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 좋아질 수 없는 남자-9화 (9/102)

9화. 그 남자와 키스를 할 수 있다면

2018.05.04.

“혹시, 지금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는 겁니까?”

그 말에 예원은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 순간, 머릿속에는 당연한 것처럼 오로지 한 사람만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

‘네’라고 대답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예원은 잠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튀어나온 대답은 정반대의 것이었다.

“……아뇨.”

“그럼 됐네요.”

다행이라는 듯 빙긋 미소 짓는 민혁과 달리, 예원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

‘참내, 되긴 뭐가 돼? 골치 아픈 게 한두 가지가 아니구만!’

돈 많은 당신이야 그러고 나면 땡이겠지만, 난 아니라고. 애먼 사람 인생에 웬 걸림돌 놓을 일 있나!

따지고 보면 그의 말엔 틀린 부분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은 묘한 마력이 있었다.

하여튼 정말 가지가지로 맘에 안 드는 남자.

그를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던 예원이 불쑥 말했다.

“근데요, 사장님.”

“…….”

“원래 그렇게 좀, 돈 자랑이 심하세요?”

돈 자랑. 속된 말로는 돈지랄.

남자의 얼굴이 일시적으로 굳은 것은 그때였다.

“……네?”

하지만 그는 몇 초 뒤, 살짝 소리 내어 웃었다.

“홍예원 씨는 늘 상상 이상으로 솔직하네요. 그런 질문 보통 잘 안 하던데.”

“……전 그냥 제가 느낀 그대로 말했을 뿐이에요.”

그녀에게서 새침한 대답이 톡 튀어나오자, 그의 눈빛은 묘하게 변했다.

“사실, 원래 나는 이렇게 돈으로 발라버리는 거 아주 혐오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요?”

“그런데.”

남자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호를 그렸다.

“나도 어쩔 수 없나 봐요. 맘이 급하니까 이렇게 되네.”

“…….”

“어쨌든, 최대한 빨리 결정해 줘요. 난 별 수 없이 그대로 따를 테니까.”

예원은 그런 그를 말없이 쏘아보았고, 그는 여전히 태평한 얼굴로 덧붙였다.

“아, 그리고 결혼은 가능하면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했으면 합니다. 애석하게도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가 않아서.”

* * *

“얘기 잘했냐?”

민혁이 올라탐과 동시에, 운전석에 앉아있던 성환이 부리나케 물었다.

뻐근한 몸을 의자에 기대며 나지막한 신음을 흘린 민혁은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글쎄. 자초지종은 잘 설명한 거 같아.”

“그래? 그럼 다행인데…….”

차는 기다렸다는 듯 출발했고, 성환은 민혁이 편안히 잠을 청할 수 있도록 조심조심 운전대를 움직였다.

“제수씨가 많이 당황스럽겠다. 일반인이라 이런 일엔 익숙하지 않을 텐데.”

“……제수씨?”

하지만 저 말은 도저히 그냥 넘길 수가 없다.

눈을 번쩍 뜬 민혁이 반문하자, 룸미러 속 성환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제수씨가 왜. 네 여자친구면 나한텐 제수씨지. 뭐, 꼽냐?”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제수씨라. 거 영 이상한 단어네.

잠시 생각하던 그는 다시금 눈을 감았다.

결국 판을 벌린 건 자신이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이 상황이 적응되지 않고 있었다.

며칠 전, 그의 반응을 떠보던 혜인의 앞에서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고 말한 것은 그야말로 홧김이었다.

또 한 번 그 비웃음을 당하기는 죽기보다 싫었으니까. 그 얼굴에 떠오르는 당혹스러움을 마주하자 묘한 통쾌함까지 일었다.

다만, 그때 그가 머릿속에 떠올린 얼굴은 ‘홍예원’의 것이 맞았다.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정말로 그랬다.

그런데 그게 씨가 된 걸까.

바로 오늘 새벽, 그는 바로 그 ‘홍예원’과 스캔들이 터졌다. 정말 어이없게도.

처음엔 당연히 정정기사를 내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시점에서, 곧바로 엄청난 묘책이 떠올랐다.

‘스캔들이야 이미 난 거 어쩔 수 없고, 사실이니까 인정하려구요. 근데 기왕 인정하는 거, 연애보다는 결혼이 임팩트가 더 크지 않겠어요?’

