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나쁜 새끼
2018.04.10.
예원은 지난 기억들을 찬찬히 돌이켜보았다.
그녀가 먼저 키스를 시도할 때면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듯했던 그의 표정.
그리고 그녀가 한참의 고민 끝에 혼후관계주의임을 고백했을 때, 어쩐지 눈에 띄게 안도하는 듯했던 그의 얼굴.
이상하게 껄끄러웠던 부분들이 이제야 모조리 이해가 되었다. 앞뒤가 착착 맞아 들어가는데 기분이 이렇게 더럽긴 또 처음이었다.
차라리 외간여자랑 바람을 피운 거였으면 조금은 덜 억울했을까. 이보단 덜 분통했을까.
‘아니라고는 죽어도 안 하네, 이 나쁜 자식이.’
끝이었다. 완전한 끝.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도,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도저히 풀지 못할 의문 하나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왜, 왜 굳이…… 나였어?”
“…….”
“너 좋다는 여자애들 주위에 많았잖아. 그런 애들 다 마다하고, 왜 굳이 날 택했던 건데.”
학창시절, 준수한 외모와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민혁은 수많은 여자애들로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고백을 받았었다.
하지만 그는 번번이 거절을 고했다. 꼭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것도 몰랐던 예원은 ‘얘가 혹시 날 좋아하나?’ 하는 생각에 가슴 설레는 나날들을 보냈었다.
그리고 실제 그와 연인으로 발전하고 난 뒤, 아마도 제 생각이 맞았었던 모양이라고 혼자서 뿌듯해했었는데.
그런데 그게.
그녀 혼자만의 망상이었단 얘기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다.
“여자는 처음부터 좋아할 수도 없는 몸이었으면서, 어째서 나랑은 ‘결혼’까지 하려고 한 거냐고.”
“…….”
“어?”
그럼에도 그녀는 실낱같은 기대를 안고 물었다.
그래도 내가, 다른 여자애들에 비해서 특별했던 건 아닐까.
사랑까진 아니었더라도, 여자를 상대로는 유일하게 그 비슷한 감정까지 도달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마음으로.
하지만 그런 기대를 깡그리 무너뜨리기라도 하듯, 전민혁은 그녀의 눈길을 피하며 천천히 대답했다.
“너라면…… 이해해 줄 것 같았어.”
“…….”
“사실이 밝혀졌을 때, 온 세상 여자가 다 날 증오하더라도…… 예원이 너만은, 끝까지 날 믿어줄 것 같았어. 언제까지고 옆에 있어줄 줄 알았어.”
“…….”
“그게 전부야.”
기대 이상으로 솔직하고 간결한 대답.
그녀의 심장은 쿵, 내려앉았다.
‘……도대체 뭘 기대한 거니, 넌.’
자괴감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는 아무래도, ‘홍예원’이란 여자를 너무 과대평가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 세상 어느 여자가, 그런 걸 모른 척 넘어가 줄 수 있니? 그걸 어떻게 이해해?”
“…….”
“아니, 그렇게 생각했음 진즉에 말했어야지. 적어도…… 적어도 이런 식으론 알게 하지 말았어야지!”
참다못한 예원이 악에 받쳐 울부짖자, 어쩔 줄 모르던 민혁은 냉큼 바닥으로 내려가 무릎을 꿇었다.
“미안해, 예원아!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진짜 잘못했어.”
“…….”
“속이려고 한 거 아니야. 조만간 말하려고 했는데, 기회가 통 안 났어. 그래서 그랬던 거야. 제발…….”
“아버님 어머님도 아시니, 설마?”
그의 말을 가로막은 예원은 곧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물을 걸 물었어야 했는데.
“그럴 리가 없지.”
이 사실을 아셨다면, 나와의 결혼을 그렇게 반대하셨을 리가 없으니까. ‘연막’을 치기 위해서라도 악착같이 결혼시키려 안달이셨을 텐데.
문득, 천애고아를 며느리로 맞아들이는 건 좀 그렇다며, 저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그 얼굴들이 떠올랐다.
그 분들이 이 사실을 알면 과연 뭐라고 하실까.
결혼 허락을 받기 위해 물심양면 노력했던 자신이 더없이 한심해지는 순간이었다.
이제 막 다 넘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정말 밝은 날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자.”
“…….”
“너…… 날 좋아하기는 했니?”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이나마 이런 식으로라도 부여잡고 싶을 만큼, 진정 눈물 나게 사랑했던 남자.
