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3화 〉32국 - 장인과 원석 (33/75)



〈 33화 〉32국 - 장인과 원석

보통 프로바둑기사의 기풍은 성격을 따라간다.

전투 바둑으로 유명한 이한돌 9단은 과거바둑협회의 위상이 절정이던 시절에도 협회와 대립각을 세우던 강직한 성격의 사람이었고,

대국에서 졌을 때 시간이 남아있는 것을 이해할  없다는 말을 남긴 조지훈 9단은 매우 치열한 기풍을 가지고 있었다.

내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내유외강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세연이는 실리를 챙기는 선택을 자주 하는 편이고 많은 사람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휘운이는 타협을 즐기는 유들유들한 바둑을 둔다. 인공지능의 신봉자인 재영이는 극한의 효율을 추구한다.

아니, 멀리 갈 필요 없이 나도 성격이 기풍에 강하게 반영되어있는 사람 중 하나이다.

바둑을 둘 때마다 남의 눈치를 보는 나 역시 상대와 상황에 맞춘 바둑을 두니까.

그러므로 나는 항상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가끔 영악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얌전한 아이인 수정이의 기풍은 어째서 그렇게 공격적인가.

보육원장님의 말을 듣자 드디어 그 의문이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조급함.

조금이라도 더 빨리 성과를 내야 한다는 수정이의 조급함이 수정이의 기풍에 반영되자 뒤를 보지 않고 앞으로 전진만을 외치는 공격적인 기풍이  것이다.

어떻게 할까….

나는 고민에 빠졌다.

트라우마로 인해 십 년이 넘는 시간을 낭비한 나 역시 조급함을 느끼고 있었고, 이 조급함이라는 감정은 독이 될 수 있다는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 자신의 실력에 대한 의심, 목표에 대한 회의감.

나는 이 조급증이 조금씩 나를 좀먹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항상 내가 조급해지는 것을 경계했다.

스물다섯, 어디 가서 어른이라고 말해도 부끄럽지 않은 나도 조급함 때문에 이 정도로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물며 이제  살인 수정이가 느끼는 압박감은 어떨 것인가.

지금은 별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1년 후에는? 5년 후에는?

그때도 수정이가 조급함에 잡아먹히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데…. 어떻게 말해야 하지?’

문제는  조급함은 내가 함부로 건들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것이었다.

수정이의 조급해하는 원인은 그녀가 가족처럼 여기는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이는 수정이가 바둑을 배우는 동기이기도 했다.

자칫 잘못하면 바둑을 배우는 이유 자체를 잃을 있으니 섣불리 건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날 저녁, 잠도 제대로 못 자고밤을 새워 고민하던 나는 이 문제를 상담할 수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핸드폰을 들었다.

전화를 거는 대상은 내 스승님.

나보다 이런 고민을백번은 더 해봤을 내가 아는 스승 중에 가장 훌륭한 스승이었다.

#

잠시  스승인 신창연 협회 9단의 이야기를 해보겠다.

프로바둑기사로서의 전성기는 한참 전에 넘긴 어느새 지천명이 넘은 스승님은 사람들에게 명인이라고 불리지만 사실 명인전의 타이틀 홀더는 아니었다.

하지만 전성기 시절 무려 15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명인 타이틀을 유지했기 때문에 한국의 바둑기사들 중에서는 최초로 영속 명인의 자격을 얻으셨고, 그 때문에 아직도 명인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이었다.

나이 때문에 체력이 달린다는 핑계로 공식전에는 거의 얼굴을 내밀지 않고 잠정은퇴하신 스승님은 오히려 잠정은퇴 이후로 대외 활동을  활발하게하시고 계셨다.

대부분은 행사나 바둑 보급과 같은 직접적인 대국 외적의 일들이었다.

이런 스승님은 스스로의 업적뿐만이 아니라 제자를 잘 키우기로도 유명했는데 내 세대 이후로는 개점휴업 상태이지만  전만 해도 수많은 아이를 가르쳐 입단으로 이끌었고, 그렇게 입단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재영이가 입단했을  바로 바둑 리그에 납치된 것처럼 바둑 리그의 팀들은 창연도장 출신이면 일단 믿고 쓰는 경향이있을 정도였으니….

그러고 보니까 나도 창연도장 출신인데 왜 나한테는 오퍼가 안 들어오지?

중간에 바둑을 한번 포기했다고 창연도장 출신으로 안 쳐주는 건가?

모르겠다,  되면 을조리그든 갑조리그든 불러주는 곳이 있겠지.

어쨌든 나는 수정이의 일로 한참을 고민하다가 스승님에게 전화했고, 잠시 내 말을 듣던 스승님은 도장에 오라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할 말 다 하면 전화 끊어버리는 것도 여전하시구나.

나는 잠시 투덜거리다 도장으로 향했다.

두 전, 입단을 결심했을 때 스승님을 만나긴 했지만, 도장에 가는 건 도장에서 한세빛 국수를 만난 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렇게 멀지도 않으니 자주 찾아갈 수도 있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오랜만에 가는 걸까.

