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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화 〉59국 - 규격 외 (61/75)



〈 61화 〉59국 - 규격 외

정도찬과 이 사범은 적당히 비어있는 공간을 찾아 자리를 깔고 앉았다.

둘의 바로 옆자리에서는  노인이 한 수만 물러달라며 말싸움을 하고 있었는데 결국 소주 한 병으로 극적 타협한 둘은 한 수를 무르고 다시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정도찬이 입을 열었다.

“정말…. 자유로운 분위기네요.”

바둑은 기본적으로 일수불퇴.

한번 두었다면 다시 둘 수가 없는 것이 기본이었다.

지금까지 저런 식으로 수를 물러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정도찬에게  광경은 신기하게 다가왔다.

이 사범은 그런 정도찬에게 말했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여기에서는 편하게 힘 빼고 두시게나. 애초에 다 재미있자고 두는  아니겠는가.”

편하게,  빼고, 즐겁게.

그 말을 들은 정도찬은 마치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래, 생각해보면 바둑의 본질은 게임이다.

마인드 스포츠니, 마음의 수련이니 뭐니 하지만 본질에서는 즐겁기 위해서 두는 것.

그게 바둑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정도찬을 바라보던 이 사범은 우상귀 화점에  돌을 두며 말했다.

“그런데, 아까도 물어봤지만, 입단까지 한 양반이 이곳에는 무슨 일로 오셨는가?”
“제자 때문에 왔습니다.”
“제자?”

이 사범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이곳에서 이십 년을 넘게 지냈는데 여기서 제자를 만난 사람은 봤어도 제자 때문에 여기를 찾아온 사람은  처음이구먼. 그래서?”

정도찬 역시 자신이 제자 때문에 이런 곳에 찾아오게 될지는 몰랐기에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아이 연습 상대 찾는 게 힘들더라고요.”
“제자가 기재가 좀 있나 보는구먼.”
“가끔 제가 깜짝 놀랄 정도로 뛰어난 아이입니다.”

정도찬의 말을 들은 이 사범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연습 상대가 필요한 거면 한국기원의 연구생으로 보내면 되는 것을  굳이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 겐가?”

이 사범의 의문은 당연하였다.

매주주말마다 바둑계 유망주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이는 한국기원이야말로 김수정의 연습 상대를 찾기 가장 좋은 곳임이 분명하니까.

게다가 한국기원의,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협회의 연구생 편애는 예전부터 유명했다.

당장 협회 입단만 해도 연구생인 아이가 입단하는 것과 연구생이 아닌 아이가 입단하는 것은 난이도 자체가 틀리지 않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도찬은 무작정 김수정을 한국기원의 연구생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곳의 무거운 분위기에 아이가 겁을 먹지는 않을까.

정확히 말하면 김수정이 정도찬 자신처럼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된 것이다.

정도찬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된  사범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이건 내가 뭐라고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구나.’

나쁜 소문은 빠르고 멀리 퍼지는 법이다.

정도찬이 방황하던 당시에도 바둑계에 몸을 담고 있던 이 사범 역시 정도찬의 트라우마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정도찬이 과할 정도로 김수정을 감싸고도는 것도 분명 트라우마의 잔재임이 분명했다.

‘오래간만에 바빠지겠구먼.’

정도찬의 트라우마는 그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신적인 문제라는 것이 다 그렇다. 옆에서 지켜봐 줄 수는 있지만, 전문가도 아닌 사람이 무언가를 해보려고 하는 순간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도찬의 제자마저도 내버려  수는 없었다.

지금 당장은 몰라도, 어려움이나 고난을 겪지 않고 그저 곱게만 자란 온실 속의 화초는 바둑계라는 정글을 버텨내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여긴 정글은 아니더라도 야생 정도는 되는 곳이지.’

“아이가 바둑은 어느 정도 두나?”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지만, 앞으로 조금만 더 정진하면 무리 없이 연맹에 입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이 나이가 어떻게 된다고 했지?”
“열한 살입니다.”

이 사범은 살짝 놀랐다.

‘기재구나.’

아무리 연맹의 입단이 협회 입단에 비해 쉽다고 해도 고작 열한 살짜리 아이를 두고 입단을 논한다는 건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말을 하는 사람이 한때 천재 중의 천재라고 불린 정도찬이었으니 마냥 신빙성 없는 이야기는 아닌 것처럼 들렸으니….

결국, 자신의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제대로 판단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범은 정도찬에게 말했다.

“여기 있는 늙은이들이 괜찮은 상대가 되어줄  같으니 한번 데리고 오시게나.”

그 말을 들은 정도찬은 좌하귀 삼삼에 백돌을 두며 화답했다.

#

다음날, 김수정과 함께 종묘에 방문한 정도찬은 이 사범의 부탁으로 이지호라는 아이와 지도 대국을 두고 있었다.

아마 나이가 열다섯이라고 했던가.

수정이나 루아만큼은 아니어도 바둑으로 일가를 이룰만한 재능의 소유자였다.

이 사범이 직접 지도 대국을 부탁할만하다고 해야 할까.

지도 대국을 마친 정도찬은 피드백을 시작했다.

