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8화 〉27국 - 정치 (28/75)



〈 28화 〉27국 - 정치

작은 소란이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결코 작은 소란은 아니었다.

핸드폰에선 불이 난 듯 온갖 전화와 메시지가 쏟아졌고, 인터넷 신문 매체에서는 비슷한 내용의 기사들을 쏟아냈다.

제대로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커뮤니티도 난리가 났겠지.

무슨 이야기가 돌고 있을지 무서워서 차마 확인하지는 못했다.

나는 죽어라 달라붙는 하윤서를 가까스로 떼어내고 한소율 연맹장의 차를 얻어타 대회장을 빠져나왔다.

내 차는 또 어떻게 알았는지 근처에 기자들이 달라붙어 있어서 근처에 다가가지를 못하겠더라.

어쨌든 그렇게 기원에 돌아오는 길, 아니나 다를까 한소율 연맹장은 잔소리를시작했다.

“어떻게 사람이 가는 곳마다 사고를 치는 거지?”

나는 억울했다.

내가 사고 치고 싶어서 친 것도 아니고 하윤서가 다짜고짜 카메라 앞에서 쥐불놀이 한 건데 왜 나한테 이러는 건데?

나는 최대한의 반항을 시도했다.

“아니 그건 제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요.”
“하윤서 초단이 열아홉 살이었죠? 내가 지금 기원이 아니라 경찰서를 가야 하는 건가?”
“아니 그러니까 제가 고백한 것도 아닌데….”

한소율 연맹장은 잠시 한숨을 내쉬더니 목소리 톤을 낮추며 말했다.

과할 정도로 느끼한 톤이었다.

“저도 응원할게요,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아요.”
“……?”
“저도 비슷한처지였으니까요.”
“지금 혹시 저 따라 하는 건가요?”
“비슷하죠?”
“아니 내가 언제 그렇게 느끼하게 말했다고….”
“왜요 완전 똑같은데.”
“다르거든요!”

한소율 연맹장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그 이후로도 한참 동안 나를 따라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를 내며 나를 놀렸다.

한참을 그렇게 나를 놀리던 한소율 연맹장은 드디어싫증이  것인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입조심 좀 하면서 살아요.”
“갑자기 또 무슨 소리여요?”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건 아니죠?”
“뭘요?”
“우리 엄마가 자각 없는 인간이 제일 나쁜 놈이랬는데 잘못 걸렸나.”

아까부터 한소율 연맹장이 하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라는 거지?

“일단 미성년자한테 손을 댈 쓰레기는 아니라고 믿을게요.”
“아…. 네…. 그거참 감사합니다….”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가 싫어해야 하는 건가.

어쨌든 믿어준다는 거니까 좋은 건가?

내가 잠시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자 한소율은 내게 물었다.

“바둑계의 슈퍼스타가 되고 싶다고 하셨었죠? 그렇게 되고 싶다면 적당한 사고를 치는 건 몰라도 선을 넘어서는 안 돼요,”
“네, 그런데 잠깐 지나가듯 말한 건데  말을 아직 기억하시네요.”
“상대가 스치듯 이야기한 사소한 이야기를 기억하는 게 인맥 관리의 기본이니까요.”
“또 사회생활에 찌든 중년이나  법한 이야기를….”
“제경험의 밀도가 그 사람들보다 부족하진 않을걸요?”

그녀의 말에 나는 잠시 그녀의 경력을 떠올렸다.

분하지만 확실히 저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예전에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 있지만, 괜히 한소율이 저 나이에 한 단체의 장을 맡은  아니니까.

“그런데 왜 하필 바둑이었어요?”

다 망해가던 씨름계의 숨통을 붙여놓은 한소율의 능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고, 그녀가 그쪽 일을 그만뒀을 때 온갖 회사와 업계에서 그녀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하지만 한소율이 선택한  바둑.

그 당시 언제 숨이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다는 바둑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그녀의 선택은 의외였다.

그녀의 선택에 막상 한소율을 초청한 협회가 놀랐을 정도였고  당시만 해도 협회의 사람들은 한소율을 쌍수를 들며 환영했다.