그 말에, 마침내 그는 고개를 들었다.
“좋아했어. 아니, 사랑했어. 지금도 사랑해. 정말 진심으로!”
“…….”
“이건 거짓말 아니야. 믿어줘, 예원아. 어?”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던 그의 입술이 애절하게 속삭였다.
사랑한다. 모든 걸 고백한 놈이 여자인 날 여전히 사랑한단다.
그녀는 순간, 그 말을 끔찍하게 믿고 싶어지는 자신을 저주했다.
홍예원, 그렇게 당해놓고도 모르니. 지금 또 널 이용하려는 거잖아. 저 순수해 보이는 눈빛으로.
“그래, 믿어줄게.”
“…….”
“나랑은 좀 다른 의미의 사랑이었겠지만.”
사랑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애인을 향한 사랑도 있지만, 가족 간의 사랑도 있고 또 간혹 친구 간의 사랑도 있다.
“근데 있잖아.”
얘가 나에게 느꼈던 사랑은, 과연 어느 쪽에 속했을까.
“네가 정말 진심으로 날 사랑했다면.”
“…….”
“……넌 나한테 이랬으면 안 돼.”
어느 쪽이었든 간에, 내가 했던 사랑에 비할 수는 없었을 테다.
“이 나쁜 새끼야.”
이제 막 ‘전 남자친구’가 된 그에게, 예원은 이를 악물고 똑똑히 씹어 뱉었다.
잔뜩 붉어진 눈이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그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결혼 얘긴 없었던 걸로 하자.”
“…….”
“다신 내 눈 앞에 나타나지 마.”
예원은 꿇어앉은 그를 억지로 일으켜 문 밖으로 내쫓았다.
바깥은 지독히도 추웠다. 마치 그녀의 마음처럼.
“예원아!”
“파혼 소식은 부모님께 네가 직접 전해.”
쾅!
그의 얼굴 앞으로 문이 세차게 닫혔다.
* * *
똑똑.
“네.”
서재 문이 조심스레 열리고, 그 사이로 앙증맞은 머리가 빼꼼 내밀어졌다.
“자기, 뭐해요? 바빠요?”
“아니. 잠깐 밀린 거 처리하는 중이었어. 괜찮아, 들어와.”
남자의 말에 여자는 배시시 웃더니 깨금발로 살금살금 다가왔다.
또 무슨 꿍꿍이가 있는 모양이지.
서류를 휙휙 넘기던 남자가 안경을 한 번 들어 올리곤 피식 웃었다.
“왜, 혼자 놀게 해서 심심했어? 잠깐만 기다려, 곧 놀아줄 테니까.”
“음…… 그건 됐구요. 실은, 나 방금 할 말이 생겼는데.”
“할 말? 뭔데.”
이상하리만큼 밝은 얼굴의 여자는 어느 새 그의 뒤편으로 간 채였다.
그녀는 의자에 앉은 그를 뒤에서 슬쩍 껴안더니,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당신이요.”
“…….”
“곧, 아빠가 될 거래요.”
사인을 하던 큼직한 손이 일순 우뚝, 멈추었다. 잇따라 고개도 퍼뜩 돌아갔다.
“뭐?”
“나, 임신했다구요.”
“……저, 정말이야?”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는 듯한 말투.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기양양하게 미소 지었다.
“그럼요. 방금 이걸로 확인하고 왔어요.”
여자가 그의 눈앞에 희끄무레한 막대기 하나를 흔들어 보였다.
그것이 임신 테스트기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아야!”
감격한 그는 곧장 박차고 일어나 여자를 꽉 끌어안았고, 졸지에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꺅, 애 떨어질 뻔했잖아요!”
“고마워. 정말 고마워.”
“윽, 알았으니까 이거 좀 놔요! 숨 막혀요!”
“잠깐, 잠깐만.”
기쁨에 들뜬 남자는 그걸로도 모자라 여자의 얼굴 곳곳에 뽀뽀 세례를 날리기 시작했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말만 해, 다 사줄 테니까. 응?”
“쳇, 정말이죠?”
“당연하지. 내가 언제 없는 소리 하는 거 봤어?”
하하하, 호호호.
한 치의 틈도 없이 바짝 밀착한 상태로, 두 사람은 한껏 웃음꽃을 피워냈다.
그리고…….
─컷!
“오케이! 오늘 촬영은 여기까지 합시다.”
