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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좋아질 수 없는 남자-1화 (1/102)

1화. 가짜 부부의 속사정

2018.04.06.

“주문 도와드릴까요?”

늦은 밤, 한산한 극장 안의 스낵코너.

재빠르게 튀어온 아르바이트생이 상냥하게 물었다.

오랜만에 맞은 손님은 멀대같은 키에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왕방울만한 선글라스까지 낀 채였다.

아우라로 보나 행색으로 보나, 어딘가 범상치가 않은 남자.

“네, 잠시만.”

남자는 왠지 모르게 낯이 익은 미소를 날리더니 뒤에 있는 메뉴판에 시선을 두었다.

하지만 그렇게 온통 검은 시야로는 글씨고 뭐고 한 자라도 제대로 보일 턱이 없었다.

“……흐음.”

잠시 머뭇거리던 남자는 결국, 얼굴의 반가량을 가리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어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던 알바생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니, 저, 저 얼굴은!’

티 하나 없이 매끈한 피부에 숱 많은 눈썹.

속쌍꺼풀과 함께 날렵하게 빠진 눈매와, 흡사 조각상의 것과도 비견 가능할 것 같은 콧대,

그리고 무덤하게 꾹 다물어진 도톰한 입술.

뒤통수에 형광등 백 개는 족히 달고 다닐 듯한 저 인물은 절대 일반인의 것일 수가 없었다.

‘혀…… 현민혁?’

그 사실을 깨닫자 손이 저절로 입술을 틀어막았다. 일순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그러는 사이, 메뉴판에 시선을 고정한 그에게선 자연스러운 물음이 흘러나왔다.

“음, 자기는 어떤 게 좋아?”

응? 자기?

뜬금없는 호칭에 의아해하고 있을 무렵, 뒤쪽에서 총총거리는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는 여자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진갈색의 긴 생머리에 남자와 똑같은 검은 모자를 눌러쓴 여자는 옅은 화장기에도 불구하고 얼핏 연예인인가 싶을 만큼 눈에 띄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들꽃처럼 수수해서 더 돋보이는 여자.

알바생은 홀리기라도 한 듯 두 남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음…… 그냥 콤보 먹을까요? 팝콘 너무 큰 건 싫은데.”

“남으면 버리면 되지. 마실 건, 콜라?”

“쳇, 아뇨. 나 맨날 마시는 거 있잖아요, 왜.”

“아, 자몽에이드?”

팔짱을 쏙 끼며 배시시 웃는 걸 보니 아마도 정답인 모양이다.

‘얼굴만 예쁜 줄 알았더니, 애교도 수준급이잖아.’

지켜보던 알바생의 눈초리가 절로 가늘어졌다.

하지만 그녀와 달리, 남자는 그런 여자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아! 나쵸도 맛있겠다. 어떡하지, 못 고르겠는데.”

“둘 다 먹으면 되지. 사줄게.”

“…….”

“저기, 콤보 하나랑 나쵸 하나 주세요. 음료 하나는 콜라 대신 자몽에이드로. 얼음은 적게요.”

“아, 네.”

재빨리 계산을 마치고 스낵들을 챙기는 동안에도, 그녀의 눈은 앞에 선 커플을 슬쩍슬쩍 곁눈질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남자의 팔은 어느 새 여자의 어깨 전체를 자연스레 감싸고 있었다. 또, 반짝반짝 빛나는 그 얼굴에선 좀체 행복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누가 봐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영락없는 잉꼬부부의 모습이었다.

‘실제로 보니까 진짜 잘 어울리긴 하네. 웬일이니 정말. 이게 꿈이야, 생시야!’

과연 얼마 전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군 커플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번갯불에 콩 구워먹는 듯했던 결혼도 비로소 수긍이 갔다.

금슬이 저렇게도 좋은데 굳이 억지로 참아가며 기다릴 필요가 있었을까.

항간에 떠돌던 현민혁의 루머는 모조리 다 거짓부렁이었음이 분명했다.

