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34국 - 두 여자
장수를 잡으려면 말부터 쏘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싸움에서 이기려면 상대방이 직접 의존하고 있는 것을 공격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쏠 말 자체가 없는 장수라면 어떻게 공략해야 할까.
신세연이 보기에 정도찬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주변에 별 관심도 두지 않고, 자신의 평판도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무신경함의 극치.
게다가 바둑을 그만둘 때 가족들과 심하게 다퉈서 가족과의 교류도 별로 없었다.
그런 정도찬이 그나마 신경을 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친구들과 스승이었는데이 사람들은 신세연이 포섭할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방해나 안 하면 다행이지.
그런데 평생목석처럼 살 것 같은 인간에게 제자가 생겼다.
드디어 노려볼만한 말이 생긴 것이다.
물론 그녀가 김수정과 친해지려고 노력한 건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신세연은김수정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고, 아주 잠시였지만 수정이를 가르치기도 했다.
같이 지낸 시간은 짧았지만, 신세연은 이 기특한 소녀에게 그새 정이 들어버렸다.
어쨌든그렇게 여러 가지 복잡한 이유가 겹치며 신세연은 김수정을 여러모로 챙겨주기 시작했다.
정도찬은 무신경한 인간답게 바둑 외적인 부분에서는 김수정을 잘 챙겨주지 못했다.
애초에 ‘여자’에 대한 이해가 제로에 가까운 인간에게 뭘 바라느냐마는.
신세연은 그런 정도찬이 차마 챙겨주지 못하는 부분을 대신 챙겨줬다.
정확히 말하면 가방, 옷 신발 같은 김수정이 정도찬에게 먼저 말을 꺼내기 힘든 부분들을.
물론 그녀가 김수정에게 챙겨준 물건 대부분은 김수정이 그대로 보육원에 가져다주긴 했지만, 신세연은 그것마저도 고려해서 항상 넉넉한 수량의 물건을 챙겨줬다.
다소 딱딱했던 ‘신 사범님’이라는 호칭은 어느새 ‘세연 언니’가 되었고, 언제부터인가 김수정은 개인적인 고민마저 신세연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그녀의 노력이 드디어 빛을 발했다.
수정이: 스승님이랑 스캔들 난 여자가 연습 도와준다고 집에 온대요.
수정이: 막 손만 잡고 잔다고 하는데요?
정도찬과 스캔들이난 여자라면 하윤서가 분명했다.
여자의 감이 경종을 울렸다.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겨도 정도가 있지.’
대체 어떻게 되먹은 사람이 자기에게 결혼하자는 말을 한 사람을 집에 초대할 수 있는 걸까.
신세연은 진심으로 정도찬의 뇌 구조가 궁금했다.
하윤서는 무려 처음 만난 남자에게 카메라 앞에서 청혼한 정신 나간 여자다.
아무리 김수정이 옆에 있다고 해도 그 여자가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신세연은 김수정에게 고맙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바로 기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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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찬이 주소를 보내자마자 대충 최소한의 짐만 챙기고 집을 뛰쳐나온 하윤서는 기원에 도착하자마자 기분이 나빠졌다.
바둑 공부를 핑계로 이런 짓 저런 짓도 하고.
대국에 집중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핑계로 막차를 놓치기 위해서 막차 시간도 확인하고 온 그녀였다.
운이 좋다면 정도찬의 집에서 하루를 보낼 수 있고 운이 나빠도 정도찬의 차를 얻어타 심야 드라이빙 데이트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완벽한 설계를 마쳤는데!
막상 기분 좋게 기원에 도착하니 정도찬 옆에는 다른 여자가 딱 달라붙어 있었다.
‘뭐지 저 여자?’
심지어 초단 대회 때 정도찬의 옆에 있던 여자와는 다른 여자였다.
‘혹시 여자친구?’
잠시 최악의 상황을 생각했던 하윤서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자친구가 있었다면 그런 식의 스캔들 기사는 나지 않았을 거다.
보나 마나 그의 외면을 보고 주변을 맴도는 쓰레기 같은 여자 중에 하나겠지.
어차피 정도찬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있는 건 자신뿐이었다.
하윤서는 침착하게 인사를 건넸다.
“도찬 오빠 오랜만이네요, 그 날 이후로 처음이죠?”
“아…. 네 오랜만…. 아니지 마지막으로 일주일 전이었는데?”
정도찬에게는 일주일‘밖에’ 였지만 하윤서에게는 일주일‘이나’ 였다.
정도찬을 만난 날 이후, 하윤서는 오매불망 정도찬만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정도찬에게 적극적으로 달려들지 않은 것은 정도찬이 그런 행동을 부담스럽게 여긴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그녀는 바보가 아니다.
상대방이 싫어하는 일을 하면 자신을 싫어하게 된다는 당연한 사실 정도는 알고있었다.
그래서 하윤서는 기다렸다.
사냥감의 빈틈을 찾으며 주변을 맴도는 포식자처럼.
정도찬이 빈틈을 보이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다리는 것은 하윤서가 가장 잘 하는 일이기도 했다.
‘지가 봤으면 언제 봤다고 오빠야?’
신세연의 기분 역시 바닥을 쳤다.
오빠라니? 둘이 만나봤자 얼마나만났다고?
두 번? 아니 잘 쳐 줘봐야 네 번 만났나?
‘어린 것이 벌써 발랑 까져서!’
신세연과하윤서의 시선이 교차했다.
그 순간 둘은 느꼈다.
그녀들이 하나의 먹잇감을 두고 다투는 처지라는 것을.
결국, 조금도 양보할 수 없는 기싸움이 시작되었다.
“도찬아 이 애는 누구야?”
