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72국 - 마이너스 곱하기 마이너스
훌륭한 센스와 외모, 입담과 임기응변으로 메이저 기전의 인터뷰를 도맡다시피 한 인터뷰어 김유희는 결연한 표정으로 하얀색 봉투에 멋들어진 한자 세 글자를 적었다.
社稷署
사직서였다!
주변에서 그 꼴을 보고 있던 스태프들이 필사적으로 김유희를 말렸다.
“잡아! 무조건 잡아!”
“놓치면 오늘 방송사고다!”
“언니! 오늘만! 오늘만 버텨요!”
결국, 스태프들의 저지에 탈출에 실패한 김유희는 반쯤 강제로 의자에 앉아 메이크업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김유희의 도주를 방지하기 위해 무려 세 명의 스타일리스트가 붙어있는 모습은 꽤 재미있는 모습이었지만. 아무도 마음 편히 웃을 수는 없었다.
김유희의 표정이 너무 불쌍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립스틱을 바르는 도중이라서 입을 제대로 열 수가 없었던 김유희가 웅얼거렸다.
“난 한 번만이라도 행보카고 시픈데! 왜 나는 햄보칼 수가 없는 거야!”
“이 와중에도 그런 장난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 보면 참 천생 연예인 맞네요.”
“입닥쵸! 너 나 지금 동정해?”
“요즘 애들은 그런 농담 못 알아들을걸요?”
“그릉가?”
실제로 막내 스타일리스트가 ‘저 사람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라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기에 김유희는 세월의 무상함을 실감했다.
유행은 돌고 돈다.
그리고 김유희 자신은 돌아버릴 것 같았다.
“이번 대회 참가한사람들이 예선전까지 합치면 대충 500명 넘어가지?”
“훨씬…. 넘을걸요?”
“그런데 왜 하필 저런 것…. 아니 분들만 남은 거지?”
TH 배 전국 기전의 결승 진출자 두 명.
정도찬2단과 고우선 9단.
김유희는 두 사람을 인터뷰할 생각만 하면 한숨부터 나오는 자신을 발견했다.
솔직히 말하면, 둘 다 매력 있는 바둑 기사들이다.
정도찬이야 예전부터 바둑에 별로 관심이 없는 김유희의 귀에도 ‘잘 생긴 연구생이 있다.’라는 소문이 들릴 정도로 워낙 유명했고,
고우선도 어린 나이와 나름 귀엽다고 느낄 외모로 ‘누나’들에게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는 바둑 기사였으니까.
서로 다른 두 타입의 미남 바둑 기사들 사이에서 인터뷰하게 될 김유희 자신을 부러워하는 여성 팬도 분명 있을 터였다.
문제는….
‘저 지옥의 주둥아리들….’
인터뷰를 무슨 가챠 돌리는 것처럼 하는 정도찬이야 워낙 언급이 많았기에 이제 더 설명할 필요성조차 못 느끼겠다.
사실 이쪽은 아 다르고 더 다르다고, 수습하려면 어떻게든 할 수는 있었으니까.
문제는 고우선이다.
이 인간은 일단 시끄럽다.
질문 하나를 던지면 대답 열 개가 돌아오는 미친 질문 가성비를 자랑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뿐이었다면 김유희도 시간이 지연되는 것을 걱정할지언정 다른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바둑계에서 속칭 투머치토커로 불리는 사람은 고우선 한명뿐만이 아니었고 그 중에는 잠깐 인사하려고 아침에 만났다가 저녁에 같이 술 한잔하고 헤어졌다는 ‘끝나지 않는 단독 인터뷰 괴담.’ 같은 이야기로 유명한 정휘운 7단 같은 사람도 있었으니까.
그런 사람에 비하면 그냥 단순히 말을 많이 하는 것쯤은 천사로 보일 지경이었다.
진짜 문제는 고우선이 독설가라는 점이었다.
곧 죽어도 하고 싶은 말은 꼭 하는데, 그 말을 많이 오랫동안 한다!
솔직히 말하면 이건 인터뷰어가 수습 어쩌고 할 건더기도 없었다.
김유희는 아직도 4강 B조의 사전인터뷰를 할 때 고우선이 무슨 발언을 했는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말 몇 마디로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던 그 모습을.
보다 못한 김유희가 상황을 수습하려 하자 방긋 웃으며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솔직했네요.’라고 분위기에 쐐기를 박던 그 모습을.
결국, 고우선의 발언을 수습할 엄두조차 못 낸 바둑 TV의 스태프 일동은 방송이 끝나기 전 단체로 사과방송을 송출해야 했다.
생방송으로 밥을 벌어 먹고사는 사람들의 애환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오늘의 인터뷰 대상 둘은 김유희로서는 이렇게 보였다.
“사람의 탈을 쓴 악마들! 물에 빠뜨려도 주둥이만 둥둥 뜰 지옥의 주둥아리들!”
“언니! 누가 들어요!”
“들으라고 해!”
이미 그녀의 품속에는 사직서가 고이 모셔져 있었다.
수틀리면 이 봉투를 집어 던지고 탈주하겠다고 마음먹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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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작된 결승전의 사전인터뷰는….
“정도찬 2단은 워낙 잘 두니까요. 정말 너무 기대됩니다.”
“고우선 9단은 지금까지 보여준 것도 많고, 실력도 뛰어나니까쉬운 상대는 아닐 것 같아요.”
생각보다 멀쩡했다!
‘뭐지? 왜 이렇게 인터뷰가 정상적이지?’
