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 좋아질 수 없는 남자-3화 (3/102)

3화. 결혼은 무슨!

2018.04.13.

“죽기 전에, 너랑 결혼할 사람 좀 보고 싶어.”

“……엄마.”

그의 얼굴과 목소리가 동시에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의 죽음과 결혼.

눈앞의 남자가 가장 듣기 싫어할 소리를 한꺼번에 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수진은 꿋꿋하게 말했다.

“옛말은 역시 틀리지가 않나 봐. 자기 몸은 자기가 제일 잘 안다고, 이제 슬슬 느껴지네. 때가 되었다는 게.”

“…….”

“그치만 갈 때는 가더라도 꼭…… 네가 천생 배필하고 맺어지는 건 꼭 보고 가고 싶어. 비록 진짜 엄마는 아니라도, 넌 진짜 내 아들이나 마찬가지잖니.”

“…….”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딱 하나 남은 소원인데…… 좀 들어주면 안 될까?”

“…….”

“응? 민혁아.”

기실 애원과도 다름없는 말투.

그는 아무 대답도 못하는 채로, 그녀를 조용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예원아! 잠깐만, 잠깐만 내 얘기 좀 들어봐. 응? 예원아!]

나쁜 자식.

“점장님.”

쳐 죽일 놈의 새끼.

“점장님!”

“……어?”

샷 글라스에 무의식적으로 물을 내리고 있던 예원은 퍼뜩 고개를 돌렸다.

다 완성된 아메리카노를 앞에 둔 채,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알바생 채린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이거 연하게인데요. 샷 하나 더 들어갔어요.”

아차. 빌지를 다시 확인한다는 걸 또 깜빡 잊어먹은 것이었다.

예원은 속으로 제 머리를 흠씬 쥐어박았다.

“쏘리, 얼른 다시 뽑아줄게.”

채린은 나이 지긋한 단골 고객에게 한 샷만 넣은 아메리카노를 무사히 서빙한 뒤, 예원을 향해 돌아보았다.

“점장님,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어? 왜?”

“아니, 요번 주 내내 좀 이상하신 것 같아서요. 안색도 좀 안 좋으신 것 같고. 혹시 어디 아프신가?”

……안 그렇게 봤는데 귀신이네, 쟤도.

예원은 커피가루가 흩어진 바를 타올로 닦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보였다.

“아냐, 안 아파. 일 같은 것도 없고. 그냥 생리 때 다가와서 그런가 봐.”

“어, 진짜요? 그렇잖아도 저 오늘 그 날인데.”

“그래? 몸은 좀 괜찮아?”

“배가 좀 아리긴 한데, 아까 약 먹어서 참을 만해요.”

“그래? 다행이네.”

“맞다. 생리 얘기하니까 그때 생각나요.”

“언제?”

“왜, 그때 점장님 남자친구분 오셨을 때 있잖아요.”

순간, 예원의 얼굴에 스친 당혹스러움을 눈치채지 못한 채린은 특유의 말투로 발랄하게 기억을 상기했다.

“그때도 점장님 그 날이었는데. 그분이 케이크랑 약이랑 막 사들고 오셔서는, 일 좀 적당히 하라고 하면서 괜히 그러고 가셨잖아요. 츤데레처럼.”

“…….”

“점장님은 또 거기다 대고, 케이크 파는 매장에 외부 케이크를 가져오면 어쩌냐고 막 뭐라 하셨었는데. 얼굴엔 웃음만 한 가득이면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우리가 놀렸었잖아요. 지금 솔로들 앞에서 염장 지르는 거냐고 막…….”

“…….”

“기억 안 나세요?”

무심코 넘기려 했다. 그런데 채린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잊혔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기다렸다는 듯 팡 튀어 올랐다.

기억이 안 나냐고? 그럴 리가. 모조리 기억하고 있다.

그 날 그 놈이 무슨 옷을 입었었는지. 어떤 표정을 지었었는지. 서비스로 무슨 음료를 마셨는지조차도…….

모든 게 빌어먹을 정도로 생생한 걸.

