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35국 - 기왕(棋王)
그렇게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바로 다음 날이 대회였기에 하윤서와 신세연은 나름대로 얌전히 정도찬과 김수정의 페어 바둑 연습을 도왔다.
물론 이건 정도찬의 생각이고, 얼떨결에 두 사람의 기 싸움을 눈앞에서 직관하게 된 김수정은 연습하는 내내 둘의 눈치를 보며 오들오들 떨었지만….
어쨌든 벌써 시계는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고 더 이상 연습하면 김수정의 컨디션이 무너질 것이 걱정된 정도찬은 연습을 끝낼 것을 제의했다.
“이제 슬슬 여기까지 하자.”
“그래 수고했어.”
그리고 이 순간만 기다리고 있던 맹수는 마지막 기회를 노렸다.
“앗! 벌써 시간이 이렇게….”
“왜 그래?”
“막차 시간이 11시 30분이었는데 어떡하죠?”
하윤서는 살금살금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최대한 걱정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데려다줘요! 집에 데려다줘요!’
하윤서가 노리는 것은 정도찬과의 일대일 심야 드라이빙 데이트!
그런 검은 속내를 알 길 없는 정도찬은 순진하게 넘어갔다.
“여기서 재울 수는 없으니 데려다줘야겠네, 집이 어디야?”
‘나이스!’
하윤서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신세연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그꼴을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신세연은 가방에서 차 키를 꺼내 얄밉게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도찬이 너는 내일 대회니까 오늘은 일찍 자 윤서는 내가 데려다줄게.”
“아냐 내 손님인데 내가 데려다줘야지.”
“내가 데려다준다고.”
“넹….”
두 사람의 눈빛이 다시 한번 교차했다.
‘이 나쁜 년이 마지막까지!’
눈앞의 여자 때문에 모처럼의 기회를 완벽하게 날려버렸다.
원래는 이런것도 하고 저런것도 하고 기회가 되면 그런것도하고!!! 그러려고 했는데!!!
‘어디서 뻔히 보이는 수작을 부리고 있어?’
지금까지 정도찬에게 접근한 여자가 대체 몇 명이었던가.
신세연은 어느새 정도찬에게 추파를 던지는 여자들의 완벽한 천적으로 군림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기쁘진 않았다.
전혀….
신세연이 반쯤 하윤서를 강제로 끌고 나가며 정도찬에게 말했다.
“금방 데려다주고 올 거니까 먼저 자고 있어.”
그 말의 뉘앙스를 파악한 하윤서가 반박했다.
“다시 올 필요가 있을까요?”
“다시 올 건데 무슨 문제라도 있니?”
“그럼 여기서 자고 간다는 말이에요?”
“난 가끔 여기서 자고 가는데?”
신세연은 자신의 방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가 내 방이야.”
하윤서는 최후의 변론을 펼쳤다.
“그, 그래도 도찬 오빠 내일 대회니까 일찍 자야 하는데….”
신세연은 가방에서 기원의 열쇠를 꺼내 열쇠고리를 손가락에 끼워 빙글빙글 돌리며 놀리듯 말했다.
“난 기원 열쇠 있으니까 상관없어.”
‘느 집엔 이거 없지?’라고 놀리는 듯한 모습에 하윤서는 오늘의 패배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흙이 쌓여 산을 이룬다고 했던가.
20년이라는 세월의 벽은 하윤서의 생각보다 높았다.
하지만 하윤서는 실망하지 않았다.
‘어차피 하루 이틀로 될 일은 아니었어!’
산류천석(山溜穿石)
하윤서는 산에서 흐르는 물이 바위를 뚫듯적은 노력을 끈기 있게 계속하면 언젠간 큰일을 도모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인공지능을 이기는 일이든, 정도찬을 유혹하는 일이든 같았다.
하윤서는 신세연에게 뒷덜미를 잡혀 질질 끌려가는 와중에도 어떻게 다음 기회를 잡을 것인지 머리를 팽팽 굴렸다.
