔츠를 그녀에게 선뜻 빌려주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오늘 입은 카페 유니폼도 있기는 했지만, 무지막지하게 더러워진 옷을 다시 입기는 싫었다.
그렇다고 사무실에서 여분의 유니폼을 찾자니 그녀에겐 죄다 포대자루처럼 큼지막한 것들밖에 없고.
결국, 예원은 울며 겨자 먹기로 그의 셔츠를 받아들었다.
적당히 맞는 듯하면서도 꽤나 헐렁한 그의 셔츠를 걸치면서, 예원은 생각했다.
‘뭔가 꺼림칙해. 그리고 확실히 수상해.’
하지만 어찌 보면 차라리 잘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잖아도 혼자서 술 마시기가 영 내키지 않는 날이었으니까.
‘그닥 맘에 들진 않는 술친구지만, 아무렴 어때. 혼자 마시는 것보다야 낫겠지.’
그렇게 어영부영 그와의 술자리를 시작한 것이 약 한 시간 전쯤.
“…….”
“…….”
커피를 앞에 두고 얘기했던 저번과 달리, 일회용 소주잔과 맥주캔을 각각의 앞에 둔 그들은 적당히 달아오른 얼굴로 마주앉아 있었다.
그러다 잠시, 시선을 내리깐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예원은 문득 생각했다.
‘참, 어제 일을 사과를 안 했잖아. 엄연히 이 남잔 사장인데.’
의도치 않았더라도 매장에서 그런 소동을 피운 것은 분명 제 잘못이었다.
사장인 그의 입장에선 분명 언짢은 기분이었을 터.
예원은 젊은 사장에게 모처럼 납작 엎드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말문을 틔웠다.
“어제는…… 정말 죄송했어요.”
“뭐가요?”
“어제…… 난리 났었잖아요, 카페에서. 그거 죄송하다고요.”
하지만 남자는 오히려 몹시 새삼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뭘요. 내 머리채가 뜯긴 것도 아닌데.”
“…….”
“물론 내 매장에서 그런 일이 생긴 건 유감이긴 하지만, 홍예원 씨가 주동한 것도 아니었잖아요. 그 이상한 아주머니 때문이었지.”
“……그건 그렇죠.”
그렇게 생각해주면 나야 고맙지.
그의 답을 들은 예원은 살짝 안도했다.
살짝 미소 지은 그녀가 후련한 마음으로 소주 한 잔을 들이켜자, 민혁은 그녀의 빈 잔을 다시 채워주며 지나가듯이 물었다.
“근데 궁금하긴 하네요.”
“…….”
“무슨 일 때문에 그랬던 건지…… 물어봐도 됩니까?”
그를 쳐다본 예원은 잠시간 머뭇거릴 뿐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얘길 이 사람한테 해도 될까. 굳이 알 필요 없는 이야기일 텐데.’
혹여 이상한 데서 약점이나 잡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고민이 된 것이다.
그러나 잠시 뒤.
그녀는 어느샌가, 그에게 모든 사건의 내막을 털어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말았다.
단, 10년 동안 알고 지냈던 남친이 사실은 ‘게이’였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만 빼놓고.
“그래서…… 이렇게 된 거예요.”
술 때문일까. 내내 담아둬야만 했던 이야기들이 필터링도 없이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왔다.
그녀의 말을 한참동안 묵묵히 들어주던 그는 마침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지영을 제외한다면, 그녀가 모든 사실을 털어놓은 상대는 이 남자가 유일했다.
다 털어놓고서야 급격히 민망해지는 기분에 예원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튼 진짜 죄송했습니다. 잘 처리하고 왔으니까 앞으로 다신 그럴 일 없을 거예요.”
‘처리했다’라는 말의 뜻이 궁금할 법도 했지만, 남자는 그저 설핏 웃기만 했다.
“죄송 안 해도 된다고 했을 텐데요.”
“…….”
“정 그렇게 죄송하면, 나랑 결혼이나 하든지.”
……아, 뭐야.
짜증이 난 그녀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또 그 소리세요? 그건 안 돼요.”
그녀에 비해 다소 취기가 오른 그가 대번 눈살을 찌푸렸다.
“왜. 왜 안 돼요. 얘기 좀 더 나눠 보자더니.”
“방금 전까지 들으셨잖아요. 왜 안 되는지.”
“……난 잘 모르겠는데요.”
“네?”
의자를 바짝 당겨 앉은 민혁이 예원을 주시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아닙니까? 홍예원 씨가 남자를 사귀고 싶지 않은 맘은 충분히 알겠는데, 어차피 나랑 하는 건 진짜 결혼이 아니잖아요. 그냥 비즈니스라고 생각하면 편하지.”
“…….”
그의 말을 듣던 예원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어쩜 저렇게 속 편한 말이 다 있을까.
지영의 말마따나, 아무리 계약이라도 결혼은 결혼이다.
이 남자는 그걸 모르고 있는 걸까?
“그건…….”
“그냥 지금 여기서 일하는 것처럼, 그렇게 일하듯이 해주면 되는 거예요. 부담 같은 것도 가지지 말고, 그냥 연기한다고 생각해 봐요. 나처럼.”
취기 때문인지 눈이 살짝 붉게 충혈된 그에게서는 이 계약을 꼭 성사시키고야 말겠다는 굳은 심지가 엿보이고 있었다.
‘아니, 저 남잔 뭐가 저렇게 절실한 거냐고.’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가 멈칫했다.
가만. 설마, 그게 진짜……?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뭡니까.”
예원은 잠시 주춤했다.
어쩌면 상대에게 큰 실례가 될 수도 있는 질문이었으므로.
“사장님이요.”
“네.”
“……진짜…….”