‘……뭐 이 자식아?’

‘황당할 거 알아요. 근데, 이젠 내가 그 사람 놓치고 싶지가 않아.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도 않고. 그러니까…….’

그 여자와, ‘결혼’을 해보자고.

그도 일찍이 알고 있었다. 열애설을 그토록 경계하는 연예인들도, 가끔은 그것을 이슈 몰이나 사실을 은폐하는 용도로 이용하기도 한다는 것을.

연애나 결혼이라면 무작정 기를 쓰고 피해왔던 그지만, 가만 생각해 보니 깨달을 수 있었다.

결혼에 ‘사랑’은, 결코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 까짓 거 하면 되지 뭐. 나를 위해서, 엄마를 위해서.’

그 딴엔 나름 시원하게 결정했건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런 그의 결단에, 소속사 식구들이 극도로 반발하고 나선 것이었다.

‘야, 인마! 내가 여자를 만나랬지, 다짜고짜 결혼부터 하랬어? 이게 뭐하자는 플레이야, 지금!’

단 하나뿐이라 생각한 아군이자 그의 연애에 긍정적이던 성환 또한 그랬다.

그는 결국 하루 종일 매달린 끝에 그들을 설득해냈고,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그녀를 찾은 것이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그 여자나 저나, 서로 윈윈만 한다면 결과적으로 전혀 나쁠 게 없는 사기 행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당사자 둘을 제외한 누구도 이 ‘계약결혼’에 대해서 알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이 가짜 결혼을 순조롭게 진행하고 끝맺기 위해서는.

“하여튼 맘 상하지 않게 잘 다독여줘. 갑자기 불특정 다수한테 ‘현민혁의 연인’이라고 알려진다 생각하면 두려울 거야. 뭐, 연예인 여자친구의 숙명이니 할 수 없는 거지만, 당사자한테는 그게 말처럼 쉽겠냐.”

심지어 그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성환마저도.

“뭐, 맘이 상한 것 같진 않은데……,”

“그럼?”

이제 남은 건 그 여자의 선택이다.

제 잇속을 차릴 줄 아는 여자라면, 분명 제 의견에 동의할 것이었다.

“그냥,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한 모양이야.”

“생각할 시간?”

정말 피곤한 하루가 아닐 수 없었다.

그 말을 남긴 그는 성환의 말에 대답도 해주지 못한 채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 * *

“만약에 있잖아.”

[어.]

“누가 너한테…… ‘계약연애’를 하자고 하면, 넌 어떨 거 같애?”

[누군데.]

“어?”

[누구냐고. 너한테 그딴 이상한 소릴 지껄인 놈이.]

……귀신같은 김지영.

예원은 얼른 아닌 척 목소리를 고치며 말했다.

“아니, 내 얘긴 아니고. 그냥 건너건너 아는 사람 얘긴데…….”

하지만 그런 변명 따위가 지영에게 먹혀들 리 없었다.

[웃기지 마. 이게 어디서 날 속이려고 들어? 누군데. 어떤 놈이길래 너 같이 순진한 애를 그런 식으로 꼬시냐고?]

“그, 그런 게 아니라…….”

아나, 정말.

예원은 제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대화에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암튼! 너 같으면 어떨 것 같냐고. 딴 소리하지 말고 생각 좀 해봐.”

[참내. 어디서 별 희한한 소리를 다 듣고 와서는.]

선심 쓰는 척 잠시 곰곰이 생각해보는 듯하던 지영이 말을 이었다.

[글쎄. 뭐, 계약 조건이 어떤지에 따라 생각해보겠지. 잘생기고 어린 남자면 콜할 수도 있고.]

“……으이그.”

연하남 킬러 김지영다운 멘트였다.

[암튼, 너한테 접근했다는 그 남잔 조건이 어떻게 되는데?]

엄밀히 말해 연애는 아니고 ‘결혼’이지만…… 어쨌든 계약은 계약이니 괜찮겠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어진 유도신문에 예원은 잠시 멈칫하다 대답했다.

“우리 지원이 학비 다 대주고…… 나중에는 내 카페도 차려준다 그러고…….”

[헐? 뭐야. 갑자기 어디서 그런 거물급 인간이 튀어나와?]

“……그러게.”

나도 참 신기할 따름이다.