“……아니, 기억나.”

그러나 예원의 타들어가는 속을 전혀 모르는 채린은 고무장갑을 손에 끼워 넣으며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아. 나도 그런 남자 좀 만나봤으면 좋겠다. 대체 어딜 가면 그런 남자를 만날 수 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점장님은 진짜 땡 잡으신 것 같아요.”

“……내가 뭘.”

“잘생겼지, 공부도 잘하지, 성격도 좋지. 게다가 일편단심 한 여자만 바라보고……. 전 솔직히 그렇게 완벽한 남자가 이 세상에 있을까 싶었는데, 진짜 있기도 하다는 걸 점장님 남자친구분 보고 알았잖아요. 다들 그렇게 완벽한 남자는 게이라고 막 떠들어대던데.”

“…….”

“그런 걸 보면 점장님은 아무래도 전생에 나라를 구하셨나 봐요.”

예원은 통식빵을 자르려던 것도 잊은 채, 고무장갑 낀 손을 하나 꼽아가며 전민혁 찬양에 열을 올리고 있는 채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 라……. 차라리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은 놈이라는 쪽이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

며칠 전, 친구인 지영 앞에서 체면을 차릴 새도 없이 펑펑 울어버렸던 그 날. 예원은 결국 민혁과 헤어졌다는 사실을 어렵사리 고백했다.

그러자 지영이 물었다.

‘아니 근데, 왜? 왜 헤어진 거야? 니들이 대체 뭐 땜에?’

예원은 훌쩍거리며 대답했다.

‘……바람 폈어, 그 새끼가.’

바람이라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전민혁’이 바람이라니. 지영은 예원만큼이나 충격 받은 얼굴이었다.

‘바라암? 헐. 말도 안 돼. 걔가 여자가 어디 있어서? 만나는 사람이라곤 강세찬 패거리밖에 없는 앤데, 도대체 언년이랑 바람을 피워!’

그 말을 들은 예원은 조용히 답해주고 싶었다.

‘그러게. 진즉에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뭔가 이상하다는 걸.’

못 알아챈 내가 바보 등신이지.

자신과 그가 함께 시간을 보내던 그 방에서, 두 놈이 붙어있는 걸 봤을 때.

그리고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수줍은 듯 발갛게 달아올라 있던 전민혁의 옆모습을 마주했을 때.

그녀는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두고 볼 것도 없이 냅다 소리를 질렀고, 오밤중에 맞은 때 아닌 난리에 민혁과 세찬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일 온다더니 어떻게 된 거냐며 우왕좌왕하는 그놈들이 꼴도 보기 싫었다. 그래서 갈 곳도 생각 않고 무작정 나와 버렸다. 내 집인데 내가 왜 나와야 할까,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지샌 건 물론이다.

그리고 다음 날. 집은 아주 말끔히 치워져 있었고, 그 곳에선 하룻밤 새에 그녀만큼이나 초췌해진 민혁이 예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새 벌어진 이 어마어마한 일들을 생각하면 가만히 있어도 천불이 났다. 그럼에도 모든 사실을 지영에게 솔직히 말할 수는 없었다.

‘10년을 알고 지낸 내 남자친구가, 다른 사람도 아닌 강세찬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래.’

이 말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좋은 남자라고만 생각했다.

친구로서는 8년, 연인으로서는 2년. 나름의 긴 시간 동안 그녀가 지켜봐온 민혁은 어느 면에서든 여타의 남자들과 많이 달랐으니까.

일단 그는 여자의 맘을 너무나 잘 알았다. 어떤 행동을 해야 좋아할지는 물론이었고 섭섭한 것, 화나는 것까지 기가 막히게 캐치했다.

또, 그는 성적으로 아주 담백했다.

다른 남자들처럼 짐승 같이 욕구에 급급해 스킨십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한없이 아껴주기만 했다.

플라토닉한 사랑을 꿈꿨던 그녀에게 그보다 더 안성맞춤인 남자는 없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것이 그에 대한 믿음을 더욱 증폭시켰던 건지도 모른다.