“…….”
“게이세요?”
“푸흡!”
예상치 못한 폭탄.
그는 일순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마시던 맥주를 분무기처럼 내뿜고 말았다.
깔끔하지 못한 그 광경에 예원은 곧바로 질색했다.
“아, 진짜! 기껏 다 치웠는데!”
“……미안합니다.”
……적어도 아침까지는 맥주냄새가 진동하겠구만.
바닥에 흥건해진 액체를 보고 있자니 흘러나오는 건 탄식뿐이었다.
“…….”
한편, 민혁은 그런 여자를 보며 순간 놀랐던 맘을 천천히 다독였다.
‘아니, 근데. 이 여자가 그 얘길 어떻게 알지? 이거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닌가?’
“근데 그건 어디서 들었습니까?”
그 질문에, 바닥을 원망스럽게 내려다보던 예원의 눈이 일순 동그래졌다.
“……네?”
“…….”
“……아, 그, 그게…… 그냥…….”
솔직하게는 알바생 채린에게서 주워들었다고 말해야 할 테지만, 그랬다간 이상하게 불똥이라도 튈까 싶어 좀처럼 입을 열 수 없었다.
아니, 그보다 남자의 반응이 이상했다.
아님 아니라고 하면 되지, 저렇게 물을 건 또 뭐냔 말이야.
뭐 찔리는 거라도 있어?
“…….”
예원은 결국 대답을 하지 못했고, 그 바람에 그는 조바심이 났다.
그녀의 입모양만 뚫어져라 쳐다보던 민혁이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듯 다시 물었다.
“그걸 나한테 묻는 이유가 뭡니까.”
“…….”
“왜요. 게이면, 결혼해주기라도 하려구요?”
“……네?!”
아니, 또 얘기가 왜 여기서 거기로 튀어?
“그, 그야 당연히 아니죠! 여잘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어떻게 결혼을 해요?”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아님 내가 전민혁을 왜 찼는데!’
기가 찬 예원이 곧바로 대꾸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래도 그녀의 말뜻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말은, 여잘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결혼할 수도 있단 소리로 들리는데.”
“……!”
“설마, 나랑 ‘진짜 결혼’이라도 하고 싶은 겁니까? 날 좋아하게 되기라도 할까봐, 그게 싫어서 이러는 거예요?”
“……뭐, 뭐라고요?”
……돈 자랑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넘겨짚기도 꽤 수준급인 남자다.
“허, 참나.”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오네.
그에게 별다른 사적인 감정이 없다는 것을 지금껏 온몸으로 표출해온 그녀였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그를 살짝 가소롭게 여긴 면도 있었다.
이 남자야말로 그 사실을 뻔히 알고 있을 텐데.
그런데도 굳이 저런 질문을 하는 것은 그녀로 하여금 그 저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이 인간이 사람을 떠보는 것도 유분수지!
“…….”
잠시 뒤, 겨우겨우 맘을 가라앉힌 예원은 나직하게 말했다.
“……사장님. 일단, 오해는 하지 마시고 들으세요.”
“…….”
“죄송하지만, 전 지금 그 어느 누구도 좋아할 생각이 없어요. 아니, 생각이 없다기보단…… 그런 감정에 하나하나 신경 쓸 여유가 없다고요. 그러니까!”
그녀는 마치 못을 박듯 똑똑히 말했다.
“그 말 같지도 않은 결혼을 한다 해도, 제가 사장님을 좋아할 일은 절대, 절대! 없어요. 아시겠어요?”
민혁과 세찬 앞에서 했던 말은 그냥 홧김에 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제 진정 남자를 믿고 싶지도, 좋아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직 채 딱지도 앉지 못한 상처.
아주 아주 먼 훗날, 지금의 이 상처가 아물어갈 때쯤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그 누가 오더라도 거들떠볼 생각이 없었다.
그 상대가 혹, 짜증날 정도로 잘생긴 이 남자라고 해도 말이다.
“…….”
그렇게 잠시 뒤.
그녀의 짜증이 조금이나마 사그라질 무렵, 진지한 얼굴이 된 민혁은 넌지시 물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홍예원 씨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날 좋아할 일이 없다는 거죠?”
“그렇죠!”
‘그러니까 이만 포기하시지.’
예원이 속으로 얄밉게 속삭였다.
그런데 남자의 입가엔, 이상하게도 회심의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럼 더 다행이네요.”
“……뭐가요?”
멀뚱히 쳐다보는 그녀를 향해 민혁이 곧바로 설명했다.
“난, 이전에 말했다시피 절대로 날 좋아하지 않을 상대를 찾고 있어요. 그런데 방금 홍예원 씨 말대로라면, 난 홍예원 씨에게 ‘절대 좋아질 수 없는 남자’라는 건데.”
“…….”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거잖아요. 서로에게 딱 들어맞는 조건. 아닙니까?”
“……!”
헉. 그, 그게 그렇게 되나……?
기실 말장난 같은 말에 불과했지만, 순간 예원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새를 틈탄 민혁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저번에 나더러, 애먼 사람 이용하지 말라고 했었죠.”
“…….”
“그 말 틀리지 않아요. 나, 이제부터 홍예원 씨 이용할 거예요. 보다 적극적으로.”
‘헐. 이젠 날 아주 대놓고 이용하겠다고?’
그 말은 또다시 예원의 발끈 스위치를 지그시 눌리게 했다.
“아니 무슨 그런 말을……!”
“그렇지만.”
하지만 그때, 그의 단단한 목소리가 그녀를 완벽히 가로막았다.
“그게 혹시나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면, 홍예원 씨도 날 이용하세요. 그날 밤처럼.”
“…….”
“나도, 얼마든지 이용당해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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