방금 전까지 제 얘기가 아니라 한 것이 무색하게도, 예원은 그 말에 순순히 긍정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잠시 뒤.

답지 않게 조용해진 지영이 이상하다고 여겨질 무렵, 어쩐지 조심스러운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설마…….]

“……?”

[어디서 돈 많은 할배 하나 물었냐?]

“……뭐?”

무심히 듣고 있던 예원은 즉시 발끈해 소리쳤다.

“야! 넌 사람을 뭘로 보고!”

[아, 왜 소리를 지르구 그래!]

기집애가 갈수록 목청만 커져가지고는…….

지영은 티나게 혀를 끌끌 차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하긴. 그 정도 갑부가 너 같은 일개 바리스타 나부랭이를 거들떠 볼 리가 없지. 그렇다고 재벌 후계자쯤 되는 놈이 널 꼬셨을 리도 없고……. 차라리 내가 현민혁이랑 결혼하는 게 더 빠르겠다.]

“……어?”

마치 기다린 것처럼 튀어나온 그 이름. 예원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맞다. 그러고 보니까, 얘 그 남자 팬이었지?’

남들 같은 극성팬까진 아니었지만, 지영은 분명 그 거물 사장의 팬이었다. 그것도 데뷔 때부터 열렬히 좋아했던.

그의 스크린 데뷔작이자 성공 발판이었던 퀴어 영화를 특히 찬양하던 지영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질 않았다.

그렇게 실감나는 연기일 수가 없다고 칭송에 칭송을 했었는데. 실제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도 들었다고 했었지, 아마.

맞아. 그러고 보니 그 영화도 보통 영화가 아니었잖아.

‘그럼, 그 영화도 그래서……?’

어쨌든, 그 거물이 현민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지영은 최소 까무러칠 것이 자명했다.

아니, 어쩌면 그녀를 죽이려 들지도 모른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어째서 우리 오빠의 여친이 될 수 있냐며. 블라블라블라.

[그럼 누군데. 누구길래 그렇게 엄청난 조건을 너한테 들이대?]

“……있어. 조금만 나중에 말해줄게.”

지영은 싫다는 사람에게서 뭔가를 억지로 얻어내는 타입은 아니었다.

다만, 구린 구석을 그냥 넘기는 타입도 아니었다.

[흠, 냄새가 나. 최소 사기꾼 아니면 꽃뱀 같은데.]

꽃뱀?

예원은 머릿속에 자동적으로 연상된 남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

……꽃뱀은 그 남자와 지독히도 매치가 안 된다. 차라리 뺀질이라면 모를까.

“사기꾼은 그렇다 쳐도, 꽃뱀은 아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 너 같이 순진한 애 꼬셔서 한 몫 챙겨보려는 놈일지도 모르잖아.]

그래봐야 보이지도 않을 테지만, 예원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건 아냐. 딱히 위험한 사람도 아니고…… 하여튼.”

한 몫 챙긴다, 라. 내가 가진 전 재산을 다 합치면 그 인간 발뒤꿈치라도 따라가려나.

슬프고도 우스운 진실.

[그래서 뭐. 넌 어쩌고 싶은데. 조건만 맞춰주면 그 미친 소릴 받아주고는 싶어?]

“……고민돼.”

‘아무리 그래도 계약 결혼이란 게 말이 안 되잖아. 그리고 그 인간, 소문대로 정말 게이면 어떡해? 그 나쁜 놈한테 데인 지 꼴랑 얼마나 됐다고. 또 그런 식으로 이용당하긴 죽기보다 싫단 말이야.’

예원의 착잡한 속내에도 불구하고, 지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참내,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은 거지 웬 고민……. 야, 근데. 그 남자…… 잘생겼어?]

그 말에 예원은 왠지 모르게 살짝 움찔했다.

……잘생……겼냐고?

“뭐, 잘생기긴…… 했지.”

[오올. 그건 괜찮네.]

“……괜찮긴 뭐가 괜찮아!”

그녀가 지레 발끈했지만, 지영은 이내 설교하듯 말을 이었다.

[야, 남자가 돈만 많으면 뭐하냐. 계약 연애도 연애는 연앤데, 겉가죽이 좀 번듯해야 연애할 맛이 나지. 안 그래?]

“……그런가.”

[그럼.]

수화기를 넘어오는 목소리가 갑작스레 은밀해졌다.

