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4화 〉33국 - 전조 (34/75)



〈 34화 〉33국 - 전조

대회  날.

나는 수정이와 인터넷 바둑으로 페어 바둑을 연습하고 있었다.

하지만 페어 바둑 연습을 위해 새로 만든 계정이라서 그런지, 그나마 연습이  만한 고수들은 우리의 대국신청을 거절했기 때문에 연습은 난항을 겪고 있었다.

프로들은 보통 프로들끼리만 두고,아마추어 고수들도 상대를 골라가며 두는 것이 매너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대국신청을 받아주는 것은 애매한 실력의 속칭 공방 양민들.

아마추어 중에서도 하수 측에 속하는 사람들과 대국을 하는 것이 연습이 될 리가 없었기에나는 그냥 내 본 계정을 사용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문제는 내가  계정으로 인터넷 바둑에 접속만 하면 거의 스팸메일에 가까운 대국신청이 들어온다는 점이었다.

프로 인증 마크를 보고 대국신청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한 사람이 보내는 대국신청이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하윤서 초단.

평소에 인터넷 바둑만 죽어라 두는 것인지 내가 인터넷 바둑에 접속할 때마다 보이더라.

그녀가 보내는 친구 신청은 내가 계속 거절해서 메시지는 못 보내지만 내가 대기실에 있으면 거의 초당 한 번씩 대국신청을 보내오는 집착이 무서웠다.

하필 인터넷 바둑 특성상 대기자 목록 최상단에는 프로들이 노출되기에 몰래 접속할 수도 없고….

하지만 내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정이는 그저 계속 이기고있다는 사실 자체가 즐거운 모양이었다.

“스승님! 또 이겼어요! 20연승이에요!”
“어? 그래, 또 이겼네.”

평소 수정이의 바둑 연습 상대는 대부분 우리 기원의 죽돌이들이다.

내가 얼굴을 기억하는 손님 대부분은 바둑 엔터테인먼트의 시대가 오기 전부터 기원에서 살다시피 하던 바둑의 고인물들.

요즘 들어 그 사람들만을 상대하는 수정이의 승률은 그렇게 높지 않았기에 이렇게 시원하게 이기는 바둑을 두는 것이 오랜만인 거겠지.

그렇게생각하니 이건 이거 나름대로 나쁘지 않았다.

연습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하면 미묘하지만 이렇게 자신감을 얻는 것도 중요하긴 하니까.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는데 물통이 비어있었다.

“수정아 잠깐  떠올 테니까 다음 상대는 수정이가 골라볼래?”
“네! 맡겨주세요!”

수정이는 눈을 빛내며 대기자 명단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새 계정이 지금 6단이지만 20연승이니까  좋으면 8단 정도는 대국신청을 받아주지 않을까?

잠시 주방에  정수기에서 물을 채우고 방에 돌아오니 이미 대국이 잡혀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잡힌 듯 수정이가 몇 수정도 두고 있는 상태였다.

“생각보다 빨리 잡혔네?”
“제일 위에 있는 사람한테 신청했는데 받아줬어요!”
“응?”

제일 위에 있는 사람이면 프로일 텐데?

아무리 20연승 중이라고는 하지만프로가 대국신청을 받아줬다고?

나는 의기양양하게 ‘저 잘했죠?’라는 표정을짓고 있는 수정이를 한번 쓰다듬어주고 옆에 앉아 상대를 확인했다.

대국 상대는 ‘인공지능죽어’

“이 여자는 쉬지도 않나?”
“아는 사람이에요?”
“......아는 사람이긴 하지.”

‘인공지능죽어’는 하윤서 초단의 아이디였다.

괜히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설마 나인 걸 알고 대국신청을 받은 건 아니겠지?

하지만 채팅창을 확인해보니 조용한 것이 그건 아닌 듯했다.

그래, 워낙 인터넷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이니 20연승을 한 사람을 보고 호기심에 대국신청을 받아준 거겠지.

연습 상대가 없어서 걱정이었는데 오히려 잘 됐다.

하윤서 초단 정도면 연습 상대로는 차고 넘치는 상대였다.