“도찬 오빠! 오늘 연습 도와줬으니까 나중에 밥 사요!”
“그래요. 나중에 연락해요. 맛있는 거 사줄 테니까.”
정도찬은 별생각이 없었다.
그저 도움을 받았으니 보답한다, 그 정도의 의미로 대답한 것이지만 훌륭하게 ‘다음 기회’를 잡은 하윤서는 쾌재를 불렀다.
‘다음번 만남은 이 여자의 방해가 없을 때!’
오늘 못한 것까지 두 배로 이런 것하고 저런 것 잔뜩 해버릴 테다!
한편 예상치 못한 공격을 당한 신세연은 이를 악물었다.
‘이 영악한 것이 마지막까지!’
하지만 그렇게 큰 타격은 없었다.
정도찬과 하윤서가 일대일로 식사를 빙자한 데이트를 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니까!
신세연은 김수정을 바라봤다.
‘다음번에도 부탁해!’
김수정은 나만 믿으라는 듯 화답했다.
‘맡겨만 주세요!’
최고의 아군은 그녀의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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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당일 정도찬과 김수정은 아침 일찍 일어나 방송국으로 향했다.
대회의 시작 시간 자체는 12시부터였지만 9시부터 대기를 하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정확히 9시에 맞춰서 방송국에 도착한 정도찬은 대기실에 들어가 먼저 온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팀은 정도찬과 김수정을 포함한 여덟 팀이었다.
작년만 해도 서른두 팀이 참여하는 나쁘지 않은 규모의 대회였는데 한세빛 국수의 참가 소식이 전해지자 반의반 토막이 나버린 것이다.
대회 참가 소식만으로 웬만한 사람들은 발을 뺀다.
현 바둑계에서 한세빛 국수의 위상은 그 정도였다.
정도찬은 자신의 머리를 정리해주던 방송국 소속의 스타일리스트에게 물었다.
“참가자가 이렇게 적은데 괜찮은 거 맞아요?”
“위에서는 오히려 더 좋아하던데요?”
“네?”
“작년에는 스튜디오 관중석이 반도 안 차서 방청객 알바를 들였거든요, 그런데 올해는 방청권 경쟁까지 붙었으니까 화제성으로 따지면 훨씬 좋아진 거죠.”
대국 수는 줄었어도 화제성은좋아졌으니 오히려 좋다는 건가.
하긴 송출 시간이 한정된 방송국 입장에서 보면 짧고 굵은 것을 선호하는 게 당연할지도.
어쨌든 대충 이런 느낌의 잡담을 나누기를 삼십 분, 드디어 정도찬과 김수정의 메이크업이 끝났다.
입단 이후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이런 메이크업에 익숙해진 정도찬은 별 감흥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메이크업을 처음 받아본 김수정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마냥 신기한지 거울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정도찬은 그런 수정이가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 으려다가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가 도끼눈을 뜨는 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손을 뒤로 빼며 말했다.
“그렇게 신기해?”
“네! 그런데 너무 답답해요….”
“조금 지나면 익숙해질 거야.”
그러고 보니 이게 수정이가 카메라 앞에 서는 첫 무대였다.
정도찬은 김수정이 많이 긴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어 어떻게 긴장을 풀어줘야 할까 고민했다.
그때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수저엉~!!”
멀리서도 확연히 보이는 웨이브 진 갈색의 긴 머리.
이루아였다.
“어? 루아다!”
김수정도 단번에 이루아를 알아본 것인지 도도도 달려가 그녀의 친구를 맞이했다.
‘루아가 여기 있다는 건….’
한세빛이 있다는 뜻이었다.
정도찬의 시선이 한세빛을 좆았다.
한세빛은 한눈에 보기에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거구의 사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험상궂은 얼굴에 터질듯한 근육으로 똘똘 뭉쳐있는 듯한 산만 한 덩치, 등산 중에 만난다면 산적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남자였다.
워낙 특징이 뚜렷한 사람이었기에 정도찬은 그가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니 올해의 기왕전에서 깜짝 우승하고 기왕 타이틀을 획득한 사람이었으니 못 알아보는것이 이상했다.