김유희는 분명히 이 자리가 아수라장 그 자체가 될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인터뷰를 시작하니 두 사람 다 너무 차분하게 잘 대응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오히려 김유희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대체 나중에 무슨 짓을 하려고 이렇게 조용한 거야?’
김유희는 베테랑 인터뷰어 답게 이런 상황에서도 오히려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침착해 공명의 함정이다!’
하지만….
“사실 제가 정도찬 2단과의 대국을 많이 기대하고 있었거든요. 이번에 이렇게 기회가 생겨서 영광입니다.”
‘아니, 당신 저번 주까지만 해도 미친개처럼 물어뜯고 다녔잖아? 오늘은 왜 이렇게 얌전해?’
라고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김유희는 적당히 웃어넘겼다.
“고우선 9단이 정도찬 2단과의 맞대결이 성사되어서 영광이다. 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정도찬 2단의 이야기를 안 들어볼 수는 없겠죠?”
아까부터어딘가 지쳐있는 듯한 모습의 정도찬은 짧게 대답했다.
“저도 참 좋네요.”
‘당신도 이런 성격 아니잖아? 오늘따라 인터뷰 가챠가 왜 이렇게 잘 돌아가지?’
김유희는 여전히 불안해했지만 베테랑답게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
애초에 고우선은 자신이 인정할만한 실력자 앞에서는 깍듯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그의 기준에서 ‘존중할 만한’ 실력자인 정도찬을 상대로는 도를 넘는 언사를 자제하고 있었고.
정도찬은 한참 전부터 대기실에서 고우선에게 시달렸기 때문에 피곤해서 김유희 자신의 질문에 대충 대답하고 있었다!
수학 포기자 김유희는 과거에 배웠지만,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사칙연산의 규칙 중 하나를 드디어 이해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이너스 곱하기 마이너스가 플러스가 되는 원리가 이런 거였구나!’
수학의 신비가 그 배일을 한 꺼풀 벗…. 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김유희의 처지에서 보면 이만한 호재가 또 없었다.
‘이런 분위기면 딱히 마음고생 할 필요 없겠네!’
라고 순식간에 판단한 김유희는 순식간에 즐겜모드에 들어갔다.
자신이 언제 또 이런 미남들 옆에 붙어서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호사를 누리겠는가!
김유희가 인터뷰를 시작하기 직전 안주머니에 넣어둔 사직서가 살짝 밖으로 삐져나오며 ‘나 아직 여기 있어!’라는 듯 자신의 존재를 피로했다.
그 모습이 마치 ‘난 여기에 있으니까 언제든지 믿고 맡겨줘!’라고 말하는 듯 든든하게 느껴져 김유희는...
잽싸게 집어넣었다!
배신감에 사무친 사직서가 항변했다.
‘안이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하지만 김유희 역시 나름의 사정은 있었으니….
‘이런 거 카메라에 찍히면 평생 박제라고….’
더는 사직서가 보이지 않도록 안주머니 깊숙이 밀어넣은 김유희는 오랜만에, 정말 아주 오랜만에 마음 편하게 인터뷰를 이어갔다.
‘아…. 차라리 둘이 같은 팀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갑조리그 인터뷰도 무서울 게 없을 것 같은데.
아까부터 고우선에게 시달리며 속으로 ‘대가리가 깨져도 차윤석!’을 외치고 있던 정도찬이 들었다면 기겁을 할 만한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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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찬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사람과 바둑을 두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반상 앞에서 이렇게까지 분위기가 바뀌는 사람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대국이 시작되자 입 가볍고 귀찮게 굴던 사람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진지하게 대국에 집중하는 바둑 기사만이 남은 것이다.
그 괴리감이 생각보다 커서, 자꾸 고우선에게 시선이 가는지라 정도찬은 쉽사리 대국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런것도 심리전 중에 하나라고 봐야 하냐?’
분명 의식하고 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고우선의 확 바뀐 태도는 이상할 정도로 정도찬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상대해온 사람들과는 다른 의미로 까다로운 상대였다.
‘그래도 나쁘지 않아.’
안 그래도 상대방에게 신경을 못 쓰는 것이 정도찬의 문제점이었는데, 고우선은 상대방에게 신경이 쓰이게끔 만드는 상대였다.
어찌 보면 지금의 정도찬에게 있어서 괜찮은 연습 상대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그렇게 마음을 먹자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해지…. 지 않았다!
평소와는 느낌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도저히, 차분하게 바둑판에 온전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정도찬은 이내 흑 돌을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이 조금씩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런정도찬의 모습을 본 고우선은 생각했다.
‘긴장했구나.’
정도찬의 실력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그 역시 입단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신인이었다.
‘어쩌면 진짜 실력은 나중에야 볼 수 있을지도….’
라고 오해하고 있던 고우선이 살짝 실망하고 있을 때.
정도찬은드디어 자신의 감정을 깨달았다.
‘환희, 흥분, 희열.’
그 어떤 아름다운 형용사를 머릿속에 떠올려도 이 감정을 묘사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으리라.
TH 배 전국 기전의 결승전.
메이저 기전의 결승전.
모든 바둑 팬들의 시선이 한 곳에 몰리는, 영광스러운 자리.
이 자리는 정도찬이 지난 20년간 계속 꿈꿔오고 있었던 무대였다.
이 순간만큼은정도찬 자신이 세상의 중심에 있는 느낌이었다.
‘아니, 이게 시작이야.’
손 떨림이 점점 멎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역사에 이름을 새길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