어쩌면 나는 무의식적으로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는 도장에 가는 것을 피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창연도장에 도착한 나는 스승님의 방으로 향했다.

스승님의 방으로 가는 길, 그 풍경 하나하나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좋은 기억도 있었지만, 나쁜 기억이 더 많았다.

하지만 이곳에서 생활하던 때가 그립다고 느껴지는 건 어째서일까.

모르겠다.

나는 스승님의 방문 앞에서 노크했고, 스승님은 그냥 들어오지 뭔 놈의 노크냐며 나를 타박했다.

너무 오랜만에 와서 그런가? 나도 모르게 실수했다.

어째서 노크하는 것이 실수라고 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노크하는 것을 예의로 여기지만 스승님은 노크하는 것을 끔찍이 싫어했다.

노크 소리에 집중이 깨진다는 단순한 이유였다.

“어차피  오는 거 알고 계셨잖아요.”
“시끄럽다, 와서 앉아라.”

스승님은 스승님이 아끼는 바둑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나이도 드실 만큼 드신 분이 아직도 저러시네.

스승님의 관절 건강이 염려된 나는 입을 열었다.

“요즘 애들은 다 의자에 앉아서 바둑 둬요.”
“무릎 꿇고 앉아있는 거 힘들어서 의자 좀 쓰자고 건의한  나다.”
“... 그거 진짜였어요?”
“그럼 거짓말하는 줄 알았냐?”
“네.”

사실 지금도 믿지는 않는다.

아무리 영속 명인의 건의라고는 해도 한 사람 때문에 그런 중대한 결정을 했을 리는 없으니까.

하지만 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스승님은 얼굴을 찌푸렸다.

“오랜만에 혼  나야겠구나, 앉아라, 가볍게 한 판 두자꾸나.”

나는 별말 없이 스승님의 맞은편에 앉았다.

“체력은 좀 괜찮아요?”
“누굴 뒷방 늙은이 취급하고 있어?”

스승님은 은근슬쩍  돌을 집어가 우상귀 화점에 착수하며 말했다.

“아이 때문에 고민이 많다고?”
“제가 제자를 받은 건 처음이라서요….”

잠시 지금이라도 돌가리기를 하자고 따질까 고민하던 나는 그냥  돌을 쥐기로 마음먹었다.

바둑알을 집어 들자 화석이 된 조개를깎아만든 바둑알의 까끌까끌한 감촉이 느껴졌다, 불량품인가 싶어 다른 바둑알을 집었지만 까끌까끌한 감촉은 여전했다.

다른 바둑알을 집었으나 까끌까끌함은 여전했고 그저 바둑알의 크기가 제각각이라는 기분 나쁜 사실만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미묘한 불쾌감에 나도 모르게 잠시 미간이 찌푸려졌다.

재료의 가치를 생각했을 때 제대로 된 장인을 만났다면 한 알당 50만 원을 호가하는 바둑알이 되었을 물건이 형편없는 장인을 만나 공산품만도 못한 물건이 된 것이다.

나는 손끝에서 느껴지는 불쾌감을 참고 화점 하나를 차지했다.

“어떠냐 그 바둑알.”
“어디 쓰레기장에서 주워오셨어요?”
“내가 깎았다.”
“어쩐지 고풍스럽고 예스럽더라.”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같다며?”
“당연히 농담이죠.”

스승님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구나.”
“칭찬으로 알아듣겠습니다.”

스승님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스승님한테 이런 취미도 있었나?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바둑은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포석은 스승님이 선호하는 고바야시류 포석.

나도 딱히  악물고 이길 생각은 없었기에 적당히 손바람을 탔다.

흑이 유리한 무난한 수순이 진행되었고, 스승님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때문에 고민하는 게냐?”
“수정이가 너무 조급해하는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나는 스승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내 말을 들은 스승님은 한참을 고민했다.

침묵 속에 수순이 이어졌고, 바둑을 두는 소리만 조용히 울려 퍼지길 한 시간.

드디어 스승님이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구나.”
“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없다.”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 억지로 다른 길을 걸으라고 할 수는 없는 법이라는 게다.”
“그게 잘못된 길이라고 해도요?”
“그 아이가 선택한 길이 잘못된 길이라는 것은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그건….”

나는  수정이의 조급함을 보고 수정이가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야…. 내가 그랬으니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조급해졌고, 그 조급함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수정이도 같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수정이는?

정말 수정이도 나와 같은 생각일까?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스승님은  대마에 치중하며 말을 이었다.

“제자를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뭐든 과하면 모자란 것보다 못하는 법이지.”
“제가 지금당장 해줄 수 있는 건 없다는 말이군요….”

스승님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말이 있지않은가.

머리는 이해했지만,가슴은 이해하지 못했다는.

속 시원한 대답을 듣기 위해 왔는데, 어째서인지 가슴이 더 답답해지는 느낌이었다.

“어렵네요.”

나는 괜히 바둑알을 매만졌다.

실력이 부족한 장인의 손에 맡겨져 제 가치를 잃은 원석.

스승님은 이 바둑알을 사용하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갑자기 손끝에서 느껴지는 바둑알의 까끌까끌함이 괴롭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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