“스승님! 스승님 차례에요!”

예상치 못한 사람과 대국을 하게  탓에 잠시 멍하니 있던 나를 수정이가 보챘다.

대회의 연습이었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한 사람당 1분의 제한시간을 가지고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별일이야 있겠어.

애초에 페어 바둑이니 하윤서 초단이 내 기풍을 알아볼 리는 없다.

오히려 대국 중에 갑자기 나가는 편이 더 이상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별생각 없이 대국에 집중했다.

요 며칠간 수정이에 대해 좀 더 알게 되며 달라진 점 중 하나는 수정이의 바둑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우선 첫 번째로 수정이가 예전과 같은 맥락의 수를 두어도 내가 느끼는 것이 전혀 달라졌다.

‘왜 저기에다 저렇게 두지?’에서 ‘아 이렇게 두고 싶은 거구나.’가 되었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또 달라진 점은 수정이가 어디까지 수를 읽는지 어느 정도는 파악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내가 국면을 리드해도 수정이가 수를 읽지 못해 전혀 엉뚱한 수를 두는 일은 많이 사라졌다.

나와 수정이의 페어 바둑 기보를 본 친구들이 ‘이제 좀 페어 바둑 같다’라고 말할 정도로 합이 잘 맞기 시작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내 수읽기를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수정이의 실력은 내가 보기에도 무서울 정도로 올라오고 있었다.

내가 수정이를 처음 만났을 때 5년 안에 협회의 프로가 될 수 있는 재능이라고 생각했던가.

요즘 수정이의 성장세를 보면 그때의 내가 얼마나수정이를 과소평가했는지 느껴졌다.

욕심을 좀 낮춰서 연맹 입단이라면 내년 상반기에도 입단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빠른 성장세였다.

나는 슬슬 수정이의 진로를 자세하게 정해야 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쉽고 빠른 길이지만 경력 내내 저평가 당할 수밖에 없는 연맹, 어렵고 느린 길이지만 입단하는 것 자체만으로 존중을 받을 수 있는 협회.

수정이의 사정을 생각한다면 연맹이 답이겠지만,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협회를 추천하고 싶었다.

그래도, 결국 선택은 본인이 하는 거다.

비록 내가 내심 협회 입단을 기대하고 있기는 하지만 수정이의 판단을 존중할 생각이었다.

나와 수정이가 서로 1분 이내에 착수했고, 하윤서 초단도 그에 화답하듯 1분 이내에 착수했기 때문에 바둑은 빠르게 진행됐다.

놀랍게도 국면은 비등비등했다.

인터넷 바둑이라고 가볍게 두는 것인지, 아니면 속기 바둑은 잘 못 두는 것인지.

그래도 이 정도의 연습 상대는 구하기 쉽지 않았기에 나는 대국이 끝나가는 것에 살짝 아쉬움을 느꼈다.

띠링-

익숙한 알림음이 들렸다.

상대가 채팅을 쳤다는 알림이었다.

가끔 이런 식으로 실력이 비슷한 상대에게 다시 대국을 요청하는 것은 흔했기 때문에 나는 별 생각 없이 채팅창을 열었다.

인공지능죽어: 오빠 언제 부계정 만들었어요?

순간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니 내 이름을 직접 말한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겠다 싶어 우선 오리발을 내밀기로 했다.

ehcks2: 누구세요?
인공지능죽어: 왜 모르는 척해요?
ehcks2: 모르는 사람이니까요.
인공지능죽어: ٩(๑`^´๑)۶
인공지능죽어: 계속 그렇게 모른 척 할거에요?
인공지능죽어: 도찬 오빠.

망했네.

어떻게 알았지?

하지만 나는 이왕 내민 오리발 끝까지 내밀기로 했다.

ehcks2: 정도찬이라니요? 저 그런 사람 모르는데요?
인공지능죽어: 아이디 영어로 쳐보니까 도찬2던데요?
ehcks2: 아 그건 제가 정도찬 2단 팬이라서요
인공지능죽어: ( ̄(エ) ̄)
인공지능죽어: 그런 사람 모른다면서요.

진짜 망했네.