드디어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웅성거리며 좋아하는 스태프들을 뒤로하고, 남자는 여자를 감쌌던 팔을 득달같이 풀어냈다.
쓰고 있던 안경 또한 곧장 주머니로 직행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선배.”
1초 전까지만 해도 하트 뿅뿅 눈이었던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이 시대의 철벽왕이자, 얼음왕자로도 유명한 배우 ‘현민혁’이었다.
“응, 민혁 씨도 수고했어.”
“그럼, 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으응.”
형식적인 인사를 마친 남자는 여느 때처럼 자리를 쌩 떠버렸고,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여자는 문득 입술을 삐죽였다.
하여튼, 찬바람도 저만한 찬바람이 없어요.
“배우님, 물 좀 드세요.”
“응.”
페트병을 받아든 그녀가 조심조심 물을 마시며 슬쩍 옆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최근에 막 인턴으로 들어온 그녀의 매니저는 멀찍이 선 현민혁 구경에 폭 빠져있었다.
“좋아?”
“……네?”
“쟤가 그렇게 좋냐고.”
아차.
“아, 아니요. 그냥 전 신기해서…….”
“신기하기는. 앞으로 저런 연예인들 마르고 닳도록 볼 텐데. 그때마다 그렇게 헤벌레, 하고 볼 거야?”
“아닙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아직 신입이라 그런가, 군기가 바짝 든 것이 꽤나 귀엽다.
피식 웃음 지은 그녀는 멀찍이 선 남자의 모습을 인턴과 함께 덩달아 감상했다.
“저, 근데 배우님. 혹시 현민혁 씨랑 친하세요?”
“그건 왜.”
“그냥, 궁금해서요.”
팔짱을 낀 여자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글쎄, 이 바닥에 현민혁이랑 친하다고 할 수 있는 배우가 있긴 있으려나. 워낙 사방으로 꽉꽉 막아두고 사는 놈이라.”
“정말요? 왜요?”
“그냥. 원래 성격이 그래. 남자배우들이랑은 좀 덜한데, 여자배우들이랑은 특히 벽을 쌓고 지낸달까.”
실제 그녀만 해도 그랬다.
그와 같이 촬영한 지가 벌써 수개월이 되었건만, 종영이 다다른 지금까지도 이렇다 할 대화를 나눈 적이 전혀 없었다.
명색이 촬영의 70% 가량을 함께한 여자주인공인데도 불구하고.
‘저러니 그런 소문이 안 돌려야 안 돌 수가 있나, 쯧쯧.’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남자를 보던 그녀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민혁아, 전화.”
“어.”
그런데 하나 신기한 것은, 시종일관 무뚝뚝한 그에게도 이따금씩은 광대가 솟아날 듯 승천할 때가 있다는 것이었다.
“여보세요. ……네! 네, 잠시만요…….”
바로 저렇게.
순식간에 화색이 만면해진 남자가 성큼성큼 자리를 떴다.
그녀는 무덤덤하게 반응했지만, 인턴은 금세 멍한 눈길이 되었다.
“와, 저렇게 웃으니까 완전 딴 사람 같네요. 진짜 잘생기긴 잘생겼다.”
“……어련하시겠어, 현민혁인데.”
“근데 갑자기 어딜 저렇게 바쁘게 가는 걸까요? 이제 막 촬영 끝났는데, 쉬지도 않고.”
쳇, 알 바냐.
다시 한 번 물을 삼켜낸 여자가 다소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모르지, 어디 꽁꽁 숨겨놓은 애인이라도 있는지도.”
* * *
“엄마.”
“응, 왔니?”
어머, 세상에.
놀란 수진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대앉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꽃을 한 아름 사들고 온 민혁 때문이었다.
“아휴, 넌 무슨 올 때마다 이런 걸 사오니, 번거롭게…….”
“엄마가 좋아하시잖아요.”
그러고 보니까 제일 예쁜 꽃이 여기 있네. 괜히 사왔나.
그 특유의 살가운 농담에, 파리한 얼굴의 수진은 오랜만에 꽃처럼 비싯 웃었다.
“이리 앉아. 촬영은, 안 바빠?”
“오늘 거의 다 끝났어요. 마지막 촬영만 남겨두고 있어서 이제 널널해요.”
“……벌써 그렇게 됐구나. 요즘은 시간이 대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다니까.”
안 그런 척하지만, 어쩔 수 없는 쓸쓸함이 여실히 묻어나는 목소리.