바보 같이 순진하게. 그게 다 터무니없는 착각이었던 줄도 모르고.

“…….”

모든 게 너무너무 원통해 미칠 지경이었고, 저를 속인 그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다.

그런데……

한편으론 측은한 마음도 드는 게 사실이었다.

아웃팅. 그쪽 방면으로는 전혀 문외한이었던 그녀지만, 그 말의 무서움만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차라리 여자랑 바람을 피운 거였으면 속 시원히 소문내고 욕할 수라도 있다. 하지만 그 바람의 대상이 같은 남자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남의 성적 취향을 마음대로 발설하는 건 엄연히 잘못된 일이다. 그건 그가 나쁜 놈인 문제를 떠나, 당연히 지켜져야 할 인도적인 도리였다.

하지만. 하지만…….

‘그럼 난, 대체 누가 위로해 줄 수 있지?’

홀로 남은 그녀는 속이 썩어 문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진짜 나라라도 팔아먹었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제가 대체 무슨 중죄를 지었기에 하나뿐인 부모님으로도 모자라 제일 소중했던 남자친구마저 이렇게 뺏겨야 하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휴.”

그렇게 그녀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을 무렵, 달그락거리는 소리들 위로 채린의 목소리가 얹혀 들려왔다.

“참. 근데 두 분, 결혼은 언제 하실 거예요? 조만간 좋은 소식 있을 거라면서요. 아직은 좀 이른가?”

“……어?”

아뿔싸.

깜짝 놀란 예원은 황급히 제 머릿속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알바생들 앞에서 지나가는 말로 결혼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되도 않은 허세까지 쬐끔 섞어서.

‘결혼? 당연히 생각은 하고 있지. 나야 뭐 빨리 할 생각은 없는데…… 울 민혁이가 워낙 보채대서, 하하.’

……거기서 끝이었으면 그나마 나았으련만.

실은 부모님과 만나 뵙고 진지하게 얘기 중이라고, 조만간 좋은 소식 있으면 알려주겠다고까지 했으니……!

‘하여튼 이놈의 입이 방정이지! 내가 대체 뭔 생각으로 그랬을까.’

당장이라도 과거의 자신을 쥐어 패고 싶은 심정으로, 예원은 억지웃음을 지었다.

“……글쎄, 잘 모르겠어. 사실 걘 아직 졸업도 안 했잖아.”

“에이, 그런 게 뭐가 중요해요. 조금이라도 이를 때 빨리 잡으셔야죠. 저 같으면 당장 잡고 안 놔줄 텐데. 남 주기 아까운 분이잖아요.”

……그래, 그랬지.

사실은 그녀도 정말이지 그러고 싶었다. 꼭 붙잡아서 어디도 못 가게, 그렇게 옆에 잡아두고 싶었다.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 고1 때 처음 만난 그들은 운명처럼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장장 8년을 친구로 지내다, 나날이 커져가는 마음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그녀의 고백으로 두 사람은 결국 연인 사이까지 되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나이는 어느덧 스물일곱이 되어 있었다.

5년차에 접어드는 능력 있는 바리스타인 그녀에 반해, 그는 이제 막 졸업을 목전에 둔 대학생이었다. 실상 결혼을 생각하기엔 좀 이른 감이 있는 조건과 나이.

그럼에도 그녀는 모든 것을 무릅쓰고 결혼을 강행하려 했다.

왜?

그를 너무도 사랑했으니까.

어릴 적 부모님을 잃은 뒤 맘씨 좋은 이모 밑에서 동생과 함께 예쁨을 받고 큰 예원이었지만, 그래도 가족의 화목함과 사랑은 그녀가 늘 간절히 원하던 것이었다.

금전적인 부분이야 앞으로 함께 메꿔가면 되는 문제니, 당장이라도 그와 한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그렇게 그와의 핑크빛 미래를 그리던 그녀가 어떻게 감히 예상할 수 있었을까.

그의 부모님으로부터 기어이 결혼 허락을 받아냈더니, 제일 결정적인 것에 이리 발목을 턱 잡혀버릴 줄. 지독히도 허무하게 말이다.