물론 예전에도 말했다시피 한소율은 협회와의 첫 미팅에서부터 무시무시한 폭탄 발언을 터트리며 아수라장을 만들었지만….

“그냥…. 어렸을 때 바둑 학원에 다녔는데 학원에 잘생긴 애가 있었거든요. 나중에  애가 어디 대단한곳에 간다고 그만둬서 나도 그만두긴 했지만.”
“......네?”
“원래 잘생기고 예쁘고 귀여운 것들은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잖아요? 얼굴 뜯어먹고 산다는 말이 괜히 나왔겠어요?”

상상 이상으로 어이가 없는 이유였기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얼빠 기질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중증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씨름 쪽에서    어떻게 했는지 알아요? 모르죠?”
“아뇨, 알아요.”

한소율은 씨름을 고 체중선수들의 파워게임에서 잘생기고 몸 좋은 선수들의 기술 싸움으로 변화시켰다.

체계적인 관리하에 몸을 만들고 모래판 위에 선 씨름 선수들이 시합 내내 서로 부대끼고 싸우니, 이런 걸 보면 죽고  사는 라이트 팬들이 씨름계에 대거 유입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겠지.

어찌 보면 지금의 바둑계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면 내가  그만뒀는지는 알아요?”
“그건 모르죠.”
“그 양반들이 좀 먹고살 만해지니까 정신줄을 놓더라고요, 이건 전통문화적으로 옳지 않은 현상이니, 씨름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있느니 뭐니 엄청 짜증 나게 굴고. 그래서 그만뒀어요.”

한소율 연맹장은 그때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 그런 상황이 다시 오지 않게끔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할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죠.”
“연맹을 만든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어요?”
“좀 더 복잡한 이유가 있긴 한데…. 가장 큰 이유는 그게 맞아요.”

한소율 연맹장, 다 죽어가던 바둑계를 일으킨 사람.

항상 대단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속마음을 들어보니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지금 자기가 연맹과 협회를 잇는 가교가 되어 둘을 통합시키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죠? 그래서 동시 입단 한 거고.”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만은 없으니까요.”

지금은 아직 서로서로 필요로 하기 때문에 조용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이런 상황이 지속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이 상황이 길어질수록 두 단체 사이의 골은 점점 깊어지겠지.

나는 돌이킬  없는 상황이 오기 전에 두 단체를 통합, 혹은 화해시키고 싶었다.

“유시운 협회장이 도찬 씨를 엄청 싫어한다는 소문이 들려요.”
“왜요?”
“이유는 나도 모르죠.”
“절 싫어하는 것 치고는 조용한데요?”

유시운 협회장이 내가 마음에 든다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괴롭힐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스케줄을 꼬아버린다거나, 협회의 행사에 초대하지 않는다거나. 그런 직접 항의하기는 어렵지만 계속 신경 쓰이는 방법들이 많았으니.

“신창연 명인 눈치를 보는 거죠, 한세빛 국수도 이쪽에 있는데 신창연 명인까지 넘어오면 치명타니까.”
“스승님이 그러실 분은 아닌데….”
“중요한 건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요 그것만으로도 유시운 협회장은 신경을  수밖에 없으니까.”
“이상한 곳에서 스승님 영향력을 체감하네요.”
“그렇게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니까요…. 그 사람이 언제까지 참고만 있을 것 같아요?”
“대충 스승님 은퇴하시기 전까지?”
“욕심이 많은 사람인데, 그것보다 짧을걸요?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한소율 연맹장은 잠시 차를 멈춰 새우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도찬 씨는 바둑만 생각해요. 정치는 내가 해줄 테니까.”

나는 그녀를 마주 보며 웃었다.

“나는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어요.”

나는 내 주재를 잘 아는 사람이다.

내게 연맹과 협회 사이에서 정치로 무엇인가를 얻을 능력은 없다.

그저 나중에 바둑계에서 내 영향력이 커진다면 양쪽에 속해있다는 점을 이용해서 메신저 역할을 할  있지 않을까. 그런 얕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걱정하면서 동시 입단한다고 했을 때는  반대 안 했어요?”
“그건 도찬 씨를 바둑계의 슈퍼스타로 만들어줄 초석이었으니까요.”
“네?”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하죠, 도착했어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기원에 도착해있었다.

