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2화 〉60국 - 응 안 해~ (62/75)



〈 62화 〉60국 - 응 안 해~

정도찬과 이 사범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김수정은 일생일대의 시련을 마주했다.

“바둑 두는 사람 어디 갔나?~”
“히잉….”

김수정은 바둑판을 보며 울상지었다.

아무리 봐도 자신의 대마가 위험해 보였던 것이다.

노상 바둑 46년 차, 임이규 옹은 강했다!

김수정은 바둑판을 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두는 사람은 처음 봐….’

사실 포석 단계에서부터 심상치가 않았다.

바둑을 시작한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김수정으로서는 난생처음 보는 고목을 활용한 포석.

정도찬이 즐겨쓰는 삼삼 포석이 극단적으로 실리를 추구하는 포석이라면 고목 포석은 극단적으로 세력을 추구하는 포석이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바둑판의 귀는 실리를 차지하기 위해 두는 곳이다.

실리를 추구해야 하는 곳에서 세력을 추구하는 것은 축구장에서 농구를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

당연히 온갖 파훼법이 나왔고, 고목 포석은 사장된 지 오래였다.

그래서 정도찬도 고목 포석은 굳이 가르치지 않았다.

우선 최신 유행 포석들을 배운 후에 과거의 포석들을되짚어갈 생각이었으니까.

결국, 제대로 된 대응을 못 한 김수정은 세력은 세력대로, 실리는 실리대로 넘겨주는 실수를 저질렀다.

‘할아버지가 고목에 뒀을  바로 화점이나 소목에 치중을 해야 했는데….’

그리고  실수를 깨달은 순간에는이미 너무 늦어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임이규 옹은 정석 진행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손을  다른 곳에 두기도 하고. 뜬금없는 곳을 치고 들어오기도 했다.

그녀의 스승인 정도찬의 바둑이 철저한 근거를 바탕으로 걷는 정석적인 바둑이라면 임이규 옹의 바둑은 변칙  자체였다.

그래도 이렇게 질 수는 없지!

김수정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대마의 머리를 중원으로 살짝 내밀자 임이규옹은 바로 머리를 누르며 놀리듯 말했다.

“참 난감하네~ 난감혀~”
“난감한  저거든요!”

김수정은 대마를 살리기 위해 한 칸 뛰었지만 임이규 옹은  하나 깜빡하지 않으며 치중했다.

“허허….거 참 야박하기는. 아, 이 자리는 깜빡하신 건가?”

그렇게 치중당한 곳은 대마의 생사를 가르는 치명적인 자리였다.

“씨잉...”

마음만 같아선 ‘안 해!’라며 바둑판을 엎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던 김수정은 속으로 분을 삭였다.

사실 변칙적인 바둑보다 까다로운 것이 입담이었다.

어쩜 저렇게 한 마디 한 마디가 속을 긁을까!

할아버지가 아니라 친구였으면 진작 머리끄덩이를 잡았을 텐데!

결국, 대마가 잡힌 것을 인정한 김수정은 돌을 던졌다.

“졌습니다아….”
“그래? 그렇지? 내가 보기에도내가 이긴 것 같은데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 뭐야.”

으득-

살짝 이를 악문 김수정이 다시 대국을 요청했다.

“다시…. 다시 둬요!”

다시 두면 이길 수 있다!

고목 포석 대응법도 어느 정도 알  같고, 변칙적인 바둑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자신이 중심만 잘 지키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대이다.

만약 다시 두게 된다면 김수정은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김수정의 기대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수준이 안 맞아! 수준이! 좀 더 공부하고 와!”
“무슨 소리여요! 다시 두면 제가 이길 있어요!”
“응 안 해~”

노상 바둑 46년 차 임이규 옹은 놀라울 만큼 치사했다!

결국, 임이규 옹은 자리에서 일어나 홀연히 사라지고 김수정은  사범과 대화를 나누던 정도찬에게 달려와 하소연했다.

“스승니임!!! 저 할아버지가!  할아버지가아!”
“......?”

정확한 상황을 모르는 정도찬은 그저 곤란한 듯 웃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어둑어둑 땅거미가  무렵이 되자 사람들은 한두 명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아직 봄이 찾아오지않은 2월의 밤은 아직 혹독했기에 다들 집에 돌아가려는 것이다.

정도찬 역시 ‘복수! 절대로 복수!’를 외치며 도끼눈을 뜨고 임이규 옹을 찾아다니는 김수정을 데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돌아갈 준비를 하는 둘을  이 사범은 아쉽다는 듯 정도찬에게 말했다.

“자주자주 오시게나, 적적한 늙은이들 말동무도 좀 해주고.”
“네, 앞으로 자주 오겠습니다.”

정도찬 역시 이곳이 김수정이 다양한 경험을 쌓기에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시간이 허락하는 한 자주 방문할 생각이었다.