한순간 어두운 얼굴이 된 그는 늘 그랬던 것처럼 목소리를 흐렸다.
“자주 못 찾아봬서 죄송해요, 엄마.”
하지만 수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이렇게 와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나 같은 사람도 한창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었는데, 넌 오죽하겠니.”
7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 중 하나로, 한 시대를 화려하게 풍미한 수진이었다.
그만큼 현재 민혁의 삶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을 그녀이기에, 그는 그제야 살짝 미소를 지었다.
“저, 많이 보고 싶으셨죠.”
“그럼, 당연하지.”
“……근데 오란 말씀도 한 번 없으셨어요? 연락도 잘 안 하시고.”
일부러 연락을 뜸하게 한 것이 내심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하여간 녀석도, 참.
“티비만 틀면 질리도록 나오는 얼굴인데 뭐 하러 그래. 실물만은 못해도, 꽤 봐줄만하더라고.”
그의 이름하야 현민혁.
아이돌 그룹 ‘스톰’의 인기 최하위 멤버였던 흑역사를 뒤로하고, 현재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남자배우 중 한 명이자 톱스타가 된 남자.
오버 좀 보태서 ‘국민 남친’이라 불리기도 하는 그이기에, 티비만 틀면 나온다는 말도 진정 과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수진의 앞에서만큼은 한낱 응석받이와 다름없어지곤 했다.
“와, 날 향한 엄마의 마음이 겨우 그 정도였다니……. 약간 섭섭해지려고 하는데.”
설핏 미소 지은 그녀는 짐짓 진지하게 읊조렸다.
“나 보러 안 와도 되니까, 너는 그 시간에 너 하고 싶은 것 해.”
“그런 거 없어요.”
“없긴 왜 없어. 제일 중요한 것도 아직 안 하고 있으면서.”
“……제가 뭘요.”
“요즘도, 만나는 아가씨 없니?”
……역시, 이 얘긴 왜 안 나오나 했다.
“아시면서 뭘 물으세요.”
“혹시나 해서 묻는 거지. 이번에 같이 했다는 그 애는 별로야? 꽤 예쁘장하더구만.”
“글쎄요, 별로 관심이 없어서.”
“민혁아.”
주의를 환기시키는 목소리가 전에 없이 단단해서, 그제야 민혁은 회피하던 시선을 수진에게 맞추었다.
그녀의 눈빛은 여느 때와 다르게 어쩐지 필사적이었다.
“청춘, 그거 긴 것 같아도 금방이야. 나중 가면 후회해봐야 늦는다구. 넌 날 보면서두 느끼는 게 없니?”
“엄마가 어디가 어때서요.”
“글쎄…….”
수진의 시선이 문득 그의 뒤편으로 이동했다.
그가 사온 꽃다발들을 향해서였다.
“네가 사다준 꽃들을 보고 있으면,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 사실은, 내가 바로 저 꽃들 같은 존재가 아닐까…… 뭐 그런 거.”
“…….”
“저 꽃들이 지금 당장은 저렇게 예쁘고 싱싱해도, 시간이 지나면 금방 색이 바래고 시들어버리잖니. 나도 마찬가지인 거 같애. 껍데기만은 번지르르했던 꽃이, 이제 슬슬 질 때가 돼 버린 거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살짝 화가 난 듯한 그의 반문에도, 수진은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갈 뿐이었다.
“혼자서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아등바등했던 것들도, 지나고 보니까 결국엔 다 부질없는 일이더라고. 오기만으로는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나는 너무 늦게서야 알아버린 거야.”
“…….”
“나 혼자선 안 되는 게 둘이선 될 때가 있다는 거. 그게 바로 배우자가 필요한 이유야, 민혁아. 그 소중한 인연 하날 못 찾아서, 결국 난 이렇게 빈껍데기로 살다 가잖니.”
“…….”
“난, 민혁이 네가 나 같은 실수 안 했으면 좋겠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는, 이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꽃 괜히 사왔네.”
이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실 줄 알았다면, 저까짓 거 사다 바치지 말 것을.
그 말의 의미를 수진이라고 모를 리 없었지만, 그녀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민혁아. 엄마…… 소원 하나만 들어줄래?”
“……소원이요?”
“응.”
주름진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띠더니, 이윽고 수진은 나지막이 읊조렸다.
“죽기 전에, 너랑 결혼할 사람 좀 보고 싶어.”
“……엄마.”
그의 얼굴과 목소리가 동시에 딱딱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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