나는 한소율 연맹장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차에서 내렸다.

“그나저나 나는 내일 스케줄 있어서 대회장에 못 가는데 내일은 어떻게 하려고요?”
“하아…. 택시라도 타고 가야 하나.”

갑자기 내일 있을 일들을 생각하니머리가 아파져 왔다.

교통은 둘째치고 오늘 터진 폭탄을 수습하는 것이 문제였으니.

아 몰라 내일의 내가 어떻게든 해주겠지.

머리 아픈 일은 내일로 미루는  답이다.

한소율 연맹장은 그런 나를 잠시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가 버렸다.

차라리 뭐라고 말이라도 해줘…. 아무 말 안 하니까  슬프잖아.

그나저나 벌써 오후 11시가 지났다, 수정이는 자고 있으려나.

나는 기원에 들어가 2층으로 올라갔다.

집에 돌아오니까 뭔가 안정이 되는 느낌이었다, 역시 집이 최고야.

그나저나 거실의 불이 켜져 있는걸 보면 아직 수정이가 일어나있는 모양이다.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조금  들어가니 거실 방바닥에 앉아있는 수정이의 모습이 보였다.

“수정아  왔….”

순간 나와 눈을마주친 수정이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뭐지  ‘여기에 오면 위험해요.’라고 말하는듯한 행동은?

“왜 그래? 무슨 문제라도….”
“왔어?”

갑자기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신세연이었다.

세연이가 보고 있는 TV에서는 나와 하윤서의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망했네.

“어? 어어…. 그런데 무슨 일 있어? 이 시간에 여길  오고….”
“무슨 일? 무슨 일 있냐고?”

세연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주  일이있었지, 예를 들면 내 친구가 미성년자를 꼬시고 다니는 쓰레기라는 걸 알게 된  같은.”
“예로  일이 뭔가 당사자가 엄청 억울해할 것 같은 일인데?”
“알게 뭐야, 그런데 생각보다 일찍 왔네. 기자들한테 잡히지는 않았어?”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한소율 연맹장  얻어타고 왔어.”

어째서인지 내 말을 들은 수정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자리에서일어나 내게 꾸벅 인사하더니 방 안으로 들어갔다.

뭐지? 갑자기 왜 저래?

영문을 몰라 세연이를 바라보자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세연이가 눈에 보였다.

“아주 카사노바 나셨어, 연하한테 카메라 앞에서 공개 고백받고 연상이랑 드라이빙 데이트하고 오셨구나? 아~주 대단하네! 그다음은 뭐야? 동갑이야? 동갑이랑은 뭐 하려고?”
“어…. 바둑이라도 두고 갈래?”

내 말에 말문이 막힌 것인지 세연이는 입을 다물었다.

“...... 됐어, 걱정한 내가 바보지.”

그녀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이라고 주장하는 곳에 들어가 버렸다.

어휴…. 아무리 봐도 삐진  같은데 어떻게 풀어주냐.

내가 잠시 난감하게 서 있자 다시 세연이의 방문이 살짝 열리고 세연이가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 복기 도와줄 테니까 바둑판 들고 와.”
“어? 알았어….”
“내일 결승이니까 이번만 그냥 넘어가 주는 거야 알겠어?”
“넹….”

난 잘못한  없는데 어째서인지 그냥 알았다고 해야 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공부방에서 대충 눈에 보이는 바둑판과 바둑알을 챙겨 세연이의 방으로 건너갔다.

집중적으로 복기한 대국은 당연하게도 하윤서와의 첫 대국.

기보를 보며  돌을 놓던 세연이가 입을 열었다.

“잘 두더라.”
“기풍이 특이하더라고,”
“기풍만 특이한 건 아닌 것 같던데?”
“진심으로 인공지능을 이기려고 하던데?, 아직 어려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건가?”
“... 우리도 아직 어려.”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스물다섯, 바둑계에 막 입단한 사람의 나이라고는 볼 수 없는 나이.

바둑계에는 적어도 스물에는 일가를 이루어야 대성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트라우마는 내게서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아갔다.

그래

나는 조급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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