[사람이 아무리 얼굴 뜯어먹고 사는 건 아니라고 해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는 최소한의 한계라는 게 있는 거거든. 한 번 생각해봐. ‘내가 이 남자랑 키스를 할 수 있을까.’ 상상해보면 바로 답 나올걸?]

“……키스?”

예원은 순간, 사장 놈과 다정히 입 맞추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야 말았다.

남자의 손이 자신의 볼을 포근히 감싸고, 허리와 허리가 강하게 밀착되면서, 입술과 입술이 부드럽게 포개지고 서로의 더운 호흡이 얽히는…….

“…….”

……윽.

“어우!”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진저리를 치는 그녀의 목소리에 지영은 재미있다는 듯 깔깔댔다.

[쳇, 오바하기는. 왜, 막 상상만 해도 끔찍해? 그 남자가 그렇게 싫어?]

정확히 말해 싫은 것까진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그 남자와 내가 키스를 하다니. 말이 안 되잖아!

“……어.”

[네가 그렇게까지 싫어할 정도면 영 또라인가 본데. 그럼 더 두고 볼 것도 없네. 그냥 쌩 까.]

“……그건 안 돼.”

하지만 그 놈은 어쨌든 그녀가 일하고 있는 카페의 사장이었고. 그녀는 또 그 말도 안 되는 열애설을 내게 한 장본인이 맞았다.

즉 맘대로 쌩깔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얘기.

게다가 솔직히, 그 제안이 살짝 솔깃한 것도 없지 않았다.

‘딱 일 년만 버티면 앞으로 몇 십 년은 편하게 살 수 있을 텐데…….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로 빙빙 돌아야 할 이유도 없고……. 그냥 말 그대로 척만 해주는 거라면…….’

그 날 이후, 예원은 치열한 고민을 거듭하는 중이었다. 단칼에 거절하고 싶은 맘, 또 한편으로는 받아들이고 싶은 맘이 서로 극심히 충돌했다.

하지만 그런 예원의 복잡한 심경을 알 리 없는 지영은 눌렀던 짜증을 빽 내질렀다.

[아, 그럼 나 보고 뭐 어쩌라고! 졸라 답답하게 구네!]

“……미안.”

하기야, 나 자신도 답답한데 너는 오죽하겠니.

그래도 예원의 짤막한 사과에 조금 누그러진 지영은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럼 그 남자랑 한 번 더 얘기해 봐. 그러다 보면 무슨 답이든 나오겠지. 계약 연애든 뭐든, 전민혁 땜에 죽니 마니 하는 것보단 나을 거 같기도 하고.]

“…….”

[그리고 결정적으로, 어차피 네가 내 말을 들을 거 같지도 않다.]

부정할 수 없는 그 말에 주춤하고 있는 사이, 문 바깥으로 그녀를 부르는 부름이 들려왔다.

[예원아, 밥 먹자!]

예원은 황급히 폰을 다시 부여잡았다.

“야, 나 이제 끊어야겠다. 내가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어, 그래. 그 이상한 얘기도 어찌 됐는지 알려주고.]

“어, 끊어!”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예원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저의 인기척에 이모가 퍼뜩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어, 이리 와. 밥 먹게.”

제2의 엄마와도 다름없는, 그녀의 하나뿐인 이모 은아였다.

“어, 어.”

예원은 밥상을 사이에 두고 이모와 사이좋게 마주 앉았다.

그때,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은아가 넌지시 물었다.

“누구랑 그렇게 전화를 오래해?”

“어?”

헉. 설마 들렸나?

예원은 순간 눈앞의 당면처럼 쪼그라들었다.

만약 ‘계약연애’ 어쩌고 하는 걸 들었다면, 일이 아주 곤란해질 터였다.

“어…… 지영이랑.”

“아, 지영이.”

그러나 은아는 다행히 거기까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난 또 민혁인 줄 알았네.”

대신 이 말을 해맑게 덧붙였을 뿐.

‘민혁’이란 이름에 살짝 굳은 예원을 향해 은아가 물었다.

“너희는 대학 때도 그러더니 지금도 만날 붙어 다니니?”

“……아니야. 요즘은 바빠서 별로 못 그래.”

“그래? 아무튼 다음에 한 번 데리고 와. 지영이 못 본 지도 오래 됐다.”