“형세를 판단하는 감은 좋네, 타고났어. 포석과 끝내기도 깔끔했다. 열심히 공부했구나.”

정도찬의 칭찬에 이지호는 부끄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아쉬운 점이 없는 건 아니야. 너는 형세판단이 좋으니까 이게 맞다 싶으면   적극적으로….”

복기까지 해가며 하나하나씩 짚어준 정도찬의 피드백이 끝날 무렵 이지호는 이미 정도찬의 열렬한 팬이 되어 있었다.

결국, 이지호가 아끼는 스마트폰 케이스에 사인까지 해주고 나서야풀려난 정도찬은 혼자 기보를 보며 바둑공부를 하는  사범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잘 두네요, 미래가 기대되는 아이입니다.”
“그래?  눈도 아직 쓸만한가 보고만.”

그렇게 말하는 이 사범의 기분이 퍽 좋아 보였다.

정도찬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혹시 이 사범님 제자입니까?”
“아니, 난 이제 제자 같은 건 안 키워. 무섭거든.”
“무섭다니요?”
“자네도 내가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곧 알게 될걸세.”

정도찬은 이 사범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제자를 키우는 것이 무섭다고 하는 걸까?

정도찬의 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이 사범은 그러거나 말거나 정도찬에게 질문을 던졌다.

“자네가 이제 스물여섯이던가?”
“네, 맞습니다.”
“호랑이 새끼를 키우고 있다는 자각은 있고?”
“수정이를 말씀하시는 거면…. 있습니다. 그래도 제가 십 년은 버티지 않겠습니까?”

정도찬의 말을 들은 이 사범은 바둑돌을 정리하며 말했다.

“솔직히 말씀하시게, 오 년도 아슬아슬하다고 생각하지?”
“......네.”

바둑 기사가서른 살이면 환갑이나 다름없다고들 하는데, 오 년 후면 정도찬도 서른하나이다.

정도찬 자신은 앞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기력이 떨어질 테고, 성장기를 맞이한 김수정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치고 올라오리라.

그리고 언젠가는 따라잡히겠지.

정도찬은 노상 바둑 46년 차 임이규 옹에 맞서 열심히 바둑에 집중하고 있는 김수정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상대가 워낙 변칙적인 수를 좋아하는지라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 것인지 김수정은 심각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좌우로 까딱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서 정도찬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런 정도찬의 모습을   사범은 아직은 자신의 걱정이 기우임을 깨달았다.

“그냥 늙은이가 주책을 부린 거니 신경 쓰지 마시게나.”
“아닙니다.  도움이 되었습니다.”

 사범은 정도찬에게 백 돌을 건네며 말했다.

“그나저나 아이에게 나쁜 습관이 있구먼. 상대가 알아보기 쉬운 습관은 최대한 빨리 고치는 게 좋네, 나중에 고치려면 고생하거든.”
“나쁜 습관이요?”
“머리가 복잡해질 때마다 고개를 까딱이지 않는가.”

정도찬은 다시 김수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상대의 수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인지 김수정은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리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생각하던 김수정은 이내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감을 잡았는지 고개를 멈추고 눈을 빛냈다.

“정말이네요….”
“지금까지는 모르고 있었던 건가?”
“네...”

이 사범은 크게 놀라 물었다.

“자네만 한 바둑 기사가 그걸 모르고 있었다고? 어째서?”
“그게….”

아마도 정도찬이 김수정의 버릇을 깨닫지 못한 이유는 김수정과의 지도 대국에서도 바둑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LC배 아마추어 대회 이후 정도찬은 김수정이 바둑을 두는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정도찬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이 사범은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

“바둑을 두는 내내 상대방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아니 못한다고?”
“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내 눈에는 자폐증 환자가 지능이 너무 높은 나머지 평범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거로 보이는데?”

그저 이것을 ‘사소한 약점’ 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정도찬은 놀라 물었다.

“이게 그렇게 심각한 일입니까?”

이 사범은 답답하다는 듯 대답했다.

“바둑이 어째서 수담이라고 불리겠는가. 손으로 대화를 나누니 수담인 것이지. 그런데 자네가 하는 일은 말하자면…. 혼잣말만 죽어라 하는데 상대와 대화가 통하는 것과 같네.”
“혼잣말만 하는데 어떻게 대화가 통하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내가 그걸 몰라서 신기해하고 있는 거 아닌가!”

이 사범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황당했다.

비범한 놈이라고는 생각했는데  이런 놈이 있는단 말인가.

이가 없다면 잇몸으로 살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정도찬은 지금까지 잇몸으로 살고 있던 주제에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잇몸만으로 살다가 다른 사람이 ‘야 넌 왜 이가 없어?’라고 물어보니 그제야 자신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는 것인데….

‘명인이 이 녀석을 규격 외의 천재라고 평가한 이유가 있었구먼.’

아무리 봐도 온전치 못한 상태인데 벌써 바둑계에 폭풍을 몰고 다니는 정도찬이었다.

만약 정도찬이 트라우마를 완전히 극복하고 날뛴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 사범은 늙은이의 오지랖이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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