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26국 - 아이콘
바둑 격언중에는 ‘손바람을 내면 진다’라는 표현이 있다. 기분에 치우쳐서 한 수 한 수 신중하게 판단하지 않고 두면 진다는 뜻의 격언이다.
지금 정도찬의 모습이야말로 손바람을 내고 있는 모양새였다.
아무리 초읽기에 접어들었다지만, 엄연히 3회의 30초가 남아있는데 정도찬의 한 수는 10초를 넘기는 일이 드물었다.
말 그대로 마음이 가는 곳에 돌을 두고 있는 것이다.
관전자들은 정도찬이 초읽기에 몰려 평정심을 잃었거나, 1국을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정도찬을 상대하는 하윤서는 그런 정도찬의 바뀐 태도를 보며 생각했다.
‘드디어, 드디어 알아주셨어!’
이것이야말로 사람의 바둑이다.
누가 더 인공지능과 비슷하냐를 겨루는 싸움이 아닌, 사람이 생각하고 사람이 두고 사람이 응수하는 진정한 바둑!
그녀의 고생, 그녀의 시련, 그녀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자 하윤서는 모종의 황홀감마저 느꼈다.
이런 바둑을 둬 본 것이 얼마 만이던가?
하윤서는 그저, 승패를 떠나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랐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심정과는 반대로 국면은 끝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하윤서는 자신이 잡은 승기를 쉽게 놔줄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이미 대부분의 중요한 국면은 지나간 뒤였으니 어려운 장면이 나올 구석이 없었다.
이런 상황의 다섯 집 차이는 초반 국면의 스무 집 차이보다 뒤집기 힘든 법이었으니.
정도찬이 진작 돌을 던져도 조금 빠르다고 느낄지언정 이상하지는 않은 바둑인 것이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정도찬은 자신이 어떤 바둑을 두는 사람이었는지 그것을 떠올리는 데 전념하고 있었다.
마음이 가는 곳에 두고, 왜 그곳에 마음이 갔는지를 생각했다.
평소와는 완벽하게 선후 관계가 바뀐 셈이었지만그런 식으로 둬가면서 정도찬은 조금씩 자신의 본질을 깨달아갔다.
그의 본질은 물과 같았다.
물은 잔잔하게 흐른다, 천천히, 조용히.
물은 돌을 피해 흐르려고 하지만, 때로는 부딪힘을 감수해야 할 때도 있다.
부딪힘이 계속되자 잔잔하던 흐름은 점점 사라지고, 물결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빠른 속도로 휘몰아친다.
휘몰아치는 물은 절벽을 만나면 폭포가 되고, 땅을 만나면 파도가 되었다.
그것을 상대하고 있는 하윤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자신이 밀린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빈틈이라고는 없는 견고한 성벽을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기어이 빈틈 사이들 뚫고 흘러들어온다.
조금씩이지만 확실히 흘러들어오는 물은 조금씩 하윤서의 성벽에 난 균열을 넓히기 시작했다.
한 집 한 집, 정도찬은 조금씩이지만 확실하게 하윤서에게 손해를 강요했다.
하지만 이곳은 물이 멈추지 않고 무한하게 흐를 수 있는 대자연이 아닌, 361칸의 좁디좁은 바둑판.
끊임없이 흐를 것만 같았던 물길은 결국 멈추고 말았다.
더 이상 손댈 곳이 없다.
그 사실을 깨닫자 정도찬도, 하윤서도 진한 아쉬움을 느꼈다.
하지만 아쉬움도 잠시, 치열했던 반집승부였기에 두 사람은 계가에 들어갔다.
계시원이 돌을 정리했고, 관전자들 역시 누구의 승리인지 확신하지 못해 조용히 둘의 모습을 지켜봤다.
이윽고 결과가 나왔다.
말 그대로 한 끗 차이의 결과였다.
“잘 배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흑 하윤서 초단 백 정도찬 초단
호선 덤 6집 반
제한시간 1시간, 초읽기 30초 3회
237수 백 반집 승
정도찬의 역전승이었다.
*-*-*
다음 대국도 치열할 것이라는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두 사람의 2국은 단명국이었다.
체력적인 한계를 보이며 흔들리는 하윤서를 정도찬은 가만히 두지 않았다.
정도찬은 하윤서의 빈틈이 보이는 족족 파고들어 크게 손해 입혔고, 결국 대마를 잡힌 하윤서는 돌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하윤서로서는 원통할 따름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의 바둑을 두는 상대인데, 고작 체력이 부족해서 이렇게 어이없게 대국이 끝나다니.
만약 32강에서, 아니 하다못해 8강에서 만났다면, 그것도 아니라면 내일 치러지는 결승에서 만났다면 체력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었다.
왜 하필 4강에서 만나버린 것일까.
하윤서는 괜히 믿지도 않는 신을 신나게 욕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과가 변할 리는 없었다.
정리가 끝나고, 복기와 인터뷰 시간.
사람들은 하윤서가 지금까지처럼 자리를 박차고 나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하윤서는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방송국은 이게 웬 떡인가 싶어 재빨리 그녀에게 마이크를 채웠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정도찬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쉽네요.”
바둑계의 통설중 하나이지만, 기력은 머리 30%, 노력40%, 그리고 체력 30%로 구성된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2000년대부터 체력의 중요성이 점점 조명되고 웬만한 바둑기사들은 스태미너 배양을 위해서 억지로라도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생길 정도였다.
30대를 넘은 바둑기사들이 내리막길에 서는 것 역시 체력적인 요인이 가장 크다는 것이 정설이었고.
여자 바둑기사들이 남자 바둑기사들에 비해 약하다고 생각되는 것도 체력 때문이었다.