“응.”

대답을 마친 예원은 젓가락을 들었다.

오랜만에 와서일까. 이모는 그녀가 좋아하는 반찬들을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놓은 채였다.

“요즘은 시간이 왜 이렇게 빠른지 모르겠어. 이러다가 금세 할머니 될 것 같다니까.”

“이모는 이뻐서 괜찮아. 이쁜 할머니 되면 되지.”

“할머니가 이뻐서 뭐해.”

“멋쟁이 할아버지가 대시할 수도 있잖아.”

“어유, 아서라. 징그럽게.”

나이답지 않게 뛰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이모가 밉지 않게 그녀를 흘겼다.

“하여튼, 겨울 냄새가 나는 거 보니까 겨울은 겨울인가 봐. 얼마 안 있으면 또 느이 엄마아빠 올 때 되겠네.”

“……그러게.”

“이번엔 민혁이도 꼭 데리구 와. 알았지?”

그 말에, 열심히 움직이고 있던 예원의 입은 일순 느려졌다.

“…….”

“뭐야. 왜 대답이 없어?”

뭔가가 목구멍을 콱 틀어막은 느낌.

잠시 뒤, 잘게 다져진 밥알들을 힘겹게 삼켜낸 예원이 목소리를 틔워냈다.

“……아마, 바빠서 안 될 거야.”

“왜. 그땐 민혁이도 방학일 거 아니야. 어디 간대니?”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짚이는 게 있다는 듯, 은아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너 혹시, 민혁이랑 싸웠니?”

뻔할 뻔자다.

부정도 긍정도 않는 예원을 보며 은아는 알만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으이구. 잘 좀 지내지 왜 또 싸우고 그래. 보나마나 네가 성질냈지?”

“…….”

“너도 그 성질 좀 죽여. 남자애들은 어차피 다 똑같다고 몇 번을 말하니. 사소한 거는 웬만하면 그냥 눈감아줘. 평소에도 좀 잘해주고. 그렇게 한결같이 너만 바라보는 애가 어딨어?”

“…….”

“모르긴 모르지만, 느이 엄마아빠도 민혁이 정도면 사윗감으로 최고라 했을 거야. 이번엔 꼭 좀 보여주려니까 둘이 꼭 같이 와, 응? 알았지?”

“…….”

“그리고 너희도 돈 바짝 모아서 내후년 안으로 결혼해. 서른 되기 전엔 시집가야 될 거 아니야.”

이몬 남의 속도 모르면서.

금세 부루퉁해진 예원은 미미하게 답했다.

“……시집 안 가.”

“어머, 얘가. 시집을 왜 안 가?”

깜짝 놀란 은아가 토끼 눈을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네가 애 낳고 오순도순 민혁이랑 잘 사는 게 이모 꿈인데 무슨 소리야. 언제는 너도 민혁이랑 빨리 결혼하고 싶다면서?”

“…….”

“네가 아직 어려서 맘이 갈팡질팡 하나 본데, 가정이 생긴다는 게 얼마나 좋은 건데. 일단 안정이 되잖아. 여자도 별다를 거 없어. 옆에 누가 있는 거랑 없는 거랑 얼마나 다르다고.”

기껏 설명했는데도,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조카는 은아를 향해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그럼, 그러는 이모는 왜 이제껏 과부로 살았어?”

“뭐?”

어머, 얘가.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한편으론 어이가 없기도 해서, 은아는 소리 내어 웃었다.

“다 컸다고 이젠 아주 못하는 소리가 없어. 나야 뭐, 너랑 지원이 키우는 재미로 살았지. 니들이 있는데 남자가 왜 필요하니?”

“…….”

“그래도 가끔은 그런 생각해. 너희 엄마아빠가 살아있었으면, 내가 아니라 너희 엄마아빠가 너희를 키웠으면…… 너희들이 훨씬 더 풍족하게 살았을 텐데. 먹고 싶은 거 먹고, 하고 싶은 것도 다 하고…… 훨씬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또또. 쓸데없는 소리한다.”

사실은 가끔이 아니라 늘 하는 생각이지만, 이럴 것이 뻔해서 밖으론 잘 내어놓지 않는 마음이었다.

한순간 애달파진 조카의 눈빛을 본 은아는 씩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모가 너희 엄마한테 욕 안 먹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어? 또 며칠 이따가 제사상 앞에서 눈칫밥 먹을 생각하니까 질린다, 아주.”