기왕(棋王) 김덕수
다른 바둑기사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한때 목숨을 건 내기 바둑을 두다가 프로의 눈에 띄어 입단했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도는 사람이었다.
소문이야 어찌 되었건, 정도찬이 먼저 가서 인사를 하는 게 예의였기 때문에 정도찬은 두 사람 앞에 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국수님.”
“정 사범! 이렇게 와줘서 고맙네.”
“아닙니다. 저야말로 권유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한세빛 국수는 정도찬을 반갑게 맞이했다.
잠시 한세빛 국수와 이야기를 나눈 정도찬은 김덕수에게 인사를 건넸다.
“기왕을 만나 봬서 영광입니다, 정도찬입니다.”
“아 네가 형님이 말하던 그 애구나?”
“네?”
“세빛 형님이 그렇게 칭찬하던데?”
“아하하…. 부끄럽습니다.”
김덕수는 정도찬에게 악수를 건넸다.
“잘 부탁한다 김덕수다.”
정도찬은 김덕수가 건넨 손을 마주 잡으며 말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호오….’
그 모습을 보며 김덕수는 살짝 감탄했다.
그의 덩치가 보통 덩치가 아니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은 그가 악수를 건네는 것만으로도 위협을 느낀다.
그런데 눈앞의 재미있는 친구는 조금의 동요도 하지 않는 것이 배짱이 두둑해 보이는 친구였다.
‘기회가 된다면 한번 손을 섞어보고 싶은걸.’
하지만 오늘은 날이 아니었다.
김덕수는 옆 스튜디오에서 촬영하다 잠시 한세빛을 만나러 온 거지 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연습 대국 같은 시시한 대국을 즐기는 성격도 아니었다.
이왕 할 대국이라면 높은 무대에서 화려하게 맞붙는 것이 그의 입맛에 맞았다.
“기왕하고 명인,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날이 온다면 날 만나러 오도록.”
‘만나러 와라.’라는 말은 기왕전에 참가해 기왕 타이틀을 빼앗아 보라는 은유적인 도발이었다.
보통 비슷한 위치의 타이틀은 하나만 보유하는 것이 관례였기에 한 말이었고 이를 못 알아들을 정도찬이 아니었다.
“곧 찾아뵙겠습니다.”
“‘곧’ 이라 기대되는구먼.”
타이틀이 걸린 기전의 최소 참가 자격은 9단.
얼마 전 초단 대회의 우승으로 승단하긴 했지만, 아직 2단인 정도찬은 기왕전의 예선전에도 참가하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런데도 ‘곧’ 찾아뵙겠다고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세계대회 우승을 노리는군. 역시 재밌는친구야.’
과거 협회가 주최하는 승단 대회를 거부한 한 바둑기사가 3단이라는 신분으로 세계대회를 휩쓸고 다니는 촌극이 벌어진 후, 바둑협회는 특별 승단 제도를 도입했다.
처음에는 세계대회에서 우승 시 3단 승단이었다.
하지만 16년도쯤에 한국의 9단이 일본의 9단보다 숫자가 적다는 이유로 세계대회 우승 시 무조건 9단으로 승단이라는 파격적인 승단 제도로 바뀌었고 정도찬은 이를 노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몽백합?”
“...맞습니다.”
“이거 기대되는구먼.”
정도찬의 입단이 올해 9월이었던가.
몽백합배 세계 기전은 6월이고 기왕전은 8월이니 어쩌면 입단한 지 1년도 안 돼서 타이틀을 획득하는 바둑기사가 나올지도 몰랐다.
실력?
그 한세빛이 그렇게 칭찬했는데 굳이 실력에 의문을 가져야 할까?
김덕수는 그것만큼 의미 없는 짓도 없다고 생각했다.
과연 자신은 역사적인 순간의 희생양이 될 것인가 아니면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막아선 사람으로 기록될 것인가.
김덕수는 벌써 그 순간이 기다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