“근데 아까부터 어디서 자꾸 진동 오는 것 같은데. 점장님 폰 아니에요?”

“……아, 응.”

정신이 든 예원이 충전 중이었던 폰을 확인했다.

그런데, 발신자를 발견한 그녀의 눈빛은 순식간에 싸해졌다.

[어머니]

……아, 나. 안 그래도 심란해 죽겠는데.

“채린아. 나 잠시만 전화 좀 받고 올 테니까, 손님 오시면 얘기 좀 해줄래?”

“네!”

언제부터 전화를 걸었던 건지, 그 와중에도 손에 쥔 휴대폰은 끊어질 기미가 없이 계속 진동하고 있었다.

사무실로 들어가 조심스레 문을 닫은 예원은 한 번 한숨을 쉬고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넌 애가 왜 그렇게 전화를 안 받니?]

인사는 고사하고, 받자마자 신경질을 내는 여자의 버릇은 늘 똑같았다.

[내가 아까부터 몇 통을 했는데, 카톡도 안 보고.]

“……죄송해요. 일하는 중이라 몰랐어요.”

여느 때와 비슷한 변명. 하지만 사실이었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의 여자는 예원의 말에 픽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장사가 잘되는 집도 아니더구만. 무슨 전화도 못 받을 정도로 바빠?]

“…….”

[아, 하여튼 간. 너 내일 시간 좀 있니?]

“내일이요?”

내일은 오늘과 마찬가지로 마감근무가 예정되어 있었다.

항상 카페에 손발이 묶여있는 그녀에게, 시간이란 일부러 내야하는 것이지 아무 때나 확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뇨, 저 휴무 며칠 전에 써서 이번 주엔 더 이상 못 쉬어요.”

[그래도 하루 온종일 일하진 않을 거 아니야?]

“저녁 근무이기는 한데…….”

이 분이 또 뭔 소릴 하려고 이러시지.

뭔 소릴 하든 이젠 저와 상관없는 일이지만, 왠지 모르게 불안한 맘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러면, 내일 아침에 우리 집으로 좀 와라. 김장준비 좀 같이 하자.]

“……네?”

여자의 천연덕스러운 제안에 더럭 말문이 막혔다.

갑자기 또 웬 김장?

[얘는, 뭘 그리 놀라니. 이제 슬슬 담가야 겨우내 먹지. 작년엔 네가 도와주니까 한결 수월하게 끝나더라.]

“…….”

[바쁜 거 알지만 좀 와. 이번에도 몇 포기 챙겨줄 테니까.]

‘몇 포기는 무슨. 꼴랑 두 포기 챙겨준 거 갖고 생색내는 거야, 지금?’

예원은 기가 막혔다.

작년 겨울, 그녀는 민혁의 부모님께 어떻게든 잘 보이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썼었다. 김장을 자원해서 도와드렸던 것도 그 중 하나였다.

민혁은 외동아들이었기에 집의 식구라곤 아버지, 어머니, 민혁 셋뿐이었다.

그런 집이 왜 굳이 김장을 하는 건지 속으로는 이해가 안 되었지만, 그것이 기회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예원은 군말 없이 김장을 도왔다.

수없이 많은 배추에 양념을 치댔다. 하루 종일 허리 한 번 못 펴고 작업을 마쳤더니, 어느덧 저녁 여섯시가 다 되어 있었다.

여느 집 같았으면 수고했다며 수육 같은 거라도 함께 삶아 먹자고 했겠지만, 그들에겐 그런 일도 없었다.

그녀에게 주어진 건 오직 김장김치 두 포기가 담긴 밀폐용기. 그것이 전부였다.

그걸 갖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꽤나 허탈해했었던 기억이 난다.

전민혁만 아니었음 김치고 뭐고 다 팽개치고 나오는 거였는데, 하고 생각도 했었지만 그마저도 민혁의 선물공세와 애교에 의해 사르르 녹았더랬다.

지금 생각하니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어서, 또 울화통이 치밀었다.