“…….”

“아무튼 넌 딴 생각 말고 돈이나 모을 생각해. 요즘은 간소하게 하는 게 추세라고 해도 결혼은 결혼이드라. 이모 친구 아들네도 이번에 결혼했는데, 아주 엄청나게 깨진 모양이드라고.”

그런데 예원은 그 뒤로도 한참 말이 없었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감지한 은아가 계속해서 밥을 먹으며 예원을 훑었다.

요즘 애들은 결혼을 종용하는 것이 스트레스라고 한다던데, 얘도 설마 그런가?

혼자 키운 세월만 이십 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이들의 심리를 파악하는 것은 은아에게 여전히 참 어려운 일이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탓인지 늘 생각이 깊고 의젓한 큰 조카.

가끔은 다 털어놓고 기대어도 좋을 텐데, 어려서나 커서나 착해빠진 아이는 여간해선 그 속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아휴, 됐다. 다음에 얘기하면 되지, 뭐.’

조카에게로부터 부러 시선을 돌리던 은아의 눈이 문득 앞에 있는 TV로 향했다.

“아, 맞다. 오늘 그거 마지막인데.”

“뭐?”

“<못 말리는 청혼>. 현민혁이 나오는 거 있잖아.”

“……현민혁?”

“혹시 모르니까 알람 맞춰놔야겠다.”

휴대폰을 찾아 드는 은아를 보며 예원은 젓가락을 입에 물었다.

“그거…… 재밌어?”

드문 질문이었다. 드라마광인 은아와 달리 예원은 그런 쪽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은아가 조금 의외라는 눈치로 대답했다.

“응. 딴 데선 잘생긴 줄 모르겠더니, 그거 보니까 잘생기긴 했더라. 영 기생오라비 같아서 별로였는데 나름 괜찮아. 근데 이상하게, 보면 볼수록 민혁이랑 좀 닮은 것 같애. 참, 그러고 보니까 이름도 민혁이랑 똑같네?”

“…….”

“며칠 전에 보니까 걔도 여자친구 있다고 소문났더라. 연예인이 돼가지구선 조심 좀 하지. 요즘 한참 잘 되는 것 같더니 아무래도 더 인기 끌긴 힘들겠어. 알만한 애가 여자친구랑 대놓고 그게 뭐하는 짓이래? 걔도 참. 쯧쯧.”

예원의 멍한 눈길이 이모에게로 향했다.

“…….”

이모, 그 여자가 바로 나야.

예원은 혀끝까지 도달한 그 말을 김치와 함께 애써 목구멍으로 밀어 넣어야 했다.

문득, 아까 전 그 남자가 보내왔던 메시지가 퍼뜩 떠올랐다.

[내일 시간 좀 있어요? 에덴으로 내가 갈게요.]

어쨌거나 내일은, 정말 결판을 지어야겠네.

심기일전한 예원은 입 안으로 밥 한 술을 더 떠 넣고는 전투적인 눈빛을 했다.

마치 전장을 앞에 두고 있는 병사처럼.

* * *

“생각해 봤습니까?”

에덴의 사무실. 책상 앞에 삐딱하게 앉은 민혁이 물었다.

그 앞에 선 예원은 다소 쭈뼛쭈뼛한 태도였다.

“……네.”

“결론은?”

이러고 있으니까 내가 뭐 죄 지은 것 같네.

조금 억울하기는 했지만, 바깥에서 들려오는 듯한 이상한 웅성거림을 외면하던 예원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게, 저기. 아무래도 좀 더 얘길 나눠보고 생각을 해봐야 될 것 같은데…….”

“얘기요?”

“네. 그땐 얘기를 너무 급하게 끝내기도 했고, 그 말씀하신 ‘조건’들에 대해서도 좀 더 심층적으로 얘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은데요.

그녀는 그 문장을 그렇게 끝맺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별안간 사무실 문이 발칵 열리며 알바생들 몇몇이 사무실 안으로 곧장 뛰어 들어왔다.

“점장님!”

이상하리만큼 당황한 것 같은 얼굴들을 보며, 예원은 한껏 놀란 눈으로 물었다.

“……뭐, 뭐야, 갑자기?”

“점장님, 큰일 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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