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0화 〉58국 - 종묘 (60/75)



〈 60화 〉58국 - 종묘

‘예전이야  일 없는 어르신들이 모여 시간 보내던 곳이었지, 요즘 가보면 마경이 따로 없어.’

‘거기 어르신들이 바둑 하루 이틀 두신 분들이야? 밥 먹고 바둑만 두시는 분들인데 보통은 아니지.’

‘잘 두는 사람 있다는 소문이 도니까 다른 사람들도 오고, 그 사람들 오니까 다른 사람들도 오고.’

‘소문으로는 은퇴하신 분들도 가끔 보인다는데?’

정도찬은 한지원의 말을 곱씹으며 종묘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종묘공원, 사실 종묘공원이라는 이름보다는 탑골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이 공원은 예전부터 수많은 노인이 모이는 장소로 유명했다.

정도찬 역시 이곳에서 바둑을 두는 어르신들이 많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사람들이  두냐 못 두냐의 문제가 아니지….’

김수정은 아직 열한 살, 주변 환경이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생각하면 바둑을 잘 두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라고 해서 무작정 데려올 수는 없는 법이다.

애초에 유명하긴 해도 좋은 이야기만 들려오는 곳은 아니니까.

그래서정도찬은 정말 이곳에 김수정을 데려와도 되는지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기 위해서 종묘공원을 방문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으니.

‘바둑 두는 어르신들은 어디 계신 거지?’

종묘공원 안쪽에 들어오면 바둑 두는 사람들이 딱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정도찬의 착각이었다.

종묘공원은 하루 3000명이 넘는 노인들이 방문하는 거대한 공원.

공원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국악정이라는 정자에서는 공연 따위의 볼거리가 열리고 있었고. 공원 곳곳에서는 현 정부 정책 등의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목에 핏줄을 세우며 서로에게 고함을 치는 어르신들을 바라보던 정도찬은 정말 이런 곳에 김수정을 데려와도 될까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조금 더 걷자 서예나 동양화 등의 각종 기술을 가르치며 재능기부를 하는 노인들이 보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정도찬이 보기에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솜씨였다.

‘학원을 차려도   같은 분들이  이런 곳에 계신 거지?’

이곳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장소였다.

괜히 한지원이 마굴이라고 한  아니구나.

정도찬은 애써 시선을 돌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정도찬의 눈에 ‘바둑판 대여’라고 큼지막하게 쓰인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봐도 저쪽 근처가 바둑을 두는 곳이었기 때문에 정도찬은 그쪽으로 걸어가며 주변을 살폈다.

‘사람이 많긴 많네….’

길 위에 놓인 수십 개의 바둑판, 서로 마주 앉아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수를 고민하는 노인들.

자리에 있는 모두가 바둑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목을 두는 사람들도 있고, 알까기를 하는 사람도 있고, 바둑판을 뒤집으면 장기판이 되니 장기를 두는 사람들도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농담으로라도 바둑에 전념할  있는 곳은 아닌 것 같았다.

‘역시 여긴 좀 아닌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 정도찬이 등을 돌려 돌아가려고  때 누군가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늙은이들 놀이터에 젊은 양반이 무슨 일로 오셨는가?”

나이는... 정도찬의 스승인 신창연이랑 비슷한 정도일까?

하지만 젊어서부터 꾸준한 운동과 등산으로 열심히 관리해 정정하다라는 말조차 무색한 신창연과는 달리 눈앞의 노인은 지팡이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아무래도 연세가 있는 분이었기 때문에 정도찬은 예의를 갖춰 대답했다.

“여기에 바둑 두시는 분이많다고 들어 찾아왔습니다.”
“그래? 바둑은 좀 두나?”
“그저 나름대로 움직일 줄 아는 정도입니다.”
“약우(若愚)인가. 귀한 손님이 오셨구먼.”

약우(若愚), 일견 어리석어 보이지만 나름대로 움직인다는 뜻의 2단을 뜻하는 명칭이었다.

그저 단순하게 2단이라고 대답하면, 그것이 아마추어 2단인지, 인터넷 바둑 2단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기원의 자칭 2단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정도찬은 자신이 프로바둑기사라는 것을 은연중에 알리는 화법을 사용한 것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이렇게 돌려 말한 것을 단번에 이해한 눈앞의 노인도 보통 사람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바둑계에 몸담은 사람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저런 표현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과거부터 바둑을 둬온 사람이거나.

‘어느 쪽이든 이곳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겠지.’

정도찬은 이왕 이렇게 된  눈앞의 노인에게 이곳에 관해 물어볼 생각으로 인사를 건넸다.

“정도찬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허허허…. 요즘 소문이 자자한 젊은이를 이런 곳에서 다 만나는구먼. 반갑네! 계룡산  사범일세.”

이름을 숨기고 싶어 하는 걸까, 아니면 평소에 이곳에서 그렇게 불리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댄 것일까.

