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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화 〉73국 - 대국(對局)을 대국(大局)적으로 뒀어야지 (75/75)



〈 75화 〉73국 - 대국(對局)을 대국(大局)적으로 뒀어야지

고우선은 천재다.

프로바둑기사 중에 천재 소리를 들어본  없는 사람이 없다고는 하지만, 고우선은 그중에서도 조금 더 특출난 천재였다.

그의 재능을 일찍 알아본 부모에 의해 어린 나이에 바둑계에 입문했고, 좋은 스승을 만나 고등학생이 되기도 전에 입단할 수 있었다.

그리고 퓨처스리그, 을조리그, 갑조리그를 거쳐 승단점수만으로 9단이 된 것이 그의 나이 스무 살 때였으니.

한세빛과 같은 규격 외의 천재는 아니었을지언정, 스무 살에 일가를 이룬 그의 실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고우선 그조차도 자신의 실력과 재능을 믿고 있었고, 그저 시간이 지나 현세대 고수들의 기량이 떨어진 후에는 그 계보를 자신이 이어받을 것이라고, 그렇게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정도찬이 입단하기 전까지는.

고우선은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흑 돌을 쥐고 명상하는 정도찬을 보며 생각했다.

‘어디 얼마나 잘 두나 보자고.’

정도찬, 정도찬, 지겨운 이름이었다.

그래, 정말 지겨울 정도로 들으면서 자라온 이름이었다.

영속 명인이 선택한 천재, 세계 바둑의 판도를 바꿀 아이.

고우선이 아직 어렸을 때, 정도찬의 이름은 천재라는 단어와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그의 스승은 당연하다시피 ‘정도찬 정도는 아니지만 괜찮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사용했고, 바둑에 관심 있는 친구들에게 진지하게 바둑을 배우고 있다고 하면 ‘그럼 너 정도찬이랑 아는 사이야?’라는 질문이 당연하다는 듯 돌아왔다.

그 당시, 아직 어렸던 고우선이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정도찬에게 적대감을 품을 정도로, 고우선은 정도찬이라는 이름을 지긋지긋할 정도로 들으며 자라온 것이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마주한 정도찬의 모습은 실망스러웠다.

아무리 입단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이번 대회가 입단 후 첫 메이저 대회이고, 이번이 첫 메이저 기전 결승이기도 하지만.

바둑 기사가 대국을 눈앞에 두고 저렇게 긴장하다니?

자신이 듣던, 그리고 상상하던 정도찬의 모습과는 정반대이지 않나?

‘하긴…. 정도찬이 언제 적 정도찬이냐.’

생각해보면 고우선 자신이 입단하고, 살아남고, 인정받는 동안 정도찬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천재라고 칭송받은 과거는 과거일 뿐 기원 사장으로 허송세월하다 스물다섯이 돼서야 겨우 입단한 정도찬과 지금까지 꾸준히 경력을 쌓아온 자신을 비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렇기에 고우선은 확신했다.

과거, 사람들이 그렇게 추앙하던 천재 정도찬은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고,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과거의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긴다, 이겨서 증명한다.’

고우선은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아직 정도찬의 손 떨림이 멈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

‘덥다.’

초봄.

꽃의 아름다움을 질투하는 바람이 불어와 아직은 쌀쌀한 날씨.

아직 두껍게 차려입은 사람도 있는 시기였지만 정도찬은 그 어느 때보다 덥다고 느끼고 있었다.

물론 바둑의 열기에 마음이 뜨거워졌다. 같은 만화 같은 말은 아니었고, 단순히 조명 때문이었다.

바둑판 전체가 생방송으로 송출되는 상황이었고, 착수할  최대한 그림자가 시청자의 시야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여러 대의 조명과 반사판을 사용하는데.

 조명이라는 것들이 원래 가만히 한곳에 오래 쏘고 있으면 온도가 이게 맞나 싶을 정도로 지랄 맞게 올라가는 법이다.

물론 이는 반사판도 마찬가지인지라 정도찬은 돋보기로 불을 피우는 실험의 A4용지가  기분을 실시간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었고.

대국 예절상 정장을 입는 것이 필수이기 때문에 평소에도 대국을 마치면 땀 범벅이긴 한데 오늘따라 그 정도가 유난히 심했기에 결국 정도찬은 계시원과 심판을 불러 조명 위치 조정과 실내온도 조정을 요구했다.

이렇게 사용한 시간은 정도찬의 생각 시간에서 깎이기 때문에 버틸  있다면 버텨보려고 했으나 정도가 너무 심했다.

조명 몇 개가 물러나자 체감 온도가 확 낮아진 것이 느껴졌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네.’

진작 이럴 걸 그랬다.

조금 편해지자 반상 위의 형세가 눈에  잘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전체적인 흑의 강세이지만, 덤을 생각하면 아직까진 백이 조금 유리한 형국.

정도찬이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기도 했지만, 고우선도 고우선 나름대로 단단하게 잘 버틴 것이다.