정도찬은 체력이 부족해 무너진 하윤서의 일이 마냥 남 일 같지 않았다.
그의 제자인 김수정도 언젠가는 부딪힐 문제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윤서의 대답은 생뚱맞았다.
“극에 닿은 사람의 바둑은 결국 인공지능과 같아지는 걸까요?”
“넹?”
정말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하윤서는 하윤서 나름대로 진지했다.
바둑은 끊임없는 선택의 게임.
실리인가 세력인가, 싸움인가 타협인가, 두터움인가 넓음인가.
바둑기사들은 한 번의 대국에서도 백 번이 넘는 선택을 강요당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쪽을 택하는 빈도에 따라 사람의 기풍이 정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선호’라는 감정이 없는 인공지능은 그저 최선의 수만 찾기 때문에 기풍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 인공지능에 얽매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신창연 명인이나 한세빛 국수의 블루스팟 일치율이 높은 것일까.
그녀는 항상 그게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는 의문이기도 했다.
그녀의 주변에는 그녀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앞에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가 항상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의문을 풀어줄 수도 있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았지만 하윤서의 진지한 모습을 본 정도찬은 잠시 고민하고는 대답했다.
“생각해본 적 없어서 모르겠는데요?”
아무리 인공지능의 시대가 오고 개성의 시대가 끝이 났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결국 바둑을 두는 것이 사람인 이상 각자의 취향은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결국아무리 인공지능을 따라 하려고 해도 인공지능이 될 수는 없다.
인공지능의 시대에 최고의 가치는 사람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정도찬은 하윤서가 하는 고민의 전재부터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기에 그녀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어떤 심정으로그녀의 바둑을 갈고 닦아왔는지, 그 마음을 대충 이해한 정도찬은 그녀가 왜 그런 고민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도 나는 언젠가는 사람이 인공지능을 이기는 시대가 올 거라고 믿어요.”
누가 듣는다면 그게 말이 되냐고 타박할만한 말이었다.
하지만 정도찬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인공지능은 자가 대국을 통해 학습하고 성장한다.
그리고, 그 자가 대국을 통한 학습에는 분명 한계가 존재할 터였다.
예를들면 정도찬이 자주 이용하는 오픈 소스 인공지능, 랄라 제로는 얼마 전 50만번의 자가 대국에서 전혀 가중치를 얻지 못해 사람들 사이에서 드디어 인공지능의 자가 대국을 통한 성장이 한계에 달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온 적이 있었다.
비록 그 현상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정도찬은 인공지능의 성장이 잠시라도 멈췄다는 사실 자체에 주목했다.
언젠가, 인공지능이 정말로 성장 한계를 맞이한다면, 언젠가는 사람이 인공지능을이기는 날이 올 수도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조금 더 비약하자면 그 잘난 인공지능은 정말 버그가 하나도 없는 무결점의 소프트웨어인가?
지금도 가끔 인공지능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인공지능이 보지 못한 묘수를 사람이 둔 경우가 없지 않고, 사활을 잘못 파악해 허무하게 대마를 잃는 경우도 종종 있다.
애초에 인공지능이 사람에게 진 최초이자 마지막 대국 역시 그 수를 이해하지 못한 인공지능이 버그를 일으켜 패배한 것이지 않은가.
단지 지금까지 정도찬이 인공지능을 이기겠다고 달려들지 않은 것은 만약 사람이 인공지능을 이기는 날이 온다고 하더라도, 그게 정도찬의 세대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0년, 20년이 걸릴 일이아니다. 적어도 100년, 아니어쩌면 200년,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이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인가.
바둑은 이미 천년을 넘는 세월 동안 이어져 온 기예였다.
물론 당장 바둑계가 죽니 사라지니 어쩌니 하던 시절에는 정도찬도 감히 희망을 말하지 않았다.
사람이 인공지능을 이기는 날이 오기 전에 바둑이라는 게임 자체가 힘을 잃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바둑은 다시 부흥했고, 수많은 바둑기사들이 인공지능을 연구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일상에서 바둑을 즐기기 시작했다.
정도찬은 이 상황이 한순간의 유행이 아닌 100년, 200년이 지나도 유지되기를 바랐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바둑이 잊히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초석을 쌓고 싶었다.
먼 옛날, 어떤 홈런왕이 수많은 사람을 야구장으로 끌어들인 것처럼.
그리고 그 시절에 다듬은 초석으로 야구라는 스포츠가 정착하고 대를 이어 지금의 위상을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정도찬은 그런 사람과 같은 바둑의 아이콘이 되고 싶었다.
팬도, 안티도 미치게 만드는 바둑계의 슈퍼스타가 되고 싶었다.
정도찬은 비록 스스로가 인공지능과 싸워 이기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이미 하윤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인공지능과 싸우고 있었다.
방법은 다르지만 두 사람이 바라보는 방향은 같다.
정도찬의 말에 그 사실을 확신한 하윤서는 입을 열었다.
“결혼하죠.”
“......?”
“우리 둘의 아이라면 분명….”
“마이크! 당신 지금 마이크 차고 있어요!”
“벌써 당신이라고 불러주시는 거예요? 여보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지금 방송 중이라고요!”
“전 공개연애라도 상관없는데요?”
하윤서 초단.
열여섯에 입단한 그녀였으니 3년이 지난 지금은 열아홉 살.
졸지에 고3 소녀에게 공개 고백을 받은 정도찬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날 저녁.
정도찬과 하윤서의 스캔들이 신문 1면과 연애뉴스난을 장악했고.
기어이 그 꼴을 보게 된 두 여자가 이를 악물었다.