해석: 넌 뭔데 여길 기어들어 와?
“아, 이쪽은 하윤서 초단….”
하윤서는 정도찬의 말을자르고 입을 열었다.
“어머, 요즘 저랑 도찬 오빠 일로 떠들썩했는데 뉴스 같은 건 잘 안 보시나 봐요?”
해석: 뭐긴 뭐야 저기 있는 남자한테 고백한 사람이지.
“아! 이분이 그분이었어?”
해석: 사진발 오지네 못 알아볼 뻔.
“지금이라도 알아봐 주시니 감사하네요, 그런데 도찬 오빠 이 분은 뭐 하시는 분이셔?”
해석: 말 다 했냐? 그러는 넌 뭔데 우리 오빠한테 친한 척이야?
“아, 이쪽은 신세연 협회 6단, 내 친구야.”
신세연이 정도찬의 말을 거들었다.
“도찬이랑은 알고 지낸 지 20년 정도 됐나? 오랜 친구? 그런 사이에요.”
해석: 난 친한 척 하는 게 아니라 친한 건데?
“아 그러시구나…. 20년이나 알고 지내셨구나. 난 도찬오빠 만난 지 얼마 안 됐는데….”
해석: 님 대체 20년 동안 뭐 함? 난 만난 첫날에 고백했는데.
“아 그랬죠? 그러고 보니까 도찬이가 요즘 많이 곤란해하더라고요.”
해석: 자랑이다 쯧쯧.
“그런데도찬 오빠랑 친구면 스물다섯 맞으시죠? 전 열아홉이니까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해석: -틀-
“그래요, 저도 편하게 윤서라고 불러도 되죠?”
해석: 민증에 잉크도 안 마른 년이 뭐래?
“네 언니, 말씀 편하게 해주세요.”
해석: 싫은데?
“그래 윤서야.”
해석: 나도 싫어 이년아.
용쟁호투
말 그대로 스치기만 해도 치명타인 자존심 강한 두 천재의 대결이었다.
한편 그 모습을 구경하던 정도찬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왜 둘 다 웃으면서 말하고 있는데 무섭지?’
그래 마치 예전에 잘 아는 사람이 부탁해서 거의 거저로 행사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한소율이 웃으면서 ‘참 잘했어요.’라고 말하던 느낌이랑 비슷했다.
웃는데 웃는 것 같은 느낌이 아닌 그런 감각.
정도찬은 우선 두 사람을 진정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런 그의 눈에 계단 위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던 김수정이 포착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으리라.
“수정아! 내려와서 인사해, 이쪽은 하윤서 초단이야.”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하윤서의 어그로가 김수정 쪽으로 튄 것이다.
‘저 애는 또 누구지?’
김수정을 보는 순간 하윤서의 사고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풀악셀을 밟았다.
‘설마 숨겨둔 자식?’
그래 잘 생각해보면 저런 남자를 주변 여자들이 가만히 놔뒀을 리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시절 사고를 친 것이라면….
‘하지만 전 그것도 이해할 수 있어요!’
하윤서의 이해심은 태평양 이상으로 넓었다!
하지만 하윤서가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김수정은 계단에서 총총 내려와 하윤서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김수정이에요…. 나이는 열 살이에요….”
‘열 살???!!!’
그럼 정도찬이 열다섯에 사고를 쳤다는 거고 하윤서 자신과는고작 아홉 살 차이 난다는 건데?
아무리 하윤서라도 이건 완전히 스트라이크 존 밖으로 빠지는 공이었다.
하윤서는 정신이 멍해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실시간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그…. 따님이…. 참…. 귀엽네요….”
“......?”
잠시 하윤서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은 정도찬의 뇌가 기능을 정지했다.
이윽고 하윤서가 김수정을 자신의 딸로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정도찬은 발끈했다.
“딸이 아니라 제자예요! 내제자!”
“아…. 어쩐지.”
“사람을 뭐로 생각하는 거예요? 내 나이가스물다섯인데 열 살짜리 딸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정도찬은 발끈했지만 하윤서는 하윤서 나름대로 억울했다.
‘내가 이 오빠 주변에서 본 여자가 벌써 둘인데….’
지금까지 두 번 만났으니 말 그대로 만날 때마다 여자가 바뀐 것이다.
좀 심각하게 표본이 적긴 했지만.
‘아니, 그것보다 내제자라고?’
“내제자라면 혹시 도찬 오빠랑 같이 살고 같이 밥 먹고 같이 바둑 공부하고 같이 목욕하고 같이 자는 거예요?”
무시무시한 기세로 물어보는 하윤서의 모습에 반쯤 겁에 질린 김수정이 정도찬의 뒤에 숨어 머리만 빼꼼 내밀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수정이도 다 큰 애니까 같이 목욕하거나 같이 자지는 않아.”
넌 왜 거기서 고개를 끄덕이는 거야? 정도찬은 김수정을 살짝 타박했다.
하지만 이미 하윤서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뭐야 그거 천국인가?’
그녀가 꿈꾸는 삶이 멀리 있지 않았다.
“나도! 나도! 내제자 할래요!”
“협회 입단까지 한 사람이 무슨 소리여요!”
“싫어!은퇴할 거야! 내제자 할거야아!”
참고로 협회의 프로바둑기사는 종신제이다.
한편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신세연도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라?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데?’
그래도 그녀도 나름 6단의 벽을 넘은 프로바둑기사이니 체면 때문에라도 하윤서처럼 떼를 쓸 수는 없었지만.
그녀도 할 수만 있다면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이 생각을 절대로 입 밖으로 꺼낼 생각은 없었다.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두 여자의 마음이 맞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