그림 같은 둘의 모습과, 그에 두근두근 반응하고 있는 그녀의 심장이 그리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주문하신 콤보 세트와 나쵸 나왔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아, 근데 저기!”

“네?”

이런 일생일대의 기회를 내가 그냥 날려버릴쏘냐.

휴, 심호흡을 한 알바생은 한 마디 한 마디를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혀, 현민혁 씨 맞으시죠? 두 분, 결혼 정말 축하드려요. 앞으로도 행복하세요!”

화이팅!

한 술 더 떠 양손으로 주먹까지 불끈 쥐어보이자, 두 선남선녀의 입가에는 씨익, 미소가 걸렸다.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잘 살게요.”

……꺅!

사진을 찍어준 것도, 하다못해 손을 잡아준 것도 아니건만. 그 광경 자체가 너무나 황홀하고 흐뭇한 나머지 내적 비명이 절로 튀어나왔다.

‘계’를 탄 기분이란 바로 이런 것일까?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짓던 그녀는 그들이 돌아서기 무섭게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잽싸게 꺼내들고는, 다급히 메시지를 찍기 시작했다.

[대박사건! 방금 우리 매장에 현민혁 떴음! 그 여자랑 같이!!!!!! 실물 완전쩌러ㅠㅠㅠbbb]

한편, 알바생을 뒤로한 문제의 커플은 상영관 쪽으로 걸어가면서 정다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이 많은 걸 대체 어쩌자고요. 사장님이 다 드시려고요?”

“둘 다 먹고 싶다면서요. 홍예원 씨가 먹어요.”

“아, 그건 그냥 연기니까 한 말이죠! 내일 저 오픈인데, 얼굴 빵빵해지기라도 하면 책임지실 거예요?”

“걱정 마요. 지금도 딱히 홀쭉한 편은 아니니까.”

“……뭐라고요?!”

그리 아름답지가 못하다는 게 문제였다.

꽉 깨문 어금니에 잔뜩 숨죽인 목소리, 뛰어난 복화술까지.

불특정다수로부터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두 남녀는 분명 ‘가짜 커플’이었다.

그것도 그냥 가짜 커플이 아니라, 가짜 ‘부부’!

“하여튼 이리로 좀 붙어요. 저 쪽에서도 보고 있는 것 같으니까.”

“아, 알았어요!”

……허나, 이 엄청난 작당을 벌이게 된 그들도 결코 처음부터 같은 뜻을 품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두 달 전, 그들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 * *

“크으.”

소주잔을 쥔 손이 파란색 테이블 위로 탁, 내려앉았다.

그 손은 곧이어 소주병을 쥐고 흔들었지만, 텅 비어버린 병에선 탈탈 털어도 더 이상 나오는 것이 없었다.

“어, 벌써 다 먹었네. 아줌마, 여기 소주 한 병 더요!”

“야! 그만 좀 마셔. 너 내일 오픈이라며.”

예원과 같은 바리스타인 동시에, 세상 둘도 없는 절친이기도 한 지영이 그녀를 말렸다.

‘마감 마치고 집 가려던 사람을 갑자기 소환하더니 이게 뭔 일이래. 친구라고 하나 있는 게 도움이 안 돼요, 하여튼.’

하지만 짜증이 나 있는 친구를 아는지 모르는지, 예원은 한껏 취기가 오른 듯 흐흥거리기만 했다.

“괜찮아, 괜찮아. 오픈이야 식은 죽 먹긴데, 뭐. 안 되면 매장에서 자도 되는 거구…….”

“뭐야, 아예 집에도 안 들어가려고?”

얘가, 얘가.

지영은 마뜩잖은 눈길로 혀를 끌끌 찼다.

“쯧쯔쯔, 자알 한다. 웨딩드레스 입기 전에 관리 들어간다 그럴 때부터 알아봤지. 너 같은 술고래가 무슨 얼어 죽을 놈의 다이어트냐, 다이어트는? 살을 뺄 거면 술부터 끊어. 그놈의 커피도 좀 끊고.”