종묘에는 정도찬의 예상보다 괜찮게 두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사범의 정체도 좀 신경 쓰이고.’

말하는 것만 들어보면 범상치 않은 인물인 것은 분명한데.

대체 그는 누구일까.

이 사범과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아직 그의 정체를 파악하기에는 정보가 부족했다.

아까부터 은근슬쩍 ‘누구세요?’라는 질문을 돌려 말하고 있었는데 계속 대답을 회피하는 것을 보면 말해줄 생각도 없는 것 같고.

결국, 정도찬은 이 사범의 정체를 알아내는것을 포기했다.

정도찬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이 사범은 정도찬에게 다시 한번 조언을건넸다.

“잊지 마시게, 바둑을 두는 건 대화를 하는 것과 같다네.”
“네, 명심하겠습니다.”
“에잉…. 말로만 명심하지 말고 제대로 뼈에 새기라 이 말이야.”

정도찬은 난처한  웃었다.

벌써 몇 번이나 강조해서 말한 내용이기에 귀에 딱지가 생긴것 같았지만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기도 했다.

바둑을 두는 것은 대화하는 것과 같다니.

그리고 자신은 대화가 아닌 혼잣말을 하고 있다니.

그렇다면 정도찬 자신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전 인공지능과 대국을  것이 바둑을 둔 것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트라우마를 극복한 후, 메이저대회의 4강까지 올라오며 경험한 수많은 대국은 또 무엇이고?

정도찬은 아직 이 사범의 말을 이해할  없었다.

이 사범 역시 정도찬이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기에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었고.

이 사범은 이 사범 나름대로 답답했다.

‘참 까다로운 청년일세….’

딱 하나만고치면 되는데 그 하나를 고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심지어 그것은 다른 누군가 고쳐줄 수 없는, 정도찬이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영역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까다로운 면이 있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이 사범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정도찬은 잔뜩 심통이 나서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수정과 함께 이 사범에게 인사하고 종묘를 나섰다.

기원에 돌아오는 길, 정도찬은 아직도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김수정에게 물었다.

“수정아 종묘는 어떤 것 같아?”

김수정은 여전히 뾰로통한 표정을 지은 채 대답했다.

“치사한 할아버지들이 너무 많아요!”
“......?”
“다시 두면 이길 수 있는데 다들 한번 이기면 도망가잖아요!”
“그…. 그래?”

정도찬도 김수정이 하도 분해하고 억울해하는 듯해서 잠시 대국을 보긴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다시 둔다고 이길 수 있을 것 같진 않던데.’

정도찬이 판단하기에 김수정을 상대해준 어르신들은 모두 손속에 사정을 두고 있었다.

말 그대로 적당히 둔 것이다.

막말로, 아무리 바둑을 오래 뒀다고 해도 고목 포석 같은 사장된 포석을 누가 진심으로 두려고 하겠는가?

다 한 수 가르쳐줄  봐주면서 둔 거지.

‘수준이 맞지 않으니 좀 더 공부하고 와라’라는 말은 단순히 김수정을 약 올리기 위한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도찬은 이곳의 노인들의 실력에 살짝 감탄하기도 했다.

비록 프로의 날카로운 맛은 없었지만,오랜 시간 축적된 경험에서 비롯된 부드러운 행마는 나름의 파괴력이 있었던 것이다.

‘아마추어 바둑이라도 40년 이상 두니 행마에 현기가 서리는구나.’

아마 김수정은 이곳에서 정도찬이 가르쳐줄  없는것들을 잔뜩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마저 김수정이 더는 배울 것이 없어지고, 김수정의 상대가 없어진다면….

‘그때는 정말 입단시켜야겠지.’

이 작은 아이가 프로가 된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조금 복잡해졌다.

그런 정도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수정은 말을 이었다.

“그쵸! 스승님도 다시 붙으면 제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죠?”
“......”

눈을 빛내며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는 김수정에게 차마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었던 정도찬은 입을 닫았다.

당연히 자신의 편을 들어줄 것으로 생각했던 정도찬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김수정의 얼굴이 부풀어 올랐다.

‘이런.’

삐졌다 이건.

기본적으로  삐지거나 하지 않는 김수정이지만 그런 만큼 한번 삐지면 오래 가는 편이었다.

아마 지금 삐지면…. 내일 점심으로 김수정이 좋아하는 하와이안 피자를 시켜주기 전까지는 계속 삐져있지 않을까?

뜨거운 파인애플 따위는  질색인 정도찬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수정이 네가 열심히 공부하면 이길 수 있지 않을까?”

김수정의 볼이 더 부풀어 올랐다.

역효과였다.

‘망했네.’

정도찬은 순순히 자신에게 다가올 하와이안 피자라는끔찍한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다.

어찌 되었든 4강전까지는 앞으로 1주일.

4강전과 김수정에게 정신이 팔린 이때의 정도찬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2월 14일의 존재를.

자신에게 다가올 달콤한 지옥의 존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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