정도찬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계룡산 이 사범? 누구지?’

자신을 사범이라고 칭한다면 적어도 은퇴한 프로바둑기사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씨 성을 가진 프로바둑기사가 한둘이어야지.

지금 당장 정도찬의 핸드폰 주소록에 등록되어있는 이씨 성의 프로바둑기사만 해도 서른 명은 넘을 텐데!

잠시 고민하던 정도찬은 그가 누구인지를 추론하는 것을 포기했다.

애초에 자칭 사범일 수도 있는 거고.

어차피 지금 중요한 건 상대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괜찮으시다면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할 짓 없어 공원이나 기웃거리는 늙은이인데 차고 넘치는 게 시간이지.”
“그럼 혹시….”

노인은 정도찬의 말을 막고 바둑판을 대여해준다는 현수막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서 바둑판이나 하나 빌려서 따라오게나.”
“네?”
“바둑기사 둘이 만났는데 무슨 긴말이 필요하겠는가. 수담이나 나누세.”

그렇게 말한 노인은 한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지팡이 없이도  걸으시는 분이 지팡이는 왜 들고 다니시는 거지?’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정도찬은 바로 대여료 천 원을 내고 바둑판 하나를 받아 노인을 쫓아갔다.

“그런데…. 어디까지 가시는 건가요?”
“자네가 여긴 처음이라서  모르나 본데 저 밖에 있는 놈들은 다 쭉정이들이야.”
“네?”
“그냥 천  내고 종일 시간 보내려고 오는  곳 없는 늙은이들이라고.”

정도찬은 이 공원에 자신이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저 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은 모르는 비밀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도찬이 이걸 어떻게 물어봐야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노인이 정도찬에게 물었다.

“그런데 신창연 명인 직계면 청류 중 청류인데 뭐 하러 이런 곳까지 왔는가?”
“청류요? 그게 무슨 말인가요?”
“하긴…. 명인께서는 이런 사소한 싸움에는 관심 없겠지.”

노인은 씁쓸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자네는 지금까지 어떻게 바둑을 배워왔나?”

정도찬은 잠시 고민한 후 대답했다.

“바둑 학원에 다니다 사범님의 눈에 띄어 스승님의 문하에 들어갔고, 거기서 공부한 후에 입단했습니다.”

물론 중간에 여러 가지 일이 있긴 했지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노인은 설명을 시작했다.

“그게 청류일세. 푸르고 깨끗한 물, 청류. 하지만 프로바둑기사 모두가 자네 같은 방식으로 입단하는  아니지 않은가?”
“그건…. 맞습니다.”
“학원에 다닐 돈이 없어 등 너머로 배운 아이들, 먹고 살려고 기원에서 내기바둑이나 두며 연명하던 아이들, 그 외에도 각종 이유로 의지는 있으나 환경이 도와주지 않은 아이들. 그런 아이들 중 천운이 닿아 입단한 아이들을 이렇게 부른다네.”

노인은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탁류, 더러운 물이라는 뜻이지.”

정도찬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것이 분명한 멸칭임을 듣자마자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정도찬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노인은 그렇게까지 심각한 일은 아니라는  웃으며 말했다.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일세, 요즘 세상에 누가 출신으로 그런 걸 따지겠는가?”
“그건…. 다행입니다.”
“아, 생각해보니 아직 따지긴 하는구먼, 요즘도 연맹이랑 협회로 나눠서  터지게 싸운다며? 한심하긴.”

그 대립의 중심에 있는 정도찬은 소심하게 반론했다.

“피 터지게 싸우는 정도는 아니고요…. 그냥 서로 조금 생각이 달라서 그런 거예요.”
“그 어떤 대립도 처음에는 사소해 보이는 법이지.”

‘우리도 처음에는 단순한 친목이었어!’라고 일갈한 노인은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정도찬의 눈에나무 그늘에 옹기종기 앉아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연령대는 노인부터 아이까지 다양했다.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으니.

모두 바둑을 즐기고 있다는 점이었다.

잠시 멀찍이 떨어진 곳에 멈춰선 노인은 정도찬에게 말했다.

“여기는 자유로워, 하고 싶은  할 수 있고, 오늘 만난 사람이 싫으면 내일은 다른 사람 사귀고, 그다음 날은 또 다른 사람 만나고 그러는 곳이거든.”
“이런 곳이 있었군요….”

노인은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정도찬을 놀리듯 말했다.

“청류의 도련님에게는 역시 조금 꺼려지는 장소인가?”

정도찬은 곤란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애초에 전 그런 건 잘 모르는걸요.”

멋쩍게 말하는 정도찬의 등을 살짝 두드린 노인은 환영 인사를 건넸다.

“탁류의 총본산, 종묘에 온 것을 환영하네.”

노인은 정도찬이 들고 있는 바둑판을 건네받으며 말을 이었다.

“입장료는  바둑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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