하지만 타박도 잠시. 그녀는 이내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어딘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평소처럼 술을 잔뜩 퍼마셔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보려 했지만, 예사로 넘기기엔 어쩐지 감이 쎄했다.

필시,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해.

“홍예원.”

“뭐, 왜.”

“갑자기 왜 이래. 너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럼 왜 이러는데. 엊그제 나한테 바람맞았다고 시위하는 거냐?”

어쭈, 내 말을 씹어 먹어?

대답도 않은 채 아무렇지 않게 소주 하나를 또 까려는 예원의 손길을 지영이 잽싸게 막아냈다.

“그만 마시라니까!”

“아, 왜애!”

“너 술 잘 마시는 거 나도 알고, 하늘도 알고, 전민혁도 알거든? 그러니까 이쯤 했음 그만해. 기집애가 무슨 술을 혼자서 이렇게…….”

“전민혁?”

“그래, 전민혁. 네 잘난 남자친구.”

이름 홍예원, 나이는 스물일곱, 직업은 바리스타.

여자가 가진 특징들은 그다지 특별할 게 없었다. 허나 그 중 그나마 가장 두드러지는 점을 꼽으라면, ‘전민혁’에 살고 ‘전민혁’에 죽는 애라는 것. 그 정도였다.

“아니 근데 이 자식은 네가 이렇게 술에 꼴았는데 어디서 뭐하는 거야. 연락 안 했어?”

기껏 물어보아도 예원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이깟 술에 벌써 취한 걸까. 커피만큼이나 술도 무진장 잘 마시는 통에, 소주 네 병 정도는 끄떡도 없던 앤데.

맘 속 깊은 곳에서 의구심이 일던 찰나, 예원이 불쑥 입을 열었다.

“지영아.”

“어? 왜.”

“나…… 난 있잖아.”

어눌해진 발음 끝에 작은 속삭임이 뒤따랐다.

“남자가…… 너무 싫어.”

“뭐?”

참내, 뭐래.

뭔 소릴 하려나 했더니 뜬금이 없어도 너무 없다.

잠시 놀랐던 지영은 이내 굳은 입가를 풀어냈다.

“야, 전민혁이 여자냐 그럼? 멀쩡한 남친 냅두고 웬 개소리야.”

“……그렇지. 남자지.”

맥없는 대답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던 그때, 테이블에 올려져있던 휴대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지영은 느릿느릿 휴대폰을 확인하는 예원을 멀뚱히 지켜보았다.

“누군데. 전민혁이야?”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했건만, 힐끗 넘겨본 발신자는 너무나도 의외의 이름이었다.

[지난 분기 매출 분석자료 언제까지 되죠?] ‘사장님’

어라, 이 시간에 웬?

“교수님이 너한테 문자도 다 보내? 별 꼴이네. 근데 닭살 돋게 웬 존댓말?”

예원이 일하고 있는 카페 ‘에덴’의 보스는 다름 아닌 윤정한 교수였다.

예원과 지영의 대학 은사이자, 업계의 권위자로 손꼽히는 남자.

그는 성격마저도 인자하고 따뜻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고, 예원과 지영 또한 같은 이유로 그를 무척이나 존경해 마지않았다.

“…….”

그런데 잠시 뒤.

그 상태 그대로 굳어있던 예원은 무슨 생각인지 휴대폰 액정을 꾹꾹 누르더니, 귓가로 가져다대었다.

딸깍 소리에 이어 여보세요, 하는 듯한 남자의 말이 어렴풋하게 들려오자 그녀는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사장님 저 홍예원인데요. 지금 바쁘세요?”

‘야, 갑자기 뭐해?’

어리둥절해진 지영이 입모양으로 물었지만, 예원은 본 체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제가 지금까지 참고 또 참았는데요, 오늘은 도저히 못 참겠어서요. 실례 무릅쓰고 한 마디 좀 하겠습니다.”