하여간 바보 천치 홍예원. 어리석어 빠져가지고는.

“……죄송한데, 저 정말 안 돼요. 그럴 시간 없어요.”

[오전에 잠시도 안 되니?]

“네, 죄송해요.”

그런데 습관처럼 사과해놓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아들의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김장을 도우러 오라고 하다니.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저기 근데, 혹시 민혁이한테서 무슨 얘기 못 들으셨어요?”

[얘기? 무슨 얘기.]

……아니, 이 자식이?

“……걔가 아무 말도 안 해요?”

[민혁이가? 걔야 집에 오면 바로 방에 들어가기 바쁘지, 뭐. 왜, 무슨 일 있니?]

아나, 이거 진짜!

내심 설마설마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이제껏 한 마디 언질도 주지 않았을 수가!

이 여자는 지금 아무것도 모르고 있음이 분명하다. 비로소 사태를 파악한 예원의 얼굴은 절로 심각해졌다.

파혼까지 한 마당에, 그걸 놈이 고해바치기까지 마냥 기다려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까지 또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제가 나서는 것이 옳다는 판단이 섰다.

실상 그게 제일 빠르고 쉬운 방법이었다. 물론 그다지 내키는 방법은 아니긴 했지만.

“저, 어머니. 좀 갑작스러우시겠지만,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응? 뭔데.]

결심한 그녀는 짧은 심호흡을 한 뒤 말을 이었다.

“저랑 민혁이 말인데요…….”

[응.]

“며칠 전에…… 헤어졌어요.”

휴대폰 너머가 일순 조용해졌다.

하지만 잠시 뒤, 보이지 않는 여자에게선 이내 경악스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놀랍겠지, 당연히. 기꺼이 이해하는 바다.

예원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거듭 말했다.

“정말이에요. 이렇게 된 마당에 제가 먼저 말씀드리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는데, 민혁이가 아무 얘기도 안 했다고 하니까 말씀드리는 거예요.”

[…….]

“그러니까, 앞으로는 연락하지 말아주셨음 해요.”

그 뒤로 숨 막힐 듯한 정적이 얼마쯤 흘렀을까.

여자가 불쑥 물었다.

[그게…… 정말 사실이니?]

“……네.”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리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도대체 무슨 말이야, 이게? 너희가 갑자기 왜 헤어져! 며칠 전까지만 해도 상견례를 잡니 어쩌니 하던 애들이!]

여자의 말마따나, 최근의 예원은 시간만 나면 괜찮은 한정식 집을 검색하곤 했었다. 그래도 명색이 상견례인데, 어느 정도 그럴 듯한 곳에서 치르고 싶은 마음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한순간에, 모든 것이 부질없어져 버릴 줄 알았더라면…… 그런 뻘짓 따위는 절대 하지 않았을 테다.

예원은 또다시 울컥 솟아오르려는 눈물을 겨우 참아냈다.

“자세한 건 나중에 민혁이가 말씀드릴 거예요. 그럼 그렇게 아시고, 전 이만 끊을게요.”

[예원아!]

단호히 종료 버튼을 누른 예원은 메인화면으로 돌아온 액정을 내려다보며 나지막한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가 전민혁의 마지막 외침과도 똑 닮아있어서, 더더욱 맘이 좋지 않았다.

‘아, 진짜. 죽겠네.’

그냥저냥 괜찮았던 기분은 어느 새 저 먼 바닥으로 곤두박질쳐 있었다.

대체 언제쯤이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는지.

지긋지긋한 생각들을 떨쳐내기 위해 머리를 힘껏 흔든 그녀가 사무실을 나서려던 그때, 마침 폰이 다시금 진동했다.

안 봐도 훤하다, 훤해.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하지 마시라니까요!”

그런데 뜻밖에도, 그녀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버리고 말았다.

[……전화하면 안 됩니까?]

중년 여자의 것이라 하기엔 너무나 굵직하고 감미로운 목소리.

예원의 손이 반사적으로 헙, 입을 가렸다.

“……!”

사, 사장이잖아!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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