정도찬은 살짝 감탄했다.

‘괜찮은데.’

사람이 좀 시끄럽지만 않았더라면 바로 자신의 팀으로 데려오고 싶은 실력이었다.

아니, 실력은 둘째치고 바둑을 바라보는 시야 자체가 특이하다고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굉장히 지엽적으로 보는구나.’

마치 바둑판을 여러 개의 작은 조각으로 나눠서, 그 조각들의 형세 판단을 실시간으로 하는 느낌이라고 하면 이해가 될까.

분명히 좌하변에서 싸우고 있는데 득실은 우변의 득실을 계산하고 있다던가. 잘 싸우다가 갑자기 손을 빼고 다른 곳에 두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역시는 역시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역시 인공지능만으로 바둑을 배운 세대는 뭐가 달라도 다르네.’

정도찬은 사람의 바둑에서 인공지능의 바둑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걸쳐 있던 바둑 기사였다.

그렇기에 정도찬은 사람에게 바둑을 배우기 시작해서, 인공지능과의 대국으로 그의 바둑을 완성했다.

아니, 사실 ‘완성’이라는 표현은 옳지 않았지만, 어쨌든 지금의 정도찬의 바둑에 사람과 인공지능, 양쪽 다 큰 영감을 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정도찬보다 몇  어린 고우선은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바둑 공부를 시작했다.

고우선이 자신의 부모님과 함께 바둑 학원에 갔을 때 가장 먼저 배운 것은 ‘가정용 컴퓨터에 바둑 인공지능을 설치하는 법.’이었으니까.

고우선의 스승은 고우선에게 바둑을 두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저 인공지능의 수를 이해하는 방법을 가르쳤을 뿐이지.

‘앞으로 이런 애들이 계속 나온다 이거지?’

정도찬은 이제야 인공지능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하윤서의 심정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스물한 살 짜리 프로바둑기사도 이 모양인데.

하윤서와 비슷한 나잇대인 바둑고의 학생들은 무슨 모습일까.

정도찬이 잘 모르긴 몰라도 얼굴만 다른 비슷한 기풍의, 비슷한 바둑 기사들은 아닐까?

‘결국, 새로운 시대가 오는구나….’

개성의 시대가 지고 계산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정도찬은 딱히 씁쓸함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니꼬우면 버텨야지.’

원래 내가 맞고 너희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는 법은 간단하다.

기어 올라오는 것들을 다 쥐어패고 정상의 자리를 유지하면 되는 것이다.

먼 옛날, 초대 국수의 삼연성식 포석처럼, 영속 명인의 우주류 바둑처럼. 한세빛의 대마 사냥처럼.

시대를 불문하고 마지막 낭만을 손에 쥐고 놓지 않는 강자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정도찬 역시 그의 낭만을 손에 쥐고 있는 한 명의 프로바둑기사였다.

#

정도찬의 착수를 보며 고우선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사실 고우선은 같은 팀으로 활동한 전적이 있었던 32강에서 정도찬에게 패배한 이택윤 8단에게서 ‘정신을 차려보니 져 있었다. 그저 그렇게 되었다.’라는 말을 들은  있었다.

그때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해 늪 바둑 비슷한 건가? 라고 생각하고 넘어갔지만 이제 무슨 말이었는지 조금 이해가 가는 느낌이었다.

‘좌하귀는…. 분명히 내가 기분 좋게 이기고 손을 뺐어, 우변에서는 내가 세력을 얻고 정도찬이 세력을 얻었고, 상변도 비슷해, 내가 적당히 이득을 보고 손을 뺐는데?’

이곳저곳에서 지엽적으로 이득을  것은 분명 백을 잡은 자신이었다.

그런데, 전체적인 형세를 판단해보자니 아무리 봐도 흑이 유리했다.

말 그대로 정신을 차려보니 져 있었다.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마음먹은 대로 다 됐는데 어째서 지고 있는 거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정도찬은 이제야 속은 사실을 깨닫고 혼란스러워하는 고우선을 보며 생각했다.

‘그러게 대국(對局)을 좀 대국(大局)적으로 뒀어야지.’

살을 주고 뼈를 깎는다.

하지만 바둑을 두며 뼈를 깎았다는 어떤 무신의 이야기 이후로 바둑에 심취하면 뼈가 깎이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는가.

아, 이건 좀 아닌가.

어쨌든, 정도찬이 한 일은 전투에서 지되 전쟁에서 이긴 것과 같았다.

정도찬은 각 위치에서 조금씩 손해를 보았을지언정, 전체적인 구도에서 보면 조금씩 확실하게 이득을 챙기고 있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숨겨져 있던 이득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고우선의 눈에는 하고 싶은 거 다 했는데  있는 것처럼 보이게  것이었고.

결국, 이는 전의 상실로 이어졌다.

고우선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졌습니다.”

TH 칼텍스 배 전국 기전 결승전 5번기
제1국
흑 정도찬  고우선
215수  불계승
스코어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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