하아, 하고 내뱉는 입술 끝에서 하얀 입김이 퍼졌다. 뭔진 몰라도 아주 단단히 작심한 눈치였다.

“워어~낙 바쁘신 분이라 혹시 알고 계실는지 모르겠는데요. 저, 요새 몇날 며칠을 야근했거든요? 어제도, 그제도!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도 알고, 사업이 처음이신 분이라 의욕이 과다하게 넘치시는 것도 알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제가 무슨 분석가도 아니고, 만날 사무실에만 틀어박혀서 숫자만 보고 있는 게 마냥 즐거운 줄 아시냐고요!”

예원은 힘껏 씩씩거리며 울분을 터뜨렸다.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려오기라도 한 듯이.

“아니 막말로, 손님 줄어든 게 제 탓이에요? 저요, 아직 점장 단 지 한 달 반밖에 안 됐거든요? 사람을 돌돌이청소기처럼 굴리는 것도 유분수지, 이건 정말 인간적으로 너무하신 거 아니냐고요?!”

“야! 너 미쳤어?”

식겁한 지영이 한껏 죽인 목소리로 제지했지만, 필이 받은 예원은 오히려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나 막무가내로 소리쳤다.

“자를 테면 자르세요! 제가 실은 지금 눈에 뵈는 게 없거든요. 혹시 그거 아세요? 전 사장님이 진짜, 진짜 싫어요! 이 세상에서 제일!”

“야, 야! 고만해, 기집애야!”

그야말로 대형사고가 아닐 수 없었다. 얘가 술 깨고 나서 이걸 어떻게 수습하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여자에게서 폰을 억지로 뺏어든 지영은 얼른 종료 버튼을 누르고 호통을 쳤다.

“네가 아주 간땡이가 부었지, 어? 교수님한테 지금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아니, 잠깐. 근데 뭐가 좀 이상한데.

그 분께서 사업이 처음이라니. 커피업계에서 베테랑으로 유명하신 그 분이 사업이 처음일 리가?

게다가 과중업무 때문에 억울해하는 것 치고는 화풀이성이 강해보이는 투였다.

원래부터 당돌한 애이긴 해도 나이 지긋한 사장에게 이렇게 대들 정도의 무대뽀는 아니었는데.

‘뭐지?’

문득 찝찝해진 지영이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사이, 금세 새 소주병을 까서 한 잔을 원 샷한 예원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후, 속이 다 시원하네.”

거기다가,

“하하하하하!”

괴상한 소릴 내며 웃기까지.

지영은 더욱더 낯설어하는 눈빛이 되었다.

“홍예원 네가 미쳤구나. 드디어 미쳤어.”

한데,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입 꼬리는 분명 올라가 있는데, 입술은 덜덜 떨리고 있다. 또 한없이 이지러진 눈가엔 원인 모를 물기가 맺혀있었다.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지영은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야…….”

“흐으…… 흐윽, 흡…….”

“너, 울어?”

그것이 웃음이 아니라, 울음이었음을.

“가, 갑자기 울긴 왜 울어? 야!”

지영으로선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항상 씩씩한 홍예원은 여간해선 우는 법이 없었으니까.

스스로를 어찌나 독하게 다잡는지, 그렇게 버틸 바엔 차라리 울고 털어내는 게 낫다며 충고해줘야 할 정도였는데.

덜컥, 걱정이 엄습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일임이 분명했다.

“너 진짜 무슨 일 있는 거지. 뭐야. 울지만 말고 말 좀 해봐, 응? 대체 어떻게 된 건데.”

“…….”

“혹시…… 민혁이랑 싸우기라도 했어? 그래서 그래?”

맞네.

대답이 없는 것을 긍정이라 판단한 지영은 얼른 대처방안을 궁리하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가만있어 봐. 그런 거라면 차라리……. 아!