나는 결국 순순히 시인했다.

ehcks2: 어떻게 알았어요?
인공지능죽어: Σ(゚Д゚)
인공지능죽어: 오빠 설마 숨긴 거였어요?
인공지능죽어: 난 당연히 오빠인  알고 대국신청 받은 건데.
ehcks2: ...

그렇게 티가 많이 나나?

나와 하윤서 초단의 채팅을 구경하던 수정이가 물었다.

“이 사람 누구예요?”
“하윤서 초단이야.”
“스승님한테 고백했던  사람이요?”
“......맞아.”

제자 앞에서 이런 말을 하려니 많이 쪽팔렸다.

이럴 땐 모 영화에서 나오는 초록색 돌멩이 같은 거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게 있다면 과거로 시간을 돌려서 초단 대회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을 텐데.

그나마 다행인 건 그 날 이후로 하윤서 초단이 이상한 말을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아마 하윤서 초단이 그  이후로도 인터뷰 등에서 이상한 말을 하고 다녔다면 난 아직도 기자들에게 시달리고 다녔겠지.

그나마 그녀가 별말 하지 않고 있으니 그나마 쉽게 넘어갈  있었던 거다.

그런  보면 최소한의 상식은 있는 사람인 건가?

아니, 상식이 있었다면 그렇게 카메라가 많은 곳에서 갑자기 그런 말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냥 자신의 충동과 감정에 충실한 사람은 아닐까.

자세히 생각해보니까 자기도 좀 뭔가 아니다 싶어서 별말 없는 거고.

하윤서 초단은 개인적으로 이상한 말만  한다면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기는 했다.

바둑 철학도 확고하고, 기풍도 특이하고.

연습이라도 좀 도와달라고 해볼까.

ehcks2: 저랑 제자가 내일 사제전에 나가는데 연습  도와줄 수 있어요?
인공지능죽어: ٩(๑>∀<๑)۶
인공지능죽어: 당연히도와드려야죠지금당장갈게요어디로갈까요
ehcks2: 아뇨…. 인터넷 바둑으로 하는 거로 충분한데요?
인공지능죽어: (。ŏ﹏ŏ)
인공지능죽어: 그래도인터넷으로하는것보다제가직접가서하는게더낫지않을까요?
ehcks2: 그 말이 맞긴 한데...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야 당연히 대면 연습이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피드백도 바로바로   있고, 나 역시 그쪽이 더 익숙하니까.

그런데…. 무섭다.

무려 카메라 앞에서 당당하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집에 오면 무슨 짓을 할까.

ehcks2: 이상한   할거죠?
인공지능죽어: 무슨이상한짓이요전그런거안해요정말손만잡고잘게요저믿죠?
ehcks2: 믿긴  믿어요! 잠은 집에 가서 자!
인공지능죽어: 힝….

이게 맞나 싶었지만 결국 하윤서 초단의 필사적인 설득에 넘어가 기원의 주소를 알려줬다.

수정이도 있고…. 별일 없을 거다.

아니, 별일 있으면 안 된다.

어쨌든 하윤서 초단을맞이할 준비를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수정이가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잠시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자  시선을 의식한 것인지 수정이는 급하게 핸드폰을 등 뒤로 숨겼다.

뭐지?  저러지?

“무슨 일 있니?”
“아, 아니에요. 루아한테 메시지가 와서….”
“그렇구나”

하긴 당장 내일이 대회니까 루아에게서 메시지가 올 만도 하지.

둘이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니 괜히 내가 뿌듯했다.

그런데 저렇게 숨길 필요까지는 없지 않나?

하긴 사생활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나는 수정이가 편하게 메시지를   있도록 내 방에서 나와 공부방으로 들어갔다.

손님 오기 전에 청소라도 좀 둬야지.

그리고 정확히 30분 후.

“내일 대회 나간다며? 도와주러 왔어.”
“어? 아….그래…. 고맙다.”
“도와주러 온 사람한테 반응이 왜 이래? 혹시 여자라도 불렀니?”
“......”
“아 그리고 오늘 여기서 자고 갈 거야.”

세연이가 기원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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