“야, 걔 여기 불러. 내가 대신 혼내줄 테니까! 짜식이 여자친구 울리기나 하고 말이야. 영 못 쓰겠네, 그거.”

“…….”

“아, 말 나온 김에 강세찬도 부르자. 옆에 제3자가 있어주면 아무래도 분위기가 좀 부드러워지잖아. 걔 지금 엄청 한가할 걸? 부르면 아마 바로 튀어나올 거야.”

살짝 미소를 띤 지영이 예원을 부드럽게 달랬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은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흐윽!”

바로 그 대목에서, 예원은 결국 엉엉 울음을 터뜨려버리고 말았으니까.

모든 걸 쏟아내기라도 할 것처럼, 너무나도 서럽게.

“홍예원……?”

조막만한 얼굴에 눈물줄기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 광경을, 지영은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지영아…… 나 어떡해?”

“…….”

“흐읍, 나…… 나…….”

……정말 어떡해, 나 이제.

* * *

“왜 그랬니.”

“…….”

“왜 그랬어?”

그 날 오전.

예원의 하나뿐인 남자친구 ‘전민혁’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나 잠자코 기다려보려 했지만, 이미 한계에 다다른 그녀의 인내심은 그리 깊지가 못했다.

“왜 그랬냐고 묻잖아, 이 자식아!”

“……미안해, 예원아. 정말 미안해.”

촉촉해진 예원의 눈이 그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딴 소리 듣자고 하는 말 아니니까, 제발 묻는 말에만 대답해줄래?”

“…….”

“왜 하필이면, 하필이면 여기서 그랬어?”

“…….”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제게 닥친 이 상황이 그저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이게 과연 막장 드라마와 다를 게 뭐란 말인가.

그래, 긴 얘기이긴 하지만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전민혁은 요즘 한창 대학의 마지막 학기를 보내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예원의 집에 있으면 공부가 유독 잘된다고 했다.

바로 어젯밤. 주인인 그녀조차 자리를 비운 집에 그가 홀로 가 있겠다고 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그가 멀쩡한 자기 집 놔두고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지만, 예원은 종종 그에게 흔쾌히 방을 내어주곤 했다.

그런데…….

이럴 줄 알았으면 애당초 그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는 거였다. 그랬다면 적어도, 이렇게 비참한 꼴은 면할 수 있었을 게 아닌가.

“딴 집도 아니고, 내 집에서 둘이 쪽쪽거리고 노니까 아주 스릴 넘치고 재밌었겠다?”

“…….”

“네가 날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내가 얼마나 만만해보였으면 그랬겠어.”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데.”

따지고 싶은 말들이 넘쳐흘렀다.

뒤통수를 후드려 맞은 것 같았던 그 기분 또한 아직까지 너무나 생생했지만, 예원은 어떻게든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 중이었다.

“언제부터야.”

“…….”

“대체 언제부터 사귀었냐고.”

그는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 사귀었어.”

“그럼?”

바로 어젯밤, 예원은 똑똑히 목격했었다.

제가 진정 목숨처럼 사랑하는 그가, 그녀가 아닌 다른 이와 열정적으로 맞붙어 있는 것을.

“사귀지도 않는데 그랬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십 몇 년 동안 볼 거 못 볼 거 다 보고 지낸 놈이랑?”

그것도 그녀 또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바로 ‘그 놈’과.

“……제발 말이 되는 소릴 좀 해, 민혁아. 어?”

실소를 내뱉던 그녀는 애써 맘을 가다듬으며 나직하게 물었다.

“이제 다 끝났으니까, 솔직히 말해.”

“…….”

“너…….”

“…….”

“‘남자’ 좋아하는 거였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듯, 민혁의 눈이 질끈 감겼다.

“……어.”

“언제부터.”

대답을 듣기까지가 마치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현실은, 이미 그녀의 코앞에서 방긋거리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너무나 잔혹하게도.

“……처음부터.”

하.

긴장의 끈이 탁 풀리고, 예원은 다시금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이게